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시행 1995.12.21. 1995.12.21. 제정)」
☜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 규정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시행 1995.12.21. 1995.12.21. 제정)」
☜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 규정
● 김대중 대통령(재임기간: 1998.2.25.~2003.2.24.)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2002.1.26. 제정)」
☞ 2004.1.20.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로 명칭 변경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 노무현 대통령 시절(재임기간: 2003.2.25.~2008.2.24.)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시행 2006.1.30. 2005.7.29. 제정)」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시행 2006.2.16. 2006.2.16. 제정)」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시행 2006.2.20. 2006.2.20. 제정)」
5월 문제의 해결과 가해자의 사법적 처리
2015.12.3. 정호기 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위원
Ⅰ. 머리말
1995년에는 한국 사회 전반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일들이 빈발했다. 특히 그해 하반기에는 오늘날에도 자주 회자되는 사건과 사고 그리고 의미심장한 행위들이 연이어 일어났다.1)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해 세간에서는 숱한 구설과 우려가 표명되었고, 대립과 갈등이 벌어지곤 했다. 그 가운데서도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건을 선별해야 한다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안은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5·18특별법, 법률 제5029호) 제정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례들은 특정한 시점에 국한되어 여론의 주목을 받았거나, 특정한 장소나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특성을 보여주었으나, 5·18특별법제정은 운동의 촉발, 확산, 종결 과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법률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도술한 사건들을 야기했다는 점에서 격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5·18특별법제정은 여하한 사건들과 여러 측면들에서 다른 성격을 띠었고, 다양한 사건과 활동의 종합적 구성체라고 규정해도 그르지 않다. 또한 5·18특별법은 한국 사법사에서 ‘헌정질서파괴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정·적용되었던 유일한 법률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지녔다(이재승, 2010: 43). 이런 이유들로 유수의 세계 언론은 5·18특별법에 관한 소식을 전송했으며,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과거사에 관한 제 문제를 순리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진상규명을 선행하고, 이를 근거로 가해자의 처리를 비롯해 명예회복과 피해의 치유 등에 필요한 다양한 조치들을 이행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국의 통치구조는 이러한 절차의 순행을 왜곡시켰고, 변형적 이행의 수용을 강제했다. 5·18민중항쟁(이하 5·18)의 가해자 처리가 5월 문제에서 마지막까지 미해결의 상태로 남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5·18특별법 제정은 1980년 5월 27일 이후부터 한국 사회에 제시되었던 과제, 즉 ‘가해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이었다. 이 과제는 1979년 말에서 1980년 전반기의 국정 혼란기를 틈타 군사반정을 일으켰던 이들이1990년대 초반까지 국가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혁명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한국 사회의 통치성은 1980~1990년대의 사회운동에서 가해자 처리를 가장 민감하고 높은 수준의 의제로 부각시켰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세계로 시야를 넓혀 살펴보아도 과거사 청산이 순리적으로 이루어진 사례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전쟁범죄를 규명하면서 전범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반인도주의적행위를 처벌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일 국가 내에서 발생한 권력 찬탈과 관련하여가해자를 처벌했던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Hayner, 2008: 44~45). 과거사청산이 가능한 조건과 환경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가해자의 처리는 진실의 추구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Rigby, 2007: 208),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복잡하고 다양한 절차의 수반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과정과 절차는 현실의 권력관계를 매개로 작동했던 바, 정치·사회적 지향과 이념 그리고 지배 담론 등과의 길항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5·18특별법은 다양한 문제의식과 주제로 폭넓은 접근이 가능한 연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존 연구들은 한동안 특별법의 구성과 내용에 집중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특히 1996년에 발표되었던 대부분의 연구들은 법률의 내용과 쟁점 그리고 한계를 중심으로 고찰되었다(곽노현, 1996; 김성천, 1996; 노기호, 1996; 오호택, 1996; 한상범 외, 1997). 이는 특별법 제정 과정에 참여했던 법학자들과 특별법의 가치와 성격을 중시했던 법학계가 먼저 관심을 표명했던 것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5·18특별법에 관한 연구가 이와 다른 시각에서 조명되었던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었다. 첫째, 법률적인 주제와 관점 내에서 시각을 다양화 한 것이었다. 특별법제정 과정에 관한 연구(김재균, 2000), 특별법에 의한 재판과 의의 분석(한인섭, 2002, 최재천, 2004), 특별법 제정에 관한 언론의 보도 형태와 담론 분석(박선희, 2002), 특별법에 관한 사법적 판단 분석(양선숙, 2010; 민병로, 2014)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 5·18특별법을 5월운동과 과거사 청산운동 등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고찰한 것이었다(박원순, 2001; 정웅태, 2001; 이영재, 2004; 김영택, 2010; 나간채, 2012). 사회운동의 관점은 5·18특별법의 제정 과정에서 전개되었던 집합행동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연구들은 그간에 주목하지 못했던 특별법의 제정 과정에 시선을 두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에 관한 측면은 간략하게 다루어지고, 가해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의 전사나 배경과 같이 언급되는 측면이 있다. 이와 같이 기존 연구들은 5·18특별법의 내용을 두고 국회와 법조계가 열띤 공방을 벌이던 국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법률 조문과 적용의 범위에 관한 쟁점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특별법 제정운동 그 자체가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온전하게 고찰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5·18특별법의 제정 과정을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고찰할 것이다.
한국에서 사회운동론의 연구들은 사회사적 관점, 부분운동의 동학 규명, 그리고 사회운동의 일반적 성향과 변화 고찰 등으로 분류된다(조대협, 1999: 39). 이 글은 사회운동사적 관점을 바탕으로 운동의 전개 구조와 조직 그리고 전략을 중심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즉 이 글은5·18특별법을 사회운동의 산물로 대상화하고, 특별법 제정을 둘러싸고 형성되었던 정치·사회적 구조와 쟁점 그리고 운동의 주체와 방법을 주목해서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 기존 연구들에서 밝히지 못한 운동의 부침과 전환 그리고 내외적 차이와 균열을 드러내고자한다.
Ⅱ. 연구 대상의 범주화와 자료의 특성
특별법 제정운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대상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연구 대상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이 글이 포괄해야 할 영역과 내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먼저 해결할 문제는 특별법 제정운동이 전개되었던 시기를 설정하는 것이고, 여러 국면들을 특화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문제의식은 특별법 제정운동의 발단과 종결을 규정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5월운동의 주요 변곡점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세 가지 맥락을 포착할 수 있다.
