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대통령의 5.18 관련 법률
● 노태우 대통령(재임기간: 1988.2.25.~1993.2.24.)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0.8.6. 제정)」
☞ 2004.1.20.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로 명칭 변경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 김영삼 대통령(재임기간: 1993.2.25.~1998.2.24.)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시행 1995.12.21. 1995.12.21. 제정)」
☜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 규정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시행 1995.12.21. 1995.12.21. 제정)」
☜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 규정
● 김대중 대통령(재임기간: 1998.2.25.~2003.2.24.)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2002.1.26. 제정)」
☞ 2004.1.20.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로 명칭 변경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 노무현 대통령 시절(재임기간: 2003.2.25.~2008.2.24.)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시행 2006.1.30. 2005.7.29. 제정)」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시행 2006.2.16. 2006.2.16. 제정)」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시행 2006.2.20. 2006.2.20. 제정)」
한국민주주의의 공고화와 5.18특별법
2015.12.3. 이영재 한양대학교 제3섹터연구소
1. 시작하며
‘5․18 특별법’이 제정(1995. 12)된 지 올해로 꼭 20년이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신군부의 무력진압 이후 한국사회에서 ‘5․18’은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민주적 저항의 구심력으로 작용해 왔다.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요구는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추동해온 힘이었으며, 1987년 6월 민주화 이행의 주요 동력 중 하나다. 민주화 이행 후 1988년부터 국민적 민주화 열기를 바탕으로 5․18에 대한 제도영역의 진상조사와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거대 보수여당인 민자당 체제가 출범하는 등 정치영역의 보수대결집으로 제도영역의 5․18 문제 해결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1995년 12월「5․18특별법」 제정 이전까지 난항을 겪게 된다. 「5․18특별법」 제정요구가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문민정부는 5․18문제를 ‘역사에 맡기자’는 소극적 입장으로 일관했다. 아마 “정부 여당 내에 개혁의 대상이 되는, 즉 구체제를 탄생·유지시켰던 보수그룹이 훨씬 다수를 차지(최장집, 1996: 251)”하고 있었던 것도 5․18문제에 대한 문민정부의 소극성을 설명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집권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5․18문제가 집권 세력 내의 보수대연합에 균열을 가져올 정도로 파괴력이 큰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와 직접 관련이 없는 문민 대통령의 출현은 국민들에게 큰 기대를 갖게 했고, 그 기대는 문민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구체적인실천의 양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1994년 초부터 ‘5․18’ 가해자 처벌과 진상조사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1994년 3월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가 350여명의 재야인사를 주축으로 결성되고, 1994년 5월 13일 정동년 외 321명의 당사자들이 5․18 사건 관련자 35명을 내란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하고, 김상근 목사를 대표로 한 국민위원회도 고발운동을 전개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그 성과로 1997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적으로 단죄했다. 그리고 법․제도적으로 5․18을 민주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헌법제정 권력의 정당한 투쟁으로 재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집권세력이 3당 합당을 통해 당선되었지만 주류였던 전두환, 노태우 세력과 단절하고, 당명조차 ‘신한국당’으로 변경해야 할 만큼 ‘5․18 특별법’ 제정이 가져온 파장은 상당했다.
그동안 「5․18특별법」과 관련한 연구는 1995년 특별법 제정을 전후한 시점과 1997년 소위 ‘세기의 재판’을 전후한 시기에 집중되었다. 주로 특별법 제정의 정당성을 요구하는 논의(곽노현, 1996; 김성천, 1996; 김인석, 1995; 박은정, 1995; 심헌섭, 1995), 법적 쟁점을 중심으로 사법부의 견해를 반박하는 논의(강경선, 1996; 김민배, 1996; 오병선, 1995; 오호택,1996; 허영, 1995), 재판의 성과와 한계를 정리한 논의(박원순, 2001; 정웅태, 2001; 정태욱,1996; 정태호, 2000; 한인섭, 1997; 2002)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1995년 특별법 제정과 1997년 두 전직 대통령의 사법처벌 이후 상대적으로 「5․18특별법」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잦아들었다. 특히 민주화 이행 이후 「5․18특별법」제정의 함의를 한국 민주주의의 거시적 맥락에서 조명하고자 시도한 연구들은 거의 없었다. 발표자는 이 발표문을 통해 1995년부터 치열한 실천적 담론을 만들어내며 특별법 제정에 중대한 기여를 한 기존 연구성과들을 바탕으로 하되 「5․18특별법」제정이 갖는 의미를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공고화를 가져온 전환적 계기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하 논의에서는 사법부를 중심으로 한 법․제도적 영역의 입장 전환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법제도적 변화를 추동해 낸 시민사회 영역의 정당성 요청을 또 다른 논의의 축으로 삼았다. 민주주의 공고화와 관련한 이론적 검토를 통해 이 두 축의 논의들이 갖는 의미를 평가하면서, 「5․18특별법」제정이 갖는 민주헌정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 발표문의 시기적 범위는 주로 1994년 고소․고발운동에서부터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판결까지를 중심으로 한다. 발표의 전체틀은 다음과 같다. 제2장에서 민주주의 공고화와 관련한 이론적 논의를 검토하고, 「5․18특별법」에 대한 연구방향을 ‘소극적’ 공고화 차원에서제시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5․18특별법」제정 이전 문민정부 초기의 개혁 양상을 소극적공고화 초기 단계로 규정하고 있다. 제4장에서는 「5․18특별법」제정 투쟁을 민주주의 공고화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2. 기존 논의의 검토와 연구방향
1) 민주주의 공고화 논의에 대한 검토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민주주의 연구자들은 한국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계기로 군부-권위주의 통치가 종식되고 민주화 이행이 본격화되었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민주화이행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 계기나 과제를 진단하는 데에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어수영, 2004; 선학태, 2005; 2008; 임혁백, 2005; 지병근,2008; 민준기, 2008; 이동윤 2007). 어수영(2004)은 기존 민주화 이행론의 범주에서 보기 힘든 세대 간 가치변화 문제에 주목하고 탈물질적 가치 변화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공고화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선학태(2005)는 사회복지개혁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의공고화 과제를 파악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헌정체제의 합의제형 개헌을 중심으로 공고화 과제를 설명하고자 했다(선학태, 2008). 임혁백은 2002년 노무현의 대선 승리에 주목해 낡은 정치를 상징하는 ‘3김 시대’의 종식에 중요한 전환기적 의미를 부여하고, 3김시대 종식을 민주주의 공고화의 계기로 제시한 바 있다(임혁백, 2005: 337-383). 이렇듯 한국민주주의의 공고화를 규정하는 논점은 세대 간 가치변화에서부터 사회복지적 요소의 도입, 헌정체제 개혁, 3김 시대 이후의 민주화 등 다양한 차원에서 제기되어 왔다.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두고 이렇듯 다양한 관점의 논의가 제기되는 이유는 쉐들러(Schedler)가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의 공고화라는 개념이 매우 광범위하게서로 다른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민주주의 공고화 개념은 대부분의정치현상에서 ‘느슨한’(nebulous) 합의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Schedler, 1997: 204).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행과 같이 합의 가능한 기준을 도출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공고화 논의는 다양한 각도에서 계속되어 왔다. 라이파트(Lijphart)와 같은 정치제도적 접근론자들의 경우 정치제도(특히 대통령제)가 거버넌스의 질과 정치체제의 안정화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주목하기도 했다(Lijphart, 1999). 린쯔(Linz)와 스테판(Stepan)은 신생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정치․사회․경제영역에서 ‘갈등해결을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of conflict resolution)’하는 문제에 착목해서 경제사회에 대한 국가의 민주적 개입을 강조하기도 했다(Linz and Stepan, 1998).
