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정부의 티베트에 대한 정치전략
2008년 3월, 중국의 무력에 맞서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1989년 민중봉기를 떠오르게 하면서 티베트인들의 거센 시위들이 티베트 수도인 라사(Lhassa)에서 일어났다. 2008년 하계올림픽을 불과 몇 개월 남지않은 시점이라 세계인들은 많은 관심을 갖고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이 시위들은 불교 수도승들에 의해 사주된 것이었으며 중국의 압제에 반대하여 일어난 1959년 티베트 민중봉기 49주년 기념일인 2008년 3월 10일 이후로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 시위사태 일지
3월 10일 월요일, <달라이 라마 14세>가 2007년 9월 17일 미의회에서 금메달을 수여 받은 뒤 일어난 위로 체포된 수도승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대수도원의 3-4백명의 수도승들이 길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였다. 시위 첫날에는 수도승들이 시내 간선도로에 앉아서 시위를 하였고 일부 수도승들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시위가담자의 연행을 항의하기 위해 5백명 이상의 수도승들이 경찰과 최루탄을 사용한 군대식 민병대의 진압에 대항하였다. 티베트 망명정부에 의하면, 다른 시위들이 <칭하이> 지방에 위치한 3개의 다른 수도원에서도 일어났다고 한다. 3월 11일 화요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불평등하고 사회안정을 위협하는” 시위들이 <라사>에서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다. 인도에서는 3월 13일 목요일 중국의 압제에 맞서서 시위하기 위해 티베트를 향해 걸어서 가던 백 여명의 망명 티베트인들을 경찰이 체포를 하였다.
3월 14일, 불교수도승들이 단식투쟁을 시작하였고 중국 군,경찰들이 반란을 제압하기위해 사원들을 포위한 가운데 두 명의 수도승이 자살을 시도하였다. 가장 격렬한 폭동이 <라사> 중심가 <트롬시캉> 계단 위에서 발생하였다. 시위자들은 자동차와 상점에 방화를 하고 반면에 최루탄 가스는 거리를 가득 메웠고 총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아시아 라디오 방송>은 경찰들과 무장안전요원들이 “반-중국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라사 >거리들은 경찰과 무장한 군대식 민병대가 분할방식으로 통제되고 있다고 증인들은 외국 언론사들에게 제보하였다. <자유아시아 라디오 방송>에 의하면, 백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보도했지만 중국 공식언론은 10명만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시위자들과 질서 유지의 중국 경찰들은 티베트의 옛 지방 <암도>의 일부인 <간쑤>로 다시 옮아가게 되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중국정책에 대항하여 평화적으로 시위를 했던 수천명의 시위자들의 체포와 부상자, 그리고 이유없이 죽은 자들을 고려하면 매우 심각한 걱정을 안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티베트 자치정부의 수반인 <키앙바 펀콕>은 이 폭력소요의 책임은 <달라이 라마>의 분리주의자 패거리들에게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모든 책임을 부정하였고 이러한 시위들은 중국권력에 대한 티베트인들의 “깊은 감정”의 표현일 뿐이라고 밝혔다. 유럽연합은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였고 미국 백악관은 “티베트 문화를 존중하도록” 중국정부에 요구하였다.
