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단계 맑스주의 법이론의 반성과 전진을 위한 시론(1993년 조국 울산대 교수)
I. 들어가는 말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맑스주의의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수십년의 단절을 딛고 사회운동과 맑스주의의 결합, 학문방법론으로서의 맑스주의의 복권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르네상스’는 우리 사회의 극우적 이데올로기 지형을 변형시키는 중대한 사태였고, 이를 통하여 사회운동과 학계는 자신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초 ‘사회주의없는 사회주의’였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인민의 손에 의해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이 이루어지자, 한국에서 겨우 뿌리를 내리려던 맑스주의는 그 착근(着根)의 초입단계에서 엄청난 한파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포스트 맑스주의’(post-Marxism)는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반맑스주의 선전과 함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는 물론 맑스주의 자체의 ‘해체’를 요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맑스주의의 위기론의 만개 그리고 ‘포스트 맑스주의’의 출현 등의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캘리니코스의 지적처럼 맑스주의의 반대자들은 이제 맑스주의는 “푸닥거리해서 쫓아내야 할 귀신이며, 이성적인 토론에 적합하지 않는 하나의 발작이며, 벌써 오래 전에 논박이 끝난 오류” 라고 말할 것이다. 또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등은 맑스주의에 대하여 자유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였고, 이제 자유주의에 따라 해결되어야 할 기술적 문제만이 남았다고 자신감있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반대한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했다고 해서 맑스주의의 존립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맑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모순이 존재하는 한 항상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또 새로운 상황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본성을 갖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지만 자본주의 모순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세계화되고 있다. 자본주의로 역이행하고 있는 소련 ‧ 동구의 현실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스탈린주의 탓이고 우리는 ‘진정한’ 또는 ‘순수한’ 맑스-레닌주의니까 괜찮다” 또는 “우리는 이미 맑스-레닌주의를 극복한 주체사상으로 뭉쳤으니 문제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현재의 사태가 일어나게 된 데는 그간의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의 안이함과 무능함이 원인을 제공했음은 분명하다. ‘사회주의’와 ‘노동자국가’라는 깃발 아래 이론과 실천이 전개되었다고 해서 그 이론과 실천이 당파성과 과학성을 자동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매카시즘적 비판도 금물이지만, 동시에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도 금물이다.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이름 하에서 이루어진 여러가지 ‘비사회주의’ 또는 ‘반사회주의’적 이론과 실천을 직시해야 하며, 이러한 냉정한 현실인식에 기초할 때만 현실 사회주의의 틀을 넘어서는 혁신의 전망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노동자는 말한다.
“우리는 오류를 덮어두고 해괴망측한 정통파를 자처하지 않는다!”
생각컨대 생산수단을 법적으로 ‘국유화’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자의 분리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사회주의국가’가 선포되었다고 해서 그것의 ‘국가’로서의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산수단의 ‘실질적 사회화’와 ‘비(非)국가’(=‘인민의 자기통치’)로의 지향 그리고 변혁이 없는 사회주의는 껍데기일 뿐이다. 법분야에서도 법 자체가 갖는 억압성을 제거하고 ‘인민의 자치규범’을 창출‧배양하는 이론과 실천없이 법에 대한 엄격한 준수만이 말해질 때 그 법은 이미 ‘사회주의적’이 아니다. 요컨대 생산관계, 국가기구, 법규범 ‧ 제도, 노동과정 등에 대한 변혁시도가 끊어지고 ‘체제유지’나 ‘생산력 발전’만이 전면에 내세워지는 순간 사회주의는 그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상을 간과하는 맑스주의적 이론과 실천은 맑스주의의 이름 하에 맑스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혁명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가 ‘통치이데올로기’, ‘국가이데올로기’화하여 “새로운 계급질서에 대한 스콜라주의적 정당화”를 수행하는 “국교(國敎)의 교리문답”이 되어버릴 때, 이는 결국에는 인민 스스로에 의해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분명히 직시하고 인정해야 하며, 맑스주의 이름 하에 행해진 기왕의 이론과 실천을 면밀히 검토 ‧ 비판해야 한다. 이때 유의할 것은 이 작업이 단지 맑스주의의 청산과 해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민중적 입장에 선 민주주의를 더욱 확고히 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극복전망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일체의 스탈린적 편향과 결별할 수 있으며, 동서에서 버림받고 땅 속에 묻혀버린 맑스주의의 혼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먼저 맑스주의 법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핵심명제들을 중심으로 하여, 이에 대한 편향적 이해를 비판하는 동시에 이 명제들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해명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법이론지형의 현상태를 점검한 후, 자본주의의 모순이 엄존하는 우리 현실에서 맑스주의 법이론이 담당해야 할 몇가지 과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Ⅱ. 맑스주의 법이론의 핵심명제에 대한 재검토
여기서는 맑스주의 법이론의 핵심적인 몇가지 명제를 중심으로 하여 그간의 한계점과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모스크바의 흠정(欽定)해석이 갖고 있던 이론적 무능함”을 살펴봄과 동시에 이 명제들이 갖는 소중한 문제의식들을 보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격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다시 소를 잡아 튼튼히 키우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1. ‘토대-상부구조 메타포’(metaphor)는 ‘경제결정론’인가?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사회변동의 메카니즘을 건축물에 비유하여 정식화한 토대-상부구조 메타포는, 맑스주의 법이론의 방법론에서 주춧돌 역할을 한다. 이 메타포를 요약하면, ① 토대는 상부구조를 궁극적으로 규정한다, ② 그러나 상부구조는 상대적 독자성(relative independence)을 갖는다, ③ 상부구조는 능동적으로 토대에 개입하여 반작용한다가 될 것이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맑스주의 비판진영은 이 메타포 자체를 ‘경제결정론’, ‘경제환원론’이라고 비판해 왔다. 그리고 최근의 ‘포스트 맑스주의’는 이 메타포를 경제의 중심성을 고집하는 “본질주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주장하며 이 메타포의 폐기를 다시금 요구하고 있다(‘포스트 본질주의’).
