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의 부친인 고 손용우(孫龍祐)씨는 1923.1.19. 경기도 양평(본적: 경기도 양평 설악 방일 237)에서 출생하여 1999.2.23. 사망하였다. 그의 창씨개명은 덴지츠 마사오(天日正雄)이다.
손용우 씨 배우자 김경희 씨는 서울 출신이고 자녀는 4남 2녀의 6남매로, 손혜원 위로 오빠가 3명,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 각 1명이 있다. 손혜원 의원과 막내 남동생 손현 씨 등은 서울에서 출생했다.
1940년 9월 초순 서울 조선문화학원 중등과 1학년에 재학중이던 손용우(19세)는 동급생인 안병구(19세), 권각(18세), 이동찬(18세)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 일본은 머지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조선독립에 매진해야하며, 일본역사는 허위이므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고,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한 동아일보 간행의 중지와 일제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의 부당함을 성토하고, 중일전쟁을 조선독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등의 발언으로 체포되어 1년6월의 징역형을 받았다고 공적조서에서 전한다.
● 본적 : 경기도 양평군 설악면 방일리 237 (京畿道 楊平郡 雪岳面 訪逸里 二三七)
● 주소 : 서울 성북동 133-60 (京城府 城北町 一三三 ~ 六O)
✔ 1940년 10월 1일 경성부 사직공원(社稷公園) 정문 앞에 게시중인 국세조사(國勢調査: 조선인의 노동력과 물품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인적사항, 가족구성 등을 파악하기 위한 호구조사. 성명, 세대주와의 관계, 性, 연령, 국적 및 民籍, 출생지, 배우관계, 읽고 쓰는 교육수준, 직업, 산업, 종사상의 지위, 상주지 등이 포함.) 선전 입간판에 누군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연필로 쓴 낙서가 발견되었다. 수사에 나선 종로경찰서는 서대문에 있는 조선문화학원 중등과 1학년 이종호를 용의자로 검거하고, 그가 낙서의 범인이라는 자백을 받았다. 경찰의 취조 결과, 이종호는 1940년 8,9월 무렵에 친구들에게 민족사상의 주입․선전을 받은 뒤 민족의식이 농후해져서 조선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의하고 자신의 민족사상을 선전하여 일반대중에 선동하여 조선독립투사를 획득할 목적으로 9월 28일 오후 5시 무렵에 낙서를 했다.
우발적이었을지도 모를 한 소년의 행동은, 경찰의 의지대로 조선독립이라는 거창한 목적을 위한행위로 돌변하였다. 경찰은 배후를 탐색하면서 이종호의 고향인 황해도 옹진군 출신자 6명과 문화학원 생도 5명, 중동학교 생도 7명을 중심으로 한 ‘불온언동’ 관계자들을 검거하였다.
먼저 이종호 등 옹진 출신들이 검거되었다. 그들은 김태현 방에 모여서 소련과 중국이 손을 잡고 일본군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소련군에 가담하여 조선독립을 용이하게 하는 데 찬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다음으로 이종호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같은 문화학원 생도 손용우(孫龍祐, 天日正雄)가 지목되었다. 손용우는 중동학교의 이완기에게 민족의식을 자극받고, 문화학원 내에서 급우들을 선동하였는데 이때 이종호도 그 영향을 받았다는게 경찰의 판단이었다.
즉, 중동학교 4학년 이완기(18세)에게 민족의식을 자극받은 조선문화학원 중등과 1학년인 손용우(19세)는 문화학원 내에서 급우들을 선동하였는데, 이때 같은 중등과 1학년인 이종호(17세)가 그 영향을 받아 1940년 9월 28일 오후 5시 무렵 경성부 사직공원 입구에 게시중인 국세조사(國勢調査) 광고판에 연필로 '대한독립만세'라고 낙서를 하였다는 것이다.
○ 중동학교 4학년 이완기(18세) ▶ 조선문화학원 중등과 1학년 손용우(19세) ▶ 조선문화학원 중등과 1학년 이종호(17세)로 영향이 미쳤다는 것이다.
이완기는 손용우와 같은 집에서 하숙하면서 세 차례에 걸쳐 민족주의를 지도하고 민족주의자 이광수의 '무정'을 소개하여 손용우에게 민족의식을 자극시켰다. 경찰이 보기에 이완기는 원래 민족의식이 농후해서 민족독립을 몽상하던 학생이었다. 그래서 이완기는 1940년 9월 4학년 갑조 교실에서 장개석이 일본에 화평조건을 제시하면서 '조선독립을 허용할 것'이라는 항목을 넣었다고 선전하였다. 이에 앞서 8월에 중동학교 생도가 용산연병장에 근로 작업을 하러 갔을 때 이완기의 감화를 받은 학생들이 ‘일한병합’과 조선인특별지원병제도 등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고, ‘지나사변(중일전쟁)’은 인구의 다과, 식량 문제, 외국 원조 등으로 인해 일본이 패전한다고 선동하였다.