3월 15일 토요일,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티베트 센터>에 의하면 수천명의 시위자들이 <라브랑>사원 근처에 다시 집결하였다고 한다. <라사>에 중국군용자동차와 탱크들의 출현이 외국인 여행자들을 통해 알려졌다. 시내 중심가는 야간통행금지로 통제를 받고 여행자들의 방문은 금지되었으며 티베트의 자치지역으로 여행하기 위한 특별허가서 교부는 중단되었다. 게다가 이 지역에 외국방송사들의 진입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중국정부에 “폭력사용중단”, “대화로 티베트인들의 악감정 해소”를 요구하고 티베트인들에게는 “폭력에 호소하지 않기”를 요청하였다. 주말 동안, 수도를 벗어나서 반-중국 시위들이 넘쳐났다. <간쑤>지방의 <시에>에서는, “자유 티베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로 다시 오도록 내버려두라!”고 외치는 수 천명의 수도승들이 <라브랑> 대사원 주위에서 행렬을 하면서 금요일과 수요일 시위들을 촉발시켰다. <티베트를 위한 국제캠페인>의 책임자인 Kate Saunders에 의하면, “일요일날, 시위들이 <느가와>市 에서 발생했고 7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지방정부는 분리주의자를 제압하고 <달라이 라마>와 그의 무리들의 사악한 얼굴을 명명백백하게 들어내게 하기 위해 민중의 전쟁을 선포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지방정부는 시위자들에게 지금부터 월요일 저녁까지 해산하도록 요구하면서 폭동시위대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티베트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 <뉴욕>에서도 수 백명의 시위대들이 3월 15일 토요일과 16일 일요일 결집하였고 유럽의 여러 나라 수도에서도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압제를 널리 알리기 위해 결집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시위 초기 이후로 대중에 대한 첫 발언에서 사건형국에 대해 말하자면 “매우 매우 걱정”스럽고 “국제 사회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밝혔다. 3월 17일 월요일, 티베트 망명의회는 시위초기서부터 시망한 수 백명의 사망자를 집산하여 보고했고 유엔과 국제사회의 관심을 요구하였다. <라사>는 경찰의 감시 하에 놓여졌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국가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다. 중국은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아닌지, 문제가 있다”라고 공언하였다.
● 부상자와 사망자현황
▶ 3월 15일, <자유아시아 라디오>는 <라사>의 거리에서 적어도 2구의 시체를 보았다는 증인들의 말을 인용 보도하였다.
▶ <신누아 언론사>는 3월 15일 폭동소요에 의해 2명의 호텔 종업원과 2명의 상점주인이 포함된 10명이 불에 타 죽었다고 알렸다.
▶ <연합언론>은 3월 17일 언론회견에서 티베트 자치지역 수반인 Qiangba Puncog가 주말의 폭동사건 후에 16명이 죽고 12명이 부상하였다고 확인된 사실을 밝혔다. 이 언론회견 후에 다른 대중매체들은 중국이 <라사>에서 13명의 사망자 수를 집산하였다고 보도하였다.
▶ <연합언론>은 <라사>에서 지난 주의 사망자 수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발표는 22명으로 증가 되었다고 나중에 밝혔다. <신누아 언론사>의 사망자 수의 발표는 19명으로 늘어났다. 티베트망명정부는 “티베트 소요사태의 총 사망자 수는 100명에 이른다”는 확인되지 않은 보고들을 받았다고 3월 15일 발표하였다. 다음날, 티베트망명정부는 적어도 8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확인하였다.
▶ <The Economist> <라사>특파원인 James Miles에 의하면, 경찰에 의해 죽은 사망자들은 티베트인들과 더불어 중국한족들이 포함되어있다고 알렸다.
▶ 직접 눈으로 확인한 증인들과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티베트 센터>에 보내진 증거들에 의하면, 적어도 총 사망자의 수는 79명에 달했다. 1,200명 이상의 티베트인들이 체포되었고 100명 이상의 행방불명자가 발생하였다.
▶ 티베트 망명정부에 속한 정보통에 의하면, 무장한 민병경찰이 Sera, Drepung과 Ganden의 사원들과 시위 중에 있는 다른 사원들에 물, 전기, 비상식량과 의료서비스를 차단시켰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수도승들이 굶주림에 고통을 받았고 3월 25일 1명의 수도승이 <라모쇄> 사원에서 굶어 죽었다.
● 피해재산현황
<합리적 지성보고>라는 사이트에 2008년 4월 2일 기고한 기사에서 Helga Zepp-Larouche는 폭동사태의 결과로 파괴된 재산 수를 인용하였다: “중국 언론사에 의하면, 수도 <라사>에서 280억 달러의 손실과 422개의 상점, 7개 학교, 120채의 집과 6개의 병원이 파괴되었다”.
● 중국정부의 대응
중국정부는 반-중국운동의 셋째 날 민병경찰을 투입하면서 그리고 사원들을 폐쇄하면서 대응하였다. 티베트와 티베트에 이웃한 지역들은 언론이 봉쇄되었다; 홍콩 및 외국기자들은 추방조치를 당했다. 한편, <양더핑> 장군은 해방인민군대는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였다. 중국정부는 티베트의 시위들이 이웃 자치지역의 <우구르>행동주의자들에게 길거리 시위조직을 유발시킬 수 있음을 걱정하였다. 중국정부에 의해 지명된 그러나 티베트인들에게는 인정 받지 못한 <제11대 판첸 라마>는 소요사태들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폭동행위들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해쳤을 뿐만 아니라 불교정신을 훼손하였다. 우리들은 국가를 분열시키려 하고 민족 동질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들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우리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했던 소수의 범죄를 강력하게 비난한다”.
