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대통령의 5.18 관련 법률
● 노태우 대통령(재임기간: 1988.2.25.~1993.2.24.)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0.8.6. 제정)」
☞ 2004.1.20.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로 명칭 변경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 김영삼 대통령(재임기간: 1993.2.25.~1998.2.24.)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시행 1995.12.21. 1995.12.21. 제정)」
☜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 규정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시행 1995.12.21. 1995.12.21. 제정)」
☜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 규정
● 김대중 대통령(재임기간: 1998.2.25.~2003.2.24.)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2002.1.26. 제정)」
☞ 2004.1.20.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로 명칭 변경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 노무현 대통령 시절(재임기간: 2003.2.25.~2008.2.24.)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시행 2006.1.30. 2005.7.29. 제정)」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시행 2006.2.16. 2006.2.16. 제정)」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시행 2006.2.20. 2006.2.20. 제정)」
갈등 대체전략으로서 5.18특별법
2015.12.3. 오승용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1. 들어가는 말
1995년 12월 21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다. 법률의 주요골자를 살펴보면, 이 법은 12.12쿠데타와 5·18내란사건의 주동자들에 대한 공소시효의 진행이 노태우대통령이 임기종료일인 1993년 2월 24일까지 정지된 것으로 보고, 법 제정이전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해서는 법 시행 30일 이내에 재정신청(裁定申請)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순수하게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상훈을 받은 자의 서훈과 훈장을 치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과거사청산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정치사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법률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사회학적, 역사적 맥락에서도 평가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5·18특별법은 공소시효의 적용과 관련하여 많은 사회적 논란의대상이 되었던 법률이었던 만큼, 그 동안 수행된 관련 연구 역시 5·18특별법의 위헌 여부나 형사법적 의미 등에 대한 법률적 논의가 대부분이었다(김민배 1996; 노기호 1996; 오호택1996; 조용환 1996; 이보영 2007).
내용상 선행연구 대부분이 법해석학적 연구였다고 분류할 수 있지만, 5·18특별법에 관한 연구는 특별법 제정·공포 이후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5·18특별법 제정 직전 시기에만 위헌여부 관련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법 제정 이후엔 관련 연구가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었다. 물론 이러한 연구시기와 내용의 편중 속에서도 정책결정 과정을 중심으로 광주보상법과 5·18특별법 결정과정을 연구한 드문 사례가 있고(김재균 2010), 특별법 제정 당시 언론의 보도 태도와 담론을 분석한 연구가 드물게 있었다(나의갑 1996; 박선희 2002). 이 연구는 5·18특별법에 관한 정치사회학적 연구로서, 5.18특별법 제정·공포 20주년을 맞아 5·18특별법 제정의 내용이나 법률적 의미에 대한 해석보다는 특별법 제정과정의 정치적 의미를 갈등이론의 맥락에서 조명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 5·18내란사건의 주동자들에 대한 사법처리 요구가 분출되지 못하고 잠복되어 있다가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내란사건 주동자들에 대한 고발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검찰은 국민이 동의하기 힘든 이유로 불기소를 결정하자 5·18특별법이라는 새로운 대안이 만들어졌다.
5·18특별법이라는 새로운 대안에 대해 정권과 집권당은 처음에는 회피로 일관했으나 5·18관련 단체와 야당의 수용 요구가 교차하고, 노태우비자금 사건 등이 발생하자 그 동안 의회피 방침에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 연구는 회피와 수용이라는 갈등들 간의 경쟁과정을 갈등의 대체(전략)라는 시각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정치의 본질은 갈등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것인데, 반드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은 아니다. 때론 갈등의 표출을 억압하고, 갈등의 처리를 지연하거나 혹은 갈등을 갈등주체들 간의 타협을 통해 절충하는 것 역시 정치의 목적이다.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정치적 갈등을 갈등처리의 정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정당정치의 과정이기도 하다. 갈등의 처리과정에서는 다양한 갈등들이 경쟁하고 ‘갈등들 간의 갈등(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하나의 갈등이 정치체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클 때 새로운 갈등을 끌어들여 기존 갈등의 파급력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새로운 이해관계를 창출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갈등의 대체다.
5·18특별법의 제정을 갈등관리정치의 맥락에서 해석해보는 것이 이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5·18특별법은 민주자유당(후에 신한국당)이 대선자금 공개와 대통령비자금 폭로, 총선패배의 위험이라는 갈등을 관리하기 위해 수용되었고(갈등의 대체),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이해(세력교체와 총선승리, 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연구에서 다루어질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정당에 의한 갈등관리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갈등이론에 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에 존재하는 정치적 갈등이 어떻게 처리되는가에 관한 갈등이론을 정치적 갈등의 처리에 관련된 부분에 한정하여 소개해보고자 한다. 파슨스 류의 구조기능주의적 시각과는 달리 갈등이론은 갈등의 편재성에 주목한다. 갈등이론에서는 갈등의 존재 자체가 역기능적이라고 보지는 않으며,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들이 경쟁과 대체의 과정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고 전진시키는 동력으로 본다. 이러한 갈등의 처리과정에서 갈등을 처리하는 주체들의 여러 전략들이 동시에 경쟁하게 된다. 이 연구에서는 샤츠슈나이더의 갈등이론을 중심으로 정치적 갈등이 처리되는 갈등 정치학의 유의미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5·18특별법 제정의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5·18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세 가지 흐름이 존재했는데, 5·18단체를 비롯한 사회운동세력, 검찰의 5·18불기소처분에 대한 의견서 등을 작성해서 헌법재판소에 제출하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법조계, 김영삼정부와 민자당 내부의 파벌갈등을 비롯한 정치권의 대응이 그것이다. 이 연구에서는5·18특별법 제정에 영향을 미친 세 가지 흐름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특히 세 번째 흐름에 주목하여 5·18특별법 제정의 과정을 정리할 것이다.
4장에서는 갈등의 대체전략으로서 5·18특별법의 의미를 살펴볼 것인데,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당시의 갈등구도, 갈등들 간의 경쟁, 갈등의 해결을 위한 전략의 세 가지 측면이 존재하는데, 5·18특별법의 경우 갈등의 억압이나 회피가 아니라 갈등의 대체를 통해 갈등을 해결한 대표적인 사례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즉 갈등의 ‘접근-회피’구도에서 ‘접근-접근’구도로 이행하는 과정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논문의 내용을 확인하고 갈등대체전략으로 수용된 5·18특별법 제정이 갖는 정치사회학적 의미와 영향을 요약·정리해보고자 한다. 5·18특별법 사례를 통해 기존갈등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갈등소재를 수용함으로써 기존 갈등이 유발하는 파급효과를 약화시키고, 새로운 이해를 창출하는 갈등의 대체 전략을 통해 갈등관리의 주체가 얻는 효과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2. 이론 : 정치적 갈등과 갈등의 정치학
사회는 영속적으로 질서정연한 체계가 아니다.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은 해당 사회가 전체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에 가까운 사회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갈등을 자유롭게 표출하지 못하도록 봉쇄·억압하는 사회는 어떠한 기준으로도 민주주의라 칭할 수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은 하나의 생각, 하나의 이해, 하나의 행동으로 구조화할 수 없다. 갈등은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특성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경제학자 보울딩(Kenneth Boulding)은 갈등을 경쟁의 형태로 규정하면서 경쟁 당사자들이 각각 상대방에게 양보할 수 없는 위치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양립될 수 없음을 지각함으로써 갈등이 발생한다고 보았다(Boulding1963).1) 갈등은 당사자들이 어떤 목표 혹은 목적을 충족시키려는 상호과정 속에서 상대와 양립하거나 조화될 수 없는 경우에 발생한다. 보울딩에 따르면, 체제경쟁, 정권경쟁, 이해관계에 따른 경쟁이 갈등의 원인이며, 갈등은 복수의 개인 또는 집단이 같은 목적을 가짐으로써 동일한 공간·지위 및 양립할 수 없는 역할이나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다(Boulding 1963; 홀 1999, 196).
