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1996.12.16. 선고 96노1892 판결]

대한민국법원

[12·12 군사반란 · 5·18 내란 사건]

【죄명】

∙ 반란수괴 ∙ 반란모의참여 ∙ 내란중요임무종사 ∙ 불법진퇴 ∙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 상관살해 ∙ 상관살해미수 ∙ 초병살해 ∙ 내란수괴 ∙ 내란모의참여 ∙ 내란중요임무종사 ∙ 내란목적살인 ∙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피고인】

【검사】 김각영 외 10인

【변호인】 변호사 이양우외 18인

【항소인】 전두환 외 14인 및 검사

【원심판결】

제1심 서울지방법원 1996.8.26. 선고 95고합1228, 1237, 1238, 1320, 96고합12(병합, 일부), 95고합1280(병합), 96고합12(일부, 병합), 96고합38(병합), 96고합76(병합), 96고합95(병합), 96고합127(병합) 판결


【주 문】

원심판결을 모두 파기한다.

피고인 전두환을 무기징역에, 피고인 노태우를 징역 17년에, 피고인 황영시, 허화평, 이학봉을 각 징역 8년에,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을 각 징역 7년에, 피고인 유학성, 허삼수를 각 징역 6년에, 피고인 최세창을 징역 5년에, 피고인 차규헌, 장세동, 박종규, 신윤희를 각 징역 3년 6월에 각 처한다.

원심판결 선고 전의 구금일수 중 280일을 피고인 노태우에 대한 위 형에, 각 180일을 피고인 유학성, 황영시, 이학봉에 대한 위 각 형에, 각 175일을 피고인 최세창, 장세동에 대한 위 각 형에, 각 205일을 피고인 허화평, 허삼수, 정호용에 대한 위 각 형에 각 산입한다.

피고인 전두환으로부터 금 220,500,000,000원을, 피고인 노태우로부터 금 262,896,000,000원을 각 추징한다.

피고인 전두환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 전두환이 안무혁, 성용욱과 공모하여 각 수뢰하였다는 점과, 피고인 노태우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 노태우가 최종현, 배종열로부터 각 수뢰하였다는 점 및 피고인 박준병은 각 무죄.

【이 유】

이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부 항소이유 등에 대한 판단

제1장 12·12 군사반란 및 5·17 / 5·18 내란 사건에 관한 판단

1. (성공한 쿠데타의 처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피고인들이 1979.12.12. 및 그 다음날에 한 일련의 행위와 1980.5.17. 이후에 한 일련의 행위가 가사 반란과 내란에 형식적으로 해당한다 하여도 이것은 실제로는 정당한 행위로서 소위 성공한 쿠데타에 해당하므로 처벌할 수 없다고 피고인들은 주장한다.

살피건대, 헌법은 가장 상위에 있는 법규범이므로 모든 법률은 헌법에 부합하는 범위 내에서 합법성을 취득한다. 그러나 합법성이 바로 정당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합법성이 있다 하여 반드시 정당성이 있는 규범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헌법의 배후 또는 상위에는 정의와 선 그리고 평화의 원리를 내용으로 하는 보편적인 법의 원칙이 존재하고 이를 자연법이라고 부른다면 이러한 자연법에 부합하는 내용의 헌법과 법률만이 정당성을 갖게 된다. 자연법은 만고불변의 것이지만 그에 대한 인식은 인간 이성의 개화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국가의 헌법 내지 기본적 법질서가 자연법에 어긋나는 부당한 것이라는 인식이 그 사회에 팽배하여 마침내 그 불일치를 힘에 의하여 극복하려는 급격한 투쟁이 전개될 때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은 현존하는 정치제도의 급격한 파괴와 새로운 기초에 바탕을 둔 신제도의 수립을 그 본질적 요소로 한다. 즉 현제도가 다른 제도로 급격하게 그리고 강제적으로 대치된다. 그 변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명의 희생과 폭력은 광범위하고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혁명이 성공하면 기존의 헌법과 이에 근거한 법률은 원칙적으로 폐지되어 효력을 상실하고 단지 혁명정부의 이념과 시책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의 법규범만이 효력을 유지한다. 혁명정부의 합법성에 대한 도전은 허용되지 않으며 혁명행위를 반란이나 내란의 범죄로 인정하는 데 적용될 기존의 법률은 이미 효력을 상실하여 혁명행위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고 따라서 이를 처벌할 수는 없게 된다.