중국공산당의 티베트 자치지역의회의 서기인 <장 깅거리>는 3월 18일 성명을 발표했다: “실제로, <달라이 라마>는 피와 총의 격렬한 투쟁으로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같은 날, 중국 수상 <원쟈바오>도 <라사>의 폭동은 8월 “베이징올림픽게임을 방해하기” 위한 “<달라이 라마>의 무리들에 의해 선동되고 조직”된 거라는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 언론검열
대치상태가 일주일이 지나자, 중국은 언론통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우선, 인터넷 사이트의 검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폭동과정의 비디오 이미지들은 삭제를 당하기 시작했다. 공식언론매체들만 중국인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였고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상점을 공격하고 경찰차를 불지르는 티베트시위자들의 장면들만 공개하였다. 홍콩대학교의 신문방송학과장인 <잉찬>은 “중국정부는 중요한 정보들과 예민한 비디오이미지가 된다고 판단되는 것과 정보들을 전달하기 위해 여행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에 철저한 통제를 가하였다”고 밝혔다.
● 망명티베트정부와 달라이 라마의 반응
3월 18일,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중국정부가 티베트에서의 이러한 시위들을 내가 지휘하고 있다고 비난하기 때문에, 이 주장들을 조사하기 위해 중국대표자가 포함되어야 하는 공신력 있는 기구에 의해 철저한 조사를 요청한다. 이러한 조사기구는 티베트, 티베트자치지방 외의 전통 티베트 지역 그리고 여기 인도에 있는 티베트중앙정부까지 방문을 해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와 특히 검열 받지 않은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는 10억 중국인들이 티베트에서 사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국제사회의 언론사 대표자들이 이러한 조사들을 진행하면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1987년 <The Observer> 기자인 <죠나단 미르스키>에게 이미 말한 바 있는 내용을 되풀이 하였다: 만약에 티베트의 대다수 티베트인들이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에 폭력으로 호소한다면 그는 티베트민족의 대변인의 역할을 그만두는 것 외에 다른 선택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2008년 3월 28일,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의 오해들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이해와 화해의 정신 속에서 대화를 통해 티베트문제에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이 되도록 중국국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2008년 4월 1일, 중국은 자살테러들을 계획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추종자들을 비판하면서 강도 높게 그들을 비난하였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상은 “망명티베트인들은 100% 비폭력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자살테러는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중국인들이 티베트인들로 가장하여 티베트인들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기 위해 여러 테러들을 계획하고 있는 것에 매우 걱정스럽다”. 라고 하면서 이 자살테러를 부정하였다.
4월 2일, <달라이 라마>는 “세계의 지도자들, 국회의원들, 비-정부기구와 세계시민들에게 티베트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억압행위의 즉각적인 중지와 체포된 모든 사람들의 석방”을 호소하였다.
● 세계의 반응
<라사>에서 티베트 수도승들의 시위 시작부터 2주가 지나서, 세계의 반응들은 중요한 경제적 파트너인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는 강대국들에 인해 신중함을 보였다. 보호와 신중함을 요청하는 것 외 어떠한 구체적인 제안도 중국에 하지 않았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티베트인들의 관심사들에 동참하였다. 백악관은 중국정부에게 “티베트의 문화를 존중하고”, “<달라이 라마>와 함께 대화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유럽연합은 중국에게 긴장을 완화하고 인권을 존중하도록 촉구하였다. 유럽연합의 외무부 장관인 <자비에 솔라나>는 티베트 사건들로 인해 유럽국가들이 베이징 올림픽 참여를 재검토한 바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유엔의 인권분과의 상원의원인 <루이즈 아르부르>는 중국정부에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위한 티베트인들의 권리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체포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인격적 대우를 하지 말도록 요청하였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갈등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촉구하였으며 유엔의 어떠한 중재도 없을 거라고 발표하였다.
