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고】 원고 1 외 4인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해마루종합법률사무소 담당변호사 장영석 외 1인)
【피 고】 신일본제철 주식회사 (소송대리인 변호사 주한일 외 1인)
【주 문】
1.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2. 소송비용은 원고들이 부담한다.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00,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한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일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에 의한 금원을 각 지급하라.
【이 유】
1. 기초사실
다음 각 사실은 당사자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갑 제1호증, 제2호증의 1, 6, 제3호증의 1, 제4호증의 1, 제5호증의 1, 제6호증의 1, 제22호증의 1, 제23호증의 1, 제25호증, 제47호증의 1, 2, 제49호증 내지 제53호증(각 가지번호 포함), 제55호증의 1, 2, 제62호증의 1, 2, 제71호증의 1, 2, 제74호증 내지 제78호증(각 가지번호 포함), 을 제1호증의 1, 2, 제2호증의 1, 2, 제6호증, 제7호증의 각 기재와 갑 제3호증의 3, 제4호증의 4, 제6호증의 5의 일부 기재 및 원고 5(원심: 원고 4)에 대한 당사자 본인신문결과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이를 인정할 수 있다.
가. 원고들의 동원, 강제노동 및 귀국경위
(1) 원고들은 1923.부터 1929.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평양, 보령, 군산 등에서 거주하고 있던 자들이고, 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구 일본제철’이라 한다)는 1934. 1.경 설립되어 일본 가마이시(釜石), 야하타(八幡), 오사카(大阪) 등에서 제철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회사이다.
(2)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군수물자 생산에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38. 4. 1.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를 같은 해 5. 5.부터 우리나라에서 실시하였으며, 1942. 조선인 내지이입 알선 요강을 제정·실시하고, 우리나라 각 지역의 관알선을 통하여 인력을 모집하였으며, 1944. 10.경부터는 국민징용령에 의하여 우리나라 국민에 대한 징용을 실시하였다.
한편, 구 일본제철을 비롯한 일본의 철강생산자들을 총괄 지도하는 일본 정부 직속기구인 철강통제회가 1941. 4. 26. 설립되었는데, 철강통제회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노무자를 적극 확충하기로 하고 일본 정부와 협력하여 노무자를 동원하였고, 구 일본제철은 사장이 철강통제회의 회장을 역임하는 등 철강통제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 구 일본제철은 1943.경 평양에서 오사카제철소의 공원모집 광고를 냈는데, 그 광고에는 오사카제철소에서 2년간 훈련을 받으면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훈련 종료 후 한반도의 제철소에서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4) 원고 1, 원고 2는 1943. 9.경 위 광고를 보고, 기술을 습득하여 우리나라에서 취직할 수 있다는 점에 끌려 응모한 다음, 구 일본제철의 모집담당자와 면접을 하고 합격하여 위 담당자의 인솔 하에 구 일본제철의 오사카제철소로 가서, 훈련공으로서 노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5) 오사카제철소에서 원고 1, 원고 2는 1일 8시간의 3교대제로 일하였고, 한 달에 1, 2회 정도 외출이 허용되었으며, 한 달에 2, 3엔 정도의 용돈만 지급받았을 뿐이고, 구 일본제철은 임금전액을 지급하면 낭비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원고 1, 원고 2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위 원고들 명의의 구좌에 임금의 대부분을 일방적으로 입금하였으며, 그 저금통장과 도장을 기숙사의 사감에게 보관하게 하였다. 위 원고들은 화로에 석탄을 넣고 깨뜨려서 뒤섞거나 철 파이프 속으로 들어가서 석탄찌꺼기를 제거하는 등 화상의 위험이 있고 기술습득과는 별 관계가 없는 매우 고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제공되는 식사는 그 양이 매우 적었다. 또한 경찰이 자주 들러서 위 원고들에게 ‘도망치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하였고 기숙사에서도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위 원고들은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였는데, 원고 2는 도망가고 싶다고 말하였다가 발각되어 기숙사 사감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체벌을 받기도 하였다.