장기적 맥락에서 보면, 1980년 5월 27일 이후 전개되었던 5월운동 전반이 특별법제정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사 청산운동에서 가해자의 처리에 관한 욕구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주장은 ‘책임자 처벌’이었다.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1980년 6월에 배포되었던 다양한 종류의 유인물들에서도 확인되는데(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 1997), 집합행동에서 공공연하게 등장했던 것은 1981년 5·18 제1주기에 즈음하여 전개되었던 집회와 시위였다. 5월운동의 가장 주요한 담론은 진상규명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해자 처리에 관한 주장도 중요시되었고, 그것의 구체적 실천이 특별법 제정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각은 5월운동을 특별법 제정운동과 동일시하는 결과론적 설명으로 평가될 개연성이 다분하고, 5월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다양한 쟁점과 흐름을 협소화하기 쉽다. 또한 특별법 제정운동의 구체성과 내밀성을 파악하는 것이 곤란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난점은 중기적 맥락에서 특별법 제정운동을 파악하게 되면, 어느 정도 해소가 가능하다. 중기적 맥락이라 함은 1993년 5월에 사법부를 대상으로 고소·고발운동을 전개했던 시기부터 특별법을 적용하여 사법적 단죄가 마무리되고, 사면과 복권 그리고 피해자들의 재심이 이루어졌던 시기까지를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에는 특별법 제정운동으로 규정하여 설명하기 어려운 시기와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특별법제정운동을 사법부에 가해자들을 고소·고발하던 시점을 출발점으로 하지만, 운동이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1995년 7월부터 1996년 1월까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 기간이 특별법제정운동에 관한 집합행동이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던 시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고려할 점은 연구의 주요 개념들이다. 이 글의 주요 개념들 가운데 하나는 5월 문제’이다. 이 개념은 한동안 ‘광주문제’로 명명되었고(정근식, 2001: 677), 근래에는5·18문제’로 명명되기도 했다(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 2014: 151). 전자의 명칭은사건의 성격을 지역으로 축소하는 측면이 있고, 후자는 사건의 내용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 글에서는 최정기의 연구(2006)에서 제시한 개념에 따라 5월 문제로 정의했다. 5월 문제의 핵심은 1993년 2월 13일에 정립되었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배상, 명예회복, 기념사업으로 구성된 5원칙이다((재)5·18기념재단, 2015: 391).
다음으로 살펴볼 점은 ‘특별법 제정운동’의 포괄성이다. 특별법 제정운동은 이 글의 연구 대상인데, 이 운동은 출발부터 특별법 제정을 주요한 의제로 제시했던 것은 아니다.
특별법 제정은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새로운 목표와 주장으로 부상했다고 파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럼에도 연구 대상을 특별법 제정으로 규정하는 것은 운동을 둘러싼 정치적 기회구조와 쟁점 그리고 주제와 방법의 변화와 특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운동의 동력과 자원동원 그리고 지속성이 특별법 제정을 매개로 형성되었음을 고려한 측면도 크다.
이 글에서 주로 활용한 자료는 문자와 구술 자료이다. 문자 자료는 운동의 과정에서 생산되었던 문서와 유인물, 자료집, 그리고 신문 기사 등이다. 그러나 제정운동이 전개된 이래 20여 년이 지나면서 문자 자료는 성명서, 기자회견문, 회의록 등과 같은 공식 기록의 일부만 확인이 가능하다. 특별법 제정운동은 컴퓨터를 활용하여 각종 회의 자료와 유인물 등이 제작되었는데, 이것 모두가 역사 자료라는 인식이 형성되지 않아서 적절하게수집·관리되지 않았다. 참여자들은 농성장 등에서도 다수의 기록물이 생산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망실되었거나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자료로 활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의 상황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5·18공대위 창립 1주년 기념 자료집」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광주·전남지역 외부에서 전개되었던 활동에 관한 내용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한편 여러 신문들에서 이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수록했는데, 운동의 전개국면에 따라 기사 수록 여부와 분량 등은 차이를 보였다.
그리하여 문자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안들과 공식화되지 않은 기억들을 복원하기 위해 2015년 9~10월에 구술조사를 실시했다. 구술조사의 대상자는 특별법 제정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들이 사전에 모임을 갖고 선별하는 과정을 거쳐 선정되었다.2) 이 글과 관련한 구술 대상자의 모집단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부류는 서울에서 전개되었던 농성에 참여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한 구술대상자 선정은 비교적 용이했고, 양적으로 다수였다. 또 한 부류는 특별법 제정을 목표로 결성되었던 연대 단체의 실무자 집단이다. 그런데 이들은 구술조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거나, 연락이 두절된 사람이 상당수였다. 특히 광주·전남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연대 단체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사망했거나 질병을 앓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이들에 대한 구술조사 사례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구술조사는 이 글에서 규정한 시간적 범위를 고려하여 단기적 국면에 국한해서 진행되었다.
Ⅲ. 특별법 제정운동의 구조와 의제의 전환
1. 거리의 정치에서 제도의 정치로: 고소ㆍ고발운동
전라남도 목포시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5월 28일까지 집회와 시위를 전개하고 있었지만, 언론은 계엄당국의 지침을 받아 5ㆍ18유혈사태는 10일 만인 27일 새벽 계엄군 투입이 개시되어 오전 6시경 도청을 비롯한 주요건물과 전시가지를 완전 장악함으로써 끝났다”고 보도했다.3) 이때부터 5월 운동은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사회구성원이 신군부와 통제된 방송언론의 보도 내용이 아닌 진상을 직시해줄 것을 목숨으로 호소하거나, 감시와 처벌을 감내하고 유인물 등을 제작ㆍ배포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희생자와 유가족 그리고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연행ㆍ구속자의 구명운동과 더불어 사법부의 제반 조치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5월운동이 5ㆍ18의 진상규명 요구에서 가해 혹은 책임의 문제로 쟁점을 확장하기까지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진상규명에는 가해와 책임의 주체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가해자 처벌이 주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이는 신군부 집권의 정통성과 정당성 그리고 적법성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5월 운동에서 가장 핵심이 되었던 의제였던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리’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양보할 수 없는 대척점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피해자들이 양산되었다. 특히 오랜 권위주의 시대동안 억압되었던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사회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가해자 처리는 이행기 정의(transitionaljustice)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과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가해자 처리는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사회운동의 구호와 주장에 머무를 수도 있다는 인식이 보다 일반적이었다. 가해자 처리를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가가 구체화되지 못했던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인식이 자리했다. 시민과 학생의 손으로 가해자를 직접 단죄하기 위한 활동이 실천되기도 했지만, 이것이 실현 가능하리라는 확신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가해자가 권력을 장악한 통치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었고, 설사 이 체제를 인정한다고 해도 법과 제도에 의해 가해자 처리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문민정부의 출범은 이러한 시민사회의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문민정부가 비록가해자 세력과 연대하여 권력을 획득했지만, 군부 권위주의 시대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던 것이다.
