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2 동아일보
◯ 대담•송평인 논설위원•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신평 교수
지난달 27일 대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실에서 만난 신평 교수는 “과거에는 판사실에서 돈이 오간 것을 오갔다고 했다가 쫓겨나고 지금은 잘못된 로스쿨을 잘못됐다고 했다가 동료 교수들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올 3월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은 신랄하면서도 탄탄한 논리로 로스쿨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법무부가 사법시험 폐지 4년 유예안을 발표했을 때 서울대 로스쿨 교수 59명 전원 명의의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다. 1인 성주(城主)들이 모인 교수사회는 의견이 난분분(亂紛紛)한 곳인데 최고 대학의 교수들이 군대나 회사처럼 일사불란한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서명한 어느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정말 로스쿨이 이대로 가도 된다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노 코멘트’라고 답했다. 서울대만이 아니라 전국 25개 로스쿨 전체가 똘똘 뭉쳤다. 이 침묵의 카르텔을 깬 것이 신 교수의 책이다.
―왜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인가.
“로스쿨 교수들은 과거 법학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환경에서 강의를 한다. 로스쿨 인가를 받기 위해 각 대학은 수십억 원의 돈을 들여 새 건물을 짓고 부대시설을 꾸몄다. 교수들은 1주일에 고작 6시간 수업을 하고 웬만하면 억대 연봉을 받는다. 반면 로스쿨 학생들은 로스쿨이 본래 예정한 실무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법률시장으로 나온다. 용케 법원 재판연구관이나 검사로 임용되거나 유명 로펌에 들어간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얼치기 변호사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돼있다.”
2류 변호사 만드는 로스쿨
―다른 로스쿨 교수들 반응은 어떤가.
“책 내용에 대해 전제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면 제가 반박을 하고 또 비판한 쪽에서 재비판을 하면서 논쟁을 벌일 텐데 그런 비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책 내용이 맞다는 것이다. 막연히 제 책이 로스쿨을 흠집 내기 위해 쓴 것이라는 비판은 비판이라고 할 수 없다.”
신 교수는 판사 10년, 변호사 5년을 거쳐 법대 교수 재직 17년째를 맞고 있다. 판사 변호사 교수의 경력을 고루 갖춰 로스쿨 문제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로스쿨이 벌써 8년째인데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이제 와서 바꾸기 어려운 것 아닌가.
“나는 로스쿨 교수로서 8년을 쭉 지켜봤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전혀 없다. 저처럼 실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법대도 잘 아는 입장에서 볼 때 로스쿨 제도는 절대로 그대로 가서는 안 된다. 하루빨리 지혜를 모아서 새로운 법조인 양성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도 로스쿨인데, 뭔가 법조인 양성에 새로 기여한 점이 있지 않겠나.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전공의 다양성만 해도 과거 사법시험에서 합격자를 50, 60명을 뽑을 때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타당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1000명씩 뽑으면서 그런 비판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1000명 시대에는 비(非)법학 인문계 출신만이 아니라 이공계 출신도 많이 들어왔다.”
―로스쿨은 부유층에 유리한가.
“그렇다. 변호사가 되기 위한 진입장벽이 사법시험 때보다 부유층에 훨씬 낮아졌다. 로스쿨 교육과정은 소홀하지만 유력한 부모를 둔 학생은 나중에 좋은 로펌에 들어가 일하면서 제대로 된 실무교육을 받고 법조인으로 커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집 자녀들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채 2류 3류 변호사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야 한다.”
친노가 금수저 돕는 아이러니
―그런 제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나.
“로스쿨은 노무현 정부하에서 이뤄진 사법개혁 중 하나다. 대륙법계 국가인 우리나라가 미국식 로스쿨을 모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지 논의는 있었으나 심각한 고민을 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당시 사법개혁위원회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공식석상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보다 먼저 미국식 로스쿨을 받아들인 일본의 경험에 관한 논의도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누가 주도했나.
“1998년 진보정권이 들어선 뒤 기득권층에 재빨리 진입한 ‘진보귀족’들이 사법개혁을 주도했다. ‘한건주의’에 집착한 이들에 의해 미국식 로스쿨 도입 결정이 이미 굳어진 상태에서 이를 추종한 진보 성향 교수들이 운영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도입에 앞장섰다.”
로스쿨 입학에서부터 로펌이나 재조 취업에서 돈 많고 권세 있는 유력 인사들의 자제에게 유리하다는 의혹이 여전하다. 이런 금수저 논란을 무릅쓰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로스쿨 수호에 전투적으로 앞장서는 교수들은 대체로 친노(친노무현) 성향 교수들이다. 서울대의 한모, 조모 교수가 그렇고 경북대의 김모 교수가 그렇다.
신 교수의 책에 “‘○○○ 변호사 아들이 우리 로스쿨에 원서를 냈는데 꼭 합격시켜야 한다’며 동료 연구실을 찾아다니는 교수가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300여 쪽의 책에 나오는 이 한 문장이 거센 논란의 발단이 됐다. 불명예를 떠안게 된 경북대 로스쿨은 신 교수에게 학교의 명예를 위해 ‘청탁 교수가 누구인지’ ‘청탁 학부형과 학생을 밝히라’고 요구한 반면, 로스쿨 공격의 빌미를 잡았다고 여긴 사법시험 존치 모임 쪽은 경북대 로스쿨을 경찰에 고발했다.