다렌도르프(R. Darendorf)는 보울딩의 정의를 확대하여 행위자들이 인식하든 못하든 간에 객관적으로 볼 때 목표의 양립가능성이 없는 상황을 갈등으로 규정한다. 곧 이러한 유형의 갈등은 비현실적 갈등(non-realistic conflict)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주로 소통의 부족에서 초래된다(구영록 1994, 21-22). 도이치(K. Deutch)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없는 활동이 발생할 때 갈등이 존재 하며 이 양립불가능성은 진퇴양난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곧 갈등은 한편을 희생시켜 다른 편을 얻게 되므로 양립이 불가능하거나 또는 양립하기 힘든 목표들을 추구하게 된다(터너 2001, 99).
이들 갈등이론가들의 공통점은 사회를 통합과 균형이라는 구조 기능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갈등이 널리 퍼져 있고 그 원인, 형태, 그리고 효과 등을 분석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등이 존재함을 밝히고, 갈등이 사회의 변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설명은 무엇인가?
갈등이론이 단순히 갈등의 존재와 갈등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갈등관리의 주체와 갈등관리의 전략이라는 방향으로 이론적으로 진화하는데 기여한 이론가가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다.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이 어떻게 능동적으로 처리되는지를 규명하고 있는데, 특히 그는 능동적 갈등처리의 주체로 정당을 거론한다.
정치는 갈등처리의 과정인데, 정치를 갈등을 동원하고 관리하며 통합하는 역할로 정의한다(샤츠슈나이더 2008).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정치란 기본적으로 사적인 영역에서 발원하는 수많은 갈등들 중 공동체의 존속과 관련된 중요한 갈등들을 공적 논의에 적합한 양식으로 전환하여 광범위한 대중이 그와 관련된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일련의 활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치는 갈등을 다루며, 갈등의 공적 처리 과정은 갈등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공적 영역에서 갈등을 그 중요성에 따라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과정에서부터 정치는 개입하게 된다. 이해당사자들에게는 자신과 관련된 갈등이 최우선순위이지만, 정치는 분출되는 갈등 중에서 어떤 갈등이 중하고, 어떤 갈등은 부차적인지, 어떤 갈등은 무시해도 되는 갈등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바꿔 이야기하면, 갈등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다(샤츠슈나이더 2008, 119).
그렇다면 민주주의에서는 누가 갈등을 정의하고 그것에 대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가?
그것의 주체는 단연 정당(political party)이다. 기존 정치이론가들과 달리 샤츠슈나이더는 정당을 사회의 갈등이나 균열을 반영하는 수동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정당이 갈등과 관련하여 일정한 프레임을 만들고 갈등을 위계화 하는 능동적 존재임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즉 샤츠슈나이더는 정당을 종속변수로 상정하는 대부분의 연구들과 달리정당을 독립변수로 상정하고 있다(샤츠슈나이더 2008, 121).
정당과 갈등의 관계에 대한 샤츠슈나이더의 인식은 정당론을 체계화한 대표적 연구자 인사르토리(G. Sartor)나 마이어(P. Mair)에게도 계승되고 있다(Sartori 1976; Mair 1997). 정당을 독립변수로 상정한다는 것은 정치과정, 나아가 민주주의 체제의 유지와 작동에 있어 정당이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당이 수행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능중 하나는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정의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유권자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과 가치에 부합하는 대안을 좀 더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당의 주된 기능이자 능력이다. 선거에서 정당들이 제시하는 대안들 간의경쟁을 통해 정부가 구성된다는 점에서 이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 문제와 직결된다.2)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의 네 가지 차원을 규명했다. 정치의 과정과 결과는 모두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에 의해 해결 여부가 결정된다(샤츠슈나이더 2008, 125-127).
첫째, 갈등의 범위(scope)이다. 갈등의 범위는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등에 관여하는가이다. 새로운 참여자가 투쟁에 들어오면 힘의 균형이 변하고 그 결과 또한 달라진다. 갈등의 범위는 갈등의 사사화와 사회화라는 상호 대립하는 경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3)
갈등의 두 번째 차원은 가시성(visibility)이다. 가시적인 이슈일수록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통치과정의 변화, 새로운 양식의 정치투쟁으로 인해 정부가 실행하는 공적조치들의 가시성이 높아졌고, 그 결과 이를 둘러싸고 더욱더 큰 갈등이 야기되었다.4) 셋째, 갈등의 강도다. 사람들이 공적 이슈에 관심이 제고되면 될수록 이를 둘러싸고 더 큰 갈등이 야기될 수 있다.5)
넷째, 갈등의 방향이다. 수많은 갈등이 발생하면서 각각의 갈등은 사람들을 서로 다른 분파, 정당, 계급 등으로 분열시킨다. 그러나 갈등들 간의 균등성 곧 갈등들이 비슷한 강도로 서로에게 동등한 영향을 미치고 이로 인한 상쇄효과 때문에 이 공동체 내의 모든 적대가 완화되고 긴장도가 낮은 체계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어떤 갈등은 다른 갈등을 대체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기존 갈등을 대체한 전자의 갈등이 더 가시적이고 강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갈등들 속에 놓여 있는 우리로서는 갈등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면서 가장 중요한 갈등을 가지고 싸워야만 한다. 일단 우선 순위가 높은 갈등을 중심으로 분획선이 그어지면, 양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각자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우선순위가 높은 이슈에 힘과 관심이 쏠리면서 우선순위가 낮은 갈등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덜 중요한 이슈에서는 서로 견해가 다르더라도 주요한 갈등에 의해 분획된 각 진영 내부의 사람들은 응집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를 통해 어느 정도 지속적인 다수파 연합과 소수파 연합이 부각되면서 정치도 안정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샤츠슈나이더 2008, 127).