결국 두 달여의 수사 끝에 검찰은, 황해도 옹진군 출신의 학생을 중심으로 문화학원 내에 민족그룹을 결성하고 중동학교생과 연락하여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자주 회합․협의를 계속한 사건으로 정리하였다. 이 때 검찰은 문화학원 생도와 중동학교 생도를 분리해서 처리하였다. 그래서 옹진군 출신 학생 6명은 치안유지법, 보안법, 육군형법 등 위반으로 기소하고, 문화학원 4명은 기소유예 하였다. 중동학교 생도 7명은 별건으로 처리했다.
아래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학생들의 명단이다.
○ 1941년 10월 ‘조선독립’ 낙서사건 피의자(총 18명)
1. 옹진군 출신 6명
2. 문화학원 생도 5명
3. 중등학교 생도 7명
○ 조선문화학원 중등과 1학년생
이종호(17세 *옹진군 출신), 박회락(19세 *옹진군 출신), 손용우(19세), 안병구(19세), 권각(18세), 이동찬(18세), 이정문(18세)
○ 중동학교 4학년생
이완기(18세), 서보식(19세), 문봉성(19세), 노영철(19세), 양주승(20세), 황규익(18세), 김낙진(17세)
○ 배재중학교 1학년 박병수(16세 *옹진군 출신)
○ 인문중등학원 1학년 조재홍(18세 *옹진군 출신)
○ 고등사범학원 1학년 은인관(17세 *옹진군 출신)
○ 경성전기 소제부 김태현(19세 *옹진군 출신)
1966년 지은 시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시인 이산 김광섭(金珖燮 1905.9.22 ~ 1977.5.23. 함북 경성군 출생)은 1933년 중동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혐의로 1941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정부 초기에 공보비서관을 지냈고, 이후 경희대 교수로 재직했다.
김광섭이 중동학교 재직시 생도들을 선동하고, 그 영향을 받은 중동학교 생도 이완기가 다시 문화학원 생도 손용우를, 손용우가 낙서의 범인 이종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과정으로 연결되었다.
※ 出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64호(2014.8.31. 발행) - 장신 「일제하 형무소의 사상범 대책과 전향자 처우」 김광섭의 「옥중일기」를 중심으로
✔ 고 손용우씨는 지난 2018년 8월 15일 광복절에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서훈 받았다. 1982년, 1985년, 1989년, 1991년, 2004년, 2007년 총 6차례에 걸쳐 보훈신청을 했다가 심사에서 탈락했는데, 그 탈락 사유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입증 자료 미비’ 혹은 ‘광복 이후의 행적’ 등으로 설명했고, 광복 후 조선공산당 공산청년동맹 서울지부 청년단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이력이 있었다고 했다.
국가보훈처가 밝힌 손용우 심사 내용
1. 광복 이후 행적 관련
손용우는 22세 때인 1945년 12월 조선공산당 공산청년동맹 서울지부 가입[1989년 가평경찰서장 사실조회회보서]했고, 1947년 말 입북하여 1948년 남파되어 6.25 당시 북한 중앙정치국과 재접선 활동 후 남한에 잔류했다는 증언[1990년 성북경찰서장 사실조회회보서]이 있고, 1949.4.14.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류 2일, '조선노동당 가평군 설악면당 가일리 세포책'으로 활동하였다는 증언(1986.8 치안본부)이 있다.
2. 2018년 8.15 광복절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서훈된 이유
광복 후 사회주의 학생운동을 한 것으로 추정은 되나,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 동조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기에 유공자로 의결하였다.
※ 이승만 정부의 정부수립일인 1948.8.15.을 건국일로 보면, 2018.8.15.은 건국 70주년이 되고,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인 1919.4.13.을 건국일로 보면 2018.4.13.은 건국 99주년이 된다.
2007년 탈락한 뒤 11년만인 지난 2018년 2월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는데, 4개월 뒤인 6월에 보훈처는 사회주의 활동 경력 인사에게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후에 손 의원의 부친이 애족장을 받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의혹을 사고 있다. 이에 대해 보훈처는 어떤 압박도 받은 게 없다고 밝혔다.