―경찰 조사를 받았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 나는 공공연한 청탁이 행해진다는 사실을 지나가듯 지적했을 뿐이다. 그것은 책의 큰 주제와도 별 상관이 없다. 경북대 로스쿨은 내가 실명을 밝히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징계 조치하겠다고 압박했으나 해당 학생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경찰 조사에서도 끝까지 익명을 지켰다. 그런데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해당 학생과 학부모, 청탁 교수가 누구인지 알려지고 언론에도 이니셜로 보도됐다. 내가 공개한 것은 아니지만 실명이 밝혀진 학생과 학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느 교수가 청탁하고 다녔다는 것과 그 학생이 부정입학했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 일로 또 다른 모함에도 휩쓸렸다는데….
“한 언론이 로스쿨 변호사 모임이 받은 제보라며 ‘신 교수가 청탁 학생의 입학사정 당시 면접위원 3명 중 한 명이며 이 학생에게 변호사 자녀라고 밝히도록 유도하고 다른 면접위원 2명과 달리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준 것도 바로 신 교수’라고 보도했다. 내가 그 학생의 면접위원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느거 아버지 뭐하시노’라고 물은 면접위원은 따로 있다. 내가 현장에 있었으니 누가 물었는지 안다. 그러나 밝히지 않겠다.”
신 교수는 지난달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책을 내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 인생에 있어서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는 소회의 글을 올렸다.
“휘슬블로어는 고통스럽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많은 판사가 당연하다는 듯 골프 칠 때도 난 골프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때는 판사들에게 참 좋은 때여서 많은 것을 누렸다. 변호사를 하면서는 가족들이 무난히 살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 다음에 과거 법학부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진 로스쿨에서 나 역시 지금까지 그 혜택을 누렸다. 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향유했고 다른 미련도 없다. 이 싸움을 마지막 소명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 환갑을 넘겼다. 이 일이 끝나면 내 할 일은 다했다고 본다.”
―이번에 싸우는 조직은 대학인가.
“그렇다. 법원 바깥에서 법원을 잘 모르듯이 대학 바깥에선 대학을 잘 모른다. 대학 바깥에서는 대학을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조직으로 보고 있지만 내가 본 바로는 그렇지 않다. 로스쿨은 3년 안에 법학이론과 실무수습의 과정을 거쳐 우수한 법조인을 양성할 수 있다고 했으나 거짓이다. 어느 나라도 이런 식으로 법조인을 양성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과중한 수업 부담과 빈약한 법 실무교육 끝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법률시장으로 밀려 나온다. 도대체 법조를 이토록 망가뜨려 놓고 어쩌잔 말인가.”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대학의 자율성이란 미명하에 로스쿨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방치나 다름없다. 교육부는 로스쿨 8년 동안 전혀 감독을 하지 않다가 로스쿨 금수저 논란이 생기니까 뒤늦게 입학과정을 전수(全數) 조사한다고 나섰다. 일본만 해도 법조인 양성제도 개혁회의에 관방장관이 의장, 법무상과 문부상이 부의장이 돼 계속해서 로스쿨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개입한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
신 교수는 대법원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에 이어 서열상 넘버2, 넘버3인 이인복 이상훈 대법관과 서울대 법대 동기다. 얼마 전에 후배들이 두 대법관과 합동으로 자신의 환갑상을 차려준 사진을 보여주며 뿌듯해했다. 후배 중에는 유남석 광주고법원장, 이광범 변호사도 보인다. 지난겨울 두 대법관 중 한 명이 신 교수에게 “이번에 책을 낼 때는 다른 사람 마음 상하지 않게 하라”는 충고를 했던 모양이다.
“당시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말이 계속 생각났다. 내가 공연한 일을 하는 게 아니냐는 자책이 터진 자루에 물 새듯 흘러내렸다. 하지만 내가 이 사회를 위해 꼭 해야 할 역할을 포기할 수 없다는 내면의 소리를 억제할 수 없었다.”
환갑이 지난 지긋한 나이에 신 교수는 내부를 향해 또 한번 휘슬을 불었다. 법원에서 첫 번째 그가 불었던 휘슬 소리는 나중에 법조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여러 갈래의 목소리와 합쳐져 사법개혁에 힘을 보탠 바 있다. 로스쿨에서 두 번째 그가 분 휘슬은 과연 금수저 논란에 휩싸인 로스쿨 개혁이라는 결실로 이어질 수 있을까.
*신평 교수는
1956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문사철’에 관심이 깊었다. 198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0년간 판사로 재직했다. 1993년 한 주간신문에 돈 봉투가 오가는 법원의 현실을 고발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1994년 대구경북 지역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대법원장과 싸우다 나왔다는 꼬리표가 붙은 그에게 개업 초기엔 사건 의뢰가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절치부심 노력한 끝에 대구경북 지역에서 사건 수임 1위를 기록했다. 변호사를 5년 남짓 했을 때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변호사 수입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교수의 길로 들어섰다. 한강 이남에서 판사를 지낸 사람으로 대학교수가 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2006년 경북대 로스쿨로 옮겼다.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2003년 열린우리당 경북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정무특보 이강철 씨와 갈등을 빚은 끝에 정치라는 짧은 외도를 접었다. 조배숙 20대 의원 당선자의 전남편이다. 시집 ‘산방에서’를 낸 문인협회 회원. 고(故) 조영래 변호사를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내부고발자’에서 ‘트러블메이커’까지. 그에 대한 재조(在曹) 내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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