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高宗 1852.8.27. 출생~1919.1.21. 사망 향년 66세|재위기간: 1864.1.21.~1907.7.19.|조선 제26대 국왕 |본명: 이재황 李載晃→이형 李㷗|대한제국 초대 황제)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11.3. 출생~1912.7.29. 22시 43분 사망 향년 59세|재위기간: 1867.2.13.~ 1912.7.30.|제122대 천황|본영: 사치노미야 무쓰히토 睦仁 목인)

이완용(李完用 현 경기 성남시 출생 1858.7.17.~1926.2.11. 사망 향년 67세|제16대 내각총리대신 재임기간: 1907.6.24.~1910.8.29.)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いとうひろぶみ 이등박문 1841.10.16.~1909.10.26. 사망 향년 68세|1885.12.22.~1901.5.10.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1905.12.21.~1909.6.13. 초대 한국통감)


▮ 제1차 한일협약(第一次韓日協約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등)

-  이 협정은 흔히 '한일협약' 또는 '제1차 한일협약'이라고 불리지만, 문서 원본에 제목이 없기 때문에 공식 명칭은 없다.

조선 고종(高宗) 41년(대한제국  광무 8년) 1904.2.8. 일본은 러일전쟁(日露戦争 1904.2.8.~1905.9.5.) 개전(開戰) 후 서울을 점령해 2.23. 동맹국 중 일방이 타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공격할 감행할 경우 함께 방어와 공격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공수동맹(攻守同盟)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적으로 체결하고, 이어 8.22. 일본정부 추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삼아 그의 의견을 들어 일체 재무사항을 시행하게 하는 등의 아래와 같은 내용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 작업은 한 발짝 더 진전되었고, 외교권도 제한되었다. 이 협정은 병가를 낸 외무부대신 이하영을 대신하여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서명하였다.

1. 대한(大韓) 정부는 대일본(大日本)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財政顧問)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傭聘)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1.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삼아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1. 대한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미리 대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

광무 8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
메이지 37년 8월 22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 제2차 한일협약(乙巳條約 을사늑약)

- 문서 원본에 제목이 없기 때문에 공식 명칭은 없다

조선 고종(高宗) 42년(대한제국 광무 9년) 1905.11.17. 일본제국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등박문)의 강압(强壓)하에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등 조선 대신 5명의 찬성으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서명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이어 1906.2.1. 외교사항을 관할하는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 1906.2.1.~1910.10.1. * 1906.1.31. 주한일본공사관을 폐쇄하고 2.1.부터 업무 개시)를 설치하여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에 부임했다.

▮ 제3차 한일협약(한일신협약 丁未七條約 정미 7조약)

조선 고종(高宗) 44년(대한제국  광무 11년) 1907.7.24.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과 한국통감(韓國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등박문)가 정미 7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 안중근(安重根 初號:청계淸溪 1879.9.2.~1910.3.26. 사망 향년 30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등박문) 사살

메이지 천황 42년(대한제국 융희 3년) 1909.10.26. 당시 추밀원(枢密院 일본 천황 자문기관)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와 회담하기 위해 청나라 만저우 지방 지린성 하얼빈역에 도착해 열차 차내에서 25분가량 대화 후 열차 하차 후 러시아 군대를 사열하는 순간인 오전 9시 30분경(UTC+08:30 기준) 안중권(現 황해남도 해주시 광석동 출생|順興安氏 순흥안씨 관향: 경북 영주시 순흥면)이 발사한 권총 6발 중 첫 두발을 복부에 맞아 곧 이어 사망하고, 일부 일행은 총상을 입었다.

▴ 사형장으로 향하는 안중근

그는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어 하얼빈 일본 영사관에 인계된 뒤 11.1. 오전 이곳을 출발하여 타 관련자들과 함께 일본 식민지였던 관동주의 뤼순감옥(뤼순형무소)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으면서 다음해 1910.3.26. 오전 10시 살인죄로 이곳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 집행으로 목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 뤼순 옥중에서 마지막 면회에서 빌렘 신부와 정근·공근 두 동생에게 유언을 하고 있는 안의사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 근처 죄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으나, 일본제국이 그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 현재까지도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1962.3.1. 대한민국 정부 제4대 윤보선 대통령(당시 내각수반 송요찬)이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 가묘(假墓)

○ 안중근의 옥중 한시(漢詩)

북녘 기러기 소리에 잠을 깨니 홀로 달 밝은 누대 위에 있었다. 언제고 고국을 생각지 않으랴 삼천리가 또 아름답다. 형제의 백골이 그 삼천리 땅속에 의의하고 부조는 청산에 역력하다. 우리 집에는 무궁화가 만발해서 기다리고 있고 압록강의 봄 강물은 돌아가는 배를 가게 해준다.

