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개혁과 정당활동의 위축 

1993년 2월 25일‘개혁과 변혁’을 전면에 내세운 김영삼 정부가 한국병 치유와 신한국 창조를 선언하며 공식 출범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부출범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고, 이후 한국정치는 2년여의 기간 개혁정국 속에 많은 변화를 경험해야 했다. 권위주의 청산을 위해 공작정치 산실로 일컬어지던 이른바 ‘안가’ 철거와 국가안전기획부 등의 정치사찰 중지 작업이 진행되었고, 정치군인들과 비리연루 군인들을 축출하는 ‘군의 문민화’가 추진되었다. 무엇보다도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공직자 재산공개는 축재나 투기와 관련된 다수의 유력정치인 및 고위공직자를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한 공직자윤리법 개정을 통하여 공직자 재산공개를 제도화하였다. 


공직자 재산공개의 여파는 여야 구분이 없었다. 특히 집권여당인 민주자유당은 큰 후유증을 겪었다. 민주자유당은 소속의원들의 재산공개와 함께 투기 등 부도덕한 축재과정에 대한 여론이 비등해지자 당내에 ‘재산공개진상파악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일부 의원들은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일부 의원들에 대해서는 탈당 및 경고의 징계처분이 내려졌다. 한편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도 재산공개에 대한 여론의 지지 속에 재산공개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야당 의원들에 대해서도 부동산 투기의혹 등이 제기되었다. 이에 민주당 또한 재산공개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조사에 나서는 한편 징계방침 등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해당 의원들의 반발로 징계방침을 철회하는 등 내부 진통을 겪었다. 


1993.2.25.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대통령 취임

▲1993.2.25.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


개혁정국 속에 재산공개와 더불어 각급 기관이 총동원된 사정활동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고위공직자는 물론 금융계 등에서도 입시부정사건·동화은행 비자금사건·슬롯머신 비리사건·율곡사업 비리사건 등 각종 비리에 연루된 자들이 처벌되었다. 또한 경제정의 실현과 이른바 ‘검은 돈’의 양성화를 목적으로 획기적인 경제개혁이라 일컬어지는 금융실명제가 1993년 8월 12일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 추진된 강력한 개혁 여파가 커지면서 정치권에서는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가 강하게 제기되었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법과 제도에 의한 법치가 아닌 인치(人治)라는 지적과 함께 대통령 1인 독주라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물론 야당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정치실종’이라는 말까지 대두되었다. 또한 강력한 사정활동에 대해 표적사정, 보복사정이라는 비난이 일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혁정국이 이어지면서 김영삼 정부 초기의 정당활동은 극히 위축되었다. 재산공개파동은 여당 내부에서조차 사정정국, 인사청산 문제를 제기할 만큼 큰 혼란 을 가져왔고, 다수의 정치인들이 재산축재와 관련하여 의혹을 받으면서 정당정치 자체가 위축되었다. 특히 야당 중 유일하게 교섭단체를 구성한 민주당마저 야당의 정체성과도 같았던‘개혁’을 정부와 여당에 선점당하면서 제1야당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군소정당들은 정당의 존속과 유지를 고심해야 했다. 심지어 집권여당인 민주자유당 또한 개혁바람 속에 내부적 혼란을 겪으며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강하였고, 이에 따라 김영삼 정부 출범 첫 해는 정부가 정국을 주도해 갔다. 반면 각 정당들은 내부적 혼란 속에 적극적인 정당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개혁정국의 여파는 제14대 국회의원선거 재·보궐선거에서도 드러났다. 1993년 4월과 6월 실시된 6개 선거구의 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무려 5개 선거구에서 승리하였다. 반면 민주당은 6월 보궐선거 중 단 1개 선거구에서만 승리하였다. 이에 민주당·통일국민당·새한국당 등 야3당은 개혁정국 속에 위축되어 가는 야당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7월 16일 공조체제 구축에 합의하고, 8월 12일 실시된 2개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자를 단일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단 한 곳에서도 당선되지 않아 야권공조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2. 여야 대치정국과 당내갈등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 정부 주도의 정치상황은 1993년 후반 들어 다소 변화를 보였다. 이는 김영삼 대통령이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고 공약한 쌀 수입 문제가 ‘개방’으로 결론나면서 부터였다. 이와 관련하여 대통령은 12월 9일 대국민사과 담화를 발표하였고, 이를 계기로 위축되었던 야당은 정부와 여당에 보다 강력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4년 3월에는 정부가 우루과이라운드(UR)협정서 수정안을 제출하자 야당은 이에 대한 공세를 폈고, 결국 이회창 국무총리의 대국민사과를 이끌어내었다. 특히 1994년 3월 들어 상무대비리의혹이 제기되자 이에 대한 국정조사를 발동하여 대여공세를 강화하였고, 그 결과 여야 간 갈등이 심화되어 국회 공전이 반복되는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5월과 6월 두 차례의 영수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오히려 상호불신을 초래하여 여야갈등이 심화되었다. 


여야의 대결상황은 1994년 11월 검찰이 12·12 사태 관련자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리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기소유예 결정에 반발한 민주당은 국회등원을 거부하고 장외투쟁에 나서는 한편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제출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이에 따라 국회는 1개월 이상 공전사태를 맞았다. 그러나 민주자유당은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1995년도 예산안과 1994년 추곡수매동의안을 단독으로 처리하는 등 오히려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비준동의안 승인 문제와 정부조직법 개정 등 주요 정치현안이 대두되면서 민주당이 등원을 결정하고 국회는 정상화되었지만 여야 간 갈등은 연말까지 지속되었다. 


이처럼 1994년 들어 민주당은 대여공세를 강화하며 야당의 위상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쉽게 식지 않는 개혁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거대여당의 독주 속에 정국주도권의 회복은 쉽지 않았고, 오히려 당내갈등이 심화되면서 불안정한 모습을 이어갔다. 민주당은 집단지도체제 속에 계파갈등으로 인하여 통일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다. 계파갈등은 원내총무 경선, 제14대 국회 하반기 원 구성 과정에서의 국회부의장 인선 등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표출되었다. 특히 검찰의 12·12 군사반란자 기소유예 결정에 반대하는 투쟁 과정에서는 그 방향성을 두고 당내 갈등이 심화되면서 분열 직전의 상황에 이르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열세의 상황이 계속되면서 야권은 정부와 여당에 대응하기 위해 민주당을 중심으로 대통합 논의를 진행하였다. 또한 입지가 약한 군소정당들은 대통합 논의와 함께 제3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한 소통합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의 통합논의에도 불구하고 야당통합 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각 정당들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하여 갈등하였고, 무엇보다도 각 정당들은 당내갈등을 겪으면서 야권통합에 대한 통일된 입장을 마련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야권통합은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은 대규모 야권통합에 앞서 1994년 7월 8일 신민당으로 신설합당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은 창당 이후 심각한 당내 계파갈등을 겪으면서 장기간 혼란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