물론 갈등의 차원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관심이 가장 많은 이슈에서 찬반양론을 정하기 때문에 가장 가시적이고도 강도가 높은 갈등이 갈등의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가시성과 강도는 정치의 범위도 결정하는데 사람들은 어떤 이슈에 대해 알고 거기에 관심을 가질 때에만 이를 둘러싼 갈등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한편 갈등의 방향 또한 갈등의 범위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정치에서의 주요 균열이 자신과 별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전략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갈등의 차원들이다. 일단 특정 방향의 갈등이 정해지면 다수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엽합을 유지하기 위해 그 갈등이 만들어내 낸 균열을 계속해서 이용하고자 한다. 만약 반대파가 순순히 그와 같은 갈등의 방향을 수용한다면 정치체제는 상대적 안정성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파가 되고자 하는 반대파는‘갈등의 대체’전략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다수파 연합 내에 잠재되어 있는 갈등을 불러일으킬만한 이슈들을 동원하면서 그 갈등의 강도와 가시성을 높여 궁극적으로 지배연합을 분열시키는 전략이다. 갈등의 대체는 갈등의 범위 또한 변화시킨다. 새로운 방향의 갈등이 부상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사람들이 싸움에 가담하는 반면, 이전의 갈등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이슈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의 이론적 틀을 통해 5·18특별법 제정과정을 분석할 경우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5·18특별법을 둘러싼 정치과정을 분석함으로써 갈등의 대체 혹은 치환, 즉 새로운 갈등을 불러들여 기존 갈등을 대체하는 것은 정치 전략의 핵심 중의 핵심임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정치 지도자와 정당은 가시성과 강도를 높이고 갈등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슈를 제기함으로써 갈등을 조직하는 책임을 갖고 있는데, 김영삼 대통령과 민자당(신한국당)은 기존의 불리하고 자기 파괴적인 갈등을 유리하고 갈등방향을 자기팽창성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조직하는데 5.18특별법을 활용했던 과정을 정리하고자한다.
3. 5·18특별법 제정배경
1) 배경
앞서 언급한 것처럼, 5·18특별법이 제정되기 까지 적어도 세 가지 흐름이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 흐름은 5·18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한 5.18관련 단체를 비롯한 사회운동세력이다.
가장 먼저 5·18관련 단체들이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책임자 처벌의 문제는 광주문제 해결의 5원칙에 포함된 것으로서 198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의제였다. 그렇지만 학살의 최종 책임자로 인식되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최고 권력인 대통령직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는 이 의제가 사회화되기 어려웠다. 의제가 사회적으로 진입(entrance)할 수 없었다.6) 지식인 단체들도 5·18특별법 제정 요구에 동참하고 나섰다.
전국의 의사·여성단체 회원들도 5·18특별법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 소속회원 100여명은 「5·18학살자 처벌 특별법제정촉구 여성대회」를 갖고 5·18관련자의 즉각적인 처벌을 촉구했다. 전국연합,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5·18학살자처벌특별법제정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소속 회원 50여명도 민자당사 앞에서 집회를 갖고 민자당에 5·18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또 홍창의 서울대병원장,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배기영 공동대표 등 의사 10여명도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전국 8개 지역의사 2,376명이 서명한5·18특별법제정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5·18문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관련자에 대한 엄정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나간채 2013, 201-202).
둘째, 법조계 역시 5.18특별법의 제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전국 39개 대학 법학교수 111명은 「5·18불기소처분에 대한 의견서」를 작성, 헌법재판소에 제출하고, 민주당 내 정치개혁모임 회원 24명은 전두환과 노태우등을 내란죄로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야당은 특별법 제정을 당론으로 정했는데, 새정치국민회의와 민주당은 5·18관련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및 특별검사제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럼으로써 5·18특별법 제정 문제는 1995년 14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에서여야가 해결해야할 최우선 현안으로 떠올랐다(김성천 1996, 181-189; 곽노현 1996, 51).
셋째, 5·18특별법 제정은 김영삼 정부와 민자당, 그리고 지배세력의 위기관리전략의 일환이었다. 제도정치과정에서 법조계와 새정치국민회의와 민주당이 5·18특별법의 제정, 특히 내란죄, 반란죄의 엄중처벌 및 공소시효 연장과 관련한 법률안 확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5·18특별법 문제와 1992년 대선자금 공개요구에 시달려오던 중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비자금 수뢰사건으로 구속되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자신의 대선자금 문제로 불똥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전격적으로 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에게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이는 5·18문제를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했던 김영삼대통령이 여론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면서 동시에 문제를 이대로 둔 채 1996년 봄 15대 총선을 치렀다가는 선거참패를 면할 수 없고 나아가서는 1997년의 대통령선거에서도 크게 불리할 것을 알아차린 끝에 5·18문제를 피해가기보다는 차라리 이를 수용하는 방법으로 바꾸어 이른바 정면 돌파 전략을 쓴 것이다. 김영삼과 민자당, 지배세력이 대선자금 문제 확산, 총선 참패 방지, 1997년 권력재창출이라는 전략적 목표 하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갈등을 5·18특별법 수용이라는 새로운 갈등관리책의 도입을 통해 회피하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도 민자당이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5·18특별법을 제정키로 한 것에 대해 뒤늦은 감은 있으나 불가피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1995년 7월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5.18항쟁 관련 피고소, 고발인에 대해 내린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이 잘못됐다는 점을 보수언론도 동의할 정도였다. 당시 검찰의 이 같은 결정에 많은 국민들이 실망과 분노를 금치 못했고 야당과 재야 운동권, 학생운동세력은 물론이고 교수, 변호사, 종교인들까지 그 부당성을 주장, 서명운동과 가두시위 등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나간채 2010, 202).
사실 국가사법 중추기관인 검찰이 불기소 결정을 내린 사건을 정부와 여당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재수사토록 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5·18특별법을 제정하라는 목소리가 큰 사회문제로 번지고 있어도 민자당은 거의 외면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5·18특별법 제정은 바로 5 ․ 6공화국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으므로 3당 합당을 통해 집권한 민자당으로선 사건 당사자들이 상당수 현직에 남아있다는 현실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이 같은 여건 속에서 민자당이 5·18특별법을 제정키로 방침을 바꾼 것은 그 정치적 의미가 남다르다.
물론 5·18특별법 제정과 관련하여 논란은 많았다. 헌법규정인 형벌불소급의 원칙이나 공소시효에 대한 이견 등 법리적인 문제도 그 중 하나다. 공소시효로 인해 형사처벌 가능대상자가 전직 대통령 2명에 불과해 특별법 제정은 상징적·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 이미 국민회의와 민주당 등은 특별법 시안을 각각 국회에 제출해 놓았었고, 헌법의 테두리는 벗어날 수 없다는 대원칙에 여야 모두 공감하고 있어 절차는 별로 문제될 게 없었다(곽노현1996, 53-55).
결국 정부와 여당의 의지가 핵심이었고, 정부와 여당이 헌법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5·18특별법 제정에 의견을 모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지적처럼 5.17쿠데타는 국가와 국민의 명예를 실추시킴은 물론 민족의 자존심을 손상시켜 모두를 슬프게 한 사건”이었고,“국가의 최후 보루로서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군인의 명예를 더럽힌 사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5·18특별법은 5·18의 진상규명보다는 희생자보상과 명예회복에 초점이 맞춰졌다. 5.18특별법 제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잘못된 역사를 냉철히 되돌아봄으로써 다시는 이 같은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힘에 의한 헌정 중단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 위해서였다(정근식1997, 186-188 참조).
