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초창기(1987년~1992년) 사례를 중심으로
<논문요약> 서울대병원 노동자들은 1987년 7월 31일에 노동조합을 창립하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이 참여했던 상급조직은 병노협, 병원노조연맹, 보건의료노조, 공공운수노조, 그리고 공공서비스노조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2005년 보건의료노조를 탈퇴하기 이전까지 보건의료산업의 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핵심 주체였다. 그래서 이 글은 노동현장의 조직화 문제가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전제하에,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노동현장 조직화 사례(1987년~1992년)를 분석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설립 초기에 조합원을 각종 모임에 소속하게 하는 조직화 투쟁, 노동조합의 각종 투쟁의제에 대한 노동현장 분임토의 조직화 투쟁, 그리고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투쟁을 노동조합의 조직적인 것으로 전화시키는 투쟁으로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실질적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노동현장 조직화 사례는 ‘노동조합운동의 실질적인 조직력을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가’ 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사례가 지니고 있는 함의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합원이 각종 모임의 주체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노동조합운동의 의제별 네트워크를 토대로 노동조 합과 조합원 간의 유기적 소통관계가 강화되어야 한다. 셋째, 노동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노동조합도 그러한 투쟁을 조직적인 투쟁이나 모든 조합원의 투쟁으로 전화시켜야만 한다.
1. 문제제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후 민주노총)은 1995년 창립 이후 현재 까지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산업별 체계로 변화시키기 위해 진력을 다하고 있고, 최근 제2의 산별노조운동을 위한 조직발전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2011년 말 현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소속된 67만여 조합원 중에서 80.7%인 약 54만여 명이 산업별 노동조합의 조합원이다.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후 전노협)가 약 20만 명의 조합원으로 출범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민주노조운동은 지난 20년 동안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산업별 조직으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노조 운동은 IMF 외환위기 이후 자본축적의 구조 및 노동자 계급 구성의 변화에 따른 비정규 노동자들의 급증,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투쟁에서 경험했던 기업별 노조운동의 한계, 국가 - 자본의 힘에 두려움으로 중독되어 가는 조합원들의 의식상태, 가속화되는 현장 권력의 공동화 현상 등을 노동조합운동의 위기현상으로 간주하면서, 이러한 위기를 산업별 노조의 건설로 극복하려 하였다. 위기현상은 민주노 조운동의 정체성으로 규정되어 왔던 민주성, 자주성, 연대성, 투쟁성, 계급성 등이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넘어서 노동조합의 존폐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자원은 노동조합의 존재 유무나 노동조합의 조직체계 또는 조합원의 양적인 성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노동현장을 실질적으로 조직했느냐의 여부, 즉 노동조합 및 노동현장의 다양한 조직에 조합원이 어느 정도 참여하고 노동현장에서 투쟁의 자발성을 발휘하느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노동조합의 조직력이나 조직자원에 대한 연구는 국내외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부분의 연구는 조직체계, 조직률의 정도, 투쟁의 동원력과 연대의 역량, 재정기반의 정도, 민주적 운영의 여부, 법·제도적 권리의 확보 여부 등의 다양한 지표로 조직력을 분석·평가하였다. 국내에서도 조합원의 규모, 분규의 양, 노동조합의 조직체계와 통합성의 정도, 조직화의 정도, 교섭역량 등으로 조직력 및 조직자원에 초점을 맞춰 분석·평가한 연구(이성희 1993; 정주연 2008; 강연배 2004; 박 동 2001; 김재훈 2004; 이상학 2005; 조돈문 2011)가 존재한다.