남자가 뜻을 육대주에 세웠으니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어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뼈를 어째서 선영에도 묻기를 바랄 소냐 인간이 가는 곳이 이 청산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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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막신과 대지팡이로 동네를 나오니 강둑의 푸른 버드나무가 빗속에 즐비하다. 모든 벌이 어찌 금곡주와 같겠는가. 무릉도원을 배 타고 찾는 것이로다.

여름의 풍류는 인간이 다 취하고 가올은 세상 일이 손님이 먼저 들기를 기다린다. 주인의 풍치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흥이 푸른 나무들의 연기에 충분하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나가서자 푸른 산과 흰 들 사이에 꽃이 간간히 피어 있다. 만약 화가로 하여금 이 경치를 묘사하게 한다면 그 나무안의 새소리를 어떻게 그릴까. 갈대꽃위에 누구의 이름을 새길까 헤아려 눈 속에 들어간뒤에 글자마다 분명할 것이다. 남자가 처음 한 맹세를 배반못하겠다.

해동의 밝은 달은 선생님의 얼굴이요. 북풍 맑은 곳은 처사가 있는 곳. 붉은 꽃, 푸른 버들은 작년 봄과 같고 여름이 지나고 서늘함이 생기니 가을이 왔구나.

일어나서 머리와 얼굴을 가다듬으니 누가 나와 함께 여기에 있는가. 누런 나뭇잎 덮인 사양길에 조금전엔 작은 어느 가게에 있었는데 백운명월은 다시 공산에 떠 있다.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은 전생의 꿈과 같은데 고요한 혼백은 죽지 않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나의 혼백만이 짧은 지팡이를 집고 나의 살던집을 찾아기 부엌의 한 등불만 나와의 관계인 것이다. 일보일보 삼보 다가가서 서니
붉으레한 안방의 향기가 그치질 않았고 여인은 반은 교태를, 반은 부끄러움을 머금었다. 내 죽은 뒤에 가만히 나를 생각하겠는가고 물으니 두손을 모으고 금비녀 머리를 끄덕인다.

마음속에서 이별의 말은 계속되고 이별의 술잔이 손에 닿는것이 더디기만 하다. 살아서는 오히려 생각하는 날이 있었는데 죽은 뒤에는 어찌 저 홀로 가는 때를 견디어 내겠는가. 만약 인연이 오래오래 막혔다고 말하지 말아라. 평생에 오히려 근심속에 기약하는 것이었을 것이냐. 편지 한 장을 날려 천문에 도달하게 할 수가 있어 나의 사정을 호소하면 그대로 혼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가 차라리 죽을 지언정 바른 마음을 속일까보냐 판사 검사가 어찌 나의 속마음을 알까. 원수는 갚았고, 곧 외로운 혼은 땅에 떨어진다.

○ [KFN] 안중근 의사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2016.3.29.)

▊ 일제강점기(1910.8.29.~1945.8.15. 34년 11개월)


■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조약(韓日合倂條約 한일합병조약)과 대한제국의 멸망(1910.8.29.)

대한제국(大韓帝國) 제2대 순종황제(* 당시 36세) 재위(隆熙 융희 4년) 庚戌年 1910.8.22.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 일본(당시 정식국호: 대일본제국) 메이지천황(또는 명치천황 * 당시 57세) 재위(메이지 또는 明治 명치 43년) 통감자작(統監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내정의)는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約)을 체결(調印 조인)하고, 8.29. 황제 순종(純宗)은 어명(御名)으로 한국의 통치권을 일황에게 양여한다는 칙유(勅諭)를 내리고 공포(公布와 發效 발효)하였다. 일본은 추밀원의 자순(咨詢)을 거쳐 천황이 병합조약을 재가한 후 이를 공포하였다.

일본제국 明治(명치) 43년 1910.8.29. 한일병합 조약을 공포한 이날 명치(明治) 천황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개칭하는 칙령(勅令) 제318호를 공포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은 1945.8.15. 광복이 되기까지 일본제국의 외지 영토로서, 대한제국의 국민은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조선(朝鮮) 국민으로서 35년(34년 11개월)의 지난(至難)한 삶을 이어 나가게 된다.