(6) 그러던 중 일본은 1944. 2.경 훈련공들을 강제로 징용하였고, 원고 1, 원고 2는 징용 이후에는 용돈도 전혀 지급받지 못하였다. 오사카제철소의 공장은 1945. 3.경 미합중국 군대의 공습으로 파괴되었고, 이때 훈련공들 중 일부는 사망하였으며, 원고 1, 원고 2를 포함한 나머지 훈련공들은 1945. 6.경 우리나라 청진에 건설 중인 제철소로 배치되어 청진으로 이동하였다. 원고 1, 원고 2는 기숙사의 사감에게 임금이 입금되어 있던 저금통장과 도장을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사감은 청진에 도착한 이후에도 위 통장 및 도장을 돌려주지 아니하였고, 원고 1, 원고 2는 청진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공장건설을 위해 토목공사를 하면서도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7) 원고 3은 1941.경 대전시장의 추천을 받아 보국대로 동원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구 일본제철의 가마이시제철소에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임금을 저금해준다는 말을 들었을 뿐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원고 4는 1942. 10.경 충남 보령군 마을 구장의 지시를 받고 모집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위 가마이시제철소에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임금은 극히 일부만 지급받았다. 원고 5는 1943. 1.경 군산부(지금의 군산시)의 지시를 받고 모집되어 구 일본제철의 인솔자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구 일본제철의 야하타제철소에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였고, 도주하다가 발각되어 약 5일 동안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8) 원고들은 1945. 8.경부터 같은 해 12.경까지 사이에 각 제철소가 공습으로 파괴되고 일본이 패전하여 구 일본제철에서 더 이상 강제노동을 시킬 수 없게 되자 각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 전후의 상황
(1) 미불임금의 공탁
구 일본제철은 1947. 3. 18. 오사카공탁소에 원고 1(창씨개명 ○○○○. 강제노동 당시에 △△△△을 사용함)을 피공탁자로 하여 급료 50.52엔, 예저금(預貯金) 445엔 합계 495.52엔을, 같은 날 오사카공탁소에 원고 2(창씨개명 □□□□)를 피공탁자로 하여 급료 57.44엔, 예저금(預貯金) 410엔 합계 467.44엔을, 1946.경 원고 3(창씨개명 ◇◇◇◇)을 피공탁자로 하여 예저금 23.80엔을, 1946.경 원고 5(창씨개명 ☆☆☆☆)를 피공탁자로 하여 급료 40엔, 퇴직수당 10.20엔 합계 50.20엔을 각 공탁하였다.
(2) 구 일본제철의 해산
구 일본제철은 회사경리응급조치법(1946. 8. 15. 법률 제7호), 기업재건정비법(1946. 10. 19. 법률 제40호)의 제정·시행에 따라 위 각 법에서 정한 특별경리회사, 특별경리주식회사로 지정되어 1950. 4. 1.에 해산하였고, 구 일본제철의 자산 출자로 야하타제철(八幡製鐵) 주식회사, 후지제철(富士製鐵) 주식회사, 일철기선(日鐵汽船) 주식회사, 하리마내화연와(播磨耐火煉瓦) 주식회사(위 4개 회사를 이하 ‘제2회사’라 한다)가 설립되었다.
(3)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조약과 부속협정의 체결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1951.말경부터 국교정상화 및 전후 보상문제를 논의하였고 마침내 1965. 6. 22. ‘국교정상화를 위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의 하나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청구권협정’이라고 한다)이 체결되었는데, 청구권협정은 제1조에서 일본국이 대한민국에 10년간에 걸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한다고 정함과 아울러 제2조에서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2. 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 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에 타방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b)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들어오게 된 것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 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또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은 위 제2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a) “재산, 권리 및 이익”이라 함은 법률상의 근거에 의거하여 재산적 가치가 인정되는 모든 종류의 실체적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양해되었다.
(e) 동조 3.에 의하여 취하여질 조치는 동조 1.에서 말하는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취하여질 각국의 국내조치를 말하는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g) 동조 1.에서 말하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되는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에는 한일회담에서 한국측으로부터 제출된 “한국의 대일청구요강”(소위 8개 항목)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동 대일청구요강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게 됨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위 합의의사록에 적시된 대일청구 8개 요강에는,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전쟁에 의한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 한국인의 일본인 또는 일본법인에 대한 청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4) 청구권협정에 따른 후속조치
청구권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은 1965. 12. 17.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간의 협정 제2조의 실시에 따른 대한민국 등의 재산권에 대한 조치에 관한 법률’(법률 제144호, 이하 ‘재산권조치법’이라 한다)을 제정·시행하였다.
한편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수입되는 자금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 사항을 정하기 위하여 1966. 2. 19.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이에 이어 1971. 1. 19.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10개월간 국민의 대일청구권 신고를 받은 결과 총 109,540건의 신고가 접수되었는바, 위 신고분에 대한 실제 보상을 집행하기 위하여 1974. 12. 21.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1975. 7. 1.부터 1977. 6. 30.까지 사이에 총 83,519건에 대하여 총 9,187,693,000원의 보상금을 지급하였고, 위 각 법률은 1982. 12. 31. 모두 폐지되었다.