이에 대하여 쿠데타는 그 정부형태에 따라 권력이 1인에게서 다른 1인에게로, 또는 어느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이전되는 것으로서 이로 인한 변화가 정부 자체에 국한되고 전체 국민에 대한 영향은 최소한도로 제한된다는 특징이 있다. 쿠데타는 그로 인한 변화가 사회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의 지도자가 교체되는 것에 그친다. 따라서 쿠데타는 혁명에 수반되는 광범위한 변화를 대개 초래하지 않으며 보통은 기존의 정부조직과 사법제도 그리고 사회제도가 정상적으로 유지된다. 쿠데타는 법이 정한 권력승계의 절차를 지키는 것처럼 가장하는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힘으로 강압하여 권력을 인수하는 것이다. 국가기관의 조직과 구성원은 대체로 유지되고 정부권력의 핵심구성원만이 교체된다.

그러므로 쿠데타가 성공하여도 기존의 헌법과 이에 기초한 법률은 효력을 상실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이와 같이 계속 효력을 유지하는 기존의 법질서를 근거로 하여 쿠데타정권의 불법성과 쿠데타행위의 범죄성을 추궁하는 문제제기가 빈번히 일어난다.

성공한 쿠데타정권은 법률적으로는 세가지의 얼굴을 갖는다.

첫째는 합법성의 측면이다. 쿠데타가 일단 성공하면 이 때 국가전체를 경영할 다른 대체세력이 얼마 동안은 없는 것이 보통이므로 쿠데타정권은, "국민의 안전과 복지가 최고의 법이다."(Salus populi suprema lex)라고 하는 국가긴급성의 이론(the theory of state necessity)을 부당하게 차용하거나, "실효성(efficacy)이 있는 것이 법이다."라고 하는 근본규범(grundnorm)이론을 확대적용하거나, 혹은 사실상의 정부(de facto government)라고 하여, 많은 경우 그 합법성을 인정받는다.

제2장 5·18 내란사건에 관하여

1. 이 사건 반란죄의 공소사실 중,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이 공모하여, 

가. 1980.5.17 18:00경 보안사 대공처장 피고인 이학봉의 지시에 따라 서울지역 보안부대의 지휘를 받은 치안본부와 서울시경찰국 수사관들이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의 1 소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회의 중이던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 약 50여 명을 검거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으나 검거계획이 사전에 노출되어 대부분이 도주하는 바람에 10여 명만을 검거하고,

5. 17. 23:00경 중앙정보부의 지원 요청에 따라 출동한 수경사 헌병단 소속 장교 1명, 사병 18명 등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의 1 소재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집에서 그를 체포하는 등 그 무렵 사회혼란조성 및 학생,노조소요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문익환 목사, 김동길 연세대학교 부총장, 인명진 목사, 고은태 시인, 이영희 한양대학교 교수 등을 체포하고, 예춘호, 김녹영, 이택돈, 손주항 국회의원을 현행범이 아님에도 체포하고,

5. 17. 23:00경 보안사 대공처 소속 수사관 등이 서울 중구 신당4동 340의 38 소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집에서 그를 체포하는 등 그 무렵 권력형 부정축재라는 불분명한 범죄 혐의로 김종필 공화당 총재, 이후락, 박종규, 김진만 국회의원,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 오원철 전 청와대경제제2수석비서관, 김종락 코리아타코마 사장, 장동운 전 원호처장, 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 등을 구속영장 없이 체포하고,

피고인 이학봉의 지시를 받은 광주지구 보안부대가 5.17. 23:00경부터 시위주동자에 대한 이른바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 이승룡, 유재도 등 8명을 체포하는 등 전국 각 지역에서 비상계엄 확대와 병행하여 실시한 예비검속 과정에서 총 2,699명을 체포함으로써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였다는 점,