시민사회는 문민정부가 표방했던 ‘역사바로세우기’에 의해 5월 문제의 보다 근본적인해결 방안이 제시될 것으로 예견되었다. 그것의 최대치는 가해자 처리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거나 실현 가능성이 확대되는 것이었다. 1993년 5월 13일의 대통령 특별담화는 이에 관한 인식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늠자였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특별담화는 가해자처리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또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뒷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이며 진실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것이나의 확신”4)이라고 선을 그었다. 5월 문제 해결에 관한 근본쟁점을 회피했던 바탕에는 문민정부가 당시로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정치적 세력관계와 현실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담화는 13주기 5ㆍ18 기념행사위원회가 5월 12일에 요구했던 것에 대한 부정적인응답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5) 5ㆍ18 관련단체들과 시민사회는 13주기 행사들에서 특별담화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리하여 5월 18일을 전후하여 열린 행사들에서는 특별담화를 성토하는 목소리로 충만했다. 당일 오전에 열린 추모제와 기념식에서 유족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5ㆍ18민중항쟁연합은 결의문을 통해, 그리고 오후에 열린5ㆍ18민중항쟁 13돌 기념식 및 정신계승 범국민대회’에서는 연사들의 발언을 통해 한결같이‘진상규명’과 ‘특별검사제’도입을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특별법 제정이 촉구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서울을 비롯해 전국 9개 도시들과 84개의 대학들에서 개최되었던 기념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6) 대학생들은 1987년과 1988년에 다반사로 전개했던 운동 방법을 부활시켜 가해자를 직접 체포하여 사법부에 인계하겠다고 나섰다.7)
문민정부에서도 가해자 처리는 성취되기 어려운 과제로 보였다. 특별담화 이후 기념사업이 본격화되고, 사상자에 대한 2차 보상이 실시되면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리의 쟁점이 희석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런데 사그라지던 이 의제는 1994년 5월 행사 기간이 임박하면서 다시 쟁점화 되었다. 운동 방법도 기존과 형태가 달랐다. 그동안 불신의 관점에서만 보았던 사법부가 집합행동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유사한 활동은 1988년 10월에도 시도된 바 있었지만,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검찰은 오랫동안 사건을 처리하지 않았다.8) 이에 비해 1994년 5월에 전개된 ‘고소ㆍ고발운동’은 법률적 검토 등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준비되었고, 대규모 집단성에 기반을 두고 추진되었다.
<표 1>이 보여주듯이, 이 운동이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던 시점은 5월 13일과 17일 그리고 10월 19일이었다. 고소ㆍ고발운동은 특별담화가 발표된 지 정확히 1년이 되던 날에 이루어졌다. 이날 5ㆍ18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이었던 정동년을 비롯해 피해자 320명이고소장을, 5ㆍ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국민위원회(이하 국민위원회) 상임대표 김상근과 국민위원 전원의 이름으로 서울지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고소ㆍ고발의대상은 진압에 동원되었던 계엄군의 대대장급 이상 35명이었고, 죄명은 ‘내란, 내란목적살인 등’이었다. 이후 국민위원회는 ‘국민고발운동’을 전개했는데, 그해 7월까지 참가자가 31,000여 명에 이르렀다. 5월행사 기간에 점화되었던 이 운동은 약화되지 않고, 하반기까지 계속되었다. 하반기에는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인천, 대전, 전주, 청주, 수원 등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지부들이 각 지방검찰청에 전두환ㆍ노태우를 비롯해 5ㆍ18을 진압했던 주요 책임자 35명을 처벌해달라는 고발장을 일제히 접수했다.9)
검찰은 1994년 11월 23일 정동년을 고소인으로 조사하면서 고소ㆍ고발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했다. 국민위원회는 11월 30일 진술계획서를 제출했으며,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검찰에 각종 자료를 제출하여 조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협조했다. 5ㆍ18 관련 단체들과 시민사회는 검찰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2. 목표의 전환과 달성: 불기소 결정과 5ㆍ18특별법 제정운동
검찰은 1995년 7월 18일에 1년여에 걸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발표한 것은 8월 15일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검찰은 최규하 대통령이 신군부의 압력으로 하야했던 1980년 8월 16일을 공소시효 기산점으로 파악하고, 8월 15일을 15년의 공소시효 완료일로 산정했다. 이는 시민사회가 추산했던 공소시효 완료일과도 얼추 비슷했다. 검찰은 이러한 계산법에 의거하여 고소ㆍ고발인들의 항고, 재항고, 헌법소원 등의 법률적 구제절차가 진행될 일정을 감안하고 있었다.10) 흥미롭게도 이날은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정계복귀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날이었다.11) 우연의 일치라고도 볼 수도 있을 터이지만, 이날은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 명백했다.
시민사회의 불신은 검찰의 발표 일이 임박할수록 점점 더 깊어졌다. 검찰이 1994년 10월 29일에 5ㆍ18민중항쟁과 직접 연관된 12ㆍ12사건 관련자들의 고소ㆍ고발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과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던 것이 주요했다.12) 헌법재판소도 1994년 12월 11일로 공소시효가 완료되었다고 하면서 1995년 1월 20일에 위헌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각하 결정을 내렸다.13) 시민사회는 이러한 사법당국의 판결이 5ㆍ18의 고소ㆍ고발운동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광주의 일부 시민단체 인사들과 5ㆍ18 관련 단체대표들은 비정규적으로 모임을 갖고 숙의에 들어갔다. 이 모임은 7월에 들어서는 빈번한 조찬모임으로 전환되었다. 7월 7~14일에는 5ㆍ18 관련 단체와 학생단체 그리고 민주주의민족통일 광주ㆍ전남연합(이하 광주ㆍ전남연합)이 실무대책회의를 계속했다. 이러한 모임들을 바탕으로 7월 14일 5ㆍ18학살자 기소관철을 위한 광주ㆍ전남공동대책위원회’(이하5ㆍ18공대위)가 구성되었다.14) 당일 관련 단체와 학생 등 800여 명은 상경하여 일부는 검찰청으로, 일부는 전두환이 거주하던 연희동에 인접한 연세대로 이동했다. 검찰청으로 향한 팀들은 거리시위를 벌였고, 연세대로 들어간 팀들은 연희동으로 이동을 시도하다 경찰과 충돌했다.15) 이처럼 특별법 제정운동은 광주ㆍ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준비되고,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완만하게 전개되었던 특별법 제정운동은 검찰의 발표를 계기로 급진전ㆍ급반전했다. 전국에서 ‘검찰의 발표 규탄과 학살자 기소’를 촉구하는 성명과 기자회견이 쇄도했다.