원고 1, 원고 2는 1997. 12. 24.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피고에 대하여 임금지급 및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2001. 3. 27. 원고청구기각 판결이 선고되었으며, 오사카고등재판소에서 2002. 11. 19. 항소기각되고, 위 판결은 2003. 10. 9. 확정되었다(위 소를 이하 ‘이 사건 전소’라 한다).
2. 당사자들의 주장
가. 원고들의 주장
원고들은, 일제강점 하에 피고의 전신인 구 일본제철의 모집담당관이 원고들에게 기술습득, 귀국 후 안정적인 일자리 보장, 충분한 식사와 임금 제공 등을 보장한다면서 원고들을 회유하여 일본으로 동원하였으나, 실제로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의 여러 공장에서 원고들의 의사에 반하여 자유를 박탈당한 상황에서 강제노동에 혹사당하고 임금마저 강제로 저축당하여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였으므로, 구 일본제철의 후신으로서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승계한 피고가 원고들에게 각 100,000,000원의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나. 피고의 주장
이에 대하여 피고는, ① 원고 1, 원고 2가 이미 일본에서 피고를 상대로 동일한 소를 제기하여 패소확정판결을 받았으므로 이 사건 소 중 위 원고들의 청구는 기판력에 저촉되어 기각되어야 하고, ② 원고 3, 원고 4, 원고 5의 경우 강제로 또는 기망을 통해 동원되었다 하더라도 동원은 강제노동이라는 불법행위의 수단일 뿐이고 강제노동에 종사시킨 불법행위 자체는 일본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대한민국이 불법행위지가 아니어서 대한민국법원에 국제재판관할권이 없으므로, 이 사건 소 중 위 원고들의 청구부분은 부적법하여 각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가사 적법하다 하더라도, ① 청구권협정 및 그 후속조치로 인하여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소멸하였고, ② 피고는 구 일본제철과 법인격이 다르고 구 일본제철의 원고들에 대한 위자료채무를 승계하지도 않았으므로, 피고에게 위자료 지급을 구하는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이유 없다고 주장한다.
3. 본안전 항변에 관한 판단
가. 대한민국법원의 국제재판관할권 인정 여부
대한민국법원에 국제재판관할권이 없으므로 이 사건 소가 각하되어야 한다는 피고의 항변에 대하여 살펴본다.
(1) 국제재판관할권 유무 판단의 기준
살피건대, 국제재판관할권의 유무 판단을 위한 일반적인 기준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국제사법(2001. 4. 7. 법률 제6465호로 전문개정된 것)은 제2조 제1항에서 “법원은 당사자 또는 분쟁이 된 사안이 대한민국과 실질적 관련이 있는 경우에 국제재판관할권을 가진다. 이 경우 법원은 실질적 관련의 유무를 판단함에 있어 국제재판관할 배분의 이념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야 한다.”라고 추상적인 기준을 제시한 다음, 제2조 제2항에서 “법원은 국내법의 관할 규정을 참작하여 국제재판관할권의 유무를 판단하되, 제1항의 규정의 취지에 비추어 국제재판관할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여 당해 사건이 법정지인 우리나라 민사소송법의 재판적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우리나라 국제재판관할을 인정하되 이때에도 국제재판관할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재판관할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국내법의 관할 규정을 기초로 당사자 간의 공평, 재판의 적정, 신속 및 경제를 기한다는 기본 이념뿐만 아니라 소송당사자들의 공평, 편의 그리고 예측가능성과 같은 개인적인 이익, 그리고 재판의 적정, 신속, 효율 및 판결의 실효성 등과 같은 법원 내지 국가의 이익도 함께 고려하여야 할 것이며, 이러한 다양한 이익 중 어떠한 이익을 보호할 필요가 있을지 여부는 개별 사건에서 법정지와 당사자와의 실질적 관련성 및 법정지와 분쟁이 된 사안과의 실질적 관련성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삼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대법원 2005. 1. 27. 선고 2002다59788 판결 참조).