윤봉길(尹奉吉 號:매헌梅軒 1908.6.21.~1932.12.19. 사망 향년 24세)의 폭탄 투척 일본제국 주요인사 제거

일제강점기의 일본국 제124대 천황 쇼와천황(昭和天皇 1901.4.29.~1989.1.7. 향년 87세 사망|재위기간: 1926.12.25.~1989.1.7.)이 재위하던 쇼와(昭和) 7년 1932.4.29. 중화민국 상하이시 훙커우 공원(現 루쉰 공원)에서 쇼와 천황 탄신일(天皇誕生日·天長節) 기념행사가 열렸고, 이어 거행된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에서 윤봉길(現 (現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출생|坡平尹氏 파평윤씨 관향: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이 투척한 물통 폭탄의 폭발로 당시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이며 전 일본국 제18대 육군대신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가 폭발로 중상을 입고 치료 중 패혈증이 악화되어 다음 달 5.26. 사망하였고,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는 직격으로 폭탄을 맞아 다리의 중상과 창자가 끊어져서 다음 달 4.30. 3시10분에 사망했다.

또한 중화민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제국 제61·64·75~77대 외무대신)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1928.8. 육군 중장 진급→중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일본제국 육군 제9사단장)은 왼쪽 다리를 잃었으며,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郎 일본제국 제54대 외무대신) 중장은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고, 이 외에도 많은 주요 인사들이 부상당했다.

그의 신병은 일본 소재 9사단 본부로 옮겨지게 되었다. 9사단을 주축부대로 한 일본군은 윤봉길을 일반 형사재판에 넘기지 않고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당시 일본육군 형법 21조에 따라 총살형을 채택하게 되었다.

체포된 그는 5.25. 일본 상해파견군군법회의에서 살인,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단속벌칙위반죄 등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아 11.18. 일본기선 소속 1만4천 톤급 여객선 다이요마루(大洋丸)에 실려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1932.11.20. 고베(神戶)항에 도착한 후 곧바로 오사카(大阪)로 옮겨져 일단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사형집행을 위해 12.18. 가나자와 육군 제9사단 위수구금소로 이감된 후 이튿날인 1932.12.19. 일본 육군 제9사단의 공병대 연습장이었던 이시카와현(石川縣) 가나자와시(金澤市)의 남서부에 위치한 미쓰코지야마(三小牛山)* 서북(西北)의 가나자와시(金澤市)-오하라(小原)지역 구간 산중 도로의 동쪽 골짜기에서 오전 7시27분 정사수가 쏜 총알을 미간에 맞고 13분 뒤인 7시 40분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 미쓰코지야마(三小牛山): 가나자와시(金澤市)의 남서부에 위치한 노다산(野田山) 묘지(前田家墓地 마에다 가족묘지)에 접속하는 구릉성(丘陵性: 땅이 약간 언덕진 특성)의 산으로 최고부는 해발 167m로 제2차 세계대전 전 舊 육군 제9사단의 공병대 연습장이었지만 현재는 육상 자위대 가나자와 주둔 부대의 연습장이 되었음.

사체의 매장은 가나차와 헌병대장 소노요시히코(曾野芳彦)의 손에 맡겨졌다. 육군형법에는 사형을 집행한 후 친족이나 연고자 중에 사체를 요청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이를 넘기고, 인수하지 않는 사체는 매장하며, 매장할 때 의류를 입혀 관에 넣고 육군묘지에 토장하되 묘표(墓標)는 가로 3치, 길이 1자 5치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나 그의 사후처리는 이 법 규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유해를 관에 넣고 형장에서 약 3키로 떨어진 노다산(野田山) 육군묘지에 인접한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 한 구석에 6척의 깊이로 매장하였는데, 안내소에서 감시하기가 쉬운 곳으로 공동묘지의 통로에 평장하고 묘표(墓標)마저 세우지도 않고 흔적조차 없앴다. 그의 유해를 화장했다고 하였으나 육군묘지 아래 일반인이 왕래하는 통로에 암장되었다.

1933.2.7. 윤봉길의 부친 윤황(尹堭)은 예산경찰서에 가서 유골이라도 보내주기를 부탁한다면서 가나자와 위수구금소 앞으로 유골 인도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일본군은 화장 후 매장한 유골은 제공할 수 없다면서 유골 신청을 무시했다.