토대-상부구조 메타포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맑스주의에 대한 완전한 왜곡이다. 맑스의 이 메타포는 애초부터 경제환원론식의 속류유물론과 무관하였다(이 새삼스러운 말을 다시 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변화한 이론정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맑스와 엥겔스가 당시 법을 토대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파악하고 있던 독일 관념론과의 대결 속에서 법의 토대에 대한 기본적 종속성을 강조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이 메타포를 법은 경제의 ‘복사’나 ‘반영’에 불과하고, 법에서의 변화는 단지 토대의 변화로 ‘환원’시켜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엥겔스는 당시 ‘경제결정론’적 사고에 대하여 “앞서의 명제를 무의미하고 추상적이며 몰상식한 말로 변형시켜 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적 운동이 지배적이나, 스스로 운동하고 상대적 독자성을 가진 정치적 운동으로부터 반작용을 받는다”고 강조하였다. 건축물에 비유해 보자면 맑스가 주춧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맑스를 지붕, 배관, 배선, 실내장식 등이 없이 집을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목수로 취급해서야 되겠는가?
이러한 입장에 서 있었기에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연구하면서 영국의 ‘공장법’ 제정을 둘러싸고 발생한 토지귀족과 공장귀족 간의 대립을 분석하고 동시에 이후 제정된 ‘공장법’이 영국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속도와 합리화에 끼친 중대한 영향을 밝혔던 것이다(법의 상대적 자율성과 경제의 변혁에 법이 끼치는 효과). 그리고 엥겔스는 19세기 법전편찬과정에서 ‘로마법의 계수(繼受)’가 일어나던 점을 분석하면서(법적 형태의 자립성과 탄력성), 그는 로마법의 계수가 자본주의 발전의 요청에 따른 것임을 밝히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프랑스의 경우는 부르주아 혁명의 철저성으로 인해 “부르주아 사회의 고전적 규범”격인 프랑스 민법전으로 나타나게 된 것에 비해, 영국이나 독일의 경우는 혁명 전후 제도들간의 계승관계 및 대토지소유자와 자본가의 타협에 따라 각각 ‘보통법’(Common Law)과 ‘프로이센국법’으로 상이하게 이루어졌음을 밝혔다(국가별 계급관계에 따른 법형태의 독자성). 또한 그는 근대국가에서 법은 경제조건에 상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일관된 표현(an internally coherent expression)이어야 함에 따라,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조건들의 충실한 반영이 점점 더 손상되고, 그럴수록 법전이 계급지배의 조악한 표현의 모습을 띠지 않게 됨을 지적한 바 있다. 요컨대 맑스와 엥겔스는 토대와 법 사이의 역동적 관계와 법의 상대적 자율성을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맑스의 이 메타포가 내포하고 있는 역동성을 단지 확인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메타포는 메타포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맑스의 말을 빌자면 이 메타포는 “연구를 위한 유도선”(a guiding thread for my study)이며, 이를 사용하여 구체를 향해 상승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콜린즈(Hugh Collins)는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정한다’(determine), ‘표현한다’(express) 또는 ‘발생한다’(arise)든가 하는 용어들은 어떻게 토대가 상부구조에 영향을 주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말만 바꾸어 다시금 제기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이러한 메타포를 법적 제도 및 규범들의 기원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실천을 법체계로 전환시키는 메카니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요구된다.”(강조는 인용자)
요컨대 높은 추상수준의 이 메타포를 단지 암송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토대가 법의 형태와 내용을 결정하는 메카니즘 및 법이 토대의 변화에 작용하는 메카니즘, 상부구조 내에서 법과 다른 상부구조 간의 상호관련, 법의 내용을 이루는 법규범, 법제도, 법의식, 법이데올로기 각각의 기능과 상호관련, 법규범과 관습, 도덕 등 여타 사회규범과의 상호관련, 상이한 법형태의 존재와 그 원인 등에 대한 풍부한 연구로 전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또 주의할 점이 있다. 토대와 법의 관련성을 강조한 나머지, 상부구조로서의 법을 토대와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는 1920년대 소련에서 일어난 ‘레이스너(M. A. Reisner) 대 스투치카(P. I. Stuchka) 논쟁’에서 스투치카가 주장한 바이며, 이후 프라메네츠(J. Plamenatz)등의 많은 서구의 맑스주의 법학자들이 법의 적극적 작용을 강조하다가 빠지는 혼동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상품교환관계의 전제조건은 그 교환과정 속에서 협력하는 상품소유자들이 법률상으로 상호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에서 민법이나 상법 등의 법형태나 그 속에 사용되는 법인격, 법률행위, 물권, 채권 등의 법개념은 특정한 경제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며, 또 그 경제관계의 작동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음은 분명하다. 톰슨(E. P. Thompson)의 말대로 “법은 하나의 ‘수준’(level)에서 공손하게 머무르지 않”으며 “법은 생산양식과 생산관계 그 자체 속에 맞물려 있”는 것이며, 그리고 콜린즈의 지적처럼 법적 규범은 “법의 메타규범적 성질”(the metanormative quality of law:강조는 인용자)로 말미암아 생산관계를 긴밀하게 규제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며, 생산관계에 구체적인 형태와 세부적 마디를 부여하는 유일한 제도가 되며, 따라서 법은 근원에 있어서 상부구조적이지만 그 메타규범적 성질로 인하여 물질적 토대 안에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잘못 이해하여 법과 토대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이다. 경제관계가 법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그러나 경제관계는 자동적이고 단선적으로 법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관계는 국가기관을 통하여 ‘공적 의사’로 전화하여 법규범의 총체로 나타나야 하며, 이 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법규범은 ‘보편성’과 ‘중립성’의 외관을 띰에 따라 경제관계의 진정한 사회적, 경제적 형태를 온전하게 나타내주지 않는다(노동계약에서 단적인 예를 볼 수 있듯이 법적 관계는 사회적 실재를 왜곡하고 물화(物化)된 형태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법의 세계는 경제의 세계로부터 기본적 규정을 받으면서도, 그것과는 별도의 언술(言述)과 논리로 자신을 채우고 자신의 메카니즘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2. ‘지배계급의 도구’ 테제와 ‘상대적 자율성’ 테제는 모순하는가?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과 「사유재산, 가족, 국가의 기원」 등에서 명백히 국가를 지배계급의 ‘도구’로 파악하였고, 이는 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후 서구 맑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 비판과 함께 ‘지배계급의 도구’로서의 법이라는 명제를 ‘속류 도구주의’와 등치한 후 이 명제의 적실성을 비판하고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법이라는 명제를 전면에 내세웠으며, 반면 소련의 공식입장은 이들의 문제의식을 외면한 채 ‘수정주의’라는 혐의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 이 두 명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두 명제는 서로 배치되는 것일까? 한편 ‘포스트 맑스주의’는 이에 대한 명시적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권력의 편재성”, “권력의 소재지는 비어 있는 장소이다”라는 주장으로 미루어 보아, 지배계급의 도구로서의 법의 성격을 부인하지 않을까 생각되며, 자유주의 법이론은 애초부터 법의 ‘중립성’, ‘무계급성’을 말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몇가지 의문을 던져보고, 그에 대한 답을 통해 ‘도구’와 ‘상대적 자율성’의 의미와 그 관계를 밝혀보기로 하자.