(2) 이 사건 소에 대한 판단
㈎ 의무이행지
원고들은, 이 사건 청구가 손해배상청구이고 그 의무이행지가 지참재무의 원칙에 따라 원고들의 주소지인 대한민국이므로 대한민국법원은 국제제판관할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민사소송법 제8조에 의하면 재산권에 관한 소는 의무이행지의 법원에 제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무는 지참채무이므로 이에 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일률적으로 그 의무이행지에 해당하는 피해자의 주소지국에서 제기할 수 있다고 한다면 피고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응소를 강요받는 결과가 되어 공평에 반하게 되므로, 위 조항이 규정하고 있는 의무이행지에는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채무의 이행지는 제외된다 할 것이다.
따라서, 원고들이 피고에 대하여 불법행위책임에 따른 위자료를 구하는 이 사건 소에 관하여는 민사소송법 제8조의 의무이행지 규정에 근거하여 국제재판관할권이 대한민국의 법원에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피고의 이 부분에 관한 주장은 이유 있다.
㈏ 불법행위지
원고들은, 일본 정부와 구 일본제철이 공모하여 원고들을 기망함으로써 원고들을 모집하였고, 원고들을 기망하여 동원한 것은 강제노동을 전제로 한 것으로서 강제노동이라는 불법행위의 시작이며, 기망으로 동원한 행위가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진 이상 대한민국은 불법행위지이므로 대한민국 법원은 이 사건 소에 대하여 국제재판관할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위 1.의 가.항에서 본 바와 같이 원고 1, 원고 2의 경우 모집광고에서 제시된 내용과 달리 실제로는 매우 열악한 조건에서 감시를 당하면서 기술습득과는 별 관계가 없는 노동에 종사하였고, 원고 3, 원고 4, 원고 5의 경우 구체적인 노동조건이나 내용에 대하여 알지 못한 채 지시를 받고 동원되어 임금도 받지 못하고 노동에 종사하였는바, 원고들이 위와 같이 동원된 후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면, 불법행위는 대한민국 내 원고들의 각 거주지역에서 원고들을 동원한 것으로부터 일본에 이르러 강제노동에 종사시키기까지 일련의 계속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대한민국은 불법행위지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불법행위지로서 이 사건과 실질적 관련성이 있다 할 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소송자료라고 할 수 있는 원고들이 모두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대한민국은 당사자의 생활근거지로서 이 사건과 실질적 관련성을 가진다 할 것이고, 이 사건 청구에 대한 판단이 청구권협정의 체결과 그 후속조치 등 대한민국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대한민국은 분쟁 사안과 실질적 관련이 있다 할 것이다. 나아가 이 사안은 대한민국 국민을 동원하여 강제노동에 종사시킨 것으로 그 피해자가 귀국하여 대한민국에서 손해배상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은 예측가능하다 할 것이고, 원고들과 피고의 소송수행능력을 고려할 때 대한민국 법원에 재판관할권을 인정하는 것이 당사자간의 공평을 현저히 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피고가 대한민국 내에 사무실을 둔 대리인을 선임하여 응소하고 있는 이상 대한민국법원에 응소를 강제하는 것이 심히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볼 수도 없다.
(3) 결론
그렇다면, 이 사건 소송에 관하여 대한민국 법원은 의무이행지로서는 국제재판관할권이 인정되지 아니하나, 불법행위지로서 국제재판관할권을 가진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위 항변은 이유 없다.
나. 기판력 저촉 여부에 대한 판단
원고 1, 원고 2가 일본에서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소와 동일한 내용으로 제기한 이 사건 전소에서 청구기각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실은 위 1.의 다.항에서 본 바와 같은 바, 이 사건 소의 제기가 위 확정판결의 기판력에 저촉되는지에 대하여 살펴본다.
(1) 외국법원 확정판결의 승인 요건
민사소송법 제217조의 규정에 의하면, 외국법원의 확정판결은 ① 대한민국의 법령 또는 조약에 따른 국제재판관할의 원칙상 그 외국법원의 국제재판관할이 인정될 것, ② 패소한 피고가 소장 또는 이에 준하는 서면 및 기일통지서나 명령을 적법한 방식에 따라 방어에 필요한 시간여유를 두고 송달받았거나 송달받지 아니하였더라도 소송에 응하였을 것, ③ 그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 ④ 상호보증이 있을 것 등 4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면 우리나라에서 그 효력이 인정되고, 외국법원의 확정판결이 위 승인요건을 구비하고 있는 경우에는 이와 동일한 소송을 우리나라 법원에 다시 제기하는 것은 외국법원의 확정판결의 기판력에 저촉된다 할 것이다.