● 폭동의 진원지에 대한 의문
영국의 <정부전자정보국>은 승려로 가장한 중국인민해방군들이 백 여명의 사상자들을 낸 소요폭동들을 일으켰고 이것이 중국정부의 공작정치임을 확언하는 <달라이 라마>의 발표를 확인하였다. 이 정보는 <달라이 라마>의 중국어 통역사의 발표에 의해 확인된 것이다.
타이완정부 수상의 자문관인 <루앙 밍>에 의하면, 중국공산당은 <달라이 라마>를 강제로 사임시키고 티베트인들에 대한 앞으로의 억압을 위해 ‘티베트에 사건들’을 세밀하게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는 단정 지며 이렇게 말하였다:”3월 10일의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모든 시위자들이 승려들이었음을 영상이미지를 통해 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이 승려들의 몇몇을 체포하였고 그들을 살해하였다. 살인자는 젊은 티베트인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3월 14일 이후로, 티베트인들은 무고한 승려들의 살인자 대해서 더 이상 참지를 않았고 그들은 저항하였다”. <루앙>은 티베트에서의 사건들은 세계여론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자행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문제들에 대해서 평화적인 해결책을 언제나 제안하였고 세계의 지지를 얻었다. <달라이 라마>는 소요사태가 계속된다면 자진 사퇴를 할거라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달라이 라마>는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실제로 사퇴를 한다면, 중국공산당은 강도 높게 밀어 부칠 수 있고 티베트인들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티베트와 중국관련역사
▶ 1950년 이전
12세기에 중국의 몽골정권에 의한 침입과 통제 그리고 <쿠빌리안 칸>에 의한 <원>왕조의 설립 이후에, 티베트 불교학파들의 수장들과 몽골시대의 중국황제 사이에 정치적 관계들을 맺기 시작하였다. <쿠빌리안 칸>은 정치적 역할도 수행하고 있는 불교지도자들과 상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1643부터 1949년까지는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정부에 의해 통치되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는, 러시아와 영국 사이의 각축장이었다. 영국은 인도에 이어 티베트도 식민화하려 했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의 티베트 식민정책을 막고자 했다. 1904년 티베트의 방어에 대한 군사적 무력행위를 통해서, 영국인들은 마침내 티베트를 굴복시켰고 상업적 그리고 외교적 특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1908년, 영국군의 무력도발을 기회로 중국은 <청> 왕조의 붕괴와 중국인민공화국이 설립되는 1911년의 혁명 때까지 티베트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확보하고자 했다. 중국군대와 공관들이 티베트에서 1912년 내 쫓기고 1913년 <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국제사회는 몽골과 티베트 사이의 상호독립 인정에 대한 동의 외에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14년, 영국, 티베트와 중국이 참여한 심라(Simla)회의 끝에,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에 의해 통치되는 “외-티베트”와 그의 정신적 권위 하의 유일한 “내-티베트”로 분할할 것을 의제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협정을 반대하였다.
▶ 1950년 이후
1950년,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들어왔고 부실하고 오합지졸인 티베트군대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1956년 <캄>의 <리탕>에서 중국점령군에 대한 티베트인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중국해방군은 <캄>의 다른 지역들을 점령하였고 1957년과 58년에는 <암도>지역으로 그리고 나서 1958년과 59년에는 전체 국토가 확장되기 전에 티베트자치지역인 <우탕>까지 진출하였다. 1959년 <라사>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망명하기 위해 티베트를 탈출하였다. 그는 약 10만 명의 티베트난민들과 동행하였다. 이 반란은 중국정부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중국과 티베트망명정부와의 일치하지 않은 티베트인 희생자의 수는 일반적으로 수만 명으로 추산된다. 옛 티베트의 옛 특권계급층의 반란을 진압한 후 바로 1959년부터 공산정부는 티베트에 일련의 개혁을 특히 농노제철폐를 시행하였다.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하면, 1987년 이후 독립을 위한 214번 이상의 시위시도들이 진압되었고 체포된 시위자들은 노동수용소로 추방되었으며 모두가 3년에서 20년에 이르는 감옥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 1989년에 티베트 정치책임자는 지금 중국의 주석인 <후 진타오>이었다, 티베트인들의 시위는 피바다로 끝이 났고 최소한 450명이 살해되었다. 전직 중국 기자였던 <탕 다시앙>에 의하면, <라사>의 경찰은 사건을 유발시키라는 중국정부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중국 군,경찰은 언제라도 일어날 시위들을 통제하기 위해 <라사>에 감시카메라들을 설치하였다. 수많은 국제단체들은 티베트에서의 종교탄압을 널리 알렸다. 대부분의 티베트불교의 대승들은 강제로 추방되었다.