맑스주의 법이론이 아니더라도 ‘법사회학’을 한 사람이라면 한 사회의 법에 지배계급의 의사와 이해가 반영되고, 이를 위해 법이 봉사하게 된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법이 보여준 모습은 ‘속류 도구주의’적인 도구로서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맑스주의 법이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법 중에 피지배계급에게 유리한 법이 있지 않는가? 예를 들어 노동법에는 노동자계급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고 노동자계급의 역량 증진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또한 헌법의 각종 ‘기본권’ 조항과 형사소송법상의 피의자와 피고인의 권리조항 등도 피지배계급에게 일정한 도움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법, 헌법, 형사소송법 등은 지배계급의 법이 아닐까? 또는 일부 법은 계급성이 있고, 다른 일부는 계급성이 없을까? 또는 같은 법 내에서도 일부 조항은 지배계급의 것이고, 일부 조항은 피지배계급의 것일까? 한편 실제 지배계급의 이익에 반하여 지배계급 내부의 반대에 부딪히며 법이 제정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맑스 시대 영국의 ‘공장법’의 제정―현재 한국에서의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 관련법률 제정이 제정된다면 마찬가지의 예가 될 수 있다―은 분명 개별 자본의 이익에 반하였고 그 추진은 반대에 부딪혔다. 그리고 미국에서 초기 노동보호입법에 대하여 당시 법원은 이를 계약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하는 ‘위헌’법률이라고 규정하고 노동법의 생성을 극렬 저지하였다. 그래도 이 법들은 제정되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맑스주의 법이론은 답할 수 없을까? 아니면 보다 현실성있는 답을 줄 수 있을까? 실제 헌법상의 각종 ‘기본권’조항이나 노동법, 사회보장법 등이 존재하게 된 데에는 노동자계급 등 피지배계급의 투쟁이 강제한 측면이 있고, 또 그 속에는 피지배계급의 의사가 일정 정도 반영되어 있음은 분명하다(그리고 이러한 상부구조적 관념의 분열은 토대의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을 포착하여 톰슨은 법은 “양자택일적인 법적 견해가 다루어지는 계급투쟁의 장을 제공한다”(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하였고, 에델만(B. Edelman)은 법은 “노동계급의 승리가 기록되고 법전화되고 공식화된 것에 다름아니”며, 법은 “계급투쟁의 무대이자 상금”(the site and stake of class struggle; 강조는 인용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무대’, ‘계급력의 응축’이라는 개념을 ‘지배계급의 도구’라는 개념과 모순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후자의 개념은 전자의 개념보다 고추상(高抽象)의 개념이며, 이는 법을 “매개로 궁극적으로 재생산되는 질서가 어떠한 것이냐, 자본주의 질서이냐 아니냐에 따라 판단”(강조는 인용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법의 기본권조항이나 노동법, 사회보장법이 노동계급에게 갖는 유의미성에도 불구하고 이 법들을 통하여 재생산되는 것은 다름아닌 자본주의 체제이다. 요컨대 이 법들은 “① 자본의 편협하고 단기적인 경제이익(현재의 과다착취)에 반함으로써 자본의 보다 차원높은 장기적인 경제이익(노동력의 안정적인 재생산과 공급)을 살려주는 한편, ② 자본의 단기적인 경제이익(현재의 과다착취)에 반함으로써 자본의 궁극적인 이익, 즉 정치적 이익(혁명의 방지를 통한 자본주의적 질서의 유지, 재생산)을 살려주기 위한 ‘총자본적’인” 법이라 하겠다.
이러한 법 아래에서 노동계급이 자신의 노동력을 ‘보다 공정한 절차에 따라’ 그리고 ‘보다 비싸게’ 팔 수는 있을 것이나, 노동력의 상품화 자체를 폐절하고 생산수단과 생산자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 사용가치를 소외시키는 가치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사용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전까지는 기존의 법에 아무리 노동계급의 계급력이 반영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법은 적용과 해석에서 자본주의질서의 유지를 위해 많은 왜곡과 변형을 겪게 되며, 궁극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질서의 재생산을 위해 작동하는 것이다.
생각컨대 맑스주의가 말하는 ‘도구’의 의미는 법을 둘러싼 지배계급 내의 견해차이나 법제정의 의도와 별도의 차원에서, 법이 수행하는 ‘기능’, ‘효과’ 내지 ‘결과’의 면에서 그것이 특정 경제적 지배계급의 이익을 관철시켜 준다는 의미이며(‘기능 내지 결과로서의 도구개념’), ‘상대적 자율성’은 법을 둘러싼 지배계급 내 또는 각 계급, 계층간의 대립 ‧ 투쟁 ‧ 타협의 현상을 포착하려는 개념으로tj, 이 두가지 테제는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라 통일되어 있으며, 현실 자본주의 법을 분석하고 비판하는데 있어 여전히 소중한 틀을 제공한다 하겠다.
3. ‘법사멸론’은 유토피아적인 ‘자연법론’의 변종인가?
‘법물신주의’ 비판
맑스주의의 국가와 법 사멸 명제는 가장 많이 오해되었고 맑스주의 비판에서 단골로 오르는 메뉴이다. 국가와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공산주의 사회의 기억이 까마득한 현시기, 그리고 고도로 복잡다단한 사회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현시기에 법사멸을 말하는 것은 유토피아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카토(加藤)교수는 “스토아학파나 기독교가 인류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간 과거의 황금시대에다 남겨주었던 그 절대적 자연법의 이상을, 비교적 가까운 미래에 실현가능하다고 믿는 급진적 이상주의”라고 말하고, “결국 일종의 자연법사상을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포스트 맑스주의’에서도 이 입론을 “완성될 수도 없고, 완성되어서도 안되는 유토피아” 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얼핏 공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법사멸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공산주의란 우리에게 있어서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a state of affair)가 아니며,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ideal)도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the real movement)을 공산주의라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법사멸론을 이해해야 한다. 맑스주의 국가 ‧ 법사멸론은 ‘무국가’, ‘무법’ 또는 ‘자연법상태’이라는 이상을 못박아 놓고 거기에 현실을 꿰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법상태를 발본적(拔本的, radical)으로 비판하고 그 문제점을 지양해 나가려는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법사멸론은 법의 세계에서 무법(無法)의 세계로 날아가자는 공상적 주장이 아니다!