또 다른 의혹은 손 의원의 오빠인 손모씨가 2018년 2월 전화로 신청했는데, 2018년 광복절 포상자 중 전화로 신청을 한 경우는 이 한 건 뿐이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보훈처는 재심 신청자의 경우엔 구두 신청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확실히 유공자 승인이 난다는 정보를 미리 알지 않고서야 어떻게 11년만에 전화로만 재신청을 할 수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관련기사 ▶손혜원, '부친 유공자 선정' 전 피우진 보훈처장 면담(2019.1.21)
☞ 독립유공자 등록의 절차 : 독립유공자, 그 유족 또는 가족이 국가보훈처장에게 등록 신청을 하면, 보훈처장은 독립유공자의 요건과 그 유족 또는 가족으로서의 요건을 확인한 후 보훈심사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독립유공자, 그 유족 또는 가족에 해당하는지를 결정하게 된다.
지난 2017.5.17. 제29대 국가보훈처장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여성인 피우진 예비역 중령을 임명했다. 피우진 보훈처장은 1979.8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항공학교 학생대 학생대장을 거쳐 중령으로 예편했다.
2007년까지 6차례에 걸쳐 보훈신청 심사에서 탈락했던 그 요건이 문재인 정권에서 추호도 망설임 없이 완화되고 통과되었다. 결국 그들과 같은 편의 노선은 어떠한 구실이든 둘러대어 정당화시키고 면제부를 주고 있다. 결국 그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정서에 편승하는 정치적 편향성이 여전히 또 국가보훈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 1945년 8월 15일 여운형, 안재홍 등은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기 위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하고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 허헌이 맡았다. 그러나 건준이 지나친 좌익진보 세력의 조직으로 인해 민족주의계 인사들이 탈퇴를 하게 된다. 건준은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고, 중앙의결기관으로 중앙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여 명과 12명의 고문을 선출하였다. 중앙인민위원의 구성은 민족주의자 9명과 여운형계의 중도좌파 10명 내외를 제외하면 다수가 박헌영계의 재건파 공산당 계열이었다.
1945년 9월 14일자로 중앙인민위원회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결정하고,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무부장 조만식 등으로 구성하였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원봉 등은 환국하지 않은 부재 상황에서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1945년 11월 7일 주석 취임을 거절하고, 김구도 취임을 거부하게 된다.
1945년 11월 12일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발족시키고 11월 20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중앙인민위원회의 보강을 위하여 12명으로 구성된 전형위원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인공은 미군정으로부터 실체를 인정받지 못했고. 민족주의 세력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결국 미군정청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승인을 거부하자 자동 해체되었다. 이 세력들은 1946년 2월에 발족한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집결하게 된다.
✔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24일 박헌영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재창당한다. 이후 같은 해 소련은 북에서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평양의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해 친소파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한 김일성파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였고, 김용범이 책임비서 대리로 선출되었다가 1945년 12월 17일과 18일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통해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된다. 1945년 10월 23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북조선분국의 설립을 정식으로 승인한다.
1946년 6월 22일 북조선분국은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꾸고 서울을 연고로 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한다. 이어 북조선공산당은 1946년 8월 28일부터 8월 30일까지 연안파가 세운 조선독립동맹 계열 중심의 조선신민당을 통합하여 북조선로동당을 발족한다.
남한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초기에는 온건 노선을 걷다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이 되면서, 소련의 지령에 의해 강경노선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후 조선공산당이 당비 마련을 위해 위조지폐를 제작한 정판사(精版社)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타격을 받게 되자, 수세를 전환하기 위해 시위와 봉기를 일으키면서 더욱 급진적 공산좌익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고, 대중들로부터 부정적 여론이 심화되면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신민당과 조선인민당의 3당이 합당한 남조선로동당을 만들게 된다. 이후 1949년 6월 24일 남조선로동당은 북조선로동당에 흡수되고 동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김일성을 선출하게 된다. 이 조선노동당이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게 된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영·소 외무장관의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영·중·소에 의해 최고 5년간의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에 대한 반탁 시위가 격렬히 벌어지게 되고,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은 반탁,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좌익은 찬탁으로 극심하게 대립하게 된다.