그렇지만 김영삼 대통령과 민자당, 그리고 보수언론을 비롯한 지배블럭이 5·18특별법 제정을 수용했던 것은 명백한 정치적 의도와 목적이 있었고, 그러한 의도와 목적을 갈등관리론, 특히 지배적 갈등이 심화되어 관리 불가능한 상황이 도래하여 정권과체제의 위기상황이 도래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새로운 갈등, 정권과 체제의 존립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하는 갈등을 도입하는 전략이 개입해 있다는 것이다.
샤츠슈나이더는 이를 갈등의 대체라고 명명했다. 5·18특별법 제정은 이러한 갈등의 대체전략이 작동한 것이며, 이러한 갈등대체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대선비자금으로 위기에 처했던 대통령과 집권당이 위기를 모면하는 수준을 넘어 정통성의 기반을 확대하고,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갈등관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갈등관리 전략의 일환으로서 5.18특별법의 의미를 조명하는데 목적과 필요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2) 제정과정
김영삼 정부의 출범에 대한 광주의 시각은 지극히 냉소적이었다. 그렇지만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면서 5·18은 중대한 변화를 겪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사실 김영삼 정부는 그 간의 군사정부와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문민정부로 칭하면서 처음부터 개혁을 주창하였고, 그에 따라 광주문제의 해결에도 뭔가 다른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고 있었다. 취임 초기에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5월 특별담화를 통하여 광주문제에 관한 자신의 종합적인 대책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민주화를 위한 역정(曆正)에서 ‘우뚝한 한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 위에서 각종 기념사업의 추진, 관련 피해자에 대한 추가 보상대책 등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1990년의 신고 및 보상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추가신고를 받도록 하였다. 이때 새롭게 2750명이 신청하였고, 이중 1843명에게 39099백만원을 지급하였다. 이 두 신고에 의해 사망자는 205명으로 재집계되었다(정근식 1997, 187-188).
1993년 광주시민의 김영삼 정권에 대한 지지는 매우 높았다. 그의 개혁정책에 대한 지지였다. 이 지지는 호남주민이 결코 폐쇄적 지역주의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지지는 지속되지 못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거부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대통령의 광주에 대한 이 약속은 미사여구로 수식된 말잔치로 받아들여졌다. 진상규명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역사적 평가에 맡길 것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고 무조건 용서와 화해만을 강조했다는 비판이 가해졌다. 이것은 문민정부가 5공 및 6공 세력과의 연합을 통한 권력획득과 유지를 전제하는 한 불가능한 것이었고, 광주문제의 해결을 국민적인과제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지역적 문제로 격하시킬 수밖에 없었다(정근식 1997, 190).
김영삼 정부의 5·18항쟁에 관한 입장은 군부 지도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문제가 제기되면서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1995년 7월 검찰은 이른바 신군부 세력들에게 공소시효 만료로 5·18과 관련하여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최종결정을 하였다. 그 결정은 말 그대로 역사에 심판을 맡기자는 문민정부 초기의 희망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었지만 바로 이 결정은 역설적으로 꺼져가던 5월 운동의 불길을 지피는 발화제로 작용하였다.
이에 대한 항의가 7월말부터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6 ․ 27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이 패배한 것에서 나타나듯이 권력관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광주에서는 5·18학살자 기소관철을 위한 광주전남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활동을 하였고, 전국적으로는 5·18진상규명과 5·18항쟁 정신계승 국민위원회”의 주도로 항의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5·18특별법 제정 범국민대책위원회(5.18범대위)가 조직되어 11월까지 6차례의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전국적으로 대학교수 3,500여명, 교사 수천 명이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항의하여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도를 도입하라는 서명을 진행했다(나간채2010, 203).
수사 결과가 공소권 없음으로 발표되자 그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즉각적으로 나타났고, 그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우선 광주지역 피해자들과 사회운동단체들은 언론에 관련 내용이 보도되자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이전인 7월 14일부터 5·18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전남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결성하고 당일 750여명이 상경하여 청와대와 검찰청에 항의방문을 결행했다. 공대위는 광주와 전남의 136개 단체가 참여했는데,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다음날인 7월 19일에는 5·18항쟁 피해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시민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돌입했고, 이 농성은 특별법이 제정된 그해 12월 21일까지 150여일간 지속되었다. 농성자들은 이 기간 동안에 5·18사진 전시,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고, 거의 매일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는 청와대 검찰청 등에 대한 항의방문을,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자택에서 시위와 삭발투쟁을 전개했고, 각 지역 사회단체들에 대한 방문과 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광주 현지에서도 이날 검찰 발표 규탄 및 학살자 처벌을 위한 범시민결의대회가 열렸다. 그 이후에는 서울의 국민위원회와 상호협력하면서 국회의원에게 5·18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한보내기,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천막농성(금남로일대 6곳), 토요집회, 특별법 제정을 위한공청회, 서명운동과 서명자 대회, 국회방문과 입법청원 등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했다.
서울에서는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국민위원회)가 주도했다.
국민위원회는 광주 외 지역 인사들이 주도하여 1994년 3월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결성된 조직이다. 김상근 목사와 이창복 대표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국민위원회는 검찰의 수사결과가 ‘공소권 없음’으로 발표되자마자 곧바로 5·18광주학살책임자 불기소에 대한 항의농성 기자회견’을 갖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7월 22일에는 5.18학살자 불기소처분규탄 및 기소촉구대회’를 종묘공원에서 거행하고 ‘전두환·노태우·정치검찰화형식’을 거행했으며, 25일에는 광주의 5민연과 공동으로 2차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2차 국민대회 때 한총련 대학생들은 연희동 진격투쟁을 감행하기도 했다. 3차 국민대회도 두 단체가 공동으로 개최했는데, 이때 경찰과 격렬한 충돌이 발생하여 수 십명 부상당했고, 18명이 구속되었다. 기소관철투쟁에서 특기할만한 일은 국회의원이자 국민위원회집행위원인 정상용이 중심이 되어 결행한 5·18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국토종단, 그리고 국회의 광주특위 진상조사소위원장인 김영진의원의 5.18학살자 불기소처분항의 및 기소촉구를 위한 국회단식노성이다. 이와 병행하여 법률적 대응도 계속되었다.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출했으며, 뒤이어 5민연과 공동으로 서울고등검찰청에 항고했고, 이 항고가 기각되자 제정신청과 재항고를 했다.
7월말부터 일반 시민사회단체의 참여가 급속히 확산되어갔다. 대한변호사협회 공청회개최(7.28), 고려대 교수 131명 성명서 발표, 광주향교 유림의 성명서 발표(8.8), 민주화를 위한전국교수협의회 교수농성(8.14-16),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발표(8.15), 서울시의회 특별법제정결의문 채택(8.23), 민교협의 서명교수 결의대회 및 입법청원(8.24), 조계종 스님들의 성명서발표(8.26), 예수교장로회 목회자 기자회견(9.4), 기독교장로회 총회의 결의문 채택과 서명운동(9.5), 전국 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 한국기자협회, PD연합회 공동주최 토론회개최(9.6), 정기국회 개원에 즈음한 여러 사회단체의 성명서 발표와 국회 앞 집회(9.11), 가두서명(9.13), 전국 6개 지역에서의 제4차 국민대회(9.16), 고려대 학생 40여명 5일간 단식농성 돌입(9.18), 연세대 학생 특별법청원서 제출(9.20), 뒤이어 민주당도 특별법안으로 국회에 제출했다(9.23).