다른 한편으로, 헌정체제의 성격이 권력의 집중인가, 아니면 권력의 분산인가로 나누어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선학태는 레이파트(Lijphart)에 근거해 권력집중의 다수제와 권력분점을 지향하는 합의제를 구분하고, 전자는 과반수(혹은 단순다수)의 선택을 전체 사회의 결정으로 받아들이는 ‘경쟁정치’이고 효율을 지향하는 것으로 평한다. 그는 6월 항쟁에 따른 헌법개정이 이에 해당한다고 본다. 레이파트의 논의에 따르면 한국의 ‘87년 헌정체제’는 국정 효율성과 안정성 제고를 위한 다수제 헌정 패러다임에 기초하는 것이다. 선학태는 “87년 헌정체제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집단과 계층과 지역을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정치과정에 참여시키는 데 심각한 제도적 결함을 보인다”고 평가하고,“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헌정체제를 재디자인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있다(선학태, 2010: 69-130). 이행기의 요구에 부응했던 헌정체제를 공고화의 계기에 부합하도록 새롭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 공고화와 관련하여 ‘정부형태의 변화’, ‘경제사회에 대한 국가의 민주적개입’, ‘권력분점의 합의제적 헌정체제’의 필요성 등을 제시하는 논의들은 민주주의의공고화를 향한 미래적 가치지향 측면에 주안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이러한 ‘적극적’공고화 논의와 달리 민주주의의 권위주의로의 퇴행 가능성이 차단되는 계기적 차원에 주목하는 논의들을 ‘소극적’ 차원의 공고화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소극적 공고화 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유사 민주주의로의 퇴행을 막는 제도화․규범화 계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5․18특별법」을 한국 민주주의의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차단하는 소극적 공고화계기로 평가하고자 하는 본 발표자의 문제의식에 유용한 시사점을 준다.
쉐들러는 느슨한 공고화 개념을 보다 구체적 차원에서 개념화하기 위해 큰 틀에서 공고화논의의 유형을 ‘적극적’(positive) 차원과 ‘소극적’(negative) 차원(Schedler 1997: 21)으로 대비한 바 한 바 있다. 쉐들러 뿐만 아니라 린쯔와 스테판도 ‘소극적’ 공고화와 ‘적극적’공고화를 나눔으로써 민주주의 공고화 개념의 구체화를 시도했다(Linz & Stepan, 1998: 4867). 린쯔와 스테판은 소극적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을 “행태적으로, 민주 레짐(democraticregime)은 영향력 있는 국가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또는 제도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비민주적 레짐을 창출하거나 국가를 이탈하지 않을 때 공고화된다.
태도적으로, 가장 강력한 다수가 민주적 제도와 절차에 따를 때 공고화된다. 헌정적으로, 정부의 공권력이나 비제도적 영역의 힘이 새로운 민주적 과정에 의해 확립된 제도와 절차, 법의 테두리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습관화될 때 공고화된다(Linz and Stepan,1998: 49-50)”고 파악했다. 즉 어떤 권력이나 행위자도 민주적 과정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때, 그리고 어떤 정치기구나 집단도 새로운 민주적 기준에 의한 선출을 무효화할 수 없을 때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신생민주주의의‘돌연사’(sudden death)를 피하는 차원에 주목했던 오도넬의 문제의식과도 연결되는 것이다(O’Donnell, 1992).
2) 문제의식
민주주의의 ‘적극적’ 공고화 논의와 달리 ‘소극적’ 공고화 논의에서는 민주화 이행기를 거쳐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예비해야 하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단계에서 권위주의체제로의 회귀나 민주주의의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차단하는 계기에 주목한다. 민주주의의 급작스러운 붕괴 위협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비로소 적극적 공고화를 향한 모색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아직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에 안정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의 지속은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올 수 있는 위협요소가 된다. 새롭게 형성된 민주주의체제에 역행하여 빈번하게 발생하는 정치변동은 군부의 정치적 개입과 같은 쿠테타를 들 수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지속성을 단절시키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 된다(O’Donnell, 1992). 특히 한국사회는 1961년 ‘5·16’과 1979년 ‘12·12’두 번의 쿠테타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 소극적 공고화 계기에 대한 검토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히 민주주의의 이행과 공고화 과정에서 군부의 정치개입을 억제하는 선행조건들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에서 머물지 않고 시민사회의 성숙과 민주적 정치역량 등 다양한 요소들을 향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질적 민주주의의 정향을 갖추지 못한 사례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종종 위임(delegate) 민주주의, 불완전한(imperfect)민주주의, 불안정(unstable) 민주주의 등이 거론되는 것이다(Diamond, 1999: 34-49). 1987년 민주화 이행을 경험한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공고화에 대한 논의는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막는 마지노선에 대한 관심보다는 민주주의의 심화․실질화 차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주로 다양한 정치적 다원주의 실현을 위한 정치개혁방안들이 검토되었다(양동훈, 1996; 이정진, 2002; 최장집, 2005; 강명세, 2006).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 연구에서 ‘소극적’ 공고화의 계기에 대한 검토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혹자는 문민정부의 등장을 민주주의 공고화의 계기로제시하고, 혹자는 3김 시대의 종식을 공고화의 계기로 삼았다. 임혁백은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관련하여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한국 국민들은 노무현 후보를 16대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민주주의 공고화에 커다란 진전을 이룩하였다(2005: 337)”고평한 바 있다. 박정희 정부 이후 군부의 집권으로 이어졌던 전두환, 노태우 정권 이후 문민정부가 등장한 것은 정치권력의 주체적 측면에서 중요한 질적 변화를 가져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순히 정치권력의 주체가 변화하였다고 한국 민주주의가 공고화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의 퇴행적 요소가 사라졌는가? 정치권력의주체 변화가 어떠한 경로와 맥락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지, 정치사회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영향이 있었는지 여부가 면밀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인한 정치권력의 질적 교체나 ‘3김 시대’의 종식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합종연횡으로 출현한 문민정부나, 이미 YS-DJ 순으로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정치권력의 생물학적 수명이 다해 정치의 이면으로 물러나게 된 ‘3김 시대’의 마감을 민주주의 공고화의 계기로 삼는 것은 아래로부터 민주주의의 공고화 계기를 만들어 간 「5․18특별법」제정투쟁의 성과를 반영하기에 다소 부족해 보인다.