2008년 3월에, 중국정부에 대한 시위들이 1989년의 시위들과 심각한 폭동사건들을 떠 올리면서 <라사>에서 변형되어 나타났다. 시위들은 2008년 하계올림픽이전 갑작스레 돌발하였다. 다른 시위들이 수도 외에 특히 <암도>의 티베트 옛 지방의 일부인, <칸수>의 <라브랑>사원 근처에서도 일어났다.
● 중국인민공화국과 티베트인들과의 관계
중국인민공화국과 티베트인들과의 관계의 의문점들에 대한 2개의 상반된 해석이 있다: 중국인민공화국은 티베트를 자신의 통치영토로 간주하고 역사적, 경제적, 전략적 논쟁들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것은 유일한 하나의 중국정책에 관련된 것이고 국제사회의 대부분의 국가들에 의해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 망명정부는 중국의 등장을 외침으로 간주하고 티베트 인구의 일부를 학살했고 티베트문화의 파괴와 억압을 하는 그리고 문화적으로 또 인종적으로 티베트를 중국화하는 중국을 비난한다.
● 사망자의 수에 대한 의문
티베트 망명정부에 따르면, 천이백만 명 이상의 티베트인들이 1949년부터 1979년 사이의 중국인민공화국에 의한 티베트점령의 결과로 직간접적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런 평가는 숫자들이 과장되었다고 단정짓고 티베트 망명정부에 의해 부여된 평가들의 일부는 조작된 근거들에 의존하는 것임을 입증하는 중국조사관에 의해 부정되었다. 영국의 작가이자 <자유티베트캠프연합>의 전(前) 회장인 <파트릭 프래취>는 2003년 티베트인들의 사망자수는 천이백만 명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물론 조사과정에서 실수가 있더라도 티베트인들의 5백만 명은 티베트에 대한 중국정책으로 인하여 직접적으로 사망했다고 그는 보고 있다.
● 억압과 인권에 대한 의문
독립정신으로 무장하고 중국에 저항하는 티베트인들은 중앙정부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고 티베트자치지역은 중앙정부의 감시 하에 놓여졌고 군,경찰의 개입이 중국의 다른 지역보다 더 빈번했다고 중국의 티베트개입에 반대하는 자들은 평가하였다. 사원들이 특히 엄하게 통제되었다는 사실을 예로서 그들은 강조하였다.
● 티베트문화의 파괴에 대한 의문
특히 인도와 네팔에 망명한 티베트인들은 불교에 친밀하게 연관되어있는 그들의 문화가 소멸될 위험을 안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의 문화혁명시기에 티베트에서 티베트 <착포리> 의료기관이 중국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1961년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의료와 점성술 기관을 <다라므살라>에 다시 설립하였다. <착포리> 티베트인 의료기관은 인도의 <다르쯔링>에서 역시 다시 설립하였다. 이 건축물은 티베트인들의 본래적인 의미는 상실된 채 비신성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반-중국 티베트인들은 티베트에 있는 사원들이 영혼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관광적 흥미의 대상으로 더 여겨진다고 평가한다. <베이징>에 있는 티베트 라마교의 사원인 <옹화궁>은 관광의 중요한 매력들 중에 하나이다. 공산당이 권력을 잡은 이후로 특히 문화혁명기간 동안 박애와 억압을 중국 전 지역에 있는 종교인들이 겪었다. 이것은 티베트에서만 해당되는 사항만이 아니었다.