그 이후 특별법 제정운동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어 각종 계층조직 및 단체까지 확산되었다.
거의 매일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학생 교사 일반 시민 농민 의사 변호사 약사, 법학교수 신림동 고시수험생, 사법연수원생 등이 대규모로 특별법 제정 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10울 19일 박계동 의원에 의해 폭로된 노태우비자금사건은 특별법 제정운동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박계동의원은 국회 대정문 질문에서 신한은행의 서소문지점에 우일양행명의로 예치된 110억의 예금계좌조회표를 제시하면서 노태우의 비자금 4000억원이 여러 시중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 후 검찰의 수사결과 노씨는 대기업 총수 등 40여명으로부터 46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되어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11월 16일 구속 수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싸우고 있는 각 단체들은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범국민적 연대기구로 5·18학살자처벌특별법 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범국민비대위)’를 결성하기로 의결한다. 당시에는 거의 매일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의 항의집회와 성명전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첨여민주사회시민연합(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환경운동연합,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준비위원회(민노총),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등 8개 단체가 준비작업을 맡아 추진한 결과, 1995년 10월 26일 흥사단 3층 강당에서 5.18학살자처벌 특별법제정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 결성식을 가졌다. 이 위원회는 시민사회단체 및 개인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단체는 국민위원회, 전국연합, 종교, 의료, 청년, 여성, 시민운동 등의 서울지역 시민단체와 광주지역 132개 단체, 부산지역 18개 단체, 충북지역 16개 단체 등298개였다.
결성선언문에서 우리의 최근 역사에서 이루어내지 못했던 과거청산을 실현하기 위해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국민적 힘을 결집하여 특별법 제정을 쟁취하고자 제안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 11월 4일을 ‘국민행동의 날’로 선포함과 동시에 노태우 비자금문제로 드러난 신군부집단의 부정비리를 청산할 것을 강조했다.
새로 출범한 범국민비대위는 ‘국민행동의 날’로 정한 11월 4일에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오전에는 전국 각지에서 국민행동강령과 국민대회를 알리는 유인물과 스티커를 배포했고, 정오에는 각 지역의 주요 거점에서 약식 집회와 문화패 공연, 희색 손수건배포활동을 전개했다. 3시까지 희색 손수건과 깃발 흔들기, 가면을 착용한 채 손뼉 치기, 구호 제창 등을 하며 거리행진을 벌인 후 한 곳으로 집결하여 제6차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3시에는 거리의 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전국 각지의 각종 시민사회단체, 직능단체에서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민적 의지가 충만한 가운데 시행된 국민행동의 날은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11월 7일에는 금융권과 공공부문 노동조합 100여개가 연대성명을 발표했으며 11일에는 제7차 국민대회가 개최되었고, 16일에는 광주 5월 단체 관련자들이 장기농성 중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기도회가 열렸다. 21일에는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가 주최하여 특별법 제정촉구를 위한 국회 앞 집회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국민적 압력은 마침내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으로 하여금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특별법 제정을 민자당에 지시하게 만들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법 제정 지시 이후에도 범국민비대위는 11월 29일 국회의원회관에서5·18문제의 국민적 해결을 위해 특별법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했다.7) 이어서 특별법에 관한 국민단일안을 발표했고, 제9차 국민대회를 전국 10개 지역에서 동시에 개최했으며, 12울 16일과 12월 18일에는 특별법의 올바른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 촉구 대중집회를 가졌다. 이와 같은 전 국민의 거대한 힘이 마침내 12월 19일 「5·18민주화운동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게 했다. 이 법은 신한국당, 국민회의, 민주당 등 여야 3당 합의로 상정되어 국회의원 247명이 참석한 가운데 225명이 찬성하고 20명이 반대했으며, 2명이 기권함으로 가결되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으로는 공소시효 정지(제2조), 특별재심(제4조), 기념사업(제5조), 배상의제(제6조), 상훈치탈(제7조) 및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12월 21일에는 범국민비대위가 주최하여 특별법 제정운동에 관한 성과보고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활동을 종결했으며, 명동성당 농성단도 1996년 1월 9일에 175일 동안의 장기간 천막농성을 끝내는 해단식을 갖고 광주로 돌아왔다. 1980년 항쟁 종료 이후 15년 만에 마침내 5.18특별법 제정을 이루어냄으로써 5월운동의 성과를 이루는 중요한 진전을 이뤄냈다.
5·18특별법에 따라 5·18항쟁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시작되었다. 12․12 및 5·18사건특별수사본부는 헌정질서파괴사범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시키는 조항에 근거하여 전직 두 대통령을 포함한 5·18사건 핵심 관련자들을 소환·구속하였고, 특별법에 기초한 수사와 재판은 매우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재판은 3월 11일 첫 공판이 열린 후에 27차례의 공판을 거쳐 1996년 8월 26일에 1심이 선고되었다. 전두환 피고인에게 사형이, 노태우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며,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그 후 항소심은 12차례의 공판을 거쳐 1996년 12월 16일에 선고공판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전씨는 무기징역으로, 노씨는 17년으로, 나머지 피고인들도 감형되었다. 5·18피해자 및 관련단체 인사들은 재판부의 선고에 실망하여 거세게 항의하는 한편, 민변·공대위·민예총 등 11개 재야 민주단체들은 5·18완전해결과 정의실현·희망을 위한 과거청산 국민위원회’의 발족식을 가졌다. 피고인들은 상고를 포기했으나 검찰과 고소인들은 대법원에 상고 했고,최종 상고심은 1997년 4월 17일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됨으로써 끝났다.
문제는 사면이었다.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부터 일부에서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론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97년 4월 17일 최종판결이 내려지자 5·18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은 사면저지 성명서를 발표했다. 가해자들이 진지한 참회와 사과의 자세를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면을 거론하는 것은 학살행위를 용인하고 5·18항쟁의 본질을 왜곡시킬 수 있고 5·18항쟁이 정략적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사면론은 정치권을 중심으로 사그라지지 않았다. 신군부쿠데타의 최대 피해자인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 내에 사면을 단행, 하루 빨리 동서화합의 길이 열리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고,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추석 전 조기석방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구체화되자 광주의 5월 단체와 재야 시민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자 오월문제의 해결을 위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는 소외되었다. 마침내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12월 22일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에 대한 사면이 단행되었다. 이후 5·18신묘지 조성공사가 이루어졌고, 5월 18일이 법정기념일로 공식 제정되고,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가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받았던 각종 훈장이나 포장 등의 상훈에 대한 치탈방침이 결정되었다. 뒤이어 2002년에는 폭도로 불리던 5.18항쟁의 피해자들이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거 국가유공자로 예우되고 5.18묘지가 국립5,18민주묘지로 승격됨으로써 5.18특별법 제정 이후의 프로세스도 완료되었다.