1962.3.1. 대한민국 정부 제4대 윤보선 대통령(당시 내각수반 송요찬)이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윤봉길 암장지(暗葬地)

▴ 가나자와시(金澤市)의 노다산(野田山 のだやま노다야마)에 있는 윤봉길 암장지(暗葬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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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야마는 시가지의 남동부에 자리한 구릉지이다. 특히 산 정상 부근에는 마에다가(家)의 역대 번주와 그 가족들의 묘지가 있고, 그 아래 경사면에는 가신들의 묘가 자리해 있으며, 요즘에는 산자락 대부분이 묘지로 되어 있다.

이곳 한쪽에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가 있다. 윤봉길은 1932년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의 주인공으로, 당시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의 주력부대였던 제9사단의 본거지인 가나자와로 연행된 후 군사재판을 통해 처형되어 노다야마에 암장되었다.

1946년, 유해는 본국으로 반환되어 국민장이 치러졌다. 현재 암장지는 매헌 윤봉길 의사 현양회가 관리하고 있으며, 1992년에는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이 중심이 되어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이봉창(李奉昌 일본명: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 1900.8.10.~1932.10.10. 사망 향년 32세|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 출생|공주이씨) - 묘소(墓所):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일본 도쿄(東京)에서 쇼와천황(昭和天皇 일본 제124대 천황|본명: 히로히토)을 폭사(爆死)시키려다가 미수에 그쳐 1932.10.10. 동경의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고 사이타마현 우라와(浦和)시에 있는 우라와형무소에 매장되었다.

육삼정사건(또는 육삼정의거)과 주역 백정기(白貞基)·정화암(鄭華岩)·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 

1933.3.17. 백정기(白貞基)·정화암(鄭華岩 정윤옥 鄭允玉·정현섭 鄭賢燮으로 불림),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 등 아나키스들이 주 중화민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일본 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 정객, 일본 제국 육군 소속 군인 등 100여 명을 상하이 홍구(虹口 현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훙커우구)의 로쿠산테이(六三亭 육삼정)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릿집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한 뒤, 이들을 암살하려고 모의하고 습격을 준비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의 역습을 받아 이날 백정기·원심창·이강훈 등 3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거사 실행 직전 사전 정보 누설로 체포되어 의거가 실패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 나가사키시로 이송되어 1933.11.24.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살인예비 및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취체법 위반, 기물파손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 과정에서 백정기는 모든 것을 자기가 주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백정기·원심창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백정기는 구마모토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 중 지병이던 폐결핵이 재발해 악화되어 1934.6.5. 오후 11시에 옥사하고, 원심창은 가고시마현 가고시마 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5.10.10. 석방되었고, 이강훈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나가사키현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10.10. 석방되었다.

백정기(白貞基 號:구파鷗波·九波 1896.3.2.~1934.6.5. 사망 향년 38세|현 전북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 출생|수원백씨) - 묘소(墓所):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정화암(鄭華岩 本名:정현섭鄭賢燮 字:정윤옥鄭允玉 號:화암華岩 1896.9.14.~1981.1.21. 사망 향년 84세|현 전북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 출생|동래정씨) - 묘소(墓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원심창(元心昌 異名:원훈元勳 1906.12.1.~1971.7.4. 사망 향년 65세|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안현마을 출생|원주원씨) - 묘소(墓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이강훈(李康勳 號:청뢰靑雷 1903.6.13.~2003.11.12. 사망 향년 100세|강원도 김화군 서면 청양리 출생|전주이씨) - 묘소(墓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윤봉길(尹奉吉)·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봉환(遺骸奉還)

✓ 1945.8.15. 광복 후 11월 윤봉길 출신지인 충남 예산군 덕산에서 '윤봉길선생유골봉환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대표로 선임된 김관용(金寬龍)이 11.29. 상경하여 김구에게 그 취지를 전달하고, 임시정부는 윤봉길 포함 이봉창·백정기 삼의사의 유해봉환 등을 정부 차원에서 시행하겠다고 함에 따라 위원회는 해산되었다.

한편 광복 후 재일한국인들 중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우파세력이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약칭 건청)을 결성하였다. 이어 항일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 등 아나키스트들이 10.27. 뒤늦게 석방된 박열(朴烈)을 위원장으로 한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창립하였다. 이들 두 단체는 이후 1946.10.3. 합동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在日朝鮮居留民團 약칭 민단)을 발족하게 된다.

