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의 부친이신 육종관씨는 족보상으로는 23대(世) 목사공파로서, 본관은 관성(管城: 옥천의 옛 이름)이며, 시조는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육보(陸普)로 당나라 명종 때 왕명으로 불교 국가인 신라에 유교를 전파시키기 위해 오게 되었고, 신라 경순왕 때 부마로 삼고 관성군에 봉해졌다. 본관은 옥천육씨(沃川 陸氏)이다.
시조 육보는 중국 절강성 사람으로 당나라 명종이 문학절례지신을 뽑아 신라에 선교사를 보낼 때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건너왔으며, 공을 세워 경순왕이 관성군에 봉하였다고 한다.
육여사의 생가 교동은 마성산의 말꼬리에 힘주어 자리잡은 집터로서, 이는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갈마음수(渴馬飮水)형의 명당으로서 산세가 힘차게 뻗어 내리다가 끊어질 듯 다시 살아나는 그 정기가 모인 아늑한 양지쪽에 이 명당의 교동집이 터를 잡고 있는 곳으로 설명을 한다.
당시 집의 크기는 뒤뜰의 과수원을 합치면 7~8천 평인데, 순수한 집터(垈地)만도 3천여 평이 넘었다고 한다.
▲ 육영수 여사의 충북 옥천 생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13)
이 생가 집은 이조시대의 전형적인 대궐집으로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마방, 대문에서 마주 보이는 데가 사랑, 왼편에 건너체, 사랑을 돌아 집터 중앙에 안채, 이 안채에서 왼편으로 행랑, 오른편으로 연당사랑, 뒤로 돌아 별당, 후원에 사랑과 정자(亭子), 그 오른편에 또 뒤채가 있다.
바깥 겹집 사랑채만 하여도 누마루 바깥 사랑방, 안사랑방, 사랑채 안방, 대청, 광, 다락, 식객들이 거처하는 방으로 이루어진 이조 시대의 건축구조였다.
육 여사는 1967년 1월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였다. 어깨동무는 창간 당시는 세대사(世代社)에서 편집운영을 맡아 하다가 1970년 7월 25일 육영재단이 설립되자 이곳에서 흡수하여 발행하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어깨동무는 67년 1월 1일부터 75년 4월호까지 500만권이 발행되었다고 한다.
육 여사는 1969년 4월 14일 어린이를 위한 복지사업회 모체로써 육영재단을 설립하였다. 육 여사는 어린이 회관을 건립하였다. 1969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기공식을 갖고 70년 7월 25일에 준공을 하였다.
육 여사는 어린이를 위하여 “웃고 뛰놀자 그리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가꾸자”(1974.09.05)라는 문장을 부산 어린이회관 어린이 예찬비에 남겼다.
마지막으로 육 여사는 1973년 2월 12일에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 7,700평의 부지에 연건평 2,102평에 7개과를 둔 본관 622평, 실습장 913평, 기숙사 563평, 기타 4평으로 이루어진 정수(正修)직업훈련원을 세웠다.
이 직업훈련원은 국내에서 가장 완전한 시설을 갖추었는데, 71년 초봄 친한파인 미국 하원의원이며, 상원 세출위원회 산하 대외활동소위원회 의장인 오토 패스만이 육 여사의 불우이웃 활동에 감동하여 자금을 보내왔는데, 여러 사업을 고민하다가 이 훈련원을 세우게 되었다 한다.
육 여사의 취미는 세계 각국의 특색있는 작은 스푼 수집과, 서예와 사군자를 그리는 것, 때때로 아이들과 탁구를 즐기는 것이었다고 한다.
5.16 혁명 이후, 국가시책으로 나환자에 대한 구라사업(救癩事業)을 펴 사회복귀의 활로를 찾게 하기 위하여 정착촌을 만들어 자립을 길을 열게 한 육 여사는 그들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당시 현장
육 여사는 1974년 8월 15일 해방 29주년 광복절식이 거행되던 국립중앙극장 단상에서 오전 10시 23분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의 저격으로 10시 32분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도착하여 10시 40분부터 두부관통 총창수술을 시작하여 오후 4시 20분에 마쳤으나, 이 날 저녁 7시에 결국 운명을 하고 말았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집행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
❍ 육영수(陸英修 1925.11.29. 충북 옥천 生) 여사, 1974.8.15.(향년 48세) 사망
1남 3녀 중 차녀로 언니 육인순, 오빠 육인수, 여동생 육예수가 있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근혜, 근령, 지만 등 1남 2녀를 두었다. 김종필(2018.6.23. 사망)의 부인 고 박영옥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인 박상희 씨의 딸로서, 김종필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이고, 육 여사에게는 시조카사위가 된다.
∙ 1938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졸업 – 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1길 26(문정리 83)
∙ 1942년 배화고등여학교(현 배화여자고등학교) 졸업 –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1길 34(필운동)
∙ 1974.8.15. 서울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식 도중 문세광의 저격에 의해 암살됨(당일 오후 7시에 사망, 향년 48세), 8.19일 국민장 영결식 거행 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묘지 안장
∙ 1972.12 ~ 1974.08 제8대 대통령 영부인 - 1973년 서울 용산구에 정수직업훈련원 개교, 1974년 7월 15일 소록도 국립 나병원에 양지회 회관 설립
∙ 1971.07 ~ 1972.12 제7대 대통령 영부인
∙ 1967.07 ~ 1971.07 제6대 대통령 영부인 - 1969.4.14.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한 육영재단 설립, 1970.7.25. 서울 남산에 어린이회관 건립
∙ 1963.12 ~ 1967.07 제5대 대통령 영부인 - 1963.10.15. 박정희 제5대 대통령 당선, 12.17 박정희의 제5대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생활
∙ 1963~1974 양지회(陽地會) 명예재단 고문 - 육영수 여사는 양지회를 설립해 자선과 구호 활동을 펼쳤다. 육 여사는 양지회를 통해 한센인과 난민촌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974년 11월 소록도 내에 건립된 한센인들을 위한 주거시설 명칭이 양지회 이름을 딴 양지회관이다.
∙ 1950.12.12 천주교 대구대교구 계산동 성당에서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 -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 1950년 6·25 전쟁 중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중 박정희(당시 소령) 만남
∙ 옥천여자전수학교(현 옥천여자중학교: 충북 옥천군 옥천읍 중앙로 90) 1년 3개월간 가사 교사
❐ '주기(周忌)'와 '주년(周年)'에 대한 개념
사망한 해의 횟수를 표현하는 주기(周忌), 태어난 해의 횟수를 표현하는 주년(周年)에 있어서, 그 정확한 용어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나 ❍ '주기(周忌)'의 周는 ‘두루주’, 忌는 ‘제지낼기’인데, 기(忌)를 이야기 할 때 ‘기일(忌日)’, ‘기제사(忌祭)’’의 기(忌)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합당한 한자의 주기라는 동음이의어가 없으나, 따로 별개로 주기의 한자를 조합할 수 있기 때문에 주년(周年)을 주기(周忌)로 표현하는데 있어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주년(周年)’은 일반적으로 망자나 생존해 있는 사람들에게 통용적으로 다 활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주기(周忌)는 망자(亡者)에 적용되는 뜻으로 활용되고 있고 '주년(周年)'은 돌아가신 분의 생신(生辰)의 의미로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사망한 날 해의 횟수를 표현하는 '주기(周忌)'를 '주년(周年)'으로 활용하는데 있어서도 크게 무리가 가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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