4. 갈등의 대체로서의 5·18특별법
1) 갈등의 구도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5·18특별법의 재정을 둘러싼 갈등의 구도이다. 모든 운동이나 불만이 이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슈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지지만 갈등과 결합될 때에만 이슈가 형성된다. 단적인 예로 5·18항쟁의 유가족과 관련 단체들은 전두환과 노태우 등 12․12쿠데타 세력들이 감행한 5.17비상계엄확대조치 및 그에 항거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한 행위는 국헌을 문란케 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살상행위 내지는 내란행위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전두환과 노태우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쿠데타의 당사자가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이들의 처벌을 강력히 원했지만 이들에 대한 고발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광주 문제의 해결은 결국 이들의 불법적 권력찬탈행위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때 완결되는 것이었음에도 고발의 당사자가 대통령이었던 상황에서는 이러한 문제해결은 가능할 수 없었다. 불만과 이해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슈가 될 수 없었던 것은 갈등을 억압하고 있던 권력구조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갈등의 억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갈등으로 발전하지 못한 불만내지 이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은 정치적 환경을 바꿔놓았다. 이 시기 갈등의 구도는 갈등의 ‘접근(approach)-회피(avoidance)’유형에서 갈등의 ‘접근(approach)-접근(approach)’유형으로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접근-회피 유형은 한 쪽은 얻기를 원하고 다른 한쪽은 회피하기 원하는 이슈를 둘러싼 갈등을 말하며, 접근-접근 유형은 복수의 집단 혹은 세력이 특정한 목적을 얻기 원하는 이슈를 둘러싼 갈등을 말하는데, 동일한 목표일 경우 승자와 패자로 나뉘기도 하지만 갈등을 둘러싼 목표가 서로 조금씩 다른 경우에는 승자-승자, 패자-패자로 나뉠 수도 있다.
접근-회피의 시작은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고발로부터 시작되었다. 문민정부가 출범하자마자 5·18항쟁의 피해자와 관련 단체들은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내란죄로 검찰에 고발한다. 고발사건은 모두 4건이나 되었는데, 정동년 등 5·18단체 관련자 322명이 제출한 고발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이신범 등 18명이 제출한 고발건, 재야인사 인재근 등 20명이 제출한 고발건, 민주당내 정치개혁모임 회원 24명이 제출한 고발건이 그것이다(변정수 1997, 348).8) 5·18항쟁 피해자와 관련단체의 12․12와 5·18문제 해결을 위한 전두환과 노태우 사법처리 요구에 대한 대응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해주었던 것은“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김영삼의 발언이었다. 정권과 민자당의 이러한 대응은 3당 합당체제의 산물이기도 하다.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으로 출범한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며 약간의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민정계를 대표하던 노태우로부터 민주계를 대표하던 김영삼으로의 권력 이행은 노태우정권과 비교할 때 분명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다.
12․12를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5·18항쟁을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투쟁이라고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3당 합당 세력 내부의 권력이행이 가져온 성과였지만, 동시에 12․12쿠데타와 5·18학살 관련자의 처벌에 반대하고 역사적 심판에 맡기자는 식의 회피전략을 보였던 것은 여전히 민정계가 3당 합당 체제의 한 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출된 한계였다. 다시 말해 3당합당 이후 노태우로부터 김영삼으로의 권력 이행이 5·18항쟁의 역사적 평가에 있어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법적 심판에 있어서는 여전히 구조적 제약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제약이 공식화된 것이 4건의 고발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다.
검찰은 1994년 10월 정승화씨 등이 고발한 12․12반란사건에 관하여 12․12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하면서도 전두환, 노태우씨 등이 14년간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가발전에 기여한 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단죄할 경우 헌정질서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을 참작하여 이들을 전원 기소유예처분하였다. 이에 대해 정승화 등 고발인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으나 헌법재판소는 1995년 1월 헌법소원이 이유 없다고 기각하였다. 다만, 헌법재판소는 결정이유 부분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씨의 12․12군사반란 부분은 대통령 재직 중 공소시효 진행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전두환씨에 대하여는 2002년까지, 노태우씨에 대하여는 1999년까지 공소시효가 연장되었고, 그 밖의 12․12 관련자에 대하여는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고 부연설명했다.
검찰은 이어 5·18내란죄 고발사건에 관하여는 1995년 7월 18일 “공소권 없음”을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발인들은 당연히 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 이유는 일단 쿠데타에 성공하면 국민주권, 민주주의, 법치주의를 유린한 헌법파괴범죄도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어서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12․12사건에 대하여 처리했던 것처럼 정상을 참작한다는 이유로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더라면 국민들의 불만과 저항이 그처럼 거세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2) 갈등 간의 경쟁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국민적 불반과 저항은 거셌다. 이제 접근-회피 구도를 변경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동이 개시되었다. 진보적 언론은 물론 중도적 성향의 언론들까지 사설 등을 통해 검찰처분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일제히 검찰을 비난하였고, 현행법으로 처벌이 불가능하다면 5·18내란 관련자들에게 소급 적용되는 특별법을 만들어 관련자를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이에 5·18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천주교광주대교구와 정구현사제단이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국민회의가 1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고, 고려대가 시동을 건 교수들의 서명운동 또한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되어 수천 명의 교수들이 이에 참여하였다. 개신교, 불교 등 종교계와 작가, 연극인 등 예술계는 물론 경실련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5.18내란자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5·18관련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도 도입을 촉구하는 대학생들의 동맹휴업이 전국 각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국민적 열망을 바탕으로 서명운동단체들은 5·18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청원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국민적 공분과 5·18특별법 제정에 대한 열망을 외면할 수 없던 야당들도 국민적 여론의 압력에 따라 특별법 제정을 당론으로 정하고, 새정치국민회의와 민주당은 5.18관련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및 특별검사제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는 조순형 의원 대표발의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의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안(1995.9.22)을 제출했는데, 이 법안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배경과 경과, 희생자 등에 대한 탄압과 군부의 권력찬탈과정 등에 관한 진상규명과 소추에 관한사항,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사항 규정”을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는 특별검사를 임명하여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배경과 경과, 희생자 탄압과 12․12쿠데타를 시발로 하는 군부 일부의 권력찬탈 과정 등에 관한 진상을 규명하고 헌법파괴범죄행위자를 소추하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했고, 광주민주화운동희생자 등 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희생자 등의 명예회복조치를 강구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었다.