특히 김재훈의 연구는 금속노조의 사례를 가지고 조직자원과 조직력의 상관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평가하고 있다. 김재훈은 조직자원을 제도적 자원, 인적 자원, 전략적 자원으로 구분한 상태에서, 조직력을 구성하는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을 동시에 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노동현장에서 어떻게 형성되었고 노동현장의 조합원을 어떻게 조직하였는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민주노총은 조직발전전략(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00)에서 노동현장의 조직력을 복구하는 것이 조직혁신의 과제라고 제기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사례나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 글은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노동현장의 조합원을 조직화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이 노조건설 초창기(1987년~1992년)에 노동현장의 조합원을 어떻게 조직하였는가를 분석하려 한다. 물론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서울대병원만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사업장에서는 노동현장의 조합원을 노동조합의 주체로 나서게 하였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의 사례는 제조업과 달리 한노동현장을 활성화시키는 전략 및 노동현장의 자발적 투쟁으로 사업장 내에 존재하는 약 50여 직종의 노동자들을 조직화한 경우에 해당하고, 노동현장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조합운동의 구체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특히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노조건설 초창기에 노동현장에 기반하는 운동으로 법외노조1)에 대한 정부와 병원의 탄압을 극복할 수 있었고, 보건 의료산업의 전국적 조직을 건설하는 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노조건설 초창기에 간부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기억과 공식적인 활동보고서 등을 이용하여 노동현장 조직화 사례를 분석·평가하려 한다. 노동현장을 활성화하고 노동현장의 조합원들을 노동조합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전략만이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름길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 대병원 노동조합은 1998년 이후 보건의료산업의 산업별노조를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하면서 기업별 조직의 현장조직력 및 보건의료산업부문의 핵심인 간호사직종의 조직력이 약화되는 현상을 맞이하고 있다. 이 글은 서울대병원 노조의 초창기(1987년~1992년) 조직화 사례를 통해, 기업별 노조의 현장성 및 노동현장의 직종별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산업별 노조 운동의 조직활동 전략도 결론 부문에서 추론하려 한다.
1) 1993년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이 합법화되고 난 이후,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보건의료산업을 대표할 수 있는 산업별 노조를 결성하는 활동에 주력하였고, 다른 병원의 노동조합들과 공동으로 교섭투쟁을 전개하면서 노동현장에 기반하는 운동을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2. 상급조직 건설투쟁의 주도적 주체
1987년 전국병원노동조합협의회에 이어 1988년 건설된 전국병원노 동조합연맹(이하 병원노련)은 정부와 병원자본의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단결하여 투쟁하였다. 병원노련이 1993년 6월에 합법성을 쟁취한 이후, 기업별 조직체계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투쟁의 한계를 산별노조 건설운동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산별노조가 기업별 노조에 비해 조직력과 투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병원노련은 1994년부터 공동교섭 및 공동투쟁의 힘을 바탕으로 1997년 3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1998년 2월에 산별노조를 건설하기로 확정하고 ‘의료산별노조건설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이어서 4월에는 ‘의료산별노조건설기획단’을, 10월에는 ‘의료산별노조건설준비위원회’를구성하여 1998년 2월에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보건의료산업 노동자들의 전국적 상급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주체로 참여하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 합은 ‘기업별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보건의료산업의 노동자들의 지역별, 산업별 연대투쟁을 선도적으로 전개하였는데, 대표적인 투쟁으로는 ‘전국병원노동조합협의회 및 병원노련의 건설, 병원노동 조합연맹 합법성 쟁취 및 인금인상투쟁 전진대회 개최(1989/02/10)’, 연합노련 대의원대회에 규약개정을 촉구(1989/02/15)하는 투쟁, 서울지부 위원장단 회의, 각종 부서모임, 의료민주화 및 의료공공성 연구, 사업 중심의 위원회 및 공동투쟁위원회 등에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이러한 연대투쟁의 과정에서 노동현장의 조합원들을 산업별 노조운동의 실질적인 주체로 형성하려 하였다. “노조운동 초창기에는 신문이나 소식지, 속보 이런 게 굉장히 중요했다. 그것들은 노동현장의 조합원을 만나고 조직하는 핵심 수단이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보건의료산업의 전국조직도 노동현장에 기반해서 건설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자신의 조합원뿐만 아니라 연대투쟁의 과정에서 전국병원노조협의회나 병원노 련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를 아주 많이 홍보하고 조직하였다(김유미 구술). ”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이 보건의료산업의 산업별 노조를 건설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 실질적 동력은 노동현장의 투쟁력이었 다. 그런데 이러한 투쟁력은 1987년 6월항쟁 및 7월~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에 변화되기 시작했던 계급적 힘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계급의 저항에 부딪혀 노동통제정책의 기조를 유연한 통제전략으로 변화시켰으며, 노동자계급은 계급적 힘 관계의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노동현장에 대한 조직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의 조직화 투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도 계급적힘 관계의 조건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면서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주체를 형성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조직적 힘을 간접 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계급적이고 전국적인 활동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건의료산업 부문에서 현장투쟁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였 다. 보건의료산업의 노동자들은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공동교섭 및 공동투쟁으로 산별노조 건설의 토대를 강화하였는데, 서울대병원 노동조 합은 병원노련 서울지역본부의 집단교섭과 대각선교섭에서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토대는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힘이었다. “그때 당시엔 서울대병원이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병원이 투쟁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실제로 그 싸움의 힘이나 영향력이 미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될 만큼,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서 의사 결정에서 서울대병원이 투쟁을 할 거냐 하지 않을 거냐, 혹은 서울대병원 노동조합 간부들이 어떤 판단을 할 거냐가 굉장히 중요한 단초였다(송보순구술). ”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1987년 노조결성 이후 2007년까지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조합원 총회 및 파업과 같은 방식으로 투쟁하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임·단협 투쟁은 거의 대부분 쟁의결의, 파업투쟁을 위한 결의대회, 그리고 파업투쟁을 거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었다.