7월 19일에는 서울지방검찰청에서 농성하기 위해 40여 명이 광주에서 상경했다. 이들은 계획했던 장소에 접근이 불가능하자 명동성당으로 이동하여 임시방편으로 농성장을 만들고, 농성을 시작했다.16)
전국에서 무수히 많은 집회와 시위가 열렸는데,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서울의 도심공원들에서 열린 국민대회였다. <표 2>와 같이 첫 집회는 7월 22일 국민위원회의 주체로 종묘공원에서 열렸다. 이와 유사한 성격의 집회는 3차까지 계속되었다. 2~3차에는 5ㆍ18공대위가 공동 주관 단체로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2차 국민대회였다. 명동성당 농성단이 이 집회에서 대규모 삭발을 단행했던 것인데, 여기에는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행위는 방송과 언론의 시선을 끌었고, 참가자들에게도 특별한 이벤트로 기억되고 있다.17)
특별법 제정이 집회의 명칭에 명시된 것은 4차 국민대회부터였다. 이전의 집회에서는 가해자의 기속촉구가 주요 의제였고, 특별검사제와 특별법 제정은 부수 의제였다. 집회의 대표 의제가 달라졌던 것은 시민사회가 현재의 사법체계로는 가해자의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운동의 목표가 특별법 제정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은 8월 3일부터였다. 이날부터 5ㆍ18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이시작되었고, 창당 중이던 새정치국민회의18)도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3차와 4차 국민대회가 한 달의 간격을 두고 개최되었던 것은 국민위원회라는 단체의 성격, 방학, 국회 개원(9. 1.) 등으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할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다.
그리고 2차에서 4차 국민대회 시기까지는 시국선언, 성명 발표, 결의문 채택, 서명운동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다양한 수준의 집회와 시위 그리고 항의 방문 등이 병행되었다. 특별법 제정운동의 파고가 거세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의 입장은 불변했다.
9월 22일 국민회의와 민주당은 특별법 단일안을 만들었고, 자민련도 야권 공조하기로 했지만,19) 민주자유당 김윤환 대표위원은 9월 25일에 특별법 제정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재천명했다.20) 김대중 총재는 10월 5일 5ㆍ18진상규명이 꼭 필요하되 처벌은 바라지 않는다는 일관된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시민사회와 입장의 차이를 드러냈다.21)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노태우 비자금 4천억 원’을 폭로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6공화국 비리척결이 의제로 추가되면서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을 압박했다. 특별법 제정운동은 대통령 선거운동 자금 공개 요구와 연계되었고, 노태우는 11월 16일 구속되었다.22) 이러한 것들이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작용했고, 특별법 제정을 중심의제로 한 국민대회는 8차 국민대회까지만 유지되었다.
3. 특별법 제정과 의제의 소멸: 특별법 제정 선언 이후
사회운동의 자원과 의제는 특별법 제정이 가시화되면서 재설정되어야 했다. 이러한 변화의 계기는 두 번에 걸쳐 다가왔다. 첫 번째는 1995년 11월 24일 대통령이 민주자유당사무총장으로 하여금 특별법 제정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약속을 했으므로, 특별법 제정은 기정사실이 되었지만, 시민사회는 이를 운동 목표의 달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통령이 특별검사제는 도입하지 않을 것이며, 특별법 제정이 5ㆍ6공화국에 참여한 인사들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23) 특별법이 제정되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법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 문제로 정리되었는데, 그동안 제기되었던 법률적인 절차가 해소되어야 했고, 정당별로 제각각 제출되었던 특별법 법안들의 차이가 조율되어야 했다.
법률적인 문제는 헌법재판소가 11월 30일에 5ㆍ18 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과 관련하여 최종결정을 내리기로 한 것이었다. 정치권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특별법제정의 폭을 제한할 것이며, 결정 내용에 따라 혼선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민주자유당은 11월 29일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관련하여 5ㆍ18 관련단체를 비롯해 5ㆍ18공대위 그리고 변호사회 등과 의견을 교환하고 대책을 강구했다.24) 그런데 이날 오후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헌법소원을 냈던 4개 집단 388명이 이를 취하하고, 사건 당사자인 검찰이 이에 동의한 것이다.25) 이는 헌법재판소가결정행위를 할 수 있는 원인 요인이 소멸하는 것을 의미했다.
법률적인 문제가 해소되자 정치권은 특별법에 포함할 내용을 두고 협상과 공방을 벌였다. 정치권은 1996년 4월에 실시될 15대 총선거와 연계하여 특별법 제정이 미치는 효과를 전유하는데 촉각을 세웠고, 특별법 제정운동은 복잡한 셈법이 펼쳐지는 장이 되어갔다.
이러한 대립은 주로 민주자유당과 새정치국민회의 사이에 형성되었다. 민주자유당은 김대중 총재가 5ㆍ18의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던 발언, 특별법 제정 발표 직후 ‘사법처리는 하되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다고 했던 발언, 그리고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던 점 등을 부각시켰다.26) 새정치국민회의는 김영삼 대통령이 특별법 제정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한다고 하면서 노태우 비자금이 김영삼 정부의 대선 자금으로 사용되었을 개연성이 있다고 쟁점화 했다.27)
6차 국민대회부터 집회와 시위를 주관했던 5ㆍ18학살자처벌특별법제정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는 특별법 제정 방침 발표를 ‘승리’로 해석했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여 8차 범국민대회는 ‘국민 승리를 축하하는 대회’로 치러졌고, 성명서에도‘지난 15년 동안 싸워온 국민의 승리’라고 명시했다.28) 그리고 11월 21일부터 계속해오던 국회 앞 집회의 중단을 밝혔으며, 28일로 예정했던 청와대 항의방문 계획도 취소했다.29) 특별법 제정이 확정되면서 시민사회의 관심은 특별검사제 도입에 집중했다. 일찍이 주장되었던 특별검사제 도입은 특별법 제정의 의미와 특별법 집행의 공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지표로 부각되었다. 광주ㆍ전남지역의 대학생들은 이의 관철을 요구하는 공세적인행동에 들어갔으며,30) 8차 범국민대회에 참석했던 관련단체 회원들은 전두환의 집 앞에서 기습시위를 벌이고 했다.