현실적으로 소극적 공고화 논의의 핵심은 공고화 단계의 구체적 지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다. 군터(Gunther), 다이아만드로스(Diamandouros), 풀(Puhle)은“정치적으로 중요한 반체제적 정당 또는 사회운동의 존재” 여부를 소극적 공고화 단계의주요한 지표로 지칭한 바 있다(Gunther․Diamandouros․Puhle, 1995: 12-23). 그러나 반체제적 정당이 존재하더라도 명목상 존재할 경우, 다시 말해 그 실제적 영향력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측정하지 않은 경우 이 반체제적 정당의 존재여부가 민주주의 공고화의 정확한 지표가 될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논의를 한국에 적용해보면, 사회운동은 어떤 강권적 통치기에도 존재했기 때문에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보면, 관건은 반체제적 정당이 언제 출현했고, 정치적으로 어떤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는가를 따져 봐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반체제적’ 정당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반체제적 정당이 존재하는 것으로 공고화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여부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소극적 차원에서 민주주의 공고화를 가늠하는 계기에 대한 불명료함은 비단 한국만의 딜레마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공고화 계기를 설명하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는 소극적 공고화의 계기와 관련하여 특정 정당이나 사회운동의 출현, 또는 헌정적 재디자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그리 만족스러운 답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필자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공고화 수순은 제도 영역의 변화를 독립변수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공감대 영역, 즉 시민사회 영역이 독립변수가 되고 이 독립변수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종속변수로써 제도영역을 검토하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로 보인다. 민주주의공고화의 현상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정당 유형이나 사회운동의 유무도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겠지만, 보다 명료한 공고화의 출발은 이행기를 거친 민주주의의 퇴행을 차단하는 민주헌정질서의 규범이 제대로 확립되었는지 여부가 될 것이다. 민주화 이행의 골자가권위주의적 통치구조로부터 민주적 절차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선거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에 있다면,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확립이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민주헌정적 규범에 의해 강력하게 엄호 받는가 여부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특히 「5․18특별법」의 제정 투쟁과 그 후속조치들에서 쟁점이 된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는가?’와 관련한 쟁점은 이러한 소극적 차원의 공고화 사례에 비추어 볼 때“정치적인 동기에 의한 폭력의 사용을 사전적으로 방지하고 있는 정도(Schedler, 2001:71)”에 가장 부합하는 쟁점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의 공고화 논의가 경험과 규범의 이중적 토대에 기초해야 한다는 쉐들러의 제안에도 가장 부합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Schedler, 1997: 2-4). 이하에서는 문민정부의 집권 초기를 소극적 공고화의 초입단계로 상정하고, 「5․18특별법」제정 단계를 소극적 공고화의 확립 단계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3. 민주화 이행 이후 위로부터의 소극적 공고화 단계
1) 문민정부 초기 소극적 공고화의 양상
민주화 1세대 정치를 상징하는 소위 3김 시대의 정치적 업적은 상당히 빠른 시간에 군부 권위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주도했다는 데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임기가 시작된 1993년부터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는 한국의 정치적 권리와시민적 자유 두 항목에 모두 2점을 줌으로써 한국을 자유민주주의로 분류하였다(임혁백,2005: 345). 그렇다고, 문민정부의 집권으로 한국은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곧 한국 민주주의에 권위주의로 퇴행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제거 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문민정부 초기의 개혁조치가 갖는 의미가 상당함에도불구하고, 권위주의로의 퇴행 위협이 사라진 소극적 공고화의 확립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문민정부 집권 초기에 단행된 일련의 개혁조치는 소극적 공고화의 초입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극적 공고화의 차원에서 가장눈에 띠는 조치는 박정희 정권기부터 의도적으로 육성되고, 1980년 신군부의 만행을 주도했던 ‘하나회’의 실질적 해체시도였다. 이 소극적 공고화의 첫 단계가 갖는 의미는“정치화된 군장교집단인 ‘하나회’의 숙청과 군부에 대한 엄격한 문민통제의 재확립”이라고할 수 있다(임혁백, 2005: 345). 그러나 ‘하나회’의 해체로 소극적 공고화를 향한 단초는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를 소극적 공고화의 확립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위로부터의’ 하나회 척결이 3당 야합을 통한 문민정부의 태생적 한계를 반영한 ‘정적제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측면1)이 있으며, 문민정부 차원에서 과거 군부의 반헌정적 행위에 대한 확고한 척결의지를 표명하고 제도화․규범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나회 숙청에 연이어 김영삼은 1994년 1월 국회를 통해 주요 정보기관 관련법 개정을 요구했다. 개정된 정보 관련법은 핵심 국가정보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와 국군보안사령부의 정치개입을 금지하고 본연의 정보수집 업무에만 충실하도록 하였고, 공직자, 정치인, 일반 시민에 대한 감시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문민정부 초기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통해 소극적 공고화를 위한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격적으로 단행된 군부와 국가안보기구의 개혁으로 김영삼 정부는 군부에 대한 문민지배를 다시 확립하였고, 한국 정치의 ‘유보된 영역’을 제거(임혁백, 2005: 347)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1) 소위 ‘3․8사태’로 불린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의 전격 교체와 4월 2일 단행된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인사는 ‘하나회’와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군복무시(9사단장, 9공수여단) 형성된 ‘9․9인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이상기, 1993: 34-37).