마무리되는 시점도 파업투쟁 직전이나 직후에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투쟁은 노동현장의 조합원들이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화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당시 조합원이었던 최선임은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서울대병원이 공공병원으로서 전국 가이드라인이나 정부지 침을 깨기가 굉장히 어려웠지만, 서울대병원은 서울지역의 공동 투쟁을 전개하면서, 서울지역 대규모 병원들이 전선을 만드는 데 있어서 주도적이었다. 다른 병원의 노동조합에 비해 조합원의 규모가 컸고, 조합원들이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화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최선임 구술).” 서울 대병원 노동조합이 많은 노조 전임자와 대의원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도 노동현장에 대한 조직화 역량과 무관하지 않았다. 물론 정부와 자본의 공세를 공동교섭 - 공동투쟁으로 완전히 막아내는 데 역부족이었지만, 노동현장에 대한 조직화 역량은 곧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주요한 과제를 보다 능동적으로 추진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초창기에 약 80% 정도의 조직률을 바탕으로 보건의료산업 노동자들의 전국적이고 계급적인 조직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1987년 7월 31일, 40여 명의 발기인이 모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고 인간적인 의료실현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일주일간 파업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파업 이후에 조합원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1987년 7월 31일 노동조합 설립 12일 만에 조합원 1,000여 명이 가입하였고, 1991년 7월에는 조합 원이 2,079명으로 증가하였다. 다음의 <표 1>은 1987년 노조 설립 이후 1991년 7월까지 조합원의 증감을 나타내고 있다.
1988년 7월 현재,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조합원 중에서 의사직 종, 관리직종, 3급 대상자 등이 1,001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을 제외한 2,041명 중에서 1,700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실질적인 조직화 비율은 약 83.29%였다. 그 이후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의사직 종을 가입대상자에서 제외시켜 약 70% 이상의 실질적인 조직률을 유지 하였다. 이러한 조직화의 동력은 노동현장의 일상적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조에서 주관하는 소모임 및 상임집행부서모임, 현장조직을 활성 화하기 위한 모임, 현안 문제를 중심으로 한 현장분임토의 활성화, 그리고 조합원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각종 교육 및 대내외 행사에 조합 원의 참여를 조직화했던 것이다(서울대병원노조 1988/7, 48; 1990/07, 63).” 1991년 노조에 가입하러 갔던 조합원은 노조 사무실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조합 가입하러 갔는데, 신발 벗어놓을 자리가 없었 다. 노조 사무실 안에 사람들이 되게 많이 있었다. 나중에는 간부들이 순회할 때, 우리가 가입했다(김진경 구술).” 또한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계급적 조직력의 토대인 노동조합의 전국적 조직화(Korpi 1983, 39 - 40)를 위해 선도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보건의료노조 결성하고 그 다음해 정도까지도 서울대병원이 선도투쟁 하면 다른 데 거의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됐다. 또 1998년 보건의료노조를 만들고 1999년부터는 공공병원과 연대투쟁을 전개하면서, 보건의료 노동조합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것은 사실이다(최경숙 구술).”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와 달리 기업·업종·지역을 넘어 동일한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계급적 이해의 통일, 계급적 단결과 투쟁, 국가·자본에 저항하는 투쟁전선의 형성, 투쟁의 파괴력 강화, 노동자들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 기업별 노조운동의 한계 극복’ 등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셋째,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산업별 차원의 의료공공성 투쟁, 예를 들면, 의료개혁투쟁, 의료민주화 투쟁, 의료시장화 저지투쟁 등에서 선도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노동조합의 간부였던 전귀늠과 구연업은 다음과 기억한다. “일단은 병원에 한 조직적인, 작은 조직으로 봤을 때는, 두 가지일 것 같아요. 하나는 우리 안에서 그런 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경험에 대한 것들이지만,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민주주의가 우리 내부로 투영시켜 그걸 얻어낼 수있다는 구조, 그것이 곧 의료민주화의 한 축이고, 다른 축은 환자 중심 으로 사고가 전환되는 것, 이것은 의료민주화의 다른 축이다. 예를 들면, 의약품성분명으로 처방하자는 노조의 의견에 대해, 의사의 고유 권한 이라고 하면서 병원에서 굉장히 놀란거죠. 특히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그런 문제제기를 했다는 거, 성분표시가 왜 중요하고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언지를 전부에게 다 알리지는 못했지만, 당시에는 그 자체 만으로도 의료민주화의 대표성을 갖는 투쟁이었다(전귀늠 구술; 구연업 구술).”