법사멸론의 핵심은 법 자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강제성‧억압성을 항상 경계하면서, 입법, 법집행 과정의 민중참여와 법제도, 법기구에 대한 민중통제를 실현하자는 것, 그리고 이 속에서 인민의 자율적 규범의식을 함양하고 이것으로 법을 대체해 나아가자는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은 ‘법의 민주화’라는 과제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토대에서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장악‧관리하여 노동력의 상품화를 제거하려는 실천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이 점에서 법사멸론은 ‘실정법’과 대립되는 ‘초역사적 자연법’을 상정하고 이를 지향하는 입론과는 그 접근방식과 전망에서 완전 상이하다. 그리고 법사멸의 시기를 ‘예언’하라고 말하라는 것은 그 자체가 비변증법적인 요구이다). 정치적 힘, 특히 국가와 법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인간 자신으로의 환원이며 해방이 아니던가? 그리고 현존하는 국가와 법에 대한 발본적 비판이야말로 맑스주의의 핵심이 아니던가?
이러한 맥락에서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반(半)국가’, ‘준(準)국가’(semi-state)라고 규정한 문제의식과 동일하게, 사회주의법, 프롤레타리아법은 ‘반(半)법’, ‘준(準)법’(semi-law)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즉 사회주의법은,
“자기 사멸의 전제조건의 창출과정을 매개하고 있는 법체계라는 지극히 패러독스한 역사적 존재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관점없이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국가가 만든 법은 아무 문제가 있을 수 없고 노동자는 이를 준수하기만 하면 되며, 만약 이를 위반하는 것은 반노동자적 행위로서 엄격하게 처벌되어야 한다는 말만이 되뇌어진다면 이는 바로 ‘법물신주의’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첩경인 것이다(1936년 스탈린헌법을 맑스-레닌주의의 모든 원리를 체현한 것으로 찬양‧옹호하며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학’을 구축한 비신스키(A. Y. Vyshinsky) 등 소련 법학자들의 태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우리는 사회주의법, 프롤레타리아법이라는 것은 “법의 사멸을 법이 매개한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부정적 계기 속에 있는 긍정적 계기”로서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변증법적 통일을 보지 못하고 ‘부정적 계기’만을 포착하면 ‘법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고, ‘긍정적 계기’만을 포착하면 ‘법실증주의’와 ‘법물신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법사멸론의 문제의식의 현실화에 대한 예로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행해진 몇가지 시도를 참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산단위에서의 경미한 범죄행위를 국가기관에 넘기지 않고 내부징계로 처리하는 ‘동지법원(同志法院, Comrade’s Court)’제도, 입법과정에의 인민참여제도, 법관선거제도, 인민배석판사제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이후 ‘당에 의한 국가의 대체’가 가속화되면서 형식화되어 버렸고, 그에 따라 본래의 의의를 살리지 못한 채 결국 ‘대립물’로 전화해 버린 점은 역사적 비극이다.
4.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합법성’을 부정하는가?
‘법허무주의’ 비판
현실 사회주의가 취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수많은 ‘합법성’ 침해와 ‘법허무주의’를 초래하였다. 스탈린 치하에서 일어난 무수한 숙청과 테러, 중국의 이른바 ‘문화대혁명’ 시기 “無法無天”, “有法不依”, “要人治不要法治”의 구호 하에 자행된 파괴행위, 스탈린, 모택동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한 ‘법률’에 대한 ‘훈령’의 우위현상―이른바 ‘관청적 합법성’의 만연―등등은 그 단적인 예이다. 그리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지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쟁취되고 유지되는 지배, 어떠한 법률에도 저촉받지 않는 지배”라고 정의한 바 있다. 또한 실제 NEP 초기에 소련에서는 전시공산주의 시대의 ‘혁명적 합목적성에 의한 지배’식의 사고의 연속선상에서 ‘혁명적(사회주의적) 합법성’과 ‘부르주아 합법성’과의 차이를 법규범에 대한 구속정도의 약화로 파악하는 견해가 존재하였다(대표적으로는 소리츠(A. Sol‘ts)의 견해).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간단하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 역시 ‘합법성’ 침해나 ‘독재적 통치형태’와 무연(無緣)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헌법상으로 보장된 계엄, 비상조치권 등의 ‘합법적 독재권’은 물론, ‘초법적 독재권’의 행사를 애초부터 내포하고 있다. 자본주의 유지가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불가능할 경우에는 항상 독재적 통치형태는 튀어나오게 마련인 것이다(보나파르티즘, 파시즘, 군부독재 등을 상기하라).생각컨대 독재적 통치형태의 사용은 자본주의 국가건 사회주의 국가건 모두 애초부터 본성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맑스주의는 바로 이 점을 냉정하게 포착하여 독재와 민주주의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독재관 ‧ 민주주의관에 대한 이런 식의 옹호만으로 족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이 ‘비상수단’에 의해 활동하는가 ‘합법성’에 의해 활동하는가는 그 권력이 처해있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을 어떠한 형식으로 행사할 것인가 하는 판단이 자의적으로 내려질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실질적 민주주의’가 이룩되었다고 해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경시하는 것은, 오히려 전자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예가 잘 보여준다(“실질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의 형이상학적 대립구도와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맹신’”).