그 동안 새정치국민회의의 공식적인 입장은 5·18의 진상은 규명하되, 처벌은 원치 않는다였다. 그렇지만 국회에 제출한 국민회의의 법률안의 내용에는 관련자 소추와 처벌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국민회의의 공식적인 입장이 여론의 압력에 의해 변화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민주당은 장기욱 의원의 대표발의로 12․12군사반란 및 5·18내란사건처리특별법안(1995.11.13)을 제출하였는데, 검찰의 ‘공소권 없음’결정으로 수백 명이 살상되고 투옥된 5.18내란사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공권력에 의해 그늘에 가려지는 결과가 유발되고, 검사의 기소독점주의 및 기소편의주의가 국민의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일반 국민의 법적 정의와 진실에 대한 염원은 특별검사제도의 도입으로 동 사건의 공명정대한 해결을 촉구하는 것으로 공감되어 있는 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는‘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법정신에 입각하여, 형사 소추 시효 완성 전에 그 배제를 규정하고, 특별검사제도 도입을 그 주요 골자로 하는 법을 제정하여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결정,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식의 오도된 법적용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취지에서 12․12군사반란죄를 기소유예한 노태우의 부정 축재를 확인하기위해 법률안을 제출하였다. 여론의 압력이 거세지고, 국민회의와 민주당이 비슷한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5·18특별법제정 문제는 14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여야 간에 해결해야 할 최우선현안으로 부상했다. ‘회피’태도를 보이던 야당이 ‘접근’태도로 입장을 바꿈으로써 이제 국회 내에서 접근-회피의 경쟁하는 두 가지 정치적 입장과 흐름이 형성되었다.
3) 갈등의 치환
김영삼 대통령은 5·18특별법 문제와 92년 대선자금 공개요구에 시달려오던 중 설상가상으로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뢰의혹을 폭로하게 되었고 급기야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수뢰로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하여 국회는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였는데 내란죄, 반란죄의 엄중처벌 및 공소시효 연장에 법률안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당시 돌발변수 중의 하나는 5·18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평결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5·18특별법에 대한 성안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평결은 특별법 제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만약 헌법재판소가 내란 사건의 공소시효 기산일을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일인 1980년 8월 16일로 본다면 5·18사건의 내란행위의 공소시효는 1995년 8월 16일에 만료되어버린다. 특별법은 공소시효 만료 전에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법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된 이후에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특별법은 만다는 것은 위헌이자 형벌불소급의 원칙에 위배됨으로써 결과적으로 5·18특별법 제정 자체가불가능해지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국민회의는 헌재의 평결이 자칫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는데, 국민회의의 대책은 헌재 결정을 막기 위해 헌법소원선고연기 신청을 냈으나 헌재 측은 연기신청을 받아주지 않고, 11월 30일 선고를 강행하겠다고 답변하였다. 결국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막는 길은 헌법소원을 아예 취하하는 길밖에 없었다.
헌법재판소에 제출된 헌법소원이 취하되면서 국회에서는 ‘5·18민주화운동등에 관한 특별법안’은 1995년 12월 19일 제177회 정기회 제18차 본회의에서 상정·의결되었다. 이 법률안의 1979년 12․12와 1980년 5·18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정지등에 관한 사항 등을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법안에서는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에 대하여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보며,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이라 함은 당해 범죄행위의 종료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기간을 말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전두환과 노태우 등 내란사건 주동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해졌다. 또한 특별법 제7조에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상훈을 받은 자에 대하여 심사한 결과 오로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받은 상훈은 상훈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하여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등을 치탈”하도록 규정했다. 김영삼 정권과 민자당(신한국당)의 5·18특별법 제정은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광주의 저항적 민심을 무마하며, 5·18특별법 제정요구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대중과 야당으로부터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아옴으로써 15대 총선의 전망을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15대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대교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5·18특별법 제정은 정권과 집권당에 닥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대책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김영삼 정권과 민자당에 밀어닥친 위기는 무엇이었나?
첫 번째 위기 요인은 자유민주연합의 창당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은 거대보수집권당의 출범을 알렸지만 내부적으로는 많은 계파갈등의 요소를 내재한 불안정한 체제였다.
민정계와 민주계, 공화계의 당내 주도권 다툼은 1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정계 후보를 선임하려던 노태우와 그럴 경우 정권퇴진도 불사하겠다고 버티면서 김종필과 연대한 김영삼간의 극단적인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 김영삼과 김종필 간의 동맹은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 이후 균열이 생기게 된다. 당내 주류였던 민주계는 1994년 말부터 ‘개혁’과‘세계화’를 내세우며 김종필의 일선 후퇴를 요구했는데,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둔 계파간 권력다툼의 성격도 강했다. 김종필은 이에 반발해 1995년 1월 민자당 대표위원직을 사임하고 민자당을 탈당한 후 3월 30일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게 된다. 자민련 창당은 단기적으로 성공적이었는데, 그해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청남, 대전, 충북, 강원 등 4개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는 약진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김영삼 대통령과 민자당의 주류였던 민주계는 당내부적으로는 민정계의 반격과 당 외부적으로는 자민련의 약진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했다. 민주계는 민정계의 반격을 견제하면서도 자민련의 보수층 공략을 방어해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1995년 7월 18일 김대중의 정계복귀 선언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도 김영삼 대통령과 민자당으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민주당을 탈당해 국민회의를 창당하자마자 단숨에 의석수 53석의 제1야당이 되어 무기력했던 이기택 민주당 체제를 대체했다.
국민회의의 창당과 자민련의 창당은 기존 야당이었던 민주당과 함께 1여 3야라는 특이한 세력구도를 만들었는데, 여야 간의 경쟁구도와 정국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과 갈등이 첨예화되었던 시기다. 5·18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민적 여론을 등에 업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정국을 강타했던 가장 강력한 이슈는 김영삼 대통령의 대통령선거운동 자금을 공개하라는 요구였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반독재투쟁8인공동위원회를 열어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국회에 나와 92년 대선자금을 공개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라고 촉구하는 상황이었다(동아일보, 1997. 5. 26.).9). 김영삼 대통령과 민자당으로서는 대선자금 공개와 5·18특별법 제정 요구를 매개로 정국을 주도해나가던 김대중 총재와의 정국 주도권 경쟁에서 밀리는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정국전환의 카드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세 번째 위기요인은 노태우비자금 사건이다. 대선자금 공개요구로 곤혹스러웠던 김영삼 대통령과 민자당에게 특단을 대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사건이 발생한다. 1995년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우일양행명의로 예치된 110억 원의 예금계좌 조회표를 제시하며 노태우의 비자금 4,000억 원이 여러 시중 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신한은행 측에서 이 계좌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가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이틀 후인 10월 22일 전 대통령 노태우의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가 검찰에 자진 출두해 우일양행 명의 차명계좌에 입금되어 있는 돈은 노태우대통령이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돈이며, 전 청와대 경호실 경리과장 이태진이 관리해 왔다고 밝혀 비자금의 실제가 최초로 확인되었다. 결국 노태우는 포괄적 의미의 뇌물죄가 적용되어 1995년 11월 16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됨으로써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집권당인 민자당으로서는 1여 3야구도, 야당의 정국 주도, 현직 대통령에 대한 대선자금 공개요구와 함께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여 1996년 4․11총선 전망마저 암울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국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에게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다. 5·18문제를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하던 김영삼 대통령이 여론의 압력에 굴복한 것인데, 그는 5·18문제를 방치할 경우 1996년 치러지는 15대 총선에서 참패를 면할 수 없고, 나아가서는 1997년의 대통령선거에서도 크게 불리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5·18문제를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수용함으로써 정면 돌파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바꾸었다.
