1995.7.18. 서울지방검찰청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기소·재판

o 1980.5.17. 19:00 경 김근수 중앙정보부 안전조사국장은 안전조사국과대공수사국 수사관들을 소집, 합동수사본부의 지침에 따라 사회혼란 및 학생 ·소요 배후 조종자들을 검거·수사하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검거 대상자별로 수사팀을 편성, 수사에 착수하였음.

o 중앙정보부 김근수 국장은 수시 수사 내용을 이학봉 합동수사단장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보고하고, 합동수사단의 요청에 따라 1980.5.20.경 중간수사 결과 발표문안을 작성, 이학봉 보안사 합동수사단장,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에게 순차 보고하였음.

o 계엄사는 1980.5.22. ‘김대중이 학생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선동하여온 확증을 잡고 연행 조사중인데, 김대중은 정상적 정당활동 등을 통해서는 정권획득이 여의치 못할 것으로 판단, 변칙적 혁명 사태를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할 계기를 조성하기로 하고,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통하여 5월 중순 대학 교내·외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예춘호, 문익환, 조성우, 장기표 등과 회동, 1980.5.22. 정오를 기해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제 봉기를 획책하는 동 대중선동과 민중봉기로 정권전복을 기도하였다'는 내용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였음.

o 계엄사는 위 발표에서 김대중의 ‘대학별 배후조종 지원 선동사례'로, 1980. 3초 서울대생 심재철에게 100만원을 계공하고, 심재철이 학생회장에 당선, 시위를 주동한 사실, 복학생 朴X東의 소개로 만난 고대생 朴x男에게 45만원을 제공하고, 朴x男이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을 조종, 시위를 벌인 사실과 그밖에 1980. 5경 부산대 복학생 趙x 源에게 34만원을 제공한 사실을 드는 한편, 사상배경으로 김대중이 반국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 일본본부 의장으로 취임한 사실을 적시하여 용공행위(容共行爲)를 해왔다고 밝혔음.

o 1980년 5월 하순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은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의 재일한민통 관련 부분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입건, 수사할 컷올  김근수 국장에게 지시하였음.

o 1980.5.31. 계엄사는 ‘광주사태의 경위 및 진상과 사후처리방침' 발표에서, 사태의 발단은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으나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는, 북괴의 간첩과 이에 협력하는 불순 위해분자들의 책동 외에도 학생 소요를 배후조종해 온 김대중이 전남대와 조선대의 추종 학생, 주로 복학생들을 조종, 선동하여 온 것이 소요 사태의 발단이 되었고, 사태악화 과정에서 광주 시내 골수 추종분자들이 이룰 격화시킨 사실이 수사과정에서 판명되고 있다며, 김대중을 면담하고 그로부터 이른바 민주화 시위를 일으키도록 조종 받은 복학생 정동년과 조선대생 김종원이 5.18.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한 사실과 김대중 측근으로 10.26. 이후 김대중과 6회 접촉한 홍남순 변호사가 조선대 교내시위를 조종하고, 5.23 - 5.26. 사이에 전남도청을 출입하면서 폭도들에게 100만원을 주며 조종, 격려한 사실을 『광주사태 주요 배후주동분자와 활동사례』로 적시하였음.

o 계엄사는 1980.7.3. 발표한 ‘광주사태 관련자 처리방침’ 에서 이미 연행자 1,146 명을 훈방하였고, 곧 사안이 경미한 679명을 추가 훈방할 예정이며, 김대중으로부터 데모자금 500만원을 받아 사태의 발단이 된 학생시위를 일으킨 정동년과 역시 김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현지 사태를 일으키도록 하고, 사태 주동자들에게 100만원을 주어 투쟁을 계속하도록 선동한 홍남순 등 사태 주동 및 배후조종자 53명을 포함, 죄질이 무거운 375명은 계속 조사를 진행할 방침이라고 밝혔음.

o 이어 계엄사는 1980.7.4. 김대중과 그 추종분자들이 소위 국민연합을 전위세력으로 하여 대학 복학생들을 행동대원으로 포섭, 학원소요사태를 폭력화하고, 5.22.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혁명사태를 유발, 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하려 한 내란음모 사실이 드러났다며, 김대중과 그 추종세력 37명을 내란음모 등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음.

o 계엄사는 또 김대중이 내란음모 이외에도 반국가단체인 재일한민총을 발기, 조직, 구성하여 북괴의 노선을 지지, 동조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 사용한 혐의도 드러났다고 밝히고, 김대중 일당의 검거로 가장 중요한 정치일정 저해 요인이 해소된 만큼 정부가 공약한 1981.6. 말까지 정권이양의 정치일정은 계획대로 추진될 것임을 강조하였음.

o 수사결과 발표를 앞둔 6월 하순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은 3회에 걸쳐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만나 광주 상황을 알려 주면서 대통령이 될 것을 단념하고 협력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대중 의장은 거절하였음.

o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은 연행 53일만인 1980.7.9.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다음, 1980.7.12. 김대중 등 24명은 육본 계엄보통군법회의로, 나머지 계엄법위반사범 13명은 수경사 계엄보통군법회의로 송치하였고, 군검찰부는 8.14. 전원을 구속기소하였음.

o 육본 계엄보통군법회의는 기소당일인 1980.8.14. 제1회 공판을 시작으로 1980.9.17.까지 모두 17회 공판을 열었는데, 1980.8.14. 10:00에 개정된 제1회 공판은 모두 13만여자로 된 피고인 24명에 대한 공소장 낭독으로 끝났으며, 9.11. 결심 공판에서 군검찰관은 김대중 피고인에게 사형을, 문익환 등 관련 피고인에게는 최고 정역 20년에서 최하 징역 7년을 구형함에 따라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은 5.17. 김대중 피고인이 연행된지 117일만에 결심되었음.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첫 공판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 출석한 김대중·문익환 목사 등

▲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첫 공판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 출석한 김대중·문익환 목사 등

o 1980.9.17.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김대중 피고인에게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외국환관리법위반죄를 적용,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하였고, 나머지 피고인에게는 최고 징역 20년에서 최하 징역 2년을 선고하였음.

o 1980.10.24.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관련 피고인 24명에 대한 육본 계엄고등군법회의 항소심 제1회 공판이 시작되어, 10.29. 재6회 공판에서 군검찰관은 피고인 전원에게 원심 구형량대로 구형하였는데, 1980.11.3. 항소심 재판부는 김대중 피고인 등 17명에 대하여는 항소를 기각하고, 문익환 피고인 등 7명은 원심을 파기, 감형하거나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음.

o 1980.11.7. 피고인 24명 중 김대중 피고인 등 12명이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1981.1.23.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김대중 피고인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동일 전두환 대퉁령은 국민화합을 위해 관용한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등 관련 피고인 12명 전원을 감형하였음.

<관련 글>

▸ 김대중 내란음모 제2심 판결문(김대중·문익환·이해찬·설훈·심재철 등 24인)

▸ 김대중 내란음모 제3심 대법원 판결문(김대중·문익환·이해찬·설훈 등 12인)

▸ 김대중 내란음모 재심 서울고등법원 2003재노19 판결(김대중 1인)

▸ 김대중 내란음모 형사보상 서울고등법원 2004코3 결정(김대중 1인)

▸ 김대중 내란음모 관련자 제1·2·3심, 재심·형사보상 등 재판 결과(김대중·이해찬·설훈·심재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