나. 피고인 황영시는 1980.5.17. 17:00경 계엄의 확대와 그에 따른 계엄군의 전면 투입을 예상하여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소요진압부대 투입준비를 지시하고, 피고인 이희성은 5.17. 22:30 전군에 소요진압부대 투입 작전명령을 하달하여 5.18. 02:30경까지 광주 소재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를 포함한 전국 92개 주요 대학과 국회 및 신민당사와 공화당사, 언론기관, 공공기관을 포함한 136개 주요 보안목표에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한 계엄군 2만 5천 여 명을 배치 완료하여 각 해당시설을 점거하여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였다는 점,

다.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는 공모하여, 1980.5.18. 오후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정무회의를 주재하여 연행자 석방, 계엄군 철수 등을 요구하고, 같은 달 20. 09:00에는 다시 서울 동작구 상도1동 7의 6 소재 집에서 기자회견을 하려 하자, 피고인 노태우가 5.18. 07:20경 상도동 자택에 성환옥 헌병단장이 지휘하는 수경사 헌병단 10, 53중대 병력 118명으로 하여금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주둔지인 수경사에서 출동하게 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였으나, 김영삼 총재가 이미 집안에 들어와 있던 기자들을 상대로 5·17 조치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강행하자, 외부인의 김영삼 총재 자택 출입과 김영삼 총재의 외부 출입을 금지하는 가택연금 조치를 취하는 등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였다는 점,

라. (1) 피고인 전두환, 이희성, 황영시, 정호용은 1980.5.18. 광주시위 상황을 보고받고, 광주에서의 시위가 피고인들의 정국 장악에 상당한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강력한 진압이 예상되는 공수부대의 시내투입과 증파로 이를 조속히 제압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그날 오전에 엠(M)16 소총등으로 무장한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광주시내로 투입,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고,

5. 19. 00:50경 11공수여단 병력 장교 162명, 사병 1,038명이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광주에 증파되어 차량에 탑승하고 배속받은 장갑차의 선도로 위력시위를 하고,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하는 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고, 그 중 김안부(남, 34세)가 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고,

5. 20. 다시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한 3공수여단 병력 장교 255명, 사병 1,137명을 광주에 보내, 시위 진압에 추가 투입하고, 시민들의 차량 시위 등이 계속되자 3, 7, 11공수여단 병력들이 최루탄과 진압봉을 사용하여 진압을 계속하고, 5.20. 24:00경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 12, 15대대 장교들이 시위대의 차량 공격에 대응 발포하여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히고,

(2) 같은 날 12:00경 전남대학교 앞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차량 공격 등을 시도한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성명불상 운전사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같은 날 13:00경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돌진해 오는 시위대에게 발포를 시작하고, 이어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박민환(남, 26세)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는 등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시위대들이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경찰서, 지, 파출소 등에서 총기와 실탄을 확보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자,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도청 일대에서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으로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였다는 점,

마. 피고인 전두환, 황영시,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은 광주에서 피고인들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시위대를 무장 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조속히 진압하기로 공모하고,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은 5.21. 16:35경 국방부장관실에서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하여 외곽을 봉쇄하고, 1개 연대를 추가 투입하며, '폭도 소탕작전'을 5.23. 이후에 의명 실시하고, 피고인 황영시는 5.21. 16:00경 이구호 기갑학교장에게 기갑학교 전차 1개 대대(32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진압할 것을 지시한 데 이어, 5.23. 12:30경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무장헬기 및 전차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조속히 진압할 것을 지시하였고, 피고인 이희성은 5.21. 19:30 육본 기밀실에서 방송을 통하여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하고, 이어 같은 날 20:30경 전교사령관을 통해 3개 공수여단과 같은 날 오전에 추가로 투입된 20사단 등에 자위권 행사를 지시하고, 계엄 훈령 제11호로 각 예하부대에 자위권 발동 지시를 하달하여 이에 따라 그 무렵 광주 외곽으로 재배치되고 있는 계엄군들에게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어 무장한 계엄군들이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1항 내지 제8항 기재와 같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함으로써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였다는 점,