방송과 언론은 130일에 도달한 명동성당의 농성장을 조명했다. 농성장은 정국의 변화와 특별법 제정 발표가 갖는 정치적ㆍ상징적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농성단은 5월 문제 해결의 5원칙’이 해결될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될 때까지 농성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주장은 농성 초기에 비해 목표가 확장된 것이었다. 농성단은 5원칙을 실현할 수 있는 구제적인 방안이 특별법에 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31)
특별법 제정운동은 사안의 특성상 시민사회와 야당 특히, 새정치국민회의와 협력관계가 긴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야당과 입장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특별법 제정 방침이 확정된 뒤 5ㆍ18공대위 상임의장이 언론에서 한 인터뷰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특별검사제를 포함한 특별법 제정이 성사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소급입법에 의한 정치보복’론을 주장하던 세력들에게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되며, 정당들의 이해관계로 쟁점이 변질되는 것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반면 새정치국민회의가 강하게 주장하고 있던 대선자금 공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32) 하지만 11월 25일과 12월 9일에 개최되었던 8~9차 범국민대회의 주요 의제는 야당이 주장하고 있던 특별검사제 도입과 대선자금 공개 촉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시민사회와 농성단의 발언들에 대한 여론의 주시는 점점 약화되었다. 특별법 제정에 관한 절차와 쟁점은 정치권과 국회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여겨졌던 것이다.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국회의 목적이자 역할이므로, 정치ㆍ사회적 관심이 달라지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방송과 언론은 검찰과 사법부에서 주요하게 판단해야 할 12ㆍ12와 5ㆍ17국면 그리고 5ㆍ18의 쟁점들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었고, 신군부의 행동과 주장에 보다 비중을 두고 보도했다. 정부가 특별법 제정을 선언하면서 대립과 갈등의 주요 구도가 달라졌던 것이다. 따라서 특별검사제 도입 주장은 계속되었으나, 크게 지지를 받지 못했고, 대선자금 공개요구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러한 정세는 특별법 제정을 10여일이나 남긴 시점에 개최되었던 9차 국민대회가 마지막 전국 집회였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로 인해 개별단체들의 집회와 시위는 계속되었으나, 특별법 제정운동의 시민사회 주도성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두 번째는 12월 3일 전두환이 구속되고, 12월 19일 5ㆍ18특별법이 제정된 것이었다. 특별법의 내용과 수준이 어떠하든 이것은 사회운동의 목표가 달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별법에 대한 평가는 다양했다. 특별법 제정 과정을 실질적으로 주관했던 정치권은 당리당략의 관점에서 대응했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자민련을 제외한 신한국당,33) 국민회의, 민주당은 특별법을 합의하여 통과시켰고, 이 과정에서 각자의 이해와 각종 정치공방을 해소시켰던 바, 나름 만족스런 입장을 표방했다. 언론도 5ㆍ18특별법이 제정되었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4)
이와 대조적으로 시민사회는 관망에서 격렬한 규탄에 이르기까지 여러 견해들로 나뉘었다. 다수의 입장은 특별법이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며, 5월 문제의 청산을 위해반드시 관철되어야 하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이 포함되지 않는 등 미성숙한 법안이라는 것이었다. 예상되었던 것처럼, 시민사회의 핵심 주장이었던 특별검사제 도입이 배제된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특별검사제는 5ㆍ18의 가해자 처리에 대해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렸던 검찰에 대한 불신과 정치적 중립을 바탕으로 특별법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시각과 바람을 압축한 것이었다. 여당과 야당은 이에 대해 명확하게 다른 입장을 드러냈지만, 야당은 이를 사실상 포기하는 대신에 다른 사안들을 관철시켰다. 시민사회는 야당의 결정에 대해 아쉬움과 실망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비판했다.35)
광주지역의 시민사회는 특별법 제정에 대해 한층 복잡한 속내를 드러냈다. 특별법제정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5ㆍ18공대위는 이른바 ‘어른’그룹과 소장파 실무자들의 입장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자회견문의 기조를 두고 원만하게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는데, ‘여야 합의로 특별법이 제정돼 일단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는 어른 그룹의 논조로 발표되었다.36) 광주시의회는 특별법 제정을 환영하는 성명을 냈다가, 비난 여론이 일자 곧바로 해명을 해야 했다.37) 전남경찰청은 시위 확산을 차단하려는 취지에서 이례적으로‘시위진압 부상 경찰관 통보’라는 제목의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38) 대학생들은 특별법이 제정된 당일에 신한국당 광주ㆍ전남지부 당사로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고, 특검제 유보합의를 규탄했다.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특별검사제 실시 등을 쟁점으로 현 정국을 지속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사회운동의 동력은 급속히 냉각되어갔다. 특별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전두환ㆍ노태우를 비롯해 다수의 신군부 관련자들이 구속되었거나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고, 검찰은 12월 27일부터 광주지역 일원에서 현장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범대위는 12월 21일 ‘특별법 제정운동 성과보고대회’를 갖고 활동을 마무리했다. 명동성당 농성단도 이날 농성을 해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12월 20일 수감된 후 단식으로 저항하던 전두환이 국립경찰병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항의했던 농성단 가운데 12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농성 해제는 무산되었다.39) 연행자들은 곧 풀려나 농성장으로 돌아왔으나, 농성을 지속할 분위기는 이미 아니었다. 농성단의 대다수는 연말과 신년을 맞이하여 광주로 내려왔다. 이들이 다시 농성장을 찾았을 때는 시설들이 철거된 상태였다.40) 농성단은 1996년 1월 9일 5ㆍ18특별법 제정은 과거청산의 첫발일 뿐’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175일에 걸친 활동을 종료했다.41) 해단식 참석자들은 농성을 시작할 때와 비슷하게 50여 명이었다.42)
Ⅳ. 특별법 제정운동의 주체와 방법
1. 운동의 주체
특별법 제정운동은 많은 사회구성원의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특별법 제정운동의 주체를 특정화하는 것은 주의가 요구된다. 하지만 이 운동을 주도했던 주체들은 일정하게 유형화할 수 있으며, 이들의 역할은 분담되어 있었다. 또한 여론매체들의 주목을 받았던 주체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주체들이 있었고, 운동의 전개에서 실질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오늘날에는 기억되지 않은 주체들도 있다.
운동의 주체들은 개인과 단체 그리고 집단 등에 따라 다양하지만, 집합행동과 참여 형태를 중심에 두고 분류하면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살펴볼 주체들은 오랜 기간 5월운동의 구심을 형성했던 5ㆍ18 관련단체들이다.