민주화 이행기라고 할 수 있는 노태우 정부 시절 형식적 민주주의의 확립과 입법부, 사법부의 역할 정립은 취약한 상황이었다. 특히 사법부는 여전히 군부-권위주의통치기의 정치 도구적 기능에 충실한 수준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여세를 몰아‘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회장 윤강옥)가 노태우 정부 집권 1년차인 1988년 10월 18일 전두환, 노태우 등 군 고위지휘관 9명을 상대로 한 고소2)에 대한 사법부의 응답은 당시 신군부의‘광주사태’ 규정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사법부의 판결 요지는 이렇다. 첫째, 1979년 12월 12일 자의 병력이동은 “수도권 일부 군 병력이 청와대 부근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후 제한된 규모의 예비 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한 것으로 동 사건은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 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1980년 5월 18일 전후의 소위 ‘광주사태’는 “시위 현장에서의 일부 군인과 학생들 간의 감정적인 충돌과 악성 유언비어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며,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일부러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시민을 살상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유남영, 1993:553-554).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서울지검은 고소한 지 4년만인 1992년 12월 26일 이 고소사건에 대해 전부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다. 이에 고소인들이 항고, 재항고를 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심지어 이 결정은 피고소인에 대한 소환조사 조차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2) 전두환(5·18 당시 보안 사령관) 노태우(수도 경비 사령관) 정호용(공수 특전 사령관) 박준병(제20사단장) 신우식(공수 특전단 제7여단장) 최웅(공수 특전 단 제11여단장) 최세창(공수 특전 단 제3여단장: 윤흥정 (전남북 계엄 분 소장) 소준열(전남북계엄 분 소장) 등 9명을 형법 제87조(내란죄), 제88조(내란 목적 살인), 제90조(내란 예비 음모, 선전 선동), 군형법 제5조(반란죄), 제30조 (군무 이탈), 제44조(항명), 제52조(상관에 대한 폭행 치사 상) 위반으로 고소하였다.
문민정부의 등장 이후 제도영역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요구가 활발해진 것은 분명 이전 전두환․노태우정부와 다른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1993년 6월에는 11만 5천 8백 87명이 서명한 ‘5·18 민중항쟁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에 관한 청원’이 국회에 접수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1993년 7월 19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비롯한 12․12쿠테타 피해자들이 신군부세력을 고소한 것을 비롯하여 삼청교육대사건, 해직공무원사건, 국제그룹해체사건 등 신군부세력의 집권과정에서 있었던 피해자들의 고소, 고발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피해자들만이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들도5․18항쟁의 진상조사와 가해자처벌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5․18진상규명과광주항쟁정신계승국민위원회’(이하 국민위원회)는 1994년 5월 13일 5․18민중항쟁 당시 진압책임을 들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하여 모두 35명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같은 날 광주항쟁 피해자, 부상자, 유가족 등 322명이 연대 서명한 고소장도 함께 접수되었다. 이 고소장은 “80년 5월의 시민학살은 12․12쿠테타를 일으킨 반란군들이 정권탈취를 위해 자행한 범죄”라며 “전 씨 등 피고발인들이 불법적으로 국회를 해산하는 등 국가기관을 전복하고 저항하는 시민을 총칼로 살상했으므로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고발에는 일반 시민들도 동참하여 ‘5․18’ 14돌을 맞이하여 망월동묘역과 금남로 일대에 설치된 고발운동창구에는 서명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고, 단일사건 사상 최대의 고발인 숫자를 기록했다. 1994년 4월 14일에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관련자 22명의 고발이 이어졌다. 전두환․노태우로 대표되는 신군부에 대한 고소․고발이 이어진 것은 가두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요구 시위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행에 따른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문민정부의 등장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위로부터의 개혁조치들이 비교적 성과를 이루었다면, 이와 비교해 볼 때 아래로 부터의 민주주의 요구에 대한 문민정부의 대응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문민정부는 권위주의 통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적 구조위에서 출범하는 내재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을 안고 출발한 문민정부가 아래로부터 개진되었던 민주주의의 공고화 기대에 부응하기는 어려웠다3). 이는 곧 주류를 이루고 있던 권위주의 세력과의 일대 격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자칫 통치의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93년 5월 13일 문민정부의 광주수습책을 담은 특별담화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명예를 높이 세우는 일”이라면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한겨레신문> 1993. 5. 14.일자3면). 소위 광주수습책의 관건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해 어느 수준에서 해법을 제시하는지 여부에 있었다. 특별담화에서 제시한 방향은 ‘역사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3) 3당 합당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배경에 바로 ‘5․18’이 자리한다. 1988년 6월 국회 차원의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활동이 시작되었고, ‘광주청문회’에서 신군부 세력들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기의식은 노태우 정권의 주도 아래 1990년 5월 민자당 창당으로 이어졌고, 발포책임자 규명 등 핵심 사항이 다시 묻히고 말았다. ‘3당 합당’ 직후인 8월 6일 「광주보상법」을 단독으로 처리한 것도 5․18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현실적인 정치구도에서 과거 권위주의 세력과의 정치적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자 민주화 이행 이후 제대로 된 민주주의 공고화를 향한 전진의 구체적 양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민정부의 특별담화는 5·18 가해자 세력이 여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정치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역사에 맡기자’는 문민정부의 애매한 태도는 1995년 후반기까지 이어진다.