바. 피고인 전두환, 황영시,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은,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저항하고 있는 시민과 학생들을 무력으로 조속히 진압할 의도하에,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인 '상무충정작전'을 만들어 5.25. 12:15경 국방부 내 육군회관에서 피고인 전두환, 주영복, 이희성, 황영시 및 공소외 류병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 상무충정작전을 5.27. 00:01 이후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피고인 황영시는 5.25. 오후 김재명 작전참모부장과 함께 광주에 내려 가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이를 직접 전달하고,

공소외 소준열은 피고인 정호용의 도움을 받아 광주재진입작전의 공수여단별 임무를 결정한 다음 5.26. 23:00경부터 공수여단 특공조에 의한 침투작전이 실시되어 3공수여단 특공조 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5.27. 04:00경 전남도청 후문에 도착, 도청 후문을 넘어 최후 항쟁을 결의하고 남아 있는 무장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진입하여 같은 날 05:21 전남도청을 점령하고, 7공수여단 특공조 33대대 8, 9지역대 6개 중대 장교 20명, 사병 181명은 5.27. 05:06 광주공원을 점령하고, 11공수여단 특공조 61대대 4중대 장교 4명, 사병 33명은 같은 날 04:46 제1목표인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저항 없이 점령하고, 이어 같은 날 06:20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건물을 총격전 끝에 점령하여 모두 295명의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이날 광주 재진입작전 과정에서 특공조 부대원들로 하여금 시위대에 대하여 총격 등을 가하게 하여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9항 기재와 같이 이정연 등을 각 살해하게 하는 방법으로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였다는 점은,

앞에서 항소이유에 대한 판단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무죄를 선고할 것이나, 이와 상상적 경합의 관계에 있는 내란수괴죄 또는 내란모의참여죄에 대하여 주문에서 유죄로 인정한 이상 따로 무죄의 선고를 하지 아니한다.

2.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이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허화평, 허삼수, 정호용과 반란할 것을 모의한 다음,

가.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는 공모하여, 피고인 노태우가 5.17. 17:00경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치고 수경사로 돌아와, 박동원 작전참모에게 중앙청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중앙청 건물 안에는 헌병단 병력을, 건물 밖에는 제30경비단 병력을 충분히 배치하라고 하면서 국무회의장 주변에는 더욱 철저한 경비와 보안유지를 해줄 것을 재차 당부하고, 박동원은 이를 이현우 제30경비단장과 성환옥 헌병단장에게 지시하여, 같은 날 19:35 중앙청 외곽에는 권총과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한 수경사 30경비단 소속 장교 18명, 사병 324명과 장갑차 4대를 주둔지인 경복궁에서 이동 배치하고, 현관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계단과 복도 등 중앙청 내부에는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수경사 헌병단 소속 장교 17명과 사병 236명을 주둔지인 수경사로부터 이동시켜 약 1, 2m 간격으로 배치함으로써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국무위원들에게 그 위력을 보임과 동시에, 성환옥은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할 목적으로 헌병단 통신과장에게 보안유지를 당부하면서 중앙청 내 전화선을 절단하라고 지시하여 인입 2,440회선과 구내배송선 일체를 통신실 근무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단하고, 배치된 병력들은 출입자를 검문하면서 국무위원 외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중앙청 내 근무 공무원들을 사무실에서 내쫓아 5층에 있는 방으로 모두 몰아넣은 후 5.18. 07:00경까지 외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등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였다는 점과,

나. 피고인 이희성은 1980.5.18. 01:45경 계엄군 소속 33사단 101연대 1대대 3중대 소속 장교 3명, 사병 95명이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경장갑차 8대와 전차 4대를 지원받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 소재 국회의사당을 점거하여 같은 해 8.30.까지 국회의원 등 일체의 출입자를 통제하면서 같은 해 5.20. 09:00경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기자회견에 참석하였던 황낙주, 손주항, 오세응 등 국회의원 38명과 의원비서관, 보도진 등 3백 여 명이 같은 날 10:15경 국회 정문에 도착, 국회의사당으로 들어오려 하자, 위 계엄군들이 소총으로 황낙주 의원 등을 밀어내어 국회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저지함으로써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였다는 점은,

앞에서 항소이유에 대한 판단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에 대하여 각 무죄를 선고할 것이나, 이와 상상적 경합의 관계에 있는 내란모의참여죄에 대하여 주문에서 유죄로 인정한 이상 따로 무죄의 선고를 하지 아니한다.