(2) 판단
㈎ 이 사건이 위 4가지 요건을 충족하는지에 대하여 보건대, 먼저 ① 일본은 피고의 사무소 소재지이므로, 이 사건 전소가 제기된 일본국 재판소가 위 사건에 대하여 국제재판관할권을 가지고, ② 원고 1, 원고 2가 이 사건 전소에서 원고로 소를 제기하였다가 패소하였고, 피고가 패소한 경우가 아니므로, 위 ①, ②요건은 모두 충족되었다 할 것이다.
다음으로, ④요건에 대하여 보면, 상호보증은 외국의 법령, 판례 및 관례 등에 의하여 승인요건을 비교하여 인정되면 충분하고 반드시 당사국과 조약이 체결되어 있을 필요는 없고, 우리나라와 외국 사이에 동종 판결의 승인요건이 현저히 균형을 상실하지 아니하고 외국에서 정한 요건이 우리나라에서 정한 요건보다 전체로서 과중하지 아니하며 중요한 점에서 실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정도라면 상호보증의 요건을 구비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며, 당해 외국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의 동종 판결을 승인한 사례가 없더라도 실제로 승인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상태이면 충분하다 할 것인바(대법원 2004. 10. 28. 선고 2002다74213 판결 등 참조), 일본의 경우 일본 민사소송법 제118조에서 외국판결의 승인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민사소송법 제217조와 동일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상호보증이 있다고 할 것이어서, 위 ④요건도 충족되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 ③요건 즉, 이 사건 전소에 대한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아니하는지에 대하여 이하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 위반의 의미
위 ③요건에서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란 민법 제103조에 정한 국내 실체법상의 공서보다는 좁은 의미로서, 실체적 공서와 그 성립절차에 관한 절차적 공서를 포함하는 것인바,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경우’란 ㉠ 동일 당사자 간의 동일 사건에 관하여 대한민국에서 판결이 확정된 후에 다시 외국에서 판결이 선고되어 확정됨으로써 대한민국 판결의 기판력에 저촉되는 경우(대법원 1994. 5. 10. 선고 93므1051, 1068 판결 참조), ㉡ 재심사유에 관한 민사소송법 제451조 제1항 제6호, 제7호, 제2항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피고가 판결국 법정에서 위증을 이용하여 판결을 얻는 등의 사기적인 사유를 주장할 수 없었고 또한 처벌받을 사기적인 행위에 대하여 유죄 판결과 같은 고도의 증명이 있는 경우(대법원 2004. 10. 28. 선고 2002다74213 판결 참조), ㉢ 외국판결의 내용 자체가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경우 등을 말한다.
이 사건의 경우 위 ㉠, ㉡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아니함이 명백하고, ㉢의 경우 즉 일본법원의 판결 내용 자체가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지가 문제된다.
㈐ 이 사건 전소의 판결 내용
을 제2호증의 1, 을 제6호증의 각 기재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사건 전소에서 일본국 법원은,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기업이 부담할 엄청난 액수의 배상 및 미지급 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 제정·시행된 회사경리응급조치법, 기업재건정비법에 따라, 원고들의 임금채권 및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채권이 위 각 법에서 정한 구채권에 해당하여 구계정에 속하고, 제2회사가 구계정에 속하는 구 일본제철의 구채무를 당연히 포괄승계하는 것은 아니며, 제2회사가 구 일본제철의 구채무를 승계한다는 의사표시를 한 사실을 인정할 증거도 없으므로, 제2회사 중 일부가 합병되어 설립된 피고에게도 원고들에 대한 채무가 승계되지 않았다고 보아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 판단
위와 같은 일본법원의 판결 내용 자체가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지 살펴본다.
1) 회사 해산, 분할, 합병의 준거법
회사의 설립, 권리능력의 유무와 범위, 행위능력, 조직 및 내부관계, 사원의 권리와 의무 등 회사의 설립부터 소멸까지의 사항을 비롯한 회사법상의 쟁점에 대하여는 회사의 속인법(屬人法)이 적용되어야 하므로, 회사가 해산하여 분할되었다가 후에 일부가 다시 합병될 경우 그 절차 및 그에 따른 회사법적 효과, 즉 법인격의 소멸과 권리·의무의 승계 등도 회사의 속인법이 규율하는 사항이라고 할 것이다.