특별법 제정운동에서 이들의 주요 역할은 검찰에 고소운동을 벌인 것과 명동성당 농성이 핵심이다. 그런데 특별법 제정의 단초가 되었던 고소운동의 주체는 관련단체가 아니라 개인이었다. 고소장의 고소인이 ‘정동년 외 32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소장은 당사자만이 취할 수 있는 법적 행위임을 감안하면, 이들 모두는 5ㆍ18의 직접적 피해자들이고, 관련단체들의 회원이었다. 정동년의 당시 직함이 5ㆍ18민중항쟁연합(이한 5민련) 상임의장이어서 언론에는 이 단체가 고소운동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보도된 측면이 있다.
5민련은 1992년 5월운동협의회를 바탕으로 결성되었고 관련단체 11개 가운데 9개가 참여했지만(김재균, 2000: 174~175), 5민련이 특별법 제정운동을 주도한 주체라고 하기는 어렵다.
관련단체들이 특별법 제정운동의 주된 주체로 상징성을 부여받았던 것은 집회와 시위 그리고 농성 등과 같은 집합행동을 통해서였다. 이들의 행동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관련단체와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연대 기구에 참여한 단체들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별 단체 혹은 새롭게 결성된 단체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관련단체들이 특별법 제정운동에서 개별 단체로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규모집회와 시위 등에서는 연대기구의 소속 단체로 활동했으며, 특정한 상황이나 활동에서만 개별단체로 등장했다. 즉 청와대와 검찰청을 비롯한 권력기구 등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에는 주로 개별 단체나 조직으로 활동했고, 상경투쟁 초기에 5ㆍ18학살자 처벌을 위한 명동성당 농성단(7. 19.)’과 5ㆍ18학살자 처벌을 위한 삭발투쟁 참가자 일동(7. 28.)’이라는 명의를 사용했다. 이들의 역할이 가장 돋보였던 것은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이었다.
청년단체와 학생단체 등이 명동성당에서 혹은 대학 캠퍼스 등에서 이루어졌으나, 이는 기간이 정해진 것이었다. 농성을 매개로 한 운동의 주체는 관련 단체들, 특히 유족회와 부상자회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관련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여 구성했던 연대 기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주지역에서는 5ㆍ18공대위가 중심이었다. 5ㆍ18공대위는 1994년 5월 행사를 즈음해서 맹아가 형성되었다. 현행 법률로는 가해자를 법정에 세울 수 있는 잔여 시한이 1년여에 불과하다는 점을 파악한 지역의 원로들이 비주기적으로 ‘무명’의 모임을 갖고 대책을 모색했던 것이 발단이었다. 이들 모임에 광주ㆍ전남연합의 실무진 일부와 5월 행사 진행 실무자 일부가 결합했다.43) 이들은 1995년 검찰의 발표가 임박하게 되자 더욱 긴밀하게 모임을 갖고, 대책을 숙의했다. 그리하여 7월 14일 5ㆍ18학살자 기소 관철을 위한 광주ㆍ전남공동대책위원회’라는 명칭으로 기자회견문을 발표했고, 단체 출범을 공식화했다.
이 단체는 7월 21일 5ㆍ18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ㆍ전남공동대책위원회’로 개칭되었고, 상설단체가 되었다.44) 5ㆍ18공대위에는 광주ㆍ전남지역에서 활동하던 136개의 시민단체가 참여했으나, 협의체 수준이어서 의무감과 결속력은 높지 않았다.
5ㆍ18공대위는 위원장단과 집행위원회 그리고 사무국으로 구성되었다.45) 5ㆍ18공대위에는 5ㆍ18 관련단체들도 참여했으나, 명동성당 농성단과 일정하게 역할이 나뉘어 있었다.
5ㆍ18공대위는 특별법 제정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위해 제 단체들과 협의 및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집회와 시위, 서명 등을 위한 업무와 비용을 모금하고 부담했다. 그리고 전남도청 인근에서의 농성을 주관했다.
서울에서는 초반엔 국민위원회가 특별법 제정운동의 주요 주체가 되었다. 국민위원회는 시민단체들이 결합해서 결성했던 것이 아니라, 가해자 35명을 고소하기 위해 320여명이 결성한 단체였다. 이들의 다수는 소속 시민단체들에서 중요한 지위와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자체의 실무 기구와 집행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특별법 제정운동 초기에는 전국연합 등 몇몇 단체가 사실상 실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5ㆍ18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이하연석회의)가 구성되었다. 9월 6일 첫 모임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한국여성단체연합,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 등이 참여했다. 연석회의는 전국연합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실무를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하는 구조로 전환한 것이었다. 연석회의는 특별법 제정운동을 실행할 수 있는 실질적 활동 기반을 갖추었으나,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46) 이러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0월 26일 구성되었던 것이 범대위였다.
범대위는 단일한 조직체계를 결성하기 위해 국민위원회와 5ㆍ18공대위를 비롯해 모든 연합단체와 독립단체들이 참여하여 특별법 제정운동을 전담하는 전국적 연대기구로서 위상을 정립했다. 범대위가 출범한 이후에도 각 단체별로 특별법 제정운동을 전개했지만, 범대위는 대규모 집회와 시위 그리고 국회를 상대로 하는 관련단체 및 시민단체를 대표하는 협의기구로 역할을 했다.47) 범대위의 핵심기구는 공동집행위원단과 대변인이었다.
이들의 소속단체는 전국연합, 한국여성단체연합,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화를 위한전국교수협의회였다. 그런데 범대위는 출범한지 한 달여에 만에 정부가 특별법 제정 방침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고해야 했다. 범대위는 향후 운동의 방향과 쟁점을 두고 고민했는데, 입장 차이들이 발생했다. 특별검사제 도입에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지만, 특별법 제정운동의 의제가 대선자금 공개로 확산되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동의의 정도가 높지 않았다. 그리하여 범대위는 특별법이 제정됨과 동시에 해산했다.
셋째, 특별법 제정운동의 주요 동력은 대학생단체의 동원력과 전국연합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노동단체와 농민단체 등 이른바 민중운동단체들의 조직적인 활동은 상대적으로 낮았던 반면, 교수와 교사, 의료인, 종교인 등 전문직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대학생의 경우는 1993년에 4월에 출범했던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과 지구별로 결성되었던 대학생 단체들이 활동의 구심을 이루었다. 한총련은 대규모 집회와 시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단식농성, 선전활동, 점거운동, 항의방문 등 다양한 집합행동을 전개했다. 1991년 12월에 결성되었던 전국연합은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과 노동 및 농민단체, 대학생 단체 등이 참여하여 출범했던 연합단체였다. 전국연합은 참여단체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다양한 운동 방법을 활용했으며, 특별법 제정운동의 방향과 활동의 근간을 형성했다.