1946년 초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일본 도쿄(동경)에 있는 신조선건설동맹 위원장  박열(朴烈)에게 윤봉길·이봉창·백정기의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였고, 이에 유해 발굴과 봉환을 위해 1946.3. 박열(朴烈)을 비롯하여 이강훈(李康勳)과 서상한(徐相漢) 등에 의해 유해발굴단이 조직되었고, 박열(朴烈)은 이들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서상한대표로 한 유해발굴단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묘지 위치 확인 작업 끝에 우라와형무소의 부속묘지에 묻혀있는 이봉창 의사의 유골과 이강훈과 같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백정기 의사의 유골을 그가 갇혀 있었던 나가사키 형무소 묘지에서 찾아 수습하고, 마지막으로 윤봉길 의사의 유골을 찾기 위해 1946.3.2. 가나자와에 도착해 3.3.부터 위치를 고증받기 시작하여 육군묘지 경내에 묻혔다는 것을 확인한 후 3.4.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3.6.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가나자와(金沢)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그의 암장터를 찾아내 발굴하여 유골을 수습했다.

먼저 발굴한 이봉창(李奉昌), 백정기(白貞基) 의사의 유해는 동경의 神田 오키쿠보(荻규)에 있는 전 일본육군대학 건물 내의 신조선건설동맹 사무실에 모셔졌고,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발굴 직후 가나자와에 있는 재일조선인연맹 이시카와현 본부에 안치되었다가 3.9. 아침 열차편으로 가나자와 역을 떠나 다음 날 아침 도쿄의 우에노역에 도착해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먼저 모셔져 있던 있던 오기쿠보(荻窪)의 신조선건설동맹 사무실에 안치되었고, 이후 이들 3인의 유해(遺骸)는 연합국점령군 맥아더 사령부가 마련한 군함 편으로 5.15. 아침 9시 부산에 도착하여 대창동 남조선고등여학교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5.17. 부산 중구에 있는 부립유치원에 차려진 빈소로 옮겨지고, 5.31. 오후 6시부터 대한독립촉성회 주최로 추도회가 개최되고 다음달 6.15. 대신동 공설운동장에서 추도식이 진행된 후 특급열차 해방자호(解放者號)로 6.16. 오후 5시 40분경에 서울역에 도착해 3의사 봉영식을 거행하고 지금의 조계사(曺溪寺)인 태고사(太古寺)에 안치되었다.

윤봉길 등 3의사의 국민장은 처음에는 6.30.로 예정되었으나 갑작스런 폭우로 연기되어 7.6. 거행되었는데, 오전 10시 태고사에서 발인식 거행 후 12시 용산구 효창공원에 도착해 오후 1시부터 추도식 진행 후 오후 3시반경에 하관식을 거행하였다. 이곳 효창공원에 안장된 이들 3인의 묘를 이후 효창공원 '삼의사 묘(三義士墓)'라 불리게 된다.

○ 효창공원(孝昌公園)

① 백범김구기념관 ② 백범김구묘역 ③ 의열사 ④ 이봉창의사동상 ⑤ 삼의사묘역 ⑥ 상징조형물 ⑦ 임정요인묘역 ⑧ 원효대사동상 ⑨ 반공투사위령탑 ⑩ 대한노인회 서울지부 ⑪ 대한노인회 ㉮ 광장 ㉯ 어린이놀이터 ㉰ 자연학습장 ㉱ 배드민턴장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 일대(면적 160,924m2 48,676평)
▪ 묘역(사적)
• 김구 묘역
•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 묘역 및 안중근 가묘
• 임정요인(이동녕·차리석·조성환) 묘역
• 의열사(義烈祠 네 명의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삼의사 등 7인을 모신 사당으로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인 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군무부장 조성환·비서장 차이석 및 3의사인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 7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음)

▴ 의열사(義烈祠)

효창공원 삼의사묘역(三義士墓)

▴ (왼쪽부터) 안중근(가묘)·이봉창·윤봉길·백정기

① 청계(淸溪) 안중근(安重根) ②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③ 이봉창(李奉昌) ④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등 4인의 묘역(墓域)이나, 안중근의 묘가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해 비워놓은 가묘(假墓)이기 때문에 사의사 묘(四義士墓)가 아니라 삼의사 묘(三義士墓)라 불러지고 있다. 만약 안중근의 유골을 찾게 될 경우에는 사의사 묘(四義士墓)로 개칭 될 것으로 본다. 2019.3. 안중근의 가묘 표지석이 정식 묘비로 교체되었는데, 묘비로 교체되었을 뿐 현재도 유해가 안장되지 않은 가묘 상태이다. 효창공원 중앙부에는 먼저 조성된 삼의사 묘역이 있고, 서쪽 150m 거리에 김구선생 묘역, 동남쪽 150m 거리에 임정요인들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