2) 소극적 공고화 관점에서의 우려
1993년 문민정부 출범이후 1995년 12월 ‘5․18특별법’ 제정 이전 시기를 소극적 공고화의 관점에서 초기 단계로 구분하고자 하는 이유는 특히 사법부를 중심으로 한 법․제도적 영역의 민주주의적 기능이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법부는 1987년 민주헌정질서의 개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권력의 도구적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 집권 말기인 1992년에 사법부의 ‘혐의 없음’ 결정이 이루어진 바 있다. 문민정부 하에서 제기된 고소․고발에 대한 사법부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권세력의 정치적 입장이 사법부 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관련자들은 1994년 5월 13일부터 1995년 4월 3일 동안 피고소, 고발인 58명에 대하여 총 70건의 고소, 고발장을 접수하였다. 이에 대해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검찰부는 1995년 7월 18일 ‘국가기관에 의한 최종적이고 완벽한 진상규명’이었음을 강조하며,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이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위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변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법부의 행태는 민주주의 공고화단계의 민주헌정질서를 관장하는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입법영역의 실패를 사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정치의 사법화’ 경향이 현대 민주주의의 쟁점 중 하나라면(Ferejohn &Pasquino, 2003: 248), 당시 대한민국 사법부는 역으로 ‘사법의 정치화’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는 언제든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결정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행 이후 5년 만에 문민정부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수호하고 지켜야 할 사법부는 여전히 ‘총칼’을 ‘헌법제정권력’으로 인정하는 권위주의체제하의 정치화된 도구적 사법부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에 부합하는 사법부의 존립근거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이는 사법부 자체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한국의 형식적 민주주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민정부 하에서 검찰은 12․12에서 5․18 광주학살까지 신군부의 불법적 공권력 사용을 소위 ‘성공한 쿠테타’로 규정하고, 노골적으로 ‘정치적 변혁과정에서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를 창출하기에 이른 일련의 행위’로 규정하였다. 무너진 구헌정질서에 근거하여 새로운 정권과 헌법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행위들에 법적 효력을 다투거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사법심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례적으로 옐리네크(G. Jellinek), 켈젠(H. Kelsen), 라드브루흐(G. Radbruch) 등의 법철학을 원용하고, 형법학자들의 견해4) 역시 사법심사가 배제된다는 이론과 결론을 같이 한다는 사족까지 붙였다(「5․18수사발표문」, 240-243).
4) 검찰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형법학자들은, 내란죄는 법과 사실 간의 한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내란이 그 미수 단계를 떠나 완전히 그 목적을 달성한 때에는 이미 새로운 법질서가 확립되어 기존의 질서는 이론상 새로운 법질서에 의하여 보호받을 수 없다거나(劉基天, 「형법학각론정의 下」, 일조각, 225-226쪽), 또는 내란이 성공하여 기존의법질서를 파괴해 버리면 내란죄에 관한 형법 규정의 적용문제는 생겨나지 않으며, 내란죄의 규정은 폭동의 실패로 돌아가 체포되었을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이유로(黃山德, 「형법각론」, 방문사, 1988년, 15쪽, Welzel의 저작 인용)형법에 의하여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242).
특히 1987년 민주헌정체제를 위한 제도의 일환으로 설치된 헌법재판소의 애매한 태도역시 민주화 이행의 상징적 기구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헌재는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는 소극적 공고화의 핵심기구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다.
헌재는 공소시효의 기산점 산정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을 예고했다. 당시 보도된 대로 헌재의 결정이 선고되었다면, ‘12․12 군사반란죄’로만 전․노 씨에 대한 처벌이 진행될 판이었다. 특별법 제정이 가능하였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헌법소원의 취하로 가능했다. 그 전모는 이렇다. 헌재는 제8차 평의에서 검찰의 5․18 공소권 없음 결정이 부당하고,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결정을 위헌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5․17 공소시효를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시점(80년 8월 16일)으로 기산하고 대통령 재임 중에도 공소시효가 진행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도 되었다(<조선일보>, <동아일보>, 1995. 11. 28일자). 당시 5․18 내란죄의 범죄행위 종료시점에 대해서는 ① 최대통령 하야일(80년 8월16일) ② 전두환씨의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취임일(80년 9월 1일) ③ 비상계엄해제일(81년1월 24일) ④ 5공 출범일 즉 5공화국 헌법에 의해 전두환 씨가 대통령에 선출되어 취임한 날(81년 3월 3일) 등과 같이 4가지 견해가 있었다. 그런데 하필 헌법재판소는 1980년8월 16일을 선택하려고 했다. 이 ①의 시점을 택해야 할 불가피한 법률적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문제를 덮을 수 없을 만큼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범죄사실은 범죄사실대로 두되 공소시효 문제로 정치적 타협점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결정이 확정되었을 경우 현행법에 의한 5․18 수사 및 재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5․18 특별법’ 제정 이전까지 일련의 과정을 놓고 보건대 민주주의의 퇴행을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나 사회 규범력의 확립은 소극적 공고화의 수준에 미흡한 것이었다. 문민정부의 하의 검찰은 ‘성공한 쿠테타’로 인해 새로운 헌정질서가 생겨났기 때문에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역사적 평가에 맡기자는 대통령의 요구에 충실하게 응답한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그동안의 검찰답게 5․18이 한국민주주의에서 얼마나 큰 파동을 일으킬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박은정, 1995: 12).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을 통해, 문민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향한 여정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규모와 내용으로 아래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돌연사’를 막는 소극적 공고화의 계기가 아래로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4. 「5․18 특별법」제정 투쟁과 민주주의 공고화
1) 「5․18 특별법」제정 투쟁의 양상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관련하여 볼 때,「5․18 특별법」제정 투쟁은 아래로부터 확고한 공고화의 규범을 형성해가며, 소극적 공고화의 결정적 계기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촉발된 「5․18 특별법」제정 투쟁의 성격을 민주헌정질서 확립을 위한 민주주의 공고화 투쟁으로 규정해 보고자 한다. 1994년 5월 13일의 고소․고발에 대해 1995년 7월 7일 검찰 내부의 견해가 ‘공소권 없음’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보도5) 가 있자 광주․전남에서는 5월 단체, 학생, 광주전남 연합이 실무대책회의를 갖고 7월 14일 ‘5․18 공대위’를 구성6) 하고 5월 단체회원과 학생 등 800여명이 상경하여 청와대, 검찰청, 연희동 일대 항의방문을 전개하기 시작했다(5․18공대위, 1996: 7).
5) 이 사건을 수사해 온 서울지검은 이미 지난 6월초 잠정적으로 ‘무혐의’ 결론을 내리고 이를 대검찰청에 보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뇌부는 이 사건을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 결정 쪽으로 재검토를 지시했다. ‘공소권 없음’ 결정은 통상 피의자가 사망했거나 친고죄사건에서 고소인이 고소를 취소하는 등 검찰의 기소권한이 없는 경우에 혐의인정여부에 대한 판단 없이 내려지는 불기소 처분의 한 종류다. 검찰 수뇌부의 ‘공소권 없음’ 입장은 이 사건을 불기소 처분하는데 따른 정치적 부담과 여론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내란죄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무혐의’ 결론을 내릴 경우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오고 결국 현 정권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동아일보> 1995. 7. 7. 7면).
