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2005.7.27. 10:55 인터넷신문 '데일리서프라이즈' 기고 글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

지금 인천 만민공원에는(자유공원은 한국전쟁 후 만병통치 같은 '자유'라는 말의 범람으로 바뀐 이름임) 맥아더동상 허물기 쪽과 지키기 쪽 사이에 공방이 치열하다.

폭력몰이와 색깔몰이가 웬 말인가?

앞쪽 사람들은 으레 그렇듯이 우리 민족고유의 옷이나 생활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 민족에 대한 아련하고 애틋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지만 뒤쪽 사람들은 군복과 훈장 또 미국 국기인 성조기 등으로 치장한 차림이 많아 마치 세계만방을 휘젓고 다니는 미국 군인과 같다. 그래서 뭔가 무시무시한 전쟁사태가 터질 것 같은 공포감을 불러온다.

이러한 겉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듯 7월 17일 공원에서 양측의 충돌은 뒤쪽이 앞쪽을 일방적인 힘으로 몰아붙이려는 짐승몰이 작전을 연출하는 듯 했다. 글쎄 지금이 어느 땐데 이 동상 공방이 폭력몰이와 '빨갱이'라는 색깔몰이로 결판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어이가 없다.

이제까지 으레 그리 해 왔듯이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합리적 방법일랑 아예 안중에도 없거나 또는 역량이 전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21세기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는 탈냉전 통일시대다. 이제 구태의연한 방식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합리적 논쟁을 통한 자기주장의 관철만이 용납되는 사회임을 제대로 깨닫기 바란다.

다른 한편 확고한 신념에 가득 찬 그들의 겉모습을 보건데 그들 역시 합리적 논리와 근거를 내면 속에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보여지기 도 한다. 그래서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맥아더의 진면목을 들추어내어 이를 바탕으로 맥아더 동상허물기가 너무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이고 합리적 행보임을 피력하겠다. 욕설이나 비방이 아니라 상응하는 차분한 반론을 기대해 본다.


38선 분단 집행의 집달리 맥아더

지금 한반도는 936년 고려의 통일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분단된 적은 없다. 후삼국의 분열도 44년으로 이렇게 길지는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도 35년으로 분단 60년에 비하면 반절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다 주한미군이 평택으로 이주하면 최소한 50년은 더 머물겠다하니 이대로 되면 분단이 최소한 110년은 된다는 얘기다.

이 민족비극의 원조인 38선은 미국이 이미 45년 7월 중에 계획을 세웠고 최종 획정은 8월 11일 러스크라는 중령이 미 국무성 한 구석에서 지도로 확정지었다. 우리 조선사람 누구와도 상의 한마디 없이 또 연합국 누구와도 상의 없이 독단으로 결정했다. 베트남 역시 16도 선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리적 분단을 결정하고 자행했다.

이 결정을 바로 집행한 당사자가 맥아더이다. 8월 15일 일반명령 1호를 선포해 38선에서 하루아침에 우리의 조국을 두 동강 내어버린 것이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하나 됨을 위한 통일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이 분단집행 집달리를 찬양하는 동상이 아직까지 국제관문인 인천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또 1998년 인천청소년 여론조사에서 이 분단집달리는 20%의 지지를 얻어 인천의 대표 인물 1위를 기록했다. 마치 우리가 분단을 기리고 즐기는 것으로 비쳐지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식민지총독과 같은 점령군사령관

맥아더를 많은 남쪽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짝 사랑하고 있다. 점령 당시 만약 맥아더가 조선 사람들을 사랑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배려했더라면 점령군사령관으로서 아마 다음과 같은 포고문은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표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교란케 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All persons will obey promptly all my orders and orders issued under my authority. Acts of resistance to the occupying forces or any acts which may disturb public peace and safety will be punished severely).

제5조 군정기간에(during the military control은 '군사점령기간'이 정확한 번역임) 있어서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하거나 부동할 때는 영어 원문을 기본으로 한다.

완전히 식민지총독 부임과 같은 서슬 퍼런 모습으로 점령군의 면모를 한껏 발휘했다. 이런 맥아더와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조선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조선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려 있다. ... 조선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노중선 편, '민족과 통일 1'108, 105).

첫 포고문에서 드러난 이러한 차이가 이후 점령정책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미국 군사정부를 통해 조선을 직접 통치하려 했고 이 결과 바로 군사정부가 수립되어 직접적인 점령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소련은 자기들이 직접통치행위를 책임지는 군사정부가 아니라 조선인자치정부 성격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인 점령정책을 펴나갔다.

미군이 직접적인 군사통치를 자행한 남쪽은 점령 3년 동안 1946년의 대구 10월항쟁, 1948년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등 인민항쟁과 야산대와 유격대 투쟁 등 수많은 항쟁과 전투와 폭동의 연속이었다. 이 결과 1950년 6.25전쟁 직전까지 무려 10만 명의 희생이 발생했다. 곧 이미 한국전쟁의 시발인 작은전쟁의 연속이었다.

반면에 간접적인 점령정책과 조선인에 의한 자치정부를 시행한 북쪽에서는 이런 진통과 혼란이 없이 안정을 누렸으며 친일청산과 대대적인 사회경제개혁이 이뤄져 친일파가 더욱 기성을 부린 남쪽과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이래도 미국과 맥아더가 조선사람을 위하고 사랑하고 어쩌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맥아더동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 같다.

분단세력과 동북아파시스트 후견인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강제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38선의 지리적 분단에서부터 신탁파동의 이념적 분단, 5.10단정단선의 정치적 분단 등을 주조하고 강요했다. 그렇지만 이는 국내세력의 동원이나 협력이 없이 이뤄지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