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5대 국회의원선거와 3당 체제의 형성
1996년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선거는 한국 정당체제를 또 다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15대 국회의원선거는 신한국당(1996.2.7. 민주자유당에서 당명 변경), 새정치국민회의, 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등 4당 체제 하에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구속, 장학노 비리사건과 대통령선거자금 공개논란, 3김 청산 등을 둘러싼 여야 간 공방이 전개되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은 139석을 차지하며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였고, 여대야소의 상황은 여소야대로 전환되었다.
한편 민주당의 분열로 창당된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어 제1야당의 지위를 확보하였고, 자유민주연합은 50석을 얻어 제2야당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분당 이후 1995년 12월 개혁신당과 함께‘ 3김정치 청산’을 내걸고 통합민주당으로 신설 합당한 민주당은 15석을 차지하는데 그쳐 원내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선거 전 형성되었던 4당 체제는 제15대 국회의원선거 결과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의 3당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여소야대의 정치상황은 국회의원선거 직후 이루어진 신한국당의 인위적 정개개편으로 오래지 않아 여대야소로 전환되고 말았다.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신한국당은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직후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명분으로 내세워 야당 및 무소속 당선자 영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국회 개원 전인 5월 20일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였다. 이에 야당은 신한국당의 인위적 정개개편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한편 장외 규탄집회를 전개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였고, 여야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여야 대립으로 6월 5일 소집된 개원국회는 야당이 국회의장단 구성을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등 파행을 겪었다. 과반수를 확보한 이후 신한국당은 야당의 강한 반발이 이어지자 야당의원들의 영입 추진 속도를 조절해 나갔고, 7월 1일 여야 3당은 원 구성 협상을 타결하였다. 이에 따라 국회도 국회의장을 선출하는 등 정상화되었다.
한편 신한국당의 인위적 정개개편은 여소야대 정국을 여대야소로 전환시켰지만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공조체제를 형성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직후 신한국당이 무소속 및 야당 당선자들에 대한 영입을 추진하자 야당은 이를 ‘야당 파괴행위’라고 주장하며 검찰의 편파수사의혹 및 정치공작설을 제기하는 한편 여권의 금권·관권에 의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5월 4일 총재회담을 통해 대여 공동투쟁에 합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공조체제를 형성한 양당은 장외집회뿐만 아니라 국회 문제에 있어서도 공동으로 대응하는 한편 재·보궐선거에서도 단일후보를 내세우는 선거공조를 취하였다. 그 결과 1996년 9월 12일 서울 노원구청장 재선거와 1996년 11월 18일 경기 오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양당의 단일후보가 당선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처럼 양당은 이념과 정책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이후 신한국당에 맞서기 위해 공조체제를 형성하였고, 이에 따라 여야관계는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자 유민주연합의 양자대결 구도로 전개되었다.
2. 제15대 대통령선거와 정당 간 이합집산
제15대 대통령선거가 예정된 1997년은 1996년 말 신한국당의 노동관계법 단독처리 파문이 확산되면서 여야간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야당은 국회의장의 사퇴권고 결의안을 제출하는 한편 단독처리된 개정안에 대한 효력가처분 헌법소원을 제기하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반독재투쟁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대대적인 저항에 나섰다. 이와 더불어 1997년 1월 노동계가 전국적인 파업에 나서면서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1997년 1월 말 한보비리 사건이 불거지자 야당의 대여공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새정치국민회의는 한보비리 사건에 대한 특별검사제를 요구하고 나섰고, 2월 19일 한보비리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후 김영삼 대통령의 대국민사과가 이어졌다. 신한국당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북한자금 1만 달러 수수를 폭로하면서 분위기 반전에 나섰다. 그러나 3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의 YTN 인사개입 파문이 일면서 여야는 4월까지 게이트 정국의 혼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국혼란은 한보청문회 실시와 김현철의 구속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5월 들어 각 정당들이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 선출에 나서면서 정치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는 5월 19일 김대중 총재를, 자유민주연합은 6월 23일 김종필 총재를 각각 제15대 대통령선거 후보자로 선출하였다. 신한국당의 경우에는 6명의 후보가 출마한 경선을 통하여 7월 21일 이회창 전 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민주당은 7월 30일 조순 전 서울시장을 영입 한 후 9월 12일 대통령후보로 추대하였다. 이러한 후보선출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상황은 급속하게 대통령선거 정국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대통령후보 선출과 관련한 각 정당 내부 갈등이 확산되었으며, 여야간 공방도 대통령선거 자금에 대한 논란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주요 정당의 대통령후보 선출이 종료되고 본격적인 대통령선거 경쟁이 시작되면서 각 정당 간 그리고 후보 간에는 선거상황에 따른 이합집산이 전개되었다. 가장 앞서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이후 야당 공조체제를 지속해 왔던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후보단일화가 진행되었다. 양당은 내각제와 공동정부 구성을 매개로 단일화 협상을 진행해 나갔다. 결국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정권 창출 시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을 총리로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 1997.12.18. 제15대 대선 이회창·김대중·이회창 후보(이회창 후보와의 득표율 격차 1.6%, 표차 39만557표의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당선)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후보단일화와는 달리 신한국당은 오히려 내부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선거정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아들의 병력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당내에서는 구 통일민주당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후보교체론이 제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후보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가 탈당하면서 신한국당은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이후 이인제는 11월 10일 국민신당을 창당하였고, 신당의 대통령후보로 나서면서 대통령선거 경쟁구도에 대변화를 가져왔다.
‘대세론’이 거론되며 우위를 점하던 신한국당과 이회창 후보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당내 분열로 인한 위기에 봉착하였고, 대통령선거 경쟁은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파전으로 전개되었다. 어려움에 처한 신한국당은 세력 확장을 위해 선거경쟁에서 열세에 있던 민주당과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결국 11월 7일 양당은 합당에 합의 한 후 11월 24일 한나라당을 출범시켰다. 합당협상 결과에 따라 신설합당한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는 이회창으로 단일화 되었고, 대신 당 총재는 민주당 조순이 맡게 되었다. 이로써 대통령선거 경쟁은 막바지에 이르러 명확히 3자 대결구도로 재정리 되었다.
한편 기타 군소정당들의 경우에는 공화당이 허경영 후보를, 바른나라정치연합이 김한식 후보를, 통일한국당이 신정일 후보를 내세워 대통령선거 경쟁에 참여하였다. 또한 독자적으로 대통령후보 추대운동을 벌여온 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 재야사회·노동단체들은 ‘국민후보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독자후보 추대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1997년 11월 24일 진보적 대중정당을 표방하는 정치결사체인 ‘건설 국민승리21’을 창당하였고,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국민후보로 추대하였다.
1997년 1년 동안 각 정당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이합 집산하여 한나라당, 새정치국민회의, 국민신당의 3당 대결로 진행된 제15대 대통령선거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유효투표의 40.3%인 1,032만 6,275표를 획득하여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39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4번의 대통령선거 출마 끝에 당선되었다.
선거 전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후보단일화를 통해 공동정부 구성에 합의하면서 최초의 연합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후 1998년 2월 25일‘국민의 정부’로 명명된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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