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자유당의 분열과 자유민주연합창당: 3당체제의 형성 

1994년 말 각 정당들은 여야 구분 없이 상당한 내부갈등을 겪었다. 특히 3개 정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집권여당 민주자유당은 당 내부에 형성되어 있던 계파 간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1995년 초 분당사태를 맞았다. 민주자유당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김종필 대표 체제를 유지해 오면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지속적으로 당내 갈등이 이어져 왔다. 이러한 잠재된 갈등은 전당대회를 2개월여 앞둔 1994년 말 당내에 김종필 대표위원의 2선 후퇴 주장이 제기되면서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이 당 세계화 방안을 천명한 이후 대대적인 당 개혁 논의가 전개되면서 새로운 지도체제가 모색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종필 대표위원의 2선 후퇴가 공론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갈등 상황 속에서 1995년 1월 10일 김영삼 대통령은 김종필 대표위원과의 회동에서 김종필 대표위원의 2선 퇴진을 통보하였고, 이를 계기로 당내 갈등은 파국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김종필 대표위원은 1995년 1월 19일 대표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김종필 전 대표위원은 구 신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당 창당을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1995년 2월 9일 민주자유당 탈당과 함께 신당창당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로써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은 199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구 민주정의당 출신 핵심 인사들의 탈당사태를 겪은데 이어 또 다시 구 신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는 분열사태를 맞았다. 

김종필 전 민주자유당 대표위원과 구 신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은 이후 1995년 2월 21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열고 자유민주연합이라는 신당 창당을 공식화하였다. 이후 3월 30일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김종필을 총재를 선출하고 자유민주연합을 공식 출범하였다. 

이어 5월 31일에는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당명을 유지한 채 신민당과 신설합당하여 당세를 확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자유민주연합은 5월 25일 20명의 현역의원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민주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는 민주자유당의 분열과 자유민주연합의 창당으로 3당구도로 재편되었다. 

2. 민주당의 분열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4당 체제의 형성 

1995년 6월 27일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장과 광역 및 기초의회의원을 동시에 선출하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는 자유민주연합의 창당으로 민주자유당, 민주당 등 3당의 경쟁구도 속에 전개되었다. 재편된 3당 체제 속에서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승리, 그리고 자유민주연합의 선전으로 나타났다. 반면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개혁정국 속에 독주하던 민주자유당은 패배를 경험하였다. 특히 민주당은 가장 핵심 지역이었던 서울을 포함하여 4곳의 광역단체장선거에서 승리하였고, 기초단체장 84명이 당선되었다. 광역의회의원선거에서는 지역구에서 352명이 당선되어 정당들 중 가장 많은 당선자를 배출하였고, 서울시를 포함한 7개 시·도의회에서도 제1당을 차지하였다.


1994.12.21. 정계 복귀 없음을 발언하는 당시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

▲ 1994.12.21. 정계 복귀 없음을 발언하는 당시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

그러나 민주당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승리는 정국주도권 회복과 당세의 확장 대신 극단적인 당내 분열로 이어졌다. 민주당의 당내 계파갈등은 선거 전부터 반복되어 왔다. 민주당은 전국동시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새한국 당·통일시대국민회의와의 야권 3자 통합을 이루어내며 당내 갈등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선거기간 일시적으로 잠복해 있던 계파 갈등은 선거 후 또 다시 심화되어 분출되었고 결국 분당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러한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의 중심에는 당권을 가지고 있던 이기택 총재 측과 김대중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소위 동교동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는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후 12월 19일 정계은퇴를 선언하였고, 외형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민주당 내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를 이끌고 있었다. 1994년 1월 27일 설립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하 아태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강연 등을 통하여 북핵문제·개헌론·기타 현실정치 관련 발언을 이어가면서 실질적인 정치활동을 벌여왔다. 특히 6·27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소속 후보자들을 위한 지원연설을 하는 등 지방선거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과 동교동계는 이기택 대표 측과 지속적으로 대립양상을 보여 왔고, 6·27 지방선거 후보자 공천과정에서는 극단적인 갈등을 표출하였다. 선거로 인하여 잠시 잠복했던 갈등은 지방선거 이후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분출되었고, 결국 1995년 7월 18일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정계복귀 선언과 함께 동교동계 인사들은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당창당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당에 참여하기 위해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 54명은 공식적인 신당 출범에 앞서 우선 8월 12일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여 제1야당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이후 이들은 1995년9월 5일 창당대회를 열어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을 총재로 선출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로써 1995년 5월 자유민주연합 창당으로 3당 체제로 재편된 정당 체제는 3개월여 만에 민주자유당,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의 4당 체제로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