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일본의 점령 국가들에 대한 피해 배상과 보상 등을 비롯한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연합 국가들 간의 협상이 진행되어 오다가, 마침내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49개 연합국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952년 4월 28일부터 발효되었다.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초청국가는 55개국, 이 중 인도와 버마, 유고슬라비아는 조약 내용에 대해 불만을 품고 불참하였다. 공동주최국 미국과 영국을 포함 52개국이 회의에 참석하였으나, 공산권의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폴란드 3개국이 서명을 거부, 결국 49개국이 조약에 조인하였다.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관 오페라하우스에서 일본 대표단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관 오페라하우스에서 일본 대표단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한국·북한, 몽골, 중국(*아래 설명)포르투갈(포르투갈령 동티모르 1942-1945 일본지배)은 초청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한국의 청구권 자금은 여기 1965년 한일협정·대일보상청구권 합의와 1962년의 김종필·오히라 메모협상

제일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중국은 전승국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공내전(1946~49년)으로 인해 쪼개진 2개의 정부인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중국)장개석의 중화민국(대만)간의 대립으로 인해, 한 국가의 대표성 문제(* 미국은 장제스 정부 초청 요망, 영국은 모택동 정부 초청 요망으로 합의 실패)로 결국 강화회의에 초청되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장개석 정부는 일본 정부와 배상청구를 위한 협상(1952.4.28. '중일화평조약=臺北和約=Sino-Japanese Peace Treaty' 서명 체결, 동년 8.5. 발효), 모택동 정부는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총리 주은래·일본 다나카 총리 1972.9.29. 양국 간 공동성명 발표) 끝에, 두 정부 모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우호적인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일배상 청구권을 포기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위 '중일공동성명(1972.9.29)'에서 일본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고, 이에 대만은 일본과의 단교조치를 취하게 되고, 이에 일본과 장개석 총통이 맺은 위 중일화평조약(1952.4.28.)의 효력은 중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일본은 이 평화조약 제14조에 의해 물질적·정신적 손해를 입은 국가들에 대한 배상책임 의무를 져야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태평양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식민지 국가에 대한 전쟁배상을 진행하였고, 동남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1955년 미얀마를 시작으로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순으로 배상절차를 진행했다. 이어서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준 배상의 책임으로 경제협력을 실시했다.

강화조약에 서명한 49개국 중 동남아시아 국가는 필리핀, 베트남(당시 월남), 인도네시아, 라오스, 캄보디아 5개국이다.

일본은 1955년부터 1959년에 걸쳐 버마(현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베트남에 대해 보상을 하였다. 일본이 정식으로 침략 피해에 대해 배상한 것은 이 네 나라이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경제 원조를 하거나 무상 경제 협력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배상국가>

필리핀은 1956년 배상·경제협정, 베트남(당시 월남)은 1959년 배상·경제협정, 인도네시아는 1958년 평화·경제협정을 일본과 맺고 배상지원을 받았다. 

버마(현 미얀마)는 강화회의의 불참으로 조약 서명국은 아니었지만, 제일 먼저 배상협정에 나서서(1954년 배상협정) 배상을 받았다. 이후 다시 준 배상(1963년 경제·기술협정)의 지원을 받았다.

<준 배상국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강화조약의 체약국이었지만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일본은 두 나라에 무상 자금 공여(준 배상)를 실시했다.

태국(1955년 협정), 싱가포르(1967년 협정), 말레이시아(1967년 협정), 미크로네시아(1969년 협정)는 조약 체약국은 아니었지만 일본과 별도의 협정을 맺어 경제적 지원(준 배상)을 받았다.

이상의 동남아시아 국가에 대한 배상 및 준 배상 금액은 아래와 같다. 