민중과 부르주아지가 연합하여 봉건제를 타도한 프랑스혁명의 성과인 ‘형식적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원리가 혁명 이후 그 실내용에 있어서 계급지배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과, 사회주의 하에서는 ‘형식적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필요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와이처(R. Weitzer)의 말대로, “법적 형식성과 일반성의 주된 문제점은 그것이 자본주의하에서 추상적으로 존재하면서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신비화한다”는데 있는 것이지, “법적 장치들의 형식성과 보편성 자체가 반드시 부정의를 낳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통하여, 그리고 ‘사회주의적 합법성’―위에서 본 ‘법사멸론’적 관점에서 수립되는―을 통하여 자신을 구현할 때만 온전히 발전할 수 있다. ‘합법성’의 준수와 ‘법치’가 강조되어야 할 이유는 첫째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정책의 일관성 확보라는 측면이 있을 것이고, 둘째로는 공민의 인권보장이라는 측면이 있다. 특히 현시기는 둘째의 측면에 대한 주목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근로자의 국가가 수립된 후라 하더라도 근로자 개개인, 즉 공민과 근로자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권력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의 보장적 기능’이 여전히 중요하며 독자적 의의를 갖는 권리보장의 법적 절차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Ⅲ. 한국 법이론지형의 현상태와 ‘민중적 민주법학’
이상에서 맑스주의 법이론의 몇가지 핵심명제를 검토하면서 맑스주의 법이론의 진정한 문제의식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그러면 현단계 맑스주의 법이론의 과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국 법이론지형의 현상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의 도구였던 ‘식민법학’은 해방 후에도 청산되지 못하고 한국 법학의 기초가 되었다. 이 ‘식민법학’에다 이후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수입된 각종 파쇼적 또는 자유주의적 법이론이 혼합되어 현재의 한국 법학이 만들어졌다. 이 속에서 보수학문의 아성으로 자리잡은 법학은 ‘과학’으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기술학’으로 전락하였으며, ‘육법당(陸法黨)’이라는 야유에서도 보이듯이 지배체제 유지와 ‘법복귀족’ 양산에 충실히 봉사하였다.
이러한 법학계의 상황에서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법이론전선은 변혁운동의 전선이 그러하였듯이 ‘민주 대 반민주’에 그어져 있었고, 그 민주진영의 주종은 ‘자유주의 ‧ 입헌주의 법학’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연구의 방향과 내용을 제약하는 한국 사회에서 맑스주의 법이론 등 진보적 법이론의 입지는 매우 좁았던 것이다. 그런데 87년 대투쟁과 민중운동의 전면진출을 계기로 분산되어 있던 몇몇 민중지향적 법연구써클들이 집결하여 조직적 틀을 갖추면서 “민중적 관점 ‧ 운동적 관점에 선 민주주의법학”을 추구하게 된다. 한편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의 법현실을 비판하던 중진 학자들도 모임을 꾸리며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법이론전선의 민주진영 내에서 ‘분화’가 시작된 것이다(‘민중적 관점’ 대 ‘자유주의적 관점’). 이는 이후 크게 보아 「민주법학」과 「법과 사회」라는 두가지 경향의 법학무크지의 발간으로 표출된다.
여기서 ‘민중적 관점’에 서고자 한 흐름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체제옹호적 성격의 법학을 탈피하고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 우리 사회의 발본적 변화를 지향하는 법학을 구축하는 것, 외국이론의 번안과 법조문 해석에 매달리는 법학을 지양하고 과학적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법현실에 터잡은 법학을 구축하는 것, 법을 통하여 새로운 지배층을 양산하는 법학이 아니라 주권자 민중에게 복무하는 법학을 구축하는 것. 이런 지향 하에서 법학분야에서도 민중운동, 학술운동과의 연대가 이루어졌으며, 이 노력 속에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변혁의 문제는 법연구자들이 회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의식이 확산‧공유되는 성과를 낳았다.
이러한 민중적 민주법학의 구축에 있어서 주로 맑스주의 등의 사회주의적 관점에 선 법이론 연구자와 ‘비판법학’(Critical Legal Studies)적 경향의 연구자들이 적극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맑스주의 법이론은 한국 사회에서 법이 수행하는 기능과 그 메카니즘을 ‘토대’와 관련 하에서 밝히고, ‘법의 지배’로 표현되는 이데올로기의 본성을 비판하며, 법의 보편적 외양을 활용하여 법을 운동의 성장을 위해 활용하는 것을 당면한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맑스주의 법이론에 입각한 연구는 수적으로도 소수였고, 그 내용도 빈약하였다. 당시 맑스주의 법이론은 맑스주의 법이론의 소개와 이에 기초한 초보적 법분석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 맑스주의에 입각한 법학방법론을 전분야에 걸쳐 확고하게 정립 ‧ 발전시키고, 한국의 법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상승하는 과제의 수행은 매우 취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닥쳐왔다. 이 붕괴는 이러한 맑스주의 법이론을 비롯한 민중적 민주법학진영에 많은 충격을 주었고, 반면 반(反)맑스주의적 입장에 서있는 연구진영에게는 일약 활력을 주었다. 민중적 민주법학 건설 초기의 취약함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찾아옴으로써, 맑스주의 법이론에 대한 회의와 자유주의 법이론으로의 재경도(再傾倒)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 맑스주의’의 등장은 이 현상을 강화하는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민중운동과 학술운동이 80년대의 실천을 통해 체득한 맑스주의는 이제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으니 이제 민중적 민주법학의 내용에서 맑스주의 법이론을 삭제하고, 각종 자유주의 법이론 또는 ‘포스트 맑스주의’로 그 내용을 채워야 할 것인가? 아니면 맑스주의 법이론의 성과를 발전시키고 한계를 극복하면서 민중적 민주법학을 보다 발전시킬 것인가?
우리는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법학’은 우리 사회의 법현실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지만 그 비판이 항상 자본주의라는 틀에 의해 제한됨에 따라, 우리 사회의 법현실을 발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권과 체제유지 필요성 사이의 충돌상황을 바라보는 민주주의법학진영 내의 대표적 두사람의 발언과 태도를 대비하면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법과 사회이론연구회>의 대표자인 양건 교수는 한국의 법현실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견지해 왔고,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해 왔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양교수는 정주영 국민당대표의 공산당 합법화발언을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산당은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정당으로 그 결성은 헌법위반이며 허용될 수 없다.”
양교수는 ‘일반민주주의’(Democracy in General)의 본질적 내용인 사상의 자유의 허용여부를 친자본주의냐 반자본주의냐에 따라 판단하고 있으며, 미국 대법원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의 법칙을 공산당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양교수의 국가보안법 비판은 국보법의 ‘법적 형태’에 대한 비판이었고, 국보법 문제의 핵심인 사상의 자유에 대한 전면옹호는 누락된 비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서서 국가보안법을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독수(毒樹)의 썩은 잎을 쳐주는 것이 그것의 뿌리를 강화시켜 주는 것처럼,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옹호와 ‘법학적 세계관’으로의 매몰로 귀결”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에 비해 <민주주의법학연구회>의 전임회장 강경선 교수는 맑스주의 법이론가가 아니지만 양교수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원리가 민주주의의 원리에 우선하지는 못하며 자본주의의 제도와 운영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합치되도록 조정받을 것이 요구된다‧‧‧‧‧‧ 자본주의와 정면 대립하는 사회주의 방식의 경우도 그것이 민주주의와 합치되는 한 수용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강교수는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고 사회주의자의 존재의미를 인정하며, 나아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수괴’ 박노해씨의 공판에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들어 박씨를 변호하였다.