물론 5·18특별법 제정 지시가 단순히 대통령과 집권당에 닥친 위기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기를 정면 돌파하면서 동시에 민자당을 개편하는 계기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측면도 있다. 특별법 제정은 결과적으로 민자당 내부의 가장 강력한 도전세력인 민정계 중진들을 물갈이하는 가장 효과적인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5·18특별법에 따라 사법처리가 예상되는 인물들은 단순한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 뿐만 아니라 민정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직을 유지한 채 민자당으로 흡수된 다수의 민정계 중진 의원들을 공천과정에서 물갈이하지 못할 경우 김영삼 대통령의 레임덕은 물론이고 민주계의 당권유지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민자당은 1995년 6월 지방선거에 패배, 지방정치구조가 여소야대가 됨에 따라 정권심판론이 확산됐고, 내부적으로도 민주계와 민정계가 개혁 대 안정세력으로 나누어 대격이 격화되고 있었으며, 1997년 대권을 놓고 ‘포스트 YS’권력투쟁 등이 노정되고 있었다. 이에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칭하고, 김영삼 대통령 주도로 기성 정치권의 틀을 깨는 과감한 세대교체를 추진했고, 이춘구 전 대표를 비롯한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등용된 중진들을 물갈이하며 세대교체의 공간을 마련했다. ‘대쪽’이미지의 이회창 전 국무총리를 영입하는 상징적 조치를 취해 보수층을 안정시키면서도 동시에 5·6공 군부정권의 색채를 씻어내는 동시에 민주·개혁 분위기 조성을 위해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이신범, 이성헌, 김영춘 등 개혁성향의 정치 신인들을 수혈하여 총선에 출마시켰다. 여기에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을 비롯한 재계 인사들과 김도언 전 검찰청장, 정형근 전 안기부 차장, 최연희 전 검사장, 안상수 변호사,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김무성, 정의화, 황우여 등도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았다.
반면, 이춘구, 정순덕, 황인성 의원 등이 과거청산의 흐름 속에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상천, 허삼수, 배명국 의원 등은 공천에서 탈락했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을 받지 못하고 탈락한 현역 의원은 30여명이었는데, 대부분이 민정계였다. 대신 민정계가 공천에서 탈락한 지역구엔 홍인길(전 청와대 수석), 한이헌(전 청와대 수석)과 김무성(전내무차관), 김기춘(전 법무장관) 등 김영삼 대통령의 친위세력이 김영삼 대통령의 아성인 부산 경남에 집중 배치되어 당선되었는데, 대통령의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한 포석이었다.
결국 신한국당은 1996년 4․11총선에서 지역구 122석과 전국구 18석 등 과반에 육박하는 140석을 확보하며 선전했으며, 국회 개원 이전에 사정정국을 조성하여 무소속 의원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원내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게 된다. 5·18특별법은 신한국당의 세력교체, 국회의원 물갈이를 위한 정책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과 집권당인 민자당이 당초의 입장을 번복하여 5·18특별법 제정을 수용하는 과정에는 대통령과 집권당의 통치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목적과 이를 계기로 권력내부의 물갈이를 단행하려는 의도가 혼합되어 있었고, 야당 역시 5·18특별법 제정을 통해 지지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과거청산의 대의를 실현하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접근-회피의 갈등구도가 접근-접근의 갈등구도로 치환됨으로써 갈등하던 양 주체의 서로 다른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5·18특별법 제정은 갈등정치학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전범(典範)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김영삼 대통령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과 담론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집착 무용론에서 명예혁명론으로, 역사바로세우기론으로 논리를 바꾸면서 5·18특별법 제정을 자신이 주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1993년 5월 특별담화를 통해 김영삼은 광주문제에 관한 자신의 종합적인 대책을 발표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이 민주화를 향한 역정에서 “우뚝한 한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위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 위에서 각종 기념사업의 추진, 관련 피해자에 대한 추가 보상대책 등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렇지만 5·18책임자처벌에 대해서는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며 미온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조직화되고,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비자금을 폭로하면서 본인의 대선자금 공개 요구가 더욱 거제시는 상황에 직면하자 전격적으로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다. 5·18특별법은 민주자유당(후에 신한국당)이 대선자금공개와 대통령비자금 폭로, 총선패배의 위험이라는 갈등을 관리하기 위해 수용되었고(갈등의 대체),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이해(세력교체와 총선승리, 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5·18특별법 제정과정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갈등은 그것의 강도가 아무리 크고 가시성이 높다하더라도 그것이 해결되는 방향은 그 구성의 주체가 정당이기 때문에 기존 정당정치동학 내에서 규정되며, 갈등의 대립자들의 사회적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갈등해결의 통로로서 정당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갈등의 구성과 처리 과정의 주체를 구성하는 것은 정당이며,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 역시 정당이다. 이것이 정당을 통해 구성되는 갈등의 정치를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며, 5·18특별법 제정과정을 통해 확인하는 갈등관리정치의 모습이다.
이 연구의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5ㆍ18특별법의 제정의 정당정치 및 의회정치적 가치를 재조명했다. 5·18특별법은 헌정 사상 최초로 평화적인 방식으로 과거의 헌정파괴행위를 단죄할 수 있도록 법률적 근거를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특별법을 계기로 향후 군사정변이나 내란행위 등이 발생하여 헌정질서가 파괴되는 일이 발생할 시에는 공시시효를 영원히 배제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사회구성원들에게 전달하는 계도효과도 컸으며, 무엇보다 최소주의적 관점에서 자유롭게 평등한 선거와 주기적인 정권교체 못지않게 체제역행의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봉쇄조항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둘째, 이 연구는 갈등대체전략의 전형으로서 한국정치과정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조명했다. 5·18특별법은 이른바 5·18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지만, 정치 전략과 갈등관리의 맥락에서도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특히 사회운동 연구에서 법은 소외된 주제였는데, 5·18특별법의 갈등대체성을 검토함으로써 현존하는 정치체제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회운동과 제도권 내부의 입법활동이 결합됨으로써 5·18특별법이 성안되고 가결됨으로써 사회운동과 입법과정의 다양한 형성과 구조, 및 성격을 이해하는데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셋째, 5·18특별법은 원외에서 제기된 사회적 이슈가 원내의 정치과정을 통해 수용된 외부주도형 정책결정 모델의 대표적 사례다. 외부주도형이란 정부 외부에 존재하는 집단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사회 문제를 정부가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사회 쟁점화하고 의제로 채택하게 하는 의제설정 유형이며, 보다 일반적으로는 ‘쟁점이 정부 외부에서 발생하여 의제가 성립, 제도의제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한 모형이 된다.
즉 체제의제가 제도의제로 변환되는 일반적인 모형이다. 외부주도 모형에 따른 의제의 확산은 최종적인 진입 단계에 있어서 쉽사리 정책의제 내에 포함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체제의제와 제도의제 사이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특히 특정 쟁점에 대한 정부의 결정이 심각한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 명백할 경우에는 제도의제로의 전환에 실패하게 된다. 이 쟁점의 정책화에 대해 반대하는 정책참여자들이 사회 엘리트 계층일 경우, 이는 무의사 결정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러한 이론화에 부응하는 사례로서 5·18특별법은 정책결정모형의 적용에 매우 적합한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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