■ 배상대상 국가와 배상금액

○ 버마(현 미얀마; 1942~1945년 일본지배) * 배상액 총 3억4,000만 달러(총 1,224억 엔)

버마(현 미얀마) 국기

1) 1차 배상

∙ 10년간 무상지원 720억 엔(2억 달러)

▪ 10년간 5,000만 달러 경제협력 차관

- 재정차관 2,000만 달러[이자율: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이자율수준을 감안하여 책정, 3년 거치 7년 상환]

- 상업차관 3.000만 달러

▪ 협정일 : 버마 양곤에서 1954년 11월 5일(1955.4.16 발효)

▪ 협정명 : 1. 일본과 버마 연방 간의 평화조약(日本とビルマ連邦との間の平和条約)

2. 일본·버마 평화 조약 및 배상·경제 협력 협정(日本・ビルマ平和条約及び賠償・経済協力協定)

- 이 협정의 배상재검토 조항에 의해 1963년 3월 29일 추가협정을 맺어 1억4,000만 달러의 무상원조와 3,000만 달러의 차관이 공여되었다.

※ 버마 연방(현 미얀마)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체약국도 아니었으나, 배상협정 체결에는 제일 먼저 나서 1954년에 이 조약에 준하는 양자 간 평화조약을 맺어 배상을 받았다. 이후 버마는 다시 아래의 준배상의 금액을 지급받았다.

2) 2차 배상 (준準 배상)

○ 버마(현 미얀마) 1965 4월 16일부터 12년의 기간 내에 504억 엔(1억4,000만 달러) 무상원조, 3,000만 달러의 차관 공여, 500만 달러(18억 엔)분의 경제협력 무상원조

▪ 협정일 : 1963년 3월 29일 재협정

▪ 협정명 : 일본국과 버마 연방 간의 경제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 (日本国とビルマ連邦との間の経済及び技術協力に関する協定)

○ 필리핀(1942~1945년 일본지배)

필리핀 국기

∙ 20년간 무상 1,980억 엔(순배상액 5억 5,000만 달러)상당의 역무와 생산물에 의한 배상

∙ 상업차관(민간 베이스 장기대부) 2억5.000만 달러(900억엔)

▪ 협정일 : 1956년 5월 9일(1956년 7월 23일 발효)

▪ 협정명 : 일본국과 필리핀 공화국 간의 배상협정(日本国とフィリピン共和国との間の賠償協定)

○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국기

∙ 12년간 무상차관 802억 8,000만 엔(2억2,300만 달러)의 생산물과 역무의 공여

∙ 20년간 상업차관 4억 달러(1,440억 엔) 이상 공여

▪ 협정일 : 1958년 1월 20일 평화조약, 배상협정 조인(1958년 4월 15일 발효) 

▪ 협정명 : 일본국과 인도네시아 공화국 간의 배상협정(日本国とインドネシア共和国との間の賠償協定)

※ 인도네시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약국은 아니었으나, 1958년에 별도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준하는 양자 간 평화조약을 체결해 배상을 받았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와 협정을 맺을 때, 1억7000여만 달러의 무역채권 청구를 포기했다.

○ (남)베트남(1945년 일본지배)

베트남 국기

▪ (1959.5.13. 円차관 협정 조인, 1960.1.12. 발효) : 배상 명목으로 5년간 무상차관 140억 4,000만 엔(3천9백만 달러) 상당의 역무와 생산물 제공

▪차관 1,660만 달러

- 3년간 정부차관 750만 달러(27억엔)

- 경제개발차관 약정(1959.5.13. 1960.1.12.): 협정발효 5년 후부터 상업차관 910만 달러(32억 7,600만엔)의 장기대부(민간베이스)

∙ 재정차관 550만 달러(이자율: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이자율수준을 감안하여 책정, 3년 거치 7년 상환)

▪ 협정일 : 1959년 5월 13일 사이공에서 협정 체결(1960년 1월 12일 발효 * 사이공은 당시 월남이라 불렀던 남베트남의 수도로서, 1975년 월맹이라 불리던 북베트남이 월남을 함락하여 1976년 호찌민특별시로 개칭하였다. 현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다.)