3.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이 사건 불법진퇴죄의 공소사실 중,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는 공모하여, 피고인 노태우가 5.17. 17:00경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치고 수경사로 돌아와, 박동원 작전참모에게 중앙청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중앙청 건물 안에는 헌병단 병력을, 건물 밖에는 30경비단 병력을 충분히 배치하라고 하면서 국무회의장 주변에는 더욱 철저한 경비와 보안유지를 해줄 것을 재차 당부하고, 박동원은 이를 이현우 30경비단장과 성환옥 헌병단장에게 지시하여, 같은 날 19:35 중앙청 외곽에는 권총과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한 수경사 30경비단 소속 장교 18명, 사병 324명과 장갑차 4대를 주둔지인 경복궁에서 이동 배치하고, 현관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계단과 복도 등 중앙청 내부에는 위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수경사 헌병단 소속 장교 17명과 사병 236명을 주둔지인 수경사로부터 이동시켜 약 1, 2m 간격으로 배치함으로써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으로서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 없이 부대를 불법 진퇴시켰다라는 점은,

앞에서 항소이유에 대한 판단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반란죄(반란수괴죄 및 반란모의참여죄)에 흡수되어 따로 별도의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에 의하여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할 것이나, 이와 일죄의 관계에 있는 반란수괴죄 또는 반란모의참여죄 등에 대하여 주문에서 유죄로 인정한 이상 따로 무죄의 선고를 하지 아니한다.

4. 이 사건 내란죄의 공소사실 중,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이 공모하여,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광주에서의 시위와 시민들의 무장 상황을 보고받고 피고인들의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강경진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광주에서 피고인들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시위대를 무장 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자위권발동이라는 명목으로 발포를 하게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조속히 진압하기로 공모하고, 자위권의 발동을 지시한 다음 실탄을 배부하고,

1980.5.22. 00:40경 3공수여단 병력이 차량 6대에 분승하여 광주 북구 문흥동 소재 광주교도소에 접근한 시위대와 교전하고, 같은 날 09:00경 다시 2.5t 트럭에 탑승하여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광주교도소에 접근한 시위대 6명과 교전하여 그 과정에서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2항 기재와 같이 서종덕 등을 각 사망하게 하여 작당하여 계엄군의 무력으로 저항하는 시민들을 강경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이나 국무위원 등을 외포케하여 폭동하였다는 점은,

앞에서 항소이유에 대한 판단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범죄로 되지 아니하거나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에 의하여 무죄를 선고할 것이나, 이와 포괄일죄의 관계에 있는 내란수괴죄 또는 내란모의참여죄에 대하여 주문에서 유죄로 인정한 이상 따로 무죄의 선고를 하지 아니한다.

5. 이 사건 내란목적살인죄의 공소사실 중, 피고인 전두환, 황영시,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이 공모하여,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피고인 전두환, 황영시, 이희성, 주영복은 피고인 정호용과 함께 광주에서 피고인들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시위대를 무장 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조속히 진압하기로 공모하고,

피고인 이희성, 같은 주영복은 5.21. 16:35경 국방부장관실에서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하여 외곽을 봉쇄하고, 1개 연대를 추가 투입하며, '폭도 소탕작전'을 5.23. 이후에 의명 실시하고, 피고인 황영시는 5.21. 16:00경 이구호 기갑학교장에게 기갑학교 전차 1개 대대(32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진압할 것을 지시한 데 이어, 5.23. 12:30경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무장헬기 및 전차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조속히 진압할 것을 지시하였고, 피고인 이희성은 5.21. 19:30 육본 기밀실에서 방송을 통하여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하고, 이어 같은 날 20:30경 전교사령관을 통해 3개 공수여단과 같은 날 오전에 추가로 투입된 20사단 등에 자위권 행사를 지시하고, 계엄 훈령 제11호로 각 예하부대에 자위권발동지시를 하달하여 이에 따라 그 무렵 광주 외곽으로 재배치되고 있는 계엄군들에게 자위권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어 무장한 계엄군들이 시위대와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기재와 순번 제1, 2, 3, 4, 5, 6, 7, 8항 기재와 같이 피해자들을 각 사망하게 하였다는 점은