그 밖에도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의료민주화 실천위원회를 구성하여 병원제도 및 의료제도의 개혁, 그리고 의료시장의 개방화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한적인 수준이었지만, 약품처방전의 성분명 화, 영안실비리 금지, 약품비리 근절, 단기병상제 폐지, 지정진료제의 금지, 선택진료제 금지, 환자·보호자의 권리 향상, 낙하산인사 저지, 공공 의료기관의 확대 및 강화, 외국인 의료시장 투자개방 저지, 의료기관의 공공성 강화 등에서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당시 성과에 대해 조합 원이었던 신은영은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핵심은 의료민주화였습니다. 저희는 의료민주화는 초창기부터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같이 제가 해왔다고 알고 있어요. 조합원들이 의료민주화라는 요구안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다 의식은 갖고 있는 것 같아요. 파업 때도 매번 빼먹지 않고 하는 게다 그 입원 환자분들을 생각하는 거, 그러니까 저희가 주로해 왔던 거는 의료의 민주화와 공공성, 즉 환자들의 공공성, 공공의료가그 돈 문제로 연결이 되잖아요(신은영 구술).”
이러한 투쟁은 1990년부터 보건의료산업 부문의 ‘1노조 1의료민주 화운동’ 을 토대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보건의료 정책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정책에 대해 선도적으로 맞서 투쟁 하였다. 이러한 투쟁의 조직력은 노동현장과 긴밀하게 결합되는 투쟁전 략에서 비롯되었다. 즉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일상적인 직종별 조직화 활동, 다양한 소모임 조직화, 투쟁의제를 둘러싼 조합원의 토론 조직화, 그리고 노동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을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전화시킴으로써 조합원을 노동조합의 실질적인 주체로 나서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울대병원 노동조합도 1996년~1997년 총파업투쟁과 IMF 외환위기 이후, 노동현장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서울대병원 노동조합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노조운동 전체에서 나타나는 문제일 수 있다. 특히 민주노조운동이 정규직 중심의 대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던 측면, 또는 간부를 중심으로 하는 공공부문의 사무직 노동조합운동의 특성 등을 고려할 수 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 노동조합 간부들은 이러한 한계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대안을 지속적으로 고민하였는데, 그 방안은 주로 현장에서 찾았다. “첫째, 현장활동 강화를 위한 대의원 중심의 현장사업을 중·장기적으로 계획을 수립하여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 둘째, 대의원 조직의 강화를 위해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을 가지고 집행해야 한다. 셋째, 조직위원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조직적 대안을 마련하고 조직위원들을 조직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10) 넷째, 간부와 조합원 간의 간극이 지속적으로 없어져야 한다. 다섯째, 미조직 부서 및 비정규직 노동 자들에 대한 조직화 방안이 마련되고 집행되어야 한다(서울대병원노1995, 28).”