▪ 협정명 : 일본국과 베트남 공화국 간의 배상협정(日本国とヴィエトナム共和国との間の賠償協定)

■ 준(準)배상 대상 국가와 배상금액

○ 태국(타이 왕국)

태국 국기

1955년 7월 9일 특별 円 협정 조인(1955.8.5. 발효) - 5년간에 54억 엔(1,500만 달러) 지불, 2800만 달러의 경제협력

1962년 1월 31일 특별 円新 협정(경제협력협정) 조인(1962.5.9. 발효) - 8년간에 차관 96억 엔(2,670만 달러)의 자본재, 역무 제공

☞ 태국은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점령되어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지만, 전시 중에 일본군이 태국의 화폐를 차입하여 물자를 조달한 건에 관해서 총 150억 엔의 보상을 받았다.

○ 라오스(1945년 일본지배)

라오스 국기

▪ 2년간 10억 엔(300만 달러)의 생산물과 역무의 무상공여

▪ 협정일 : 1958년 10월 15일 경제기술협력협정조인(1959.1.23발효)

▪ 협정명 : 일본국과 라오스 간의 경제 및 기술협력 협정(日本国とラオスとの間の經済及び技術協力協定)

☞ 라오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당사국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대신에 위와 같이 별도의 경제기술협력 협정을 맺어 경제 협력 형태로 무상자금 지원을 받았다.

○ 캄보디아(1945년 일본지배)

캄보디아 국기

▪ 3년간 15억 엔(450만 달러)의 생산물과 역무의 무상공여 · 차관 3,000만 달러

▪ 협정일 : 1959년 3월 2일 경제기술협력협정 조인(1959.7.6 발효)

▪ 협정명 : 일본과 캄보디아 간의 경제 및 기술협력 협정(日本とカンボジアとの間の経済および技術協力協定)

☞ 캄보디아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당사국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대신에 위와 같이 별도의 경제기술협력 협정을 맺어 경제 협력 형태로 무상자금 지원을 받았다.

○ 싱가포르(1942~1945년 일본지배)

싱가포르 국기

1) 29억 4,000만 3천 엔(2,500만 싱가포르 달러 = 81만7천 달러)의 무상공여 

* 참고 : 1967년 평균 1달러 = 3.061220 싱가포르달러

2) 29억 4,000만 3천 엔(2,500만 싱가포르 달러 = 81만7천 달러)의 유상공여 차관

▪ 협정일 : 1967년 9월 21일 싱가포르

▪ 협정명 : 싱가포르와의 「혈채」 협정(シンガポールとの「血債」協定)

※ 싱가포르는 평화조약 체결 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정식 배상 채권국이 되지는 못했지만 1965년 8월에 독립을 달성한 이후 대일 배상에 대한 청구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싱가포르에 대해 정식의 배상청구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여 무상 29억 4,000만 엔과 무상 29억 4,000만 엔의 공여가 이루어졌다.

○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국기

29억4,000만 3천 엔(2,500만 말레이시아 달러 = 81만7천 달러)을 효력발생 일로부터 3년간 무상공여 · 약 1,700만 달러의 생산물과 역무 무상제공

※ 참고 : 말레이시아 링깃(MYR=RM)은 1993년 이전까지는 말레이 달러(M$)로 사용

* 1967년 연평균 1달러 = 3.061220 싱가포르·말레이시아 달러

▪ 협정일 : 1967년 9월 21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1968.5.7. 발효)

▪ 협정명 : 말레이시아와의 「혈채」 협정(マレーシアとの「血債」協定)

※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평화조약 체결 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정식 배상 채권국이 되지는 못했지만 1957년 8월에 독립을 달성한 이후 대일 배상에 대한 청구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말레이시아에 대해 정식의 배상청구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여 무상 29억 4,000만 엔의 공여가 이루어졌다.

○ 미크로네시아

미크로네시아 국기

18억 엔(5백만 달러) 무상 협력자금 제공

▪ 협정일 : 1969년 4월 18일

▪ 협정명 : 태평양 제도 신탁통치지역에 관한 일본국과 미합중국 간의 협정(太平洋諸島信託統治地域に関する日本国とアメリカ合衆国との間の協定)

※ 미크로네시아에 대해서도 1969년 ‘신탁통치지역 미일협정’을 체결하여 18억 엔경제협력자금이 제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