● 식민을 통한 중국화
중국의 대다수 종족인 수많은 중국한족들이 티베트로 이주하였다, 동시에 티베트인들은 한족들에 의해 일자리를 많이 뺏겼다. 여러 지역의 티베트 식민지 지역의 분할과 자치지역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 베이징-라사의 철도연결
2006년 7월 1일, <후진타오>는 <칭하이>성에 있는 <거얼무>역에서 티베트 <라사>행 첫 열차를 개통식 하였다. <베이징>에서 오는 철로의 연장선에 있는 이 새로운 철도연결은 중국정부가 말하기를 경제적 통합 및 티베트의 경제 그리고 관광발전에 유리할 거라고 한다. 예전의 티베트 반정부인사인 <구츄섬>의 말을 인용한 <브뤼노 필립> 기자에 의하면 티베트에서 중국화가 가속화될 것이라고 하였다. 티베트 보호자들은 이 새로운 철로는 티베트에 중국이주자들을 가속화시키고 이미 과도하게 개발한 자연자원들을 더 빨리 고갈시키게 될 것을 걱정하였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철도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제를 용이하게 할 것이며 많은 중국이주자들의 통로가 될 것”이라고 특히 평가하였다. 철로가 개통되었을 때,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국민들에게 이 새로운 철로가 가져올 수 있을 이익과 손해를 따져보기 위해 기다려보자고 요청하곤 했다. <달라이 라마>는 “이 철로가 티베트인들의 대다수에게 이익을 준다는 조건 하에서” 흔쾌히 수용하였다. 그러나 2007년 말,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전통과 문화의 전승을 위태롭게 하면서 티베트를 거지와 창녀 그리고 실업자들이 넘쳐나도록 만든 것은 중국정부의 이 새로운 철로의 건설이었다고 단언하였다. 티베트의 불모의 고원지대는 매우 형편없는 취업환경과 높은 고원지대로 인한 악조건들로 인하여 어려운 삶의 조건들만 제공할 뿐이었다.
● 중국에 대한 비난들
<국제법률가협회>는 1959년 보고에서 중국정부에 의해 티베트에서 범해진 인종말살을 학살로 규정하였고 티베트망명정부와 티베트의 자유와 티베트인들의 인권존중을 위해 투쟁하는 <망명티베트연합>에 따르면, 1949년에서 1979년 사이에 중국의 침략에 관련하여 발생한 사건들은 1백2십만명의 티베트인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로이터통신>은 중국정부는 티베트민족에 대한 인종말살행위에 관련하여 실제로 스페인법정에 의해 기소 당했다고 보도하였다. 게다가 감옥에서의 학대, 미성년자에 대한 가혹행위뿐만 아니라, 티베트여성들에 적용된 특별조치에 대해서도 비정부기구들은 인용하였다. 다른 소수민족들은 중국의 산아제한정책에 적용되지 않는데 반해, <인권협회>에 의하면 티베트여성들은 이 산아정책에 적용되고 첫아이를 낳고 나서 두 번째 아이부터 의무적으로 낙태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감옥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들은 금지되지만 중국정부에 의해 교체되고 지금은 중국영향권 안에 있는 <판첸 라마>의 사진은 허용되었다. 티베트 해방을 위한 시위들은 폭력으로 진압되었다: 티베트해방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두 명의 여승들이 1990년 <라사>의 <드라브치> 감옥소에 감금되었다. 그들은 감옥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초들(고문, 학대와 굶주림)을 겪은 후에, 1999년과 2002년 각자 석방되었다. 지금은 140명의 티베트 양심수들이 <드라브시> 감옥소에 갇혀있다. 1987년 이후, 중요한 시위들이 독립을 부르짖으며 일어났다. 계엄령의 법(1989-90)으로 수 백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과격한 진압이 일년 내내 이어졌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티베트센터>에 의하면, 최근의 충돌은 중국인민해방군 창설 80주년 행사날인 2007년 8월 1일 <리탕>에서 발생하였다고 한다. 52세의 어떤 티베트 유목민인 <런귀 아다크>는 <Kardze>경찰에 체포되기 전에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귀향, <판첸 라마>의 자유와 티베트를 위한 자유를 요구하였다. 중국정부와 티베트인민지지 시위자들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런귀 아다크>는 여전히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상황은 매우 긴장상태로 되었고 명령을 받은 3000명의 군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티베트망명정부>와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상황이 진전될지라도 티베트의 상황은 특히 우롱 당한 인권과 심각하게 파손된 환경을 위해 악화만 될 뿐이라고 단정하였다. 100명 이상이 되는 티베트정치범들은 감옥에서 체계적으로 고문을 받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존중 받기가 요원해졌다. 중국 한족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도 티베트인들은 특히 취업에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 티베트망명정부의 시각