섭외사법(2001. 4. 7. 법률 제6465호로 전문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섭외사법’이라 한다) 제29조는 "상사회사의 행위능력은 그 영업소 소재지의 법에 의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을 뿐 그 속인법에 관한 명문의 규정이 없어 설립준거법주의와 본거지법주의 등 학설이 나뉘어 왔었는데 어느 견해를 따르더라도 구 일본제철의 속인법이 일본국 법률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으므로(전문개정된 후의 국제사법 제16조는 "법인 또는 단체는 그 설립의 준거법에 의한다"라고 규정하여 원칙적으로 설립준거법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구 일본제철의 회사해산 및 분할에 따른 법인격 소멸 여부, 채무승계 여부 등을 판단할 준거법으로는 당시 일본국의 법률인 회사경리응급조치법, 기업재건정비법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위 법률들이 법인격남용의 이론에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이므로 이 사건에서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나, 위 주장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2) 회사경리응급조치법, 기업재건정비법의 규정에 따른 판단
섭외적 사건에 관하여 적용될 외국법규의 내용을 확정하고 그 의미를 해석할 때에는 그 외국법이 그 본국에서 현실로 해석·적용되고 있는 의미·내용대로 해석·적용되어야 하는바(대법원 2003. 1. 10. 선고 2000다70064 판결 등 참조), 을 제1호증의 1의 기재에 의하면, 회사경리응급조치법에서는, 1946. 8. 11. 오전 0시(이하 ‘지정시’라 한다)를 기준으로 회사의 계산은 신계정과 구계정으로 구분하여 경리해야 하고, 회사의 목적으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사업의 계속 및 전후 산업의 회복진흥에 필요한 것은 신계정에 소속시키며(위 법 제1조, 제7조), 지정시 이전에 생긴 원인으로 발생한 채권은 구채권에 해당하고, 구채권에 대해서는 변제 등 소멸행위를 금지하며(위 법 제14조), 예외적으로 변제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구계정으로 변제하여야 하고, 신계정으로 변제하는 경우는 특별관리인의 승인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에만 일정한 금액의 한도 내에서 가능하며(위 법 제14조), 지정시 이전의 원인으로 생긴 수입, 지출은 구계정의 수입, 지출로 경리해야 한다(위 법 제11조)고 규정되어 있다.
위 규정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원고들의 위자료청구권은 지정시 이전에 생긴 원인으로 발생한 것으로서 구채권에 해당하고, 위 규정의 취지는 구채권이 구계정에 속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원고들의 위자료청구권은 구계정에 속한다고 봄이 상당하다.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위 법에서 정한 ‘지정시 이전에 생긴 원인’이란 정상적인 영업활동과 관련된 것만을 의미하고 원고들의 경우와 같이 전쟁범죄를 위하여 강제노동에 종사시키는 불법행위를 의미하지는 않으므로, 원고들의 권리는 구채권에 해당하지 않고 신계정과 구계정 모두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리였다고 주장하나, 이를 인정할 근거가 없으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또한, 을 제1호증의 2의 기재에 의하면, 기업재건정비법에서는, 특별경리주식회사가 신계정에 속하는 자산을 출자할 경우 출자받는 자가 지정시 이후에 특별경리주식회사의 신계정의 부담이 된 채무를 승계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위 법 제10조), 구계정에 속하는 채무의 승계여부에 대하여는 아무런 규정이 없고, 지정시까지 생긴 손실액과 이익액을 계산하여(위 법 제3조) 손실액이 이익액을 초과하는 경우 그 초과액을 특별손실액으로 하여(위 법 제4조) 일정한 기준에 따라 주주, 채권자가 부담하도록(위 법 제7조) 규정하고 있다.
위 규정내용을 종합하면, 제2회사가 당연히 특별경리주식회사의 채무를 승계하지는 않는다는 전제에서, 지정시 이후에 신계정의 부담이 된 채무를 승계하는 경우에 대하여만 채권자를 보호하는 규정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제2회사가 특별경리주식회사의 구계정에 속하는 구채권을 당연히 포괄적으로 승계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근로관계에 기한 채권은 회사의 경영주체 변경에 의하여 당연히 포괄적으로 새로운 회사에 승계되고, 원고들의 강제노동에 의한 손해배상청구권은 근로관계에 기한 채권의 일종이므로, 구 일본제철의 원고들에 대한 채무를 피고가 당연히 승계하였다고 주장하나, 이를 인정할 근거가 없으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도 이유 없다.
