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 출신인 임종석(1966.4.24.)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3기 의장, 열린우리당 대변인, 대통합민주신당 원내 수석부대표,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노태우 정부 시절 한양대학교(당시 23ㆍ한양대 무기재료4) 총학생회장을 지내던 1989년 전대협 의장을 맡았고, 1989년 2월 15일 여의도 농민 폭력 시위를 주도한 혐의(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로 지명 수배되어 1989년 3월 12일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는 임종석의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동년 6월 30일 평양축전 파견 임수경의 밀입북(* 당시 노태우 정부는 임수경의 평양 축전 참가를 허락하지 않았고, 임종석이 제3기 의장으로 있던 전대협이 제3국을 통해 임수경을 파견)을 몰래 도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추가되었다.
이 전대협 후신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은 1997년 이적단체로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 1987년 이른바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이인영 의원과 우상호 의원의 모습
1989년 12월 18일 오전 8시 15분 경 서울청량리경찰서는 호위 학생 5명과 함께 경희대학교 학생회관 건물 계단을 내려오는 임종석을 발견, 검거해 구속을 집행했다. 임종석은 청량리경찰서에서 약 1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오전 9시 50분 경 서울 장안동의 서울지방경찰청 공안분실로 인계되었다.
▲ 당시 현상지명 수배자 명단에 오른 임종석 사진 * 훗날 그는 당시 여장을 하고 다닌적은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1990년 5월 24일 서울형사지법 합의30부(재판장 정상학 부장판사)는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을 선고했다. "북한공산집단이 우리정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전대협을 상대로 평양축전에 초청한 것은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임에도 피고인은 북한의 연방제통일론에 현혹, 우리 정부는 반 통일세력이라는 그릇된 확신에 사로잡혀 전대협대표를 평양축전에 참가시켰으며 이같은 무책임한 소영웅주의적 범법행위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엄벌키로 한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국가보안법(지령수수·잠입·탈출 등)ㆍ집시법ㆍ화염병사용처벌법 등 8개 죄목이 적용됐으며 검찰에 의해 징역12년, 자격정지12년이 구형됐다.
1990년 9월 17일 서울고등법원 형사4부(재판장 박영식부장판사)는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한 임종석에게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다. 1990년 12월 26일 대법원 형사1부(주심 윤관 대법관)은 2심 판결에 불복한 임종석의 상고를 기각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 서울 고등법원 전 전대협 의장 임종석 피고인에게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 선고
대법원 판결을 확정 받은 임종석(전 한양대총학생회장)은 3년6개월(1989.12.18.~ 1993.5)간 복역하다가 1993년 5월 27일 김영삼 정권의 석가탄신일(불기 2537년) 기념으로 가석방 출소되었다. 1999년 2월 22일 김대중 정권의 3·1절 기념으로 사면복권되었다. 유죄판결에 따른 실형으로 인해 병역사항은 미필이다.
<사면복권의 자세한 내용> ▸[박근혜 대통령 사면] 일반사면·특별사면·감형·복권·집행유예 사면에 관한 이해
▲ 1993년 5월 원주교도소에서 가석방 출소하는 임종석과 꽃다발을 건네는 임수경
※ 가석방: 징역 또는 금고의 집행 중에 있는 자가 그 교정 성적이 양호하여 뉘우침의 빛이 뚜렷한 경우, 무기에 있어서는 20년, 유기에 있어서는 형기의 3분의 1을 경과한 후 가석방심사위원회의 신청에 의해 법무부 장관이 행정처분으로 가석방을 할 수 있다. (형법 제72조)
■ 형법
제6절 가석방
1992년 원주교도소 복역 당시 여자 후배였던 현 부인 김소희씨가 편지를 보내왔고, 1년 여 서신 왕래를 하다 출소 후 정을 키워오면서 1996년 결혼하여 이듬 해 딸 동아를 얻었다.
1993년 5월 원주교도소에서 가석방 출소한 이후 8월에 한양대 4학년에 복학하였고, 1995년 8월 대입 10년 만에 졸업했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1999년 2월 22일 대규모 사면복권 당시 복권되면서 공직선거 출마 자격을 얻었다.
▲1999.2.22. 복권 당시의 임종석 인터뷰 장면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피 수혈론'에 따라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내딛었다. 그해 16대 총선(2000.4.13. 목)에서 서울 성동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선의 한나라당 이세기 의원을 누르고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17대 총선(2004.4.15. 목)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성동구을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으며, 이후 열린우리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이후 임종석(당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14.6.4. 수)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캠프 총괄팀장을 맡아 6.11일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임명돼 활동하다가 2016년 제20대 총선 서울 은평을 출마를 위해 2015.12.22. 퇴임을 했다. 2016.3.16 더불어민주당 총선 후보자 2차 경선에서 2002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수행비서로 정치에 입문하여 참여정부 기간 동안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으로 일한바 있는 무명의 신인 강병원(1971.7.9. 전북 고창군生)후보에게 패해 탈락했다. 강병원 후보는 이 지역구 5선 의원이었던 거물 이재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한국의 각 방송사들로부터 저작권 사용료를 징수 받아 북한조선 중앙TV에 매년 1억~2억 원의 금액을 지급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현 청와대 임종석 비서실장 등이 바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창립자이고,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사장직을 역임했다. 이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 바로 저작권대리중개업체이다.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의 현 대표자는 김강, 취급 저작물은 어문·음악·영상·미술·사진 등이고 저작권대리중개업 신고일은 2005.4.15.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첫날인 2017.05.10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종석을 내정했다.
○ 학력·경력
•1979년 서울묵동초등학교 졸업
•1982년 태릉중학교 졸업
•1985년 용문고등학교 졸업
•1986년 한양대학교 무기재료공학과 입학
•1987년 ~ 1989년 한양대학교 동아리 소리개벽 가입 및 활동
•1989년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1989년 전대협 3기 의장
•1991년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구속
•1994년 청년정보센터 창립
•1995년 한양대학교 무기재료공학과 졸업
•1999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서울 성동구)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서울 성동구 을)
•2004년 열린우리당 원내 대변인
•2005.7.29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
•2008년 통합민주당 서울 성동구 을 당협위원장
•2013년 박원순 서울시장 캠프 총괄팀장
•2014년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2017년 5월 10일 ~ 대통령비서실장
•2017년 ~ 현재 국민경제자문회의 당연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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