맑스주의를 방법론으로 취하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어떠한 입장이 철저한가 하는 점에서 보아도 후자가 우리 사회의 극우 ‧ 파쇼적 법현실의 타개에 기여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법문제가 생겨나게 된 뿌리는 바로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라 할 때, 그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 역시 후자가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 사회의 법문제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머무를 때는 해결되기 어려우며, 민중적 관점에 서서 민주주의를 철저히 옹호 ‧ 발전시키고 새로운 자본주의 극복전망을 창출하려는 전망을 가질 때 진정 해결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현시기 맑스주의 법이론을 포함한 민중적 민주법학의 관점이다.
Ⅳ. 현단계 한국 맑스주의 법이론의 과제
이상과 같은 국내외적 조건 속에서 맑스주의 법이론은 무엇을 함으로써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맑스주의 본연의 문제의식을 되살릴 수 있는가? 또 무엇을 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진보와 민주화를 위해 일조할 수 있는가?
1. 방법론의 재확립
먼저 맑스주의 법이론은 체로니(U. Cerroni)가 지적한 “분과 사회과학, 특히 정치학과 법학에서 맑스주의적 연구의 일반적이며 항구적인 후진성”을 직시하면서 자신의 ‘방법론’ 자체를 재검토하고 재확립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맑스, 엥겔스, 레닌 등의 저작의 자구에 얽매이는 연구가 아니라, 그들의 성과 뿐만 아니라 한계를 직시하는 연구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보비오(N. Bobbio)가 통렬하게 지적했던 “권위있는 원전의 남용” 편향을 집어던져야 할 것이다. 맑스주의자의 제일의 임무는 맑스가 말했던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과 맞붙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그간의 외국의 맑스주의 법이론에 대한 총괄이 필요하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의 70여년 간의 법이론과 실천은 맑스주의 법이론의 재정립을 위한 밑거름이다. 우리는 그 한계와 오류를 직시함과 동시에 그 성과를 온전히 계승해야 한다. 사회주의적 이론과 실천이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매도되는 현정세이기 때문에 이 점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시궁창에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둘째로 비(非)맑스주의적 법이론에 대한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비맑스주의적 문화에 대한 “산만하고 순간적인 의혹의 눈길”, “짜증의 눈길” 그리고 “이상주의적 철학자같은 오만”을 버려야 한다. 누마다 이네지로(沼田稻次郞)의 다음과 같은 충고에 귀를 기울이자.
“유물사관에 입각한 자는 유물사관 이외의 사상은 알지 못한다고 비난받는다. 반성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 두세가지 법칙을 암기함으로써 유물변증법을 다 알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말할 것도 없이 법에 대한 유물변증법적 인식도 법의 계급성이라는 단어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겸허하게 반성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과거의 법사상이 법의 계급성이라는 주문(呪文)을 외움으로써 모조리 졸렬하고 무가치한 사상으로 변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맑스주의 법이론이 ‘원칙’, 그것도 빈약하게 된 원칙을 강조하는 동안, 구체적인 분석은 오히려 비맑스주의 법이론에서 더 많이 진전시켜 놓았다. 기존의 여러 법이론에 대하여 단지 “결국 부르주아적인 것 아니냐”고 딱지붙이는 식의 태도는 단연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비맑스주의 이론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겸허하게 수용―물론 비판과 함께―하고 자신의 이론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2. 법과 법이데올로기 비판
다음으로 맑스의 ‘경제비판’에 상응하는 ‘법비판’작업을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맑스는 「자본」에서 국가에 대한 분석계획만 갖고 있을 뿐 이를 완성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법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 법비판 작업은 법규범, 법제도, 법의식, 법이데올로기 등에 대한 각각의 연구와 종합이 필요한데, 일단 여기서는 법규범과 법이데올로기에 대해서만 언급해두기로 한다.
파슈카니스는 「맑스주의와 법의 일반이론」(1924)이라는 탁월한 저작에서 법실증주의와 법물신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기 위하여, 맑스가 「자본」에서 행한 ‘법형태’와 ‘상품형태’와의 연계, 엥겔스가 「반듀링론」에서 행한 평등원리와 가치법칙의 연계 등을 법학영역에 도입한 바 있다. 그는 ‘법형태’의 사회적 근원을 ‘교환관계’ 속에서 찾으면서―이때문에 그는 ‘상품교환학파’라고 불린다―, ‘법범주’는 상품교환과 함께 발생하고, 상품교환 또는 그것을 규제하는 ‘동등한 원리’의 소멸과 함께 소멸하는 역사적으로 과도적인 존재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파슈카니스는 법형태의 문제를 ‘교환관계’와의 관계에서만 파악하였고 ‘생산형태’와 관련시키는 것을 간과하였다. 30년대 초 파슈카니스 자신이 자기비판하였던 것처럼, 상품교환과정의 논리에 따라 법적 관계의 형태성을 탐구하는 것 외에, 직접생산자와 생산수단소유자 간의 지배예속관계라는 계기를 소홀히 하였으며, 따라서 법의 계급적 내용과 형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은 살아있는 구체적 현실, 계급투쟁의 현실적 조건 및 그에 대응하는 실천적 요청에서부터 이론을 유리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파슈카니스의 방법론은 ‘논리주의’로의 경사가 존재하여 법의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미흡했으며, 방법론적 편중 하에서 구체적 연구진척이 미약했다. 요컨대 현시기 맑스주의 법이론은 ‘경제관계의 매개형태’로서의 법과 ‘계급지배도구’로서의 법의 통일적 파악 및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통일적 파악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맑스주의 법이론은 ‘법학적 세계관’, ‘법의 지배’(Rule of Law) 등의 법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을 대체하고 등장한 ‘법학적 세계관’은 초기에는 계몽주의의 혁명성을 간직하면서 사회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부르주아 혁명이 승리하고 자본주의가 안착하자마자 법률적 평등 뒤에 숨어 있는 사실상의 불평등, 계약의 자유 뒤에 숨어 있는 경제적 강제, 이용 ‧ 지배 ‧ 처분 뒤에 숨어 있는 자본주의적 재산권의 진수인 타인의 불불노동(不拂勞動)에 대한 수탈을 은폐하고, 또한 법과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관념을 유포함으로써 체제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풀란차스가 지적한 법 대(對) 테러라는 대립항의 ‘환상성’, 그리고 “법대로 테러하라”는 노동자시인 백무산씨의 야유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엥겔스는 되묻는다.