(3) 결론
그렇다면, 위와 같이 판단한 일본 판결의 내용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비추어 허용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일본의 위 확정판결은 우리나라에서 그 효력이 인정된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 소 중 원고 1, 원고 2의 청구 부분은, 일본의 위 확정 판결과 동일한 소송을 우리나라 법원에 다시 제기한 것으로서, 위 확정판결의 기판력에 저촉되어 이 법원으로서는 종전 판결과 모순된 판단을 할 수 없으므로, 위 청구 부분은 본안에 관하여 더 나아가 살필 필요 없이 이유 없다.
4. 원고 3, 원고 4, 원고 5의 청구에 관한 판단
가. 청구원인에 대한 판단
(1) 국제법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책임 성립 여부
원고 3, 원고 4, 원고 5(이하 ‘원고 3 등’이라 한다)는 구 일본제철이 강제노동에 관한 국제노동기구(ILO) 제29호 조약(C29 Forced Labour Convention), 국제인권규약 등 국제법 규정을 위반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손해배상책임을 진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국제법상 사인(私人)의 주체성 인정 여부에 관하여 국가만이 그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으나 국제법상 사인의 주체성을 부정할 근거가 부족하고, 다만 사인이 실제로 국제법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여부는 개개의 조약, 국제관습법에서 정한 규범의 내용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특히 사인이 국제법에 근거하여 다른 국가 또는 그 국민을 상대로 직접 어떤 청구를 할 수 있는지 여부는 각 조약 등 국제법 자체에서 해당 규범의 위반행위로 인하여 권리를 침해당한 사인에게 그 피해회복을 청구할 수 있다는 취지 및 그에 관한 구체적인 요건, 절차, 효과에 관한 내용을 규정한 경우나 그 국제법에 따른 사인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국내법적 입법조치가 행하여진 경우에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보면, 강제노동에 관한 국제노동기구 제29호 조약 등의 각 규정에, 강제노동으로 피해를 입은 사인에게 강제노동을 실시한 주체에 대해 직접 손해배상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없다. 그렇다면, 원고 3 등은 국제법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을 구할 수는 없다 할 것이므로, 이 부분 원고 3 등의 주장은 더 나아가 살펴 볼 필요 없이 이유 없다.
(2) 국내법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책임 성립 여부
㈎ 준거법
구 섭외사법 제13조 제1항에 의하면, 불법행위로 인하여 생긴 채권의 성립 및 효력은 그 원인된 사실이 발생한 곳의 법에 의하도록 되어 있는바, 위 3.가.(2)의 ㈏항에서 본 바와 같이, 구 일본제철의 불법행위는 대한민국 내 원고 3 등의 각 거주지역에서 원고 3 등을 동원한 것으로부터 일본에 이르러 강제노동에 종사시키기까지 일련의 계속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대한민국은 불법행위지로서 그 원인된 사실이 발생한 곳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한민국 민법의 불법행위에 관한 규정이 피고의 손해배상책임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준거법이 된다.
㈏ 판단
위 증거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일본 정부는 일본의 제철소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우리나라의 인력을 동원한 사실, 구 일본제철은 철강통제회에 적극 참여하는 등 일본 정부의 인력동원정책에 공모하여 인력을 확충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원고 3 등은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상황하에서 장차 일본에서 처하게 될 노동 내용이나 환경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채 일본 정부와 구 일본제철의 위와 같은 조직적인 기망에 의하여 동원되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또한, 원고 3 등이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하여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였고, 구체적인 임금액도 모른 채 강제로 저금을 당하였으며, 상시 감시를 당하여 이탈이 불가능하였고, 식사도 불충분하게 주어진 사실은 위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구 일본제철은 원고 3 등을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한 것이고 이는 불법행위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원고 3 등이 위와 같이 강제노동에 종사하면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므로, 구 일본제철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고 3 등의 정신적 고통을 금전적으로나마 위자할 의무가 있다.
나.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원고 3 등의 위자료청구권이 소멸하였는지 여부
위 1.나.의 (3),(4)항 기재 청구권협정, 합의의사록의 내용 및 갑 제17호증, 제18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청구권협정에서는,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이익과 양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차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이익으로서 각 상대국의 관할 하에 있는 것에 대하여 각 상대국에서 국내조치를 취하기로 하고(청구권협정 제2조 제3항, 합의의사록 ⒠항), 이에 대하여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청구권협정 제2조 제3항)고 정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이에 의하면,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청구권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상대국이 취하는 국내조치에 대하여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고 재산, 권리, 이익, 청구권에 대하여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하며 상대국이 어떠한 국내조치를 취할지는 각 국의 결정에 맡기기로 한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따라서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 자체가 소멸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원고 3 등의 이 사건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소멸한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다. 구 일본제철과 피고의 법인격 동일성 및 채무승계 여부
구 일본제철이 원고 3 등에게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지급채무를 부담하는바, 원고 3 등이 위와 같은 위자료청구권을 피고에 대하여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본다.