6) 공대위는 상임위원장 강신석, 공동위원장 김경천, 김병균, 명노근, 문병란, 법일, 이광우, 정웅태, 지도위원 김동원, 송희성, 안성례, 이명자, 이종수, 윤영규, 윤장현, 정동년, 홍광석, 집행위원장 정수만, 집행위원 강구영, 김성수, 김재언, 김현장, 박영순,서형진, 심인식, 윤광장, 이귀복, 이무헌, 이행기, 정태영, 실무간사 문희태, 박강배, 박영진, 허연식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연합광주지부 실무자들이 대거 결합하였다. 공대위가 공식적으로 결성되기 이전인 1994년부터 이미 조찬모임의 형태로 조직적 연계는 시작되고 있었다. <박강배 구술, 2015>
5․18에 대한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이 발표된 1995년 7월 18일을 기점으로 기소 촉구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 서명운동 등이 그야말로 범국민적 참여와 활동으로 나타났다.
참여의 양상은 1987년 4월 13일 호헌조치 때보다 격렬한 사회적 저항으로 폭발했다. 1995년7월 31일 고려대학교 교수 131명이 전국대학 최초로 ‘5․18수사결과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제목의 집단성명을 발표한 이래 서명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고대 교수들의 성명은 검찰의 결정이 “폭력과 살상을 수반한 초헌법적 집권 행위를 정당화”한 것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 헌법의 이념을 전복”한 것으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정권을 정당화함으로서 또 다른 정변의 길을 열어 주어, 검찰의 결정이 우리사회의 민주적 기초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 전반의 도덕적 질서를 파괴함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박은정, 1995: 22). 고려대에 이어, 경북대 96명, 한신대 27명,인하대 등 경기․인천지역 7개 대학 107명, 원광대 86명, 조선대 354명, 외국어대 106명, 전북대203명, 강원대 등 강원도 내 3개 대학 79명, 대구대 122명, 서울대 221명, 이화여대 102명, 상명여대 30명 등 교수들의 서명행렬이 계속되었다(박은정, 1995: 23). 서명운동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서울대, 고려대, 경북대, 전남대 등 전국 78개 대학 교수대표 80여명은 8월 24일오후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5·18내란 주동자 구속기소 및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전국서명교수 결의대회’를 갖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을 벌인 뒤 대표를 국회에 보내 전국78개 대학 3천 5백 60여명의 교수가 서명한 ‘광주민주화운동진상규명등에관한법률’(안)과‘헌법파괴적범죄등의공소시효에관한법률’(안)을 입법청원했다(<한겨레신문>(1995. 8. 25. 1면)
1995년 8월 30일 전남 22개 시․군 지역 198개교 407명의 초․중․고 현직 교사들이 전남교사선언을 한 것을 비롯하여 5․18 학살 주동자 처벌을 위한 교사들의 열기가 각 지방으로 이어졌다. 교사들은 5·18불기소 결정과 관련하여, 특히 미래의 주인공인 아이들의 인격 형성과 생활을 지도해야 할 교사로서의 당혹감을 표현하면서 교과서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수록할 것을 주장했다. 1995년 10월 7일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특별법 관련 서명 교수는 전국의 54개 대학 6,963명, 초․중․고교 교사는 1,378개교의 8,344명으로 집계되었다.7) 문민정부 집권 이후 주춤했던 대학가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7) 대학가를 비롯한 학교 현장에서도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박영식 교육부장관은 10월 7일 518관련자 기소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교수들의 서명 및 학생들의 동맹휴업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상황을 진화하기 위해 안간힘을썼다(<동아일보> 1995. 10. 8. 27면)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9월 26일 충남대에서 전국 120여개 대학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위원회를 열고 전국 2백 4개 대학에서 동맹휴업을 벌이기로 하고(<한겨레신문> 1995. 9. 27. 23면), 「5․18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10월 29일부터 30일 양일에 걸쳐 동맹휴업을 감행하는 한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을 위한 체포결사대’(5․18결사대)를 구성해 활동에 들어갔다. 9월 30일 ‘5․18국민위원회’가 주관한 서울지역 범국민대회가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것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동맹휴업을 결의한 대학생들과 국민들의 대규모항의시위가 열렸다(<한겨레신문> 1995. 10. 1. 19면).
대한변호사협회의 경우 소속 변호사 3,000명을 상대로 10월 4일 5·18 관련 범법자들의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영구 보존의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 모임 100여명의 변호사들은 10월 16일부터 ‘5․18 관련자 기소촉구대회’를 갖고 서초동 검찰청사 앞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변호사들이 시국사건으로 집단적 거리 시위를 벌인 것은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의사들도 10월 15일 부산경남 지역 323명이 성명을 낸데 이어 17일에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의사 2,376명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의사들의 서명운동은 4․1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시국 선언 이후 처음이었다. 그 때보다 20배 늘어난 의사들이 여기에 동참했다.
종교계의 움직임도 이례적으로 전국적 규모에서 동참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을 중심으로 전국의 사제, 수녀 5,500여명을 포함하는 10만 여명의 신도들이 서명에 참여해 국회에 특별법 입법청원서를 제출했다. 건국 이래 최초로 국내 개신교 최대 교단인 대한예수회장로회(통합)도 9월 21-26일 열린 제80회 총회에서 「5․18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진압은 선량한 국민에 대한 탄압이며 헌법의 기본정신인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 범죄행위로 간주한다”고 밝히고 산하 5천 5백 84개 교회, 교인 2백 10만 여명을 대상으로 10월 9일부터 서명운동에 나설 것을 밝혔다(<한겨레신문> 1995. 10. 7. 19면).
이렇듯 5·18 기소촉구 운동은 보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확산되었다. 언론계도 10월 12일 ‘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등 67개 언론사6,450명이 서명한 ‘학살자처벌요구 언론 선언’을 통해 “지난 15년 동안 언론이 5월 학살문제를 지면과 화면에서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한 사실을 국민 앞에 사과한다”고 밝혔다.
