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은 오만했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 너무나 부족했다. 인정머리가 없었다. 덕을 갖추지 못한 군주는 결국 민심이반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언젠가는 백성이 등을 돌리게 된다.

문 대통령과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들은 왜 그렇게 결국 등을 돌리고 배신이라는 선택을 해야 했는지를 우리는 깊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왜 끝까지 그의 파수꾼으로 남지 못하고 결국 포기를 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신뢰와 믿음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뢰와 존경이라는 것은 인간의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식적으로 연출한다고 될 문제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그의 측근들이 느끼고 느껴왔던, 또 4년이라는 세월동안 대통령을 지켜 본 많은 국민들이 느끼고 느껴왔던 독선과 불통 그리고 무능, 더 나아가 무지까지 말이다. 누적된 분노가 법률의 최후 보루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격분하게 한 것이다. 

더더욱이 그 내면을 잘 알고 있는 검찰은 더 말해서 무얼 하겠는가! 그 무지의 최정점은 이제는 일국의 대통령이 김정은이라는 비루한 자에게까지 농락당했다는 그 어이없는 사실에 대한 허망함과 허탈, 분노를 넘어선 증오로서 그 방점을 찍었다.

참 나쁜 대통령을 넘어서 이제는 참 무지한 대통령이구나 하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었다. 이런 무지한 사람에게 국정운영을 더 이상 허용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헌재의 결론이다. 무능에 이어 이제는 무지까지 실증된 사람에게 국정운영권을 맡겨 더 이상의 국정혼란을 초래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금치산 선고를 한 것이다. 정치적 사형보다 더한 치욕스러운 주홍글씨를 대통령을 떠나 한 인간에게 박은 것이다.

헌법재판관도 결국 사람인지라 그런 국민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헌재의 결정문에서도 이러한 정서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국정의 최고 통치자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그 동안의 시간을 거쳐 오면서 언론, 교육, 공직기관 등 각계각층 온 누리로 퍼져 나갔다. 심지어는 그를 지지했던 국민들마저도 기대에 대한 실망이 분노로 치환(置換)되어 결국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되었다. 표면적으로 노출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강성 좌파 국민들까지도 느끼는 공감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간을 회기시켜 보자. 대통령과 위정자들은 어떠했는가? 내 편이 아닌 그 반대 정적 인사들은 티끌도 불려서 잡아 족치고 감옥에 가두고 인권을 말살하는 등의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당시 대통령의 자세에서, 다수 국민들은 ‘저렇게 비정할 수 있을까’ 하는 대통령의 인권에 대한 인식체계에 재삼 의문을 던지게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실망은 양 진영을 떠나 지금 모든 국민들에게 팽배해져 있다. 많은 시간이 흘러오면서 쌓이고 쌓여온 그런 누적된 실망과 분노가 결국 거대한 민심이반의 대폭발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으로 파면된 또 한 사람의 대통령으로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너무나도 치욕스러운 오점으로 후대의 역사에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어쩌면 스스로가 초래한 진작부터 예고된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어떤 목적을 행하기 위한 그 방법론에 있어서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그 모든 것이 정의로워야 하는 것이고, 그 잘못을 판별(判別)함에 있어 그것을 시정(是正)하기 위한 수단 또한 정의로워야 할 것이다. 

비판과 심판(審判)의 과정이 정의롭게 행해질 때 그 진정성의 가치는 훼손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과정 또한 정의롭지 못하게 된다면 그 정당성(正當性)을 논함에 있어, 그 부도덕성(不道德性)의 범주에서는 결국 또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는가! 

문 대통령은 그 측근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 모든 국민들에게 신망을 심어주는 덕의 정치를 펼치지 못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한계일 지도 모른다. 

신념이란 교만하지도 않는 것이고, 또 결코 가벼워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어릴 때 굽은 길맛가지라 하였다.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에 대한 존중은, 적어도 굴곡진 인생의 삶속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만이 최소한도로 가질 수 있는 그러한 정서의 바탕에서 생성하게 된다. 이렇게 생성된 근본이 덕의 정치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부단한 자기노력의 성찰이 하냥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어진 마음이 어렵고 부족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그릇의 크기가 그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