앞에서 항소이유에 대한 판단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범죄로 되지 아니하거나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에 의하여 각 무죄를 선고할 것이나, 이와 일죄의 관계에 있는 내란수괴죄 또는 내란모의참여죄에 대하여 주문에서 유죄로 인정한 이상 따로 무죄의 선고를 하지 아니한다.

제3장 수뢰 및 수뢰방조 사건에 관하여

1. 피고인 전두환이 안무혁, 성용욱과 공모하여 국세청장인 성용욱의 직무에 관하여 수뢰하였다는 점에 대한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 전두환은 1987.10.경 청와대 집무실에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인 안무혁에게, 당시 국세청장인 성용욱과 함께 세금부과와 징수 및 세무조사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세청장 성용욱의 지위를 이용하여 중견기업체로부터 제13대 대통령선거 지원의 명목으로 모금을 하도록 지시하고, 안무혁은 그 시경 국가안전기획부장 사무실에서 성용욱에게 전두환의 지시사항을 전달하면서 "중견기업체로부터 선거자금을 모금하자"고 제의하고, 성용욱은 이를 승낙한 다음, 안무혁, 성용욱은 공소외 이원조와 함께 금원을 모금할 대상기업체를 선정하고 성용욱이 직접 대상 기업체의 대표들에게 금원제공을 요구하여 이를 교부받기로 함으로써 국세청장의 직무에 관하여 금원을 수수하기로 순차 공모하여, 별지 피고인 전두환이 안무혁, 성용욱과 공모하여 수뢰하였다는 부분의 일람표 기재와 같이 성용욱이 1987.10.경부터 1987.12.경까지 서울 종로구 수송동 소재 국세청장 사무실에서 공소외 박경복 등 11인으로부터, 각종 세금의 부과 및 징수, 세무조사 등의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에 대하여 불이익이 없도록 선처하여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금 2억원 내지 15억원을 각 교부받아 성용욱의 직무에 관하여 합계 금 54억 5천만원의 뇌물을 각 수수하였다.'고 함에 있는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 전두환이 성용욱의 수뢰의 공동정범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2. 피고인 노태우가 최종현으로부터 수뢰하였다는 점에 대한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 노태우는 1988.12.말경 청와대에서 선경그룹 회장 최종현으로부터 기업경영과 관련된 경제정책 등을 결정하고 금융·세제 등을 운용함에 있어서 선경그룹이 다른 경쟁기업보다 우대를 받거나 최소한 불이익이 없도록 선처하여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금 30억원을 교부받아 대통령의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수수하였다."고 함에 있는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 노태우가 대통령의 직무의 대가로 위 금원을 수수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3. 피고인 노태우가 배종열로부터 수뢰하였다는 점에 관한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 노태우는 ① 1991.9.중순경 청와대에서 주식회사 한양의 회장 배종열이 평택 인천 지역의 엘엔지(LNG)설비공사 등의 수주 사례의 취지와 함께 앞으로도 대형 관급공사를 수주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금 50억원을 교부받고 ② 1991.12.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위 배종열이 같은 취지로 제공하는 금 50억원을 교부받아 대통령의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수수하였다."라고 함에 있는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 노태우가 위 일시경 위 배종열로부터 위 각 금원을 수수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이상의 이유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판사 권성(재판장) 김재복 이충상

서울고등법원 판결(96노1892).pdf

<관련 글>

2019/04/24 - 전두환·노태우 등 서울지법 제1심 판결문(95고합1228) 전문

2019/04/27 - 전두환·노태우 등 대법원 제3심 판결문(96도3376)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