언론인들이 시국사건과 관련하여 이처럼 많은 성원들이 집단을 이루어 의견을 표명한 것 역시 건국 이래 처음이다(박은정, 1995: 27). 시민사회단체의 항의 시위도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9월 30일 제5차 ‘5․18특별법 제정 촉구 국민대회’에는 전국연합, 참여연대, 경실련, 여연 등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와 3만 여명의 국민들이 참여하였다. 60여개의 재야 및 시민단체가 참가한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국민위원회’는 20여만 명의 서명을 받아 특별입법을 국회에 청원했다. 또한 10월 26일 ‘5․18서명교수모임’, ‘민변’, ‘경실련’, ‘참여연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여성단체연합’ 등 학계, 재야, 시민단체, 법조계, 종교계를 망라한 전국 297개 시민사회단체가 사상 최대 규모로 연대하여 특별법 촉구를 위한 ‘5․18학살자 처벌법 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한 것은 우리나라 시민운동사의 한 획으로 기록될 정도다. 광주․전남의 5․18 관련 유족회와 부상자 가족들과 서총련 소속대학생 3백여 명은 7월 19일부터 명동성당에서 ‘5․18 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농성’을 시작했다(<한겨레신문> 1995. 7. 20. 1면). 이례적으로 지방의회의 참여도 활발했다. 광주에 이어 10월 11일 인천시의회, 17일 서울시의회가 ‘5․18광주학살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서울시 의원 100여명은 10월 17일 5․18 특별법 제정과 책임자기소 등을 촉구하며 이틀간 시한부 농성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민주헌정질서 확립을 위한 요구가 정치권력을 움직이게 된 기폭장치는 1995년 10월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씨의 비자금 4천억 은닉사실을 폭로하면서 점화되었다. 5·18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민주주의 공고화를 기대하던 국민들이 신군부의 주역 중 한 명인 노태우 씨의 부패사실에 직면하자 폭발한 것이다. 김영삼 정권이 더 이상 면죄부를 줄 수 없는 긴박한 정치적 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국민들은 전두환의 비자금까지 조사하라고 요구했고, 이들과의 합당을 통해 집권했던 김영삼으로서는 앞뒤 가릴 겨를 없이 86 쿠테타 세력과 단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마침내 11월 24일 청와대는「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고, 11월 30일 전격적으로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가 발족했다. ‘성공한 쿠테타’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검찰 발표 이후 꼭 4개월 만에 전격적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특별수사본부 설치 이틀 만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격 구속되었다. 검찰은 전․노 두 대통령과 관련자들을 내란혐의로 기소하고, 국회는 「5․18특별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한국사회는 「5․18 특별법 」제정 이후 린쯔와 스테판이 제시한소극적 공고화의 구체적 요건을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 민주적 게임의 규칙을 제도화하고, 책임 있는 민주적 규범과 가치를 규범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한층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2) 성공한 쿠테타 처벌과 소극적 공고화의 헌정적 확립
1995년 12월 21일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례법」과「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이 제정되었다. 이 두 법률을 통해 논란이되었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의 공소시효 문제가 해결되었다.
「5․18 특별법」제1조(목적)는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정지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정착시키며 민족정기를 함양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제2조에서는 공소시효에 관한 형사소송법상의 규정을 배척8)하고,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에 관하여 ‘특별재심’(제4조)을 규정함으로써 5․18의 새로운 전기가 법제도적으로 마련되었다.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제1조는 그 제정목적을 “헌법의 존립을 해하거나 헌정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헌정질서파괴범죄에 대한 공소시효의 배제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헌법상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9)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사법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민주 헌정적 규범을 확립한 것이며, 앞날의 불법적 무력 집권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결정적 안전판 확립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5․18 특별법」의 헌법적 불일치 문제에 대한 심리에서 합헌 결정을 함으로써 국민들의 민주주의 공고화 요구에 떠밀린 것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민주헌정질서의 제도적 보루로써 기능을 다하였다.
8) 「5․18 특별법」 제2조(공소시효의 정지) ①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에 대하여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 ② 제1항에서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이라 함은 당해 범죄행위의 종료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9) 이 법 제3조는 ‘헌정질서파괴범죄’와 ‘집단살해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다.
「5․18 특별법」제정으로 가능해진 가해자 처벌 재판이 당초의 기대보다 미흡한 수준에서 종결된 측면10)이 없지 않지만, 민주주의의 소극적 공고화의 안전판 확보 차원에서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첫째, 폭력적 강권에 기반한 헌정유린행위를 처벌함에 있어 국민적 정당성 원리를 법리적으로 적용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둘째, 민주법치국가의 핵심원리에 근거한 법익을 확증하였다는 점 또한 중요한 성과였다.
10) 논자들에 따라 다수의 내용이 지적될 수 있겠지만, 크게 보아 첫째, 저항권의 명문화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항소심과 달리 ‘헌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만 규정했다(선고 96도3376). 둘째, 진상규명이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5․18 재판에 대한 한계에 대해서는 (정웅태, 2001:526; 박원순, 2001; 이영재, 2004: 257-259; 한인섭,1997; 2002) 참조.
헌법제정 권력으로서의 국민의 중요성과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의 우월성을 재판부 판시를 통하여 확증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원리는 민주법치국가의 핵심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셋째, 재판부가 성공한 쿠테타라는 검찰의 견해를 용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새로운 헌법원리의 승인여부는 검찰의 몫이 아니라 국민주권에 있다고 판시했다. 특히 대법원이 제시한 최종판결의 요지는 앞으로 유사한 무력적 정권탈취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근거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으로 민주법치국가의 원리를 대법원의 판결로 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 민주화의 법제도적 안전판 확립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우리나라의 헌법질서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따라서 그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선고 96도3376. 판시1의 다수의견).
끝으로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공소권 없음’을 강변했던 사법부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새로운 논거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반전의의미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이는 위로부터의 법제도적 결정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민주헌정적 규범 확립이라는 ‘타당성’ 요청에 대한 정치권력과 사법부의 불가항력적 승인이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94년부터 「5․18특별법」 제정을 향한 시민사회 및 학계의 범국민적 사회운동은 사상 초유의 광범위한 연대를 만들어냈고, 전국민적 참여로 이루어졌다. 이 아래로부터의 정당성 요청은 종국에 사법부가 사정변경 논리를 제시하며 다시금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도록 강제한 동력이고, 검찰이 동일사건의 재수사에 착수하는 웃지못할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 실질적 동력이었다.