결국 이 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1947년 9월 17일 유엔에 상정되고, 유엔총회는 1948년 3월 31일 안에 유엔감시하의 한국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여 9개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을 발족시키게 되고, 소련군의 입국거부로 북한을 배제한 남한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한 김구는 남북협상을 통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통일을 모색하고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남북대표자 연석회의’를 제의하여 1948년 4월 평양을 방문하였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귀환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5·10 총선거)가 실시되고,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회되었고, 유진오 등에 의한 제헌헌법안이 착수되고,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되어, 7월 20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소련과 남북한의 공산주의 좌익 세력들은 유엔 감시하에 치러지는 남북한의 총선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조기 철수와 조선인들에 의한 조선 문제 처리를 주장하였는바, 결국 그 속셈은 한반도의 공산화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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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혜원 의원은 부친이 몽양 여운형에 감복되어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여운형의 청년 비서로서 여운형을 따라 1950년 6.25전쟁 전 10대 시절인 1940년부터 독립운동을 도와서 친일 반대 데모에 뛰어들어 1941년에 2년 3개월의 감옥살이를 했는데, 이번 서훈 사유에는 1년 6개월로 나오지만 데모를 하다가 징역이 추가된 걸로 알고 있고, 해방 이후 젊은 시절까지 독립운동과 학생운동 일선에서 극렬하게 뛰었던 정치인이었고, 그 이후로는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는데, 통일이 되기 전에는 정치가가 될 마음이 없다고 했다며 그 부친을 소개했다. 여운형에게서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을 시작했다던 1940년경 당시 손용우는 17세였다. <2018.8.14. 오마이뉴스 기사>
"통일이 되기 전에는 정치가가 될 마음이 없다 했다"는 이 말을 곱씹어 보면 결국 남북합작이 아닌 남한만의 주도로 탄생된 정권에 대한 강한 부정과 반감을 엿보게 된다. 그가 생도시절 여운형 등의 영향을 받아 비록 항일적인 기질을 발휘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미미하고 단편적인 것이고, 그의 마음속에 지배하는 사상과 체제는 여운형의 중도좌파 사회주의 체제든 박헌영의 극좌 공산주의 체제든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경도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북한의 연방제 통일정부의 이상을 지향한 것은 아닌지는 모르겠다. 어떤 변형의 통일이든 그가 추구하는 체제에서의 삶을 바라면서 말이다. 김일성은 1960년 8월 15일 해방 15주년 경축대회에서 처음으로 남북 총선거 실시를 위한 과도기적 남북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안한 바가 있다. 당시 6세의 딸 손혜원을 둔 38세 손용우는 무엇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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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훈장에는 5등급이 있는데, 1등급 대한민국장, 2등급 대통령장, 3등급 독립장, 4등급 애국장, 5등급 애족장으로 나뉜다. 이번 손혜원 의원의 부친인 고 손용우씨는 건국훈장에서 5등급인 애족장이 서훈되었는데, 애족장은 손용우 본인이 생존시에는 매달 240만6천원의 보상금이 지급되고, 본인이 사망시에는 그 유족인 배우자 김경희씨에게 매달 151만8천원이 지급되고, 배우자마저 사망하게 되면 그 다음 순위 유족인 자녀(손혜원 등 자식) 1인에게 매달 148만3천원을 지급하게 된다.
- 만약 자녀 등 유족이 2명 이상이면 나이가 많은 1인을 우선하되, 독립유공자를 주로 부양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그 사람을 우선한다. 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순위 유족 간의 협의에 의하여 같은 순위 유족 중 1명을 보상금을 받을 자로 지정한 경우에는 그 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한다.
동순위자가 2인 이상인 경우 보상금 수급자 지급순위에서는 자녀일 경우 1. 유족 간 협의로 지정한 사람 2. 독립유공자를 주로 부양한 사람 3. 나이 많은 사람 순으로 결정된다.
※ 이전에는 독립유공자 유족의 보훈급여금은 수권자녀 한 사람에게만 지급이 되어 왔는데, 2018년 4월 6일부터 독립유공자의 자녀 또는 손자녀 중에서 보상금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기준 중위소득 등 생활수준을 고려하여 생활안정을 위한 지원금을 지급하게 된다. 이 지원금을 받으려는 사람은 국가보훈처장에게 그 지원금의 지급을 신청하면 된다. 가구 소득이 기준 중위소득 50% 이하(4인 가구 기준 225만9601원)이면 매달 46만8000원, 70% 이하(4인 가구 기준 316만3441원)이면 매달 33만5000원을 받게 된다.
만약 이 지원금을 비롯한 보훈급여금 등이 거짓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지급되었거나, 그 보훈급여금 등을 받게 된 사유가 소급하여 소멸한 경우 또는 보훈급여금 등이 잘못 지급된 경우에는 환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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