넷째, 이외에도 수많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 등이 특별법 제정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이들 단체들은 서명운동을 전개하거나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집회 및 시위 참석등의 방법으로 정부와 국회의 특별법 제정을 압박하는데 일조했다. 이들 단체들의 활동은 특별법 제정운동이 5ㆍ18 관련 단체나 활동이 두드러진 단체들에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한 사회구성원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입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 운동의 방법
특별법 제정운동은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했던 것과 비례하여 수많은 운동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토록 다양한 사회운동의 방법들이 실행되었던 사례는 흔치 않다. 이러한 점에서도 과거사 청산운동의 매우 중요한 선례로 평가된다.
특별법 제정운동은 첫째, 다른 사회운동과 달리 사법부의 역할을 촉구하고 적법한 활동을 촉구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이것은 ‘고소ㆍ고발’과‘입법청원’으로 전개되었는데, 다수의 주체들이 집중과 분산의 효과를 고려하며 전개했다. 즉1988~1989년 국회청문회에서 5ㆍ18에 관한 위증혐의 고발(7. 21.),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7. 24.), 서울고등검찰청 항고(7. 25.), 대검찰청 재항고(7. 29.), 검찰총장 등 관련 검사 14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8. 11) 등으로 이어졌다. 사법부는 고소ㆍ고발운동에 대해서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했는데, 공식적인 발표 여부를 떠나 법리 해석과 적용을 둘러싼 무수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사법부의 대응 방식과 발표 내용은 특별법 제정운동을 지속시키고, 정당성을 강화하는 자극제로 작용했다.
사법부를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운동 방법은 입법청원이었다. 고소ㆍ고발운동이 기존의 법률구조 내에서 판결을 요구했다면, 입법청원운동은 새로운 법률의 제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1994년의 고소ㆍ고발운동 초반에도 주장되고 있었으나, 8월 7일 참여연대가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을 입법청원한 것에서 실질적인 단초를 형성했다. 특별법의 내용이 채워진 것은 8월 14일에 전국서명교수 결의대회가 개최된 후「진상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과 「공소시효에 관한 법률안」이 입법 청원되면서부터였다.
이후 9월 18일에는 천주교가, 9월 22일에는 5ㆍ18국민위, 5ㆍ18공대위, 전국연합이 입법청원을 했다.
둘째, 사회운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집회와 시위 그리고 항의방문 등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집회와 시위는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개최되었지만, 운동의 특성상서울과 광주가 중심이 되었다. 국민대회는 7월 22일부터 12월 9일까지 총 9회에 걸쳐 집결과 이동이 용이한 서울의 도심 공원들에서 개최되었다. 국민대회는 특별법 제정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연대기구들이 주관했다.
특별법 제정운동의 쟁점과 흐름에 따라, 각 지역별로 다양한 집회와 시위가 펼쳐졌다.
특히 광주지역에서는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빈번하게 열렸는데,48) 5ㆍ18공대위, 민주주의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과 소속 학생단체 등이 중심적인역할을 했다. 민주당 광주시지부도 집회를 열었으나, 일성회성이었다. 광주에서 개최된 집회와 시위는 매우 격렬했으며, 지방검찰청과 민주자유당 지역지부에 대한 항의방문 등이 이루어지곤 했다. 이러한 양상은 목포와 순천 등 대학들이 위치한 중소 도시들에서도 전개되었다. 다른 지역에서의 집회와 시위는 주로 전국적으로 동시에 행사가 개최되는 날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항의방문도 빈번했는데, 이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었다. 특별법 제정 방침이 공표되기 전에는 민주자유당의 당사나 의원들의 지역사무실이 주요 대상이었다. 반면 특별법제정을 전후한 시점에서는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자민련이 항의방문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항의방문은 단체 차원에서는 공권력의 규제가 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국가의주요 기관들에 대한 항의방문의 경우는 대부분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대학생이 중심이 된 항의방문은 시위의 연속으로 파악되어 방문 행위 그 자체가 공권력의 통제를 받았고, 참여자들이 연행되었다.
셋째, 시간ㆍ공간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농성이 전개되었던 점도 특징이었다. 농성은 특별법 제정운동이 이루어졌던 주요 기간 동안에 계속되었고, 농성장은 특별법 제정에 관한 의견들을 협의ㆍ조율하며 대책을 숙의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로 인해 대규모 도심집회를 마친 시위대가 농성장까지 거리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농성이 주요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은 서울과 광주였다. 서울에서는 7월 19일부터 다음 해 1월 9일까지 175일간 농성이 전개되었고, 광주에서는 8월 2일부터 10월 21일까지 금남로 수산업협동조합 전남도지회 앞 도로변에서 농성이 이루어졌다.49) 명동성당의 농성단은 20여 명을 유지했는데, 서울시와 경기도 소재의 시민단체 그리고 대학생 단체가 인력을 파견하여 지원하기도 했다. 서울의 농성장은 초기에는 정보기관원들이 출입하기도 하여 이를 차단하기 위한 격렬한 행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농성의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으로 일부 참여자들이 광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50) 농성 참가자들은 집회와 시위에서 삭발로 의사를 표하거나, 입장발표, 기자회견 등을 했으며, 거리시위에서는 선두에서 플래카드를 펼쳐드는 역할을 맡았다.
일상적으로는 서명운동과 사진전시회 등을 벌여 가해자의 처벌과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렸다. 명동성당의 농성단은 국회의 역할이 크다는 인식 하에 10월 중순 농성장을 여의도로 옮기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광주에서의 농성은 5ㆍ18공대위 주관 하에 시민단체와 관련단체 회원들이 참여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광주에서의 농성은 광주ㆍ전남연합의 회원 단체 등이 분담하여 교대로 진행되었다. 광주의 농성장은 시민들로부터 서명을 받고 도심 집회를 지원하는 상징적인장소로 활용되었다.51) 이곳에서의 농성은 서울에 비해 조직성과 긴장감이 낮았고, 서울에서 농성하다 내려온 사람들이 농성장을 지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정치인, 시민사회단체와 대학생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일정기간 동안 농성과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이들에 의한 농성은 7월부터 시작되어 10월까지 연속적으로 또는 단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김영진 의원은 국회 7월 24일부터 8월 6일까지 국회기도실에서 단식 농성을 벌였고, 정상용 의원과 광주지역 의원 등 100여 명은 7월 24일부터 15일간 국토순례를 하며 가해자 처벌을 호소했다.