이 일련의 범국민적 사회운동이 집권세력이 주저했던 두 전직 대통령의 사법처벌을 이끌어냈으며, 이 표면적 성과 외에 민주헌정질서의 법제도적 확증과 사회적 규범화를 이루어 냈다. 민주헌정질서에 대한 규범이 사법부의 판결문을 통해 활자화되기에 이르렀고,‘쿠테타’는 성공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헌정질서에서는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처벌 대상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5․18’은 명실상부한 민주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헌법제정 권력의 공고화투쟁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었다(이영재, 2004: 256. 참조).
헌법재판소가 특별법 제정에 대한 합헌 결정을 하면서 활용한 ‘법익’의 해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헌재는 특별법이 개별사건법률이라고 하더라도 입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중대한 공익이 인정될 수 있다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 중대한 공익의 근거는 ‘왜곡된 한국 반세기 헌정사의 흐름을 바로잡아야 하는 시대적 당위성과 아울러 집권과정에서의 헌정질서파괴범죄를 범한 자들을 응징하여 정의를 회복하여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집권과정에서의 헌정질서파괴 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상황이든 응징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헌정적 규범은 2번의 군부 쿠테타를 경험한 한국 현대사에 결정적인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공소시효의 완성으로 인한 이익은 단순한 법률적 차원의 이익이고,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적 보장에 속하지 않는 반면, 집권과정에서 헌정질서파괴범죄를 범한 자들을 응징하여 정의를 회복하여 왜곡된 우리 헌정사의 흐름을 바로잡아야 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우리 헌정사에 다시는 그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을 위한 헌정사적 이정표를 마련하여야 할 공익적 필요는 매우 중대”하다(한인섭, 2002: 201-203)고 판시하였다. 이는 곧 오도넬이 말한 신생민주주의의 ‘돌연사’를 방지하기 위한 최고 수준의 법적 판시라고 할 수 있다.
5. 맺으며
그동안 「5․18특별법」제정 투쟁과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사법적 심판이 있었던 1995년부터 1997년 사이 연구 성과는 활발하게 제출되었던 반면, 그 이후「5․18특별법」이 한국 민주주의사에서 갖는 의미가 다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본 발표문은 민주주의 공고화 논의 가운데 민주주의의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차단하는 계기에 주목한 ‘소극적’ 공고화 논의를 바탕으로 「5․18특별법」제정 투쟁과법률적 의의, 「5․18특별법」제정으로 가능해진 신군부 주역들에 대한 재판의 주요 내용을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 계기로써 검토하였다. 앞선 논의를 중심으로 「5․18특별법」제정이89 갖는 의의를 민주헌정적 규범질서 확립의 차원에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5․18특별법」제정 투쟁은 민주화 이행기라는 과도기 상황에서 아래로부터 전국민적 요구를 모아 보수대연합의 정치구조로 출발한 문민정부를 강제하여 민주주의의공고화를 법제도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다. 문민정부의 초기의 개혁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권세력의 중심축은 군부-권위주의 세력에 있었다. 아래로부터의 광범위한「5․18특별법」제정 투쟁을 통해 특별법 제정 이후 민자당은 당명조차 ‘신한국당’으로 변경해야 했으며,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균열을 일으켰다. 만일 아래로부터의 전국민적 요구가 없었다면, 협약적 민주화 이행 이후 3당 합당을 통한 보수대연합의 구축은 상당기간 민주주의 공고화의 과제를 지연시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따라서「5․18특별법」제정 투쟁은 생물학적 정치생명의 종결인 ‘3김 시대’의 청산과 달리적극적 차원에서 한국 민주주의 공고화에 개입했고, 그 결과 정치권력의 재편을 강제하고, 민주주의의 퇴행을 차단하는 공고화의 계기를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시민사회 영역의 광범위한 참여를 통해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차단하는 민주헌정적규범질서를 사회적으로 확립했다는 점이다. 1995년 7월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 이후 이에 항의하는 시민사회 진영의 흐름은 건국 이후 가장 광범위한 참여 양상을 보였다. 광주의 5월단체를 비롯해 대학교수, 초중고 교사, 대학생, 변호사, 의사, 종교인, 언론인, 각종 시민단체 등의 참여가 대규모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불법적 정치권력 찬탈을 심판해야 하는 민주헌정적 정당성이 규범적으로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회적 학습효과는 법제도적 청산과 더불어 민주헌정질서를 한국 사회에 내면화하고, 규범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셋째, 「5․18특별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의 제정으로 각각 12․12와 5․18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를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 규정의 민주헌정적 의미는 비단 12․12와 5․18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향후헌정질서파괴 범죄행위의 경우 국가의 소추권 행사에 장애가 발생한 기간 동안 공소시효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미래 민주헌정질서의 규범 확립에 법제도적 안전판을 마련하였다.
넷째. 「5․18특별법」제6조는 ‘광주보상법에 의한 보상은 배상으로 본다’고 규정함으로써 특별법 제정 이전까지 5․18을 대하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1980년 6월의‘위로금’ 지급이 ‘폭도에 대한 위로금 지급’이라는 국가의 모순적 자기정당화 단계였다면, 1987년 ‘민주화합추진위원회’ 설치를 통한 ‘화합’의 추구는 가해자인 신군부의 강제 화해조치단계였다. 또한 1990년 「광주보상법」의 제정은 그동안 국가가 호명했던 ‘광주사태’가아니라 ‘광주지역 학생시민들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 실체를 재규정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는 시혜적 성격의 것이었다. 「5․18특별법」제정을 통하여 비로소 국가의 헌정파괴 행위를 전제로 한 ‘배상’으로 규정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규정을 통해 내란 및 내란목적의 살인죄의 피의자가 제도적 과거청산의 영역에서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째, 「5․18특별법」제정을 통해 논란이 되던 공소시효 문제를 해결하고, 신군부의 주요관련자들을 사법적으로 심판할 수 있었다. 특히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비록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했다 할지라도 우리나라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못 박았다. 이는 민주주의의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차단하는 민주주의 공고화의안전판을 사법적으로 확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보았을 때, 「5․18특별법」의 제정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 이행에서민주주의의 공고화를 가져오는 소극적 공고화의 확립이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으며, 한국사회에 민주헌정질서의 규범을 아래로부터 확립한 역사적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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