원고 3 등은,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 사표(社標) 등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을 뿐 아니라, 피고가 구 일본제철에 의해 징용당한 자의 유족에게 위자료 및 위령제 비용을 지급한 점에 비추어보아도 구 일본제철과 피고는 법인격이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갑 제68호증 내지 제73호증(각 가지번호 포함), 갑 제80호증의 1 내지 3의 각 기재만으로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 등을 그대로 승계하였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가사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을 그대로 승계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점과 구 일본제철과 상호가 유사한 점 등을 들어 구 일본제철과 피고의 법인격이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피고가 구 일본제철에 의해 징용되어 1945. 7. 및 같은 해 8.경 가마이시제철소에서 함포사격으로 사망한 자들의 유족들에게 위자료 및 위령제 비용을 지급한 사실은 당사자 사이에 다툼이 없으나, 이를 인도적인 차원에서 책임을 부담한 것으로 볼 수 있음은 별론으로 하고, 이러한 사실을 들어 피고가 구 일본제철과 법인격이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원고 3 등에 대한 채무를 승계하지 아니한 것은 위 3.나.(2)의 ㈑항에서 본 바와 같은바, 피고가 구 일본제철과 법인격이 동일하다거나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원고 3 등에 대한 위자료지급채무를 승계하였음을 전제로 하여, 피고에 대하여 위자료 지급을 구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원고 3 등의 이 사건 청구는 이유 없다.
라. 시효소멸 여부(부가적 판단)
(1) 피고의 주장 및 판단
피고는 원고 3 등의 이 사건 위자료청구권이 시효로 소멸하였다고 주장하므로 살피건대, 원고 3 등의 이 사건 위자료청구권은 구 일본제철이 원고 3 등을 강제노동에 종사시킨 불법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10년간 이를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소멸한다고 할 것인바(민법 제766조 제2항), 원고 3 등이 주장하는 불법행위가 있은 날로부터는 물론 그 이후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국교가 정상화된 1965. 6. 22.로부터 기산하더라도 이 사건 소가 그로부터 10년이 이미 경과된 후인 2005. 2. 28. 제기되었음이 기록상 명백하므로, 원고 3 등의 이 사건 위자료청구권은 이 사건 소제기 이전에 이미 시효로 소멸하였다 할 것이다.
(2) 원고 3 등의 주장 및 판단
이에 대하여 원고 3 등은, ① 청구권협정의 존재 등 법률상 장애사유로 인하여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고, ② 피고가 시효소멸의 항변을 하는 것은 신의칙이나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위 ①주장에 대하여 살피건대, 소멸시효는 객관적으로 권리가 발생하여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하고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동안은 진행하지 않지만 여기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경우란 그 권리행사에 법률상의 장애사유, 예컨대 기간의 미도래나 조건 불성취 등이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사실상 권리의 존재나 권리행사 가능성을 알지 못하였고 알지 못함에 과실이 없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유는 법률상 장애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것인바(대법원 2006. 4. 27. 선고 2006다1381 판결 등 참조), 그 동안 청구권협정 제2조 및 그 합의의사록의 내용 해석에 관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한 것인지, 혹은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개인적 손해배상청구권도 포기한 것인지에 관하여 논란이 있어 왔고, 원고 3 등이 위 청구권협정의 명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것으로 믿었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사정만으로 원고 3 등의 권리 행사를 저지하는 법률상의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원고 3 등의 위 주장도 이유 없다.
다음으로 위 ②주장에 대하여 살피건대,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는 경우란,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거나, 또는 일단 시효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와 같이 신뢰하게 하였거나, 채권자 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채권자가 채무의 변제를 수령하는 등의 사정이 있어 채무 이행의 거절을 인정함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말하는바(대법원 2005. 5. 13. 선고 2004다71881 판결 등 참조), 이 사건의 경우 일본의 강제징용 등 불법행위에 구 일본제철이 공모하여 개입한 사정만으로, 구 일본제철과 법인격이 동일하지도 않고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승계하였다고도 볼 수 없는 피고에 대하여 채무 이행의 거절을 인정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원고 3 등의 위 주장도 이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