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4대 대통령선거 결과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듬해 1993년 2월 ‘문민정부’로 명명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였다. 새 정부 출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어 공식적으로 활동한 정당은 집권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비롯하여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신민주당, 친민당, 대한정의당, 새한국당 등 모두 8개 정당이었다.
이 중 원내에 의석을 보유한 정당은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새한국당 등 5개 정당이었으며,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정당은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등 3개 정당이었다. 그러나 통일국민당은 1992년 12월 실시된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당내 갈등과 내분으로 소속 의원들이 연쇄 탈당하는 등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결국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에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자격을 상실하고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한국 정당정치는 161석의 집권여당 민주자유당과 95석의 제1야당 민주당을 두 축으로 하는 양당체제로 재편되었다.
김영삼 정부 원년 정당 활동은 공직자재산공개를 시작으로 추진된 강력한 개혁정국 속에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고, 정부와 집권여당이 전반적으로 정국을 주도하였다. 특히 각 정당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당내갈등은 정당 활동을 위축시켰다. 야당의 경우 정부와 집권여당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야권통합을 모색하였으나 각 정당 들의 당내갈등과 정당 간 이해관계로 인하여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1994년 7월 8일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이 신민당으로 합당하여 부분적인 야권통합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민당 또한 합당 직후부터 당내갈등으로 인하여 장기간의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당내갈등의 문제는 집권여당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김종필 대표체제로 운영되어 오던 민주자유당은 지속적으로 계파 간 갈등을 표출해 오다 1994년 말 당내갈등이 심화되면서 1995년 1월 김종필 대표위원이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후 4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이후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5월 31일 신민당과 자유민주연합으로 신설합당하여 새로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양당체제로 재편된 정당구도는 2년여 만에 3당 체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전후하여 다수 정당들의 성립과 변화가 수반되었다. 지방선거 전 1993년 10월 대한민주당, 1995년 1월에 정명당이 창당되었고, 지방선거 이후에는 당내갈등이 심화되면서 민주당이 분당 사태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제14대 대통령선거 패배 이후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여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이에 따라 3당 체제의 정당구도는 민주자유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민주당 등 일여다야(一與多野)의 4당 체제로 전환되었고,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소위 ‘신3김정치’가 부활하였다. 이러한 변화속에 반(反)3김 지향의 시민사회세력들은 1995년 11월 보스정치와 지역정치 타파를 내세우며 개혁신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개혁신당은 반(反)3김이라는 공통된 정치적 주장을 내세우고 있던 민주당과 1995년 12월 21일 통합민주당으로 신설합당하였다. 이로써 4당 체제는 민주자유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으로 재구성 되는 작은 변화를 보였다.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면서 또 다시 정당의 성립과 변화가 이어 졌다. 집권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정국쇄신과 국회의원선거 승리를 위해 1996년 2월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하며 새롭게 출발하였다. 또한 선거 직전 1996년 3월 무당파 국민연합과 21세기한독당이 창당되었다. 제15대 국회의원선거 결과 신한국당은 139석,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 자유민주연합은 50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고, 통합민주당은 15석을 얻는 데 그쳐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써 여대야소 정국은 여소야대로 전환되었고, 정당구도 또한 4당 체제에서 3당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신한국당은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직후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이유로 내세워 무 소속과 야당인사에 대한 영입에 나섰고, 결국 제15대 국회 개원 전에 원내 과반수를 확보 하여 여소야대 정국을 여대야소 정국으로 전환시켰다. 한편 친민당, 대한민주당, 무당파 국민연합, 21세기한독당은 선거결과 정당존립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소멸되었다.
인위적 정계개편을 통해 형성된 여대야소 정국하에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신한국당에 맞서기 위해 공조체제를 형성하였고, 그 결과 3당체제는 여야간 양자대결의 갈등구조가 전개되었다. 이후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각 정당들은 대통령선거 승리를 위한 이합집산을 시작하였다. 신한국당에 맞서기 위한 공조체제를 유지해 오던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김대중으로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하고 정당연합을 형성하였다. 신한국당은 7월 21일 경선을 통하여 이회창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가 9월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탈당한 후 국민신당을 창당하면서 분열하였다. 한편 1996년 6월 통합민주당에서 당명을 변경한 민주당은 이후 대통령선거를 준비하는 과정 에서 1997년 7월 조순 서울시장을 영입하여 총재 및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일을 한 달여 앞둔 11월 민주당과 신한국당은 신설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출범시키며 이회창을 단일후보로 내세웠다. 그 이외에도 공화당, 민주국민연합, 바른 나라정치연합, 건설국민승리21 등 4개 정당이 대통령선거 직전 새롭게 창당되었다.
분열과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의 3자 대결구도 속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헌정사상 초유의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한국 정당정치는 정당연합이라는 새로운 정당구조를 경험하였다. 이로써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야당에서 공동여당의 지위로 탈바꿈하였고, 한나라당은 야당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한편 외형적 정당구도는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의 3당 체제였지만, 공동여당의 등장으로 실제로는 양당체제를 형성하였다.
이상과 같이 성립, 변화, 소멸의 과정을 거치면서 김영삼 정부 5년 동안 총 25개 정당이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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