“피압박계급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은 무자비하게도 그것도 ‘법에 의하여’(by right of law) 지배계급의 동일한 지향을 위해 희생되지 않았던가?”
요컨대 우리는 “악법의 폐지와 권리가 보장되는 법률의 제정을 통하여 ‘법의 지배’원칙이 확립되기만 하면 점진적으로 평화롭게 사회가 발전해 갈 것이라는 믿음은, ‘법률적 세계관’을 낳는 현실의 외양을 간파하지 못한 채 재생산적 실천으로 이어질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문제에 대해 맑스주의 법이론이 유의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 한국의 국가권력이 과거의 ‘군사파시즘체제’에서 이른바 ‘보수대연합’체제로 성격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폭력일변도의 정책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통치방식이 전면 도입되고 있으며, 여기서 과거보다 ‘법이데올로기’가 통치논리로서 보다 큰 비중을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3. 한국 사회의 법현실과의 대결
이상의 작업에 기초하고 또 이에 병행하여 맑스주의 법이론은 한국 사회의 법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작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맑스주의 법일반이론에 대한 탐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구체적 법현실에 대한 천착이다. 구체로의 상승이 이루어질 때만 추상도 더욱 발전하는 것이다. 레닌의 말대로 “구체적인 것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야말로 맑스주의의 혼이 아니던가?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하고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고, 1945년 이후에는 예속적 상황에서 독점자본의 지배가 관철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의 법현실과 그 메카니즘에 대한 연구는 몇가지 도식으로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한국의 법제사를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사와의 관련 속에서 정립해야 하며, 또한 ‘식민법학’의 유산과 해방후 도입된 ‘서구법학’ 간의 융합의 메카니즘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구의 최신식의 법이론이 다 소개되어 있지만 법집행자나 민중의 법의식에는 아직 봉건적 법사고, 파쇼적 법사고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상황, 화려한 자유민주주의적 법논리와 극우파쇼적 법현실이 교차되고 있는 상황 등등에 대한 구체적인 천착이 필요하다. 또한 한국의 각 실정법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각종 법제도―법원, 검찰, 변호사 등―에 대한 실태조사, 기능분석과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단지 아카데믹한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이 작업은 바로 한국 사회의 법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위치지워져야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단지 법학자들 사이의 폐쇄적인 이론적 담화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한국 사회의 법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현실을 타개하는 올바른 계획과 방법을 잡아 나아가기 위해서는 맑스주의 법이론은 그 본성상 현실의 진보운동과의 교통이 필수적이며, 또한 진보운동과 결합하여 그 한 부분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맑스주의 법이론은 진보적 입장에 선 실정법체계의 ‘해석론’을 새롭게 개발하고 발전시켜 진보운동의 ‘재판투쟁’에 기여해야 하고, 또한 진보운동의 발전에 ‘진지’역할을 할 수 있는 사안들을 법적 요구로 정식화하여 ‘입법운동’에 기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하에서의 ‘법의 지배’ 원리를 비판하면서도,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이라는 전망하에서 법의 지배에 때로는 반대하며(against), 때로는 그 한도 내에서(within), 또 때로는 그것을 확보하기 위하여(for)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우리는 좌익관념론이나 ‘혁명적 냉소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또한 지배법학의 논리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작업, 진보적 법학연구자들의 연대를 모색하는 작업 등의 ‘법학운동’,‘법학연구자운동’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나아가 현시기 민중의 요구를 규범적으로 정식화한 ‘강령’(programm) 작성작업에까지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4. ‘정법론’의 몰바른 위치매김
이상의 작업과 관련하여 특히 우리는 민주법학진영 내에 존재하는 ‘정법론(正法論)’에 대한 올바른 위치매김과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의식은 ‘민중의 법’과 ‘지배계급의 법’, ‘정당한 법’과 ‘현실법’ 등으로 나누고 전자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법현실의 타개에 나서려는 시도인데, 대표적으로 강경선 교수의 입론이 있다.
“이러한 실천예술의 유일한 장르가 바로 ‘법’인 것이다. 법은 정의를 이념으로 하는 구체적 행동예술인데 그 완성상태가 곧 ‘사랑 ‧ 박애’이다.”
“실제로 우리가 ‘악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미 어떤 정의로운 법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정법의 내용은 헌법 이전에 이 시대의 사물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헌법 제1조와 같이 헌법조문으로 실정화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악법을 불준수하기에 앞서, 그런 정법을 준수함으로써 진리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길고 긴 어둠의 역사 속에서 노예의 사슬에 묶여 왔음에도 항상 올바름을 향하여 투쟁을 그치지 않았던 민중이 자신의 행위지침으로 삼아 왔던 그 규범을 우리의 법으로 확인하고, 그 법을 준수함으로써 이 땅의 민주화와 해방의 그 날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듯이 강교수의 ‘법’, ‘정의로운 법’은 ‘이 시대의 사물에 의해 규정되면서 사랑 ‧ 박애로 나아가는 행동예술’이며 이는 바로 ‘민중의 행위지침’과 동일하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 견해는 ‘법’(Recht)과 ‘법률’(Gesetz)을 구별하는 ‘자연법론’의 한국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자연법론’은 학설차원에서 존재했을 뿐이었고, 그 핵심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극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견해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인민의 “혁명적 법의식”, “혁명적 양심”을 ‘법’의 원천으로 보았던 레이스너(M. A. Reisner)의 ‘계급적 직관법’론과도 매우 유사하다.민중적 입장에 선 법이데올로기를 창출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법률관계투쟁’이나 체제법학과의 법해석논쟁에서 실용성을 가질 것이며, 활동가의 자기정당성 확립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먼저 이 견해에는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그 ‘악법’, ‘현실의 법’의 발생, 변화, 기능 등에 대한 과학적 분석작업이 결여된 채, 단지 ‘민중의 법’, ‘근본규범’ 등의 우월성만이 강조되고 있다. 이 견해의 정당한 문제의식이 살아나려면 ‘현실의 법’을 규정하고 또한 ‘민중의 법’의 실현을 지연하는 “이 시대의 사물구조”에 대한 천착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 견해는 규범과 규범간의 ‘공중전’에만 촛점을 맞추게 되어 ‘헌법주의’의 문제점이 발생할 것이다. 요컨대 ‘악법’에 대비되는 ‘정법’이라는 논리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는 ‘법규범’과 ‘법의식’ ‧ ‘법이데올로기’를 혼동하고 있으며, ‘민중의 법’, ‘정법’을 말할 때는 주관적 법개념을, ‘지배계급의 법’, ‘악법’을 말할 때는 객관적 법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법분석에 있어 이중기준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 두고 싶다. 요컨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제안에 완전히 동의한다.