넷째, 시민들의 참여와 지지의 결집을 위한 참여 방법들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집합행동으로 표출되는 방법은 성명과 선언 발표, 결의문 채택, 기자회견 등이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그 사례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운동의 전개에 따라 활동들이 일정하게 달라졌다. 견해를 발표하는 운동 방법은 주요 쟁점들이 발생할 때 폭증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7월 18일 검찰의 발표, 10월 11일 노태우의 5ㆍ18에 관한 견해 발언 보도, 10월 20일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 등이 계기점이 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활성화에는 지식인 집단의 역할이 컸다. 특히, 7월 31일 고려대 교수 131명이‘검찰수사와 결정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시국선언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전국곳곳에서 교수들이 성명을 발표했다. 종교계에서는 8월 중순 이후부터 입장을 발표하는 방법으로 참여였다.52) 교사 집단은 9월 말경부터 성명과 선언을 발표하면서 특별법제정운동에 동참했다. 10월에 들어서는 변호사, 의사, 농민, 노동자 등 직능단체별로 성명을 발표했으며, 지방의회는 물론 지방자단체장들도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성명과 선언 발표와 같은 운동의 방법은 11월 24일 특별법 제정 방침이 발표되면서 소강상태를 보였다.
다섯째, 5ㆍ18특별법 제정운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널리 확산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서명운동과 사진전시회가 한 몫을 했다. 서명운동은 5ㆍ18공대위의 주도로 8월 3일부터 광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서명운동은 시민사회의 연계망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9월 18일 천주교 측에서는 123,464명의 서명을 받아 특별법 청원을 했고, 9월 22일에는 28만5천여 명이 서명했던 것으로 집산되었다. 서명운동은 대규모 회원을 확보한 시민단체들이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일상적인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하여 10월 중순에 이미 100만 여명 이상이 서명에 참여했다.53) 서명운동의 결과 특별법 제정의 당위성과 사회구성원의 지지를 입증하는 근거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하지만 국회가 이 자료에 어느 정도 가치를 부였는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명운동이 전개되는 장소에는 5ㆍ18의 진상을 알리고,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사진전시회가 병행되었다. 사진전시회는 명동성당 농성단의 주요한 활동 방법의 하나였다. 사진전시물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운동 과정에서 생산된 새로운 사진들이 추가되었다. 국민위원회는 사진전시회가 상당한 효과를 거두는 것으로 판단하고, 지역과 다른 서명 장소 등으로 확산시키려고 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공청회와 토론회 등을 통해 사법부의 발표를 토로하거나 특별법의 구성 방안이 모색되었다. 또한 정당들의 특별법 제정 활동을 촉구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추진되었다. 이는 각 정당의 대표들을 면담하여 5ㆍ18관련단체와 시민사회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과 여의도 국회 앞에서 집회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특별법 제정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을 때 주로 이루어졌다.
Ⅴ. 맺음말
5ㆍ18특별법의 제정과 가해자들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그리고 이들에 대한 특별사면이 단행된 지 18여 년이 흘렀다. 이 기간 동안 5ㆍ18특별법 제정운동에 헌신했던 피해자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가운데 유명을 달리했거나 병환 중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양상은 가해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0여 년의 세월은 이렇게 흘러갔지만,5ㆍ18특별법과 가해자 처리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일찍이 일단락되었거나 재평가되었던 5ㆍ18에 대한 평가와 예우도 점진적으로 쇠락하고 있으며, 어떤 부분들에서는 역진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한국의 과거청산 작업이 일단락된 시점에서 성찰해보면, 5ㆍ18특별법 제정운동과 이 법이 미쳤던 영향은 실로 상당한 것이었다. 5ㆍ18특별법은 거창ㆍ산청ㆍ함양사건, 민주화운동 전반, 제주4ㆍ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의 집단적 죽음 등 다양한 과거사 관련청산운동의 촉발과 실행에 복합적으로 작용했다(이재승, 2010: 30). 5ㆍ18특별법은 과거사청산 작업의 수준과 내용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선례로 검토되었고 받아들여졌다.
또한 5ㆍ18특별법은 국가 기구들의 높은 장벽과 무신경 그리고 책임 회피를 토로하고 극복대안을 마련하는데 가장 의지했던 버팀목이었다. 5ㆍ18특별법은 관련단체와 시민사회의 의견이 온전하게 수렴되지 못한 ‘반쪽의 법률’이라고 평가받기도 했지만, 이후에 제정되었던 과거청산 관련 법률들에서 이 한계를 넘어선 경우는 없었다. 따라서 5ㆍ18특별법은 과거사청산운동의 성과들에서 여전히 높은 위상을 갖고 있으며, 특별법이 제정이 된 지 20년이 경과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법률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고소ㆍ고발운동을 기반으로 특별법을 제정했던 사회운동의 사례는 없다. 이 운동이 특별법 제정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사람들도 희박했다. 신군부의 기반과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문민정부가 결단에 가까운 이 일을 단행하고 진행하기까지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했다. 하나는 특별법 제정운동이 정치적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정치권의 대응에 따라 특별법 제정운동이 어떠한 변곡선을 그렸는가를 밝히고자 했다. 다른 하나는 특별법 제정운동의 주요 주체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역할을 했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사회운동의 방법들이 활용되었는가를 규명하고자 했다. 특별법제정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은 이러한 구조와 주체 그리고 방법이 효과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완전하고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고소ㆍ고발운동은 국가를 상대로 한 사회운동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찍이 없었던 두 개의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고소ㆍ고발운동의 대상들 대부분이 구속ㆍ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운동의 동력과 주체의 약화 및 해산을 유도했다.
이를 바탕으로 가해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이 이루지면서 한국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특별법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수용하지 못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미해결 상태로 남았다. 특히 5ㆍ18의 청산 작업의 시종이라고 할 수 있는 진상규명의 핵심적인 쟁점들이 밝혀지지 않았다. 사법부의 주된 기능과 역할이 법률적 근거에 의거하여 범법자의 위법성을 입증하고, 이에 적절한 양형을 선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진상규명과는 거리가 있었다. 즉 특별법을 집행하는 사법부는 처음부터 5ㆍ18의 진상 전체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2007년에 국방부과거사위원회는 12ㆍ12와 5ㆍ17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을 다시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말끔하게 5ㆍ18의 전모가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글은 특별법에 담겨있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중요하듯이,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특별법 제정운동이 갖는 의미를 재고하기 위해 재구성하고 성찰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특별법 제정운동은 목표했던 바를 모두 이루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대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어쩌면 당시에 이루지 못한 목표를 성취하려했던 노력들이 제도화가동반한 달콤한 나락으로 급속하게 침윤하는 것을 막아주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다른 어떤 과거사보다 뜨거운 사회적 쟁점으로 신속하게 재 점화되고,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 평화 등 다양한 메시지를 전하는 구심으로 작용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