1960년부터 1980년 사이에, 수많은 정치범들이 티베트 지방 <암도>에 있는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1980년대 이후로, 경제자유화의 시행과 중국내부의 크나큰 변화는 중국 한족들을 티베트로 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수는 이론의 여지로 남아있다. 티베트망명정부는 티베트에는 6백만 명의 티베트인들과 7백5십만 명의 비-티베트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티베트망명정부에 따르면, 이것은 점령군들이 통제하는 영토들에 식민지 설치를 금지하는 1946년 <제네바협정>의 위반으로, 티베트의 정치적 독립의 기회들을 축소시키는 티베트민족에 대한 도발적인 인구정책의 결과라고 한다. 티베트망명정부는 티베트에 주둔하는 인민해방군과 기록되지 않은 유랑민들의 수를 고려하지 않은 중국정부에 의해 작성된 통계들에 이의를 제시하였다. <시닝>에서 <라사>까지 연결된 <청장철로>는 새로운 이민의 통로를 제공함으로써 중대한 관심의 주체가 되었다. 티베트망명정부는 티베트인구가1959년 이후로 눈에 띠게 줄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1959년 <인민일보>의 한 사설을 인용하였다. 이 사설에 의하면, 중국인민공화국의 통계청의 수치는 티베트자치지역의 인구는 그 당시에 1,273,969명이었다고 제시하였다. <캄>의 티베트 지역들에서는 티베트인들이 3,381,064명으로 집계되었다. <칭하이> 성(城)과 <간수>에 합병된 다른 티베트 지역들에서는 티베트인들이 1.675,534명으로 집계되었다. 이 모든 수치들을 합하면 1959년 티베트인구는 6,330,567명에 달했다. 2000년, 이 지역전체들에서 티베트인들의 전체 수는 국가통계청에 따르면 대략 5,400,000명 이었다. 이 수치는 1959년부터 2000년 사이에 티베트인구는 100만 명이 준 즉 15% 감소된 것이다. 같은 기간 동안, 중국인구는 두 배가 늘었고 세계인구는 3배가 늘었다. 이러한 분석은 1959년부터 1979년 사이에 티베트인들의 사망자수산정을 포함하여 부가적인 논쟁을 불러왔다.
● 중국인민공화국의 시각
중국은 스스로 점령군으로 여기지 않고 인구유입정책에 대한 주장들을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중국은 티베트망명정부에 의해 강력하게 요구된 “위대한 티베트”의 존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에 의하면, 이러한 생각은 중국을 분열시킬 목적으로 공모한 외국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은 일본제국주의가 2차 세계대전 동안 만주에서 만주국을 세운 사실과 소련의 지지 덕분으로 몽골이 1913년에 선언한 그의 독립을 쟁취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중국분열을 책동하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은 자치지역에 속하지 않은 티베트 인구의 영토들은 1959년 티베트정부에 의해 통제 받지 않았지만 인근지방들에 의해 몇 세기를 거쳐서 통치 받았다. 중국정부에 따르면, 자치지역에 있는 티베트인 수는 2000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비-티베트인 19만명에 티베트인 2백4십만명 이었고 티베트 본래의 모든 자치지역들에 있는 티베트인들의 수는 5백만이었으며 비-티베트인은 2백3십만명 이었다. 자치지역 내의 <라사>에서는 한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티베트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한다고 확언하였다.(예로써 소수민족들을 위해 한족에 강요한 엄격한 인구통제를 완화하면서). 산아제한정책들은 단지 중국 한족에만 적용하고 티베트인들과 같이 소수민족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티베트인이자 현재 티베트자치지역장인 <잠파 푼촉>은 중앙정부는 고지에 관련된 어려운 조건들의 이유로 티베트를 향한 어떠한 이민정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티베트자치지역 내 6%의 한족이 사업과 취업을 위해 지역사회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주문제는 없다고 발표하였다.
● 결론
중국은 4가지 중대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통일, 안전, 번영, 국가이미지. 중국의 번영은 성장이 멈추지 않고 있고 통일과 안전은 힘으로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중국의 국가이미지는 처참할 정도다. 사실, 통일과 안전을 유지하는 중국의 최선의 방식은 국제사회의 평판을 개선시키는 일이다. 50년 동안 중국은 티베트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는 중국정부의 지도자들의 체면을 손상시키기는커녕 올림픽정신을 존중한 개방의 손짓으로 전세계가 박수로 환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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