“자연권 이론의 역사성, 그것이 함축하는 내용의 이데올로기성이 철저히 인식되어야 하며, 새로운 문제틀 속에서 그 합리적 핵심이 보존될 때만 진정한 비판의 무기로서 민중의 물질성과 결합하여 무기의 비판이 될 것이다.”
5. ‘주체의 법이론’ 비판
마지막으로 북한의 ‘주체의 법이론’을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재 남한 진보운동은 과거의 ‘통념’을 되씹으면서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내야 할 시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반추작업의 대상에 북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북한에 대한 환상은 또 한번의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주체의 법이론에는 위에서 본 ‘법사멸론’의 문제의식과 사회주의하에서 기본권이 갖는 의미에 대한 이해는 매우 취약하다고 판단되는데, 본격적인 연구는 뒤로 미루더라도 북한 노동법과 형법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북한의 1978년 ‘사회주의노동법’을 비롯한 노동법령에서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 등의 ‘노동3권’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근로자의 노동에 대한 각종의 의무들은 매우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고, 이러한 의무위반의 일부는 ‘범죄’로 처벌되고 있다. 노동3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북한은 착취계급이 소멸된 근로자의 국가이며, 근로자의 이해를 완벽히 체현하고 있기 때문에 근로자에 대한 어떠한 권익의 침해도 없다는 ‘국가주의’적 사고 때문이다. 그러나 근로자 개개인과 근로자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권력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노력 외에도 반드시 공민 스스로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노력이 필요하다. 즉 ‘사회주의노동정책’의 실현을 위한 국가의 책무(노동법 제13조)만 있으면 족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노동3권의 보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 노동법에 나타나는 ‘의무의 과잉’ 현상은 사회주의체제의 효율성을 생산관계의 혁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통제를 통해서 확보하려는데서 나타난 것이다. 즉 북한 노동법의 촛점은 ‘노동자주관리’ 등을 통하여 생산수단을 생산자 자신의 소유로 복귀시키고 이를 통하여 생산수단의 ‘실질적 사회화’를 지향하는데 놓여 있기 보다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하에서 노동력의 조직화와 동원, 효율적 관리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북한 형법을 보자면, 북한 형법은 자신의 임무를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보위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제4조) 형법의 ‘계급성’와 ‘도구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형법의 본성을 솔직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그 ‘계급성’과 ‘도구성’이라는 이름 하에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법현실이 고착되어 있다는 데 있다. 특히 이는 정치형법부분에서 드러나는데, 대표적으로 ‘반혁명범죄’(제51조-66조)가 있다. 예를 들어 반혁명범죄 중 ‘반동선전선동죄’(제56조) 부분은 ‘반동적인 사상 ‧ 요언 ‧ 출판물 ‧ 문서 ‧ 낙서 ‧ 투서’ 등을 조작 ‧ 유포 ‧ 전파하는 행위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고 있다. 자본주의국가든 사회주의국가든 자신의 체제를 보위하기 위하여 각종의 ‘정치형법’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 ‘정치형법’이 ‘반혁명’, ‘반동적’ 등의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며, ‘사상’을 범죄구성요건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범죄성립여부가 공안경찰 등 법집행자의 손에 놓이게 되고 범죄의 성립범위가 확장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공민의 정치활동이 위축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형법은 체제보위의 도구로서의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국가의 과도한 또는 잘못된 권력행사로부터 공민을 보호하는 ‘보장적 기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점에 대하여 북한 당국은 “미제의 반혁명음모”, “남한 정권의 흡수통일 음모” 등을 이유로 불가피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으며, 우리의 비판을 ‘생디칼리즘’,‘우익 기회주의’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병영사회주의’적 노선을 견지한다고 체제가 강화되는게 아니다. 오히려 북한 정부가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정치와 비판을 보호하고 발전시킬 때 체제가 공고히 되는 것이 아닐까? 원래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먹고 자라며, 민주주의를 통해 강화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법분야에서도 입법과정과 ‘법발견’에서 그리고 법적용과 법집행에서 공민의 참여와 통제, 또한 법제도, 법기구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통제 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주체의 법이론’이 이러한 작업없이 “혁명적 준법기풍”, “자발적 규범주의”의 수립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도그마에 빠져 과거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학’의 오류를 반복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V. 맺음말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보수화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지만, 이 땅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은 엄연히 재생산되고 있으며 각종 ‘악법’은 엄존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맑스주의 법이론을 위시한 ‘과학적 ‧ 실천적 법학’의 존재의미는 여전하다. 그러나 단순한 존재의미의 확인에 그쳐서는 안된다. 이 시대의 진보법학은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 실험의 성과와 한계에서 교훈을 추출하고, 엄존하는 현실 자본주의의 모순과 대결하면서 새로운 전망을 열어나가는데 기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의 진전은 단지 진보법학자들 간의 학술적 논의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법에서부터 소외된 대중이 법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나아가 법 자체로부터 해방되려는 운동과 결부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저울과 칼을 들고 있다. 법학자의 노력에 따라 그녀는 권력에 빌붙어서 민중에게 칼을 휘두르는 요부(妖婦)가 될 수도 있고, 민중적 정의를 형평있게 실현하는 여장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객관적 과제의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주체역량은 미흡하기만 하다. 법허무주의와 법물신주의에 빠지지 않으며 국가법의 사멸과 인민의 자치규범의 창출을 지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 호흡 강한 걸음”이 필요하다. 전망의 혼돈, 대오의 동요, 수적 열세 등등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리고 모두가 희망과 열정에 불타 있었던 80년대가 그립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먹고 살아서는 안된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충고한다.
“좋았던 옛날 것들이 아니라 나쁜 새로운 것들로부터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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