10)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노동현장의 다양한 직종을 고려하여 8개의 조직위원회(제1조직위-제8조직위) 체계를 구성하여 운영하였다. 주요 이유는 직종의 이해에 따른 조직활동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3대 집행부에서는 노조의 부위원장이 조직위원회를 담당하도록 재편하였다. 조직위원회의 주요 역할은 현장활동의 일상화, 비정기적인 대의원 모임의 조직화, 현안문제의 현장토론 활성화, 그리고 조합원과 활동가 간의 친목 도모 등이었다. 서울대병원노조(1990).
3. 서울대병원 노동조합과 노동현장 조직화
1) 수평적인 활동가 재생산 활동
병원에는 약 50여 직종 노동자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직종은 간호직 종이었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간호사들은 1990년을 전후로 전체 직원의 42% 정도였고, 전체 조합원의 40% 정도였다. 그 외에 의료행정직, 시설 직, 급식직 등의 직종이 대표적이었지만, 구성 비율로 볼 때 간호직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3교대제 및 인력부족에 따른 노동강도 때문에 건강을 해치거나 이직을 해야만 했었다. 당시 노동조합의 간부였던 천성혜는 노동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왜 간호사들은 학생시절 그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하고도 별로 써먹지도 못하고 고작 2~3년 만에 사직하고마는 현상이 비일비재한가? 간호사들이 근무시간에 휴식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식사를 시켜먹다가도 환자가 주사 맞을 시간이 되면 달려가야 하고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를 밥 먹는 시간이라고 내버려둘 수는 없다. 3교대로 돌아가는 근무 때문에 몸을 해치는 경우도 많다. 인력충원은 없이 간호사에게만 무조건 ‘백 의의 천사’가 되라고 강요하는 병원이 야속하기만 했다(천성혜 1991.5.22).”
이러한 현상은 서울대병원만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병원에 존재했 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병원의 핵심 직종인 간호사들을 서울대병원뿐만 아니라 다른 병원의 간호사들을 횡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첫째, 간호직종의 활동가들을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체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조직으로 조직하였다. 그것은 소위 간호사위원회(준)였다. 병원 단위의 노동조합이 산업별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체계였다면, 간호사 위원회(준)는 노동현장의 직종 노동자들의 이해를 표출하면서 동시에 노동조합운동의 실질적 조직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조직체계였다. 물론 간호사위원회(준)의 역사적 토대가 존재했다. 간호사위원회(준)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은 주로 1987년 4월 ‘호헌반대서명운동’ 에 참여했던 간호사 들이었다. 서울대병원 간호사들이 중심이 되어 1987년 4월에 경인지역 간호사 460명이 호헌반대서명을 발표하자, 언론에서는 ‘하물며 간호사 까지도 서명하다?’라는 발문으로 보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87년 7~8월, 서명 간호사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민주노조 활동이 힘차게 출발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을 시발로 1년 사이에 100여 개의 병원노조가 설립되었다. 1989년 4월, 한양대, 연세대 병원이 파업하자, 당시의 대한간호사협회 부회장이 불법 쟁의에 가담하는 간호사는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협박하자 전국의 간호사들이 간협회비 불납운동을 전개하 였다. 평소 간협의 비민주성과 일반 간호사들을 무시하는 활동에 대한 문제제기가 확산되어 전국 2,300여 명의 간호사가 참여하였다. 1989년 6월, 간협회비 불납운동을 계기로 평간호사들을 진정으로 대변하고 간호 사들의 문제를 개선할 자주적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간호사회추진위를 발족하였다.
둘째,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간호사위원회(준)의 선전매체를 이용 하여 전국의 간호사를 수평적인 조직으로 조직하려 하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간부는 간호사위원회(준)의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간호사를 조직하기 위해 구체적인 활동, 즉 선전매체의 제작, 전국적인 교육수련 회, 그리고 전국간호사대회 등의 활동으로 간호사들을 조직하려 하였다.
주요한 수단은 「참간호」라는 제목의 선전매체였다. 당시의 「참간호」에 대해 한 조합원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참간호는 간호사들이 뭔가 의미있는 노동을 하고, 제대로 된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목적에서 만들게 됐다. 그런데 서울대병원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간부나 활동가들은 전국적인 사안뿐만 아니라 간호사준비위원 회의 참간호를 만드는 것도, 준비위원 및 간준위 위원장도 서울대병원 노조의 간부가 맡아서 했다. 실제로 집행위를 하거나 각종 모임을 조직할 때도 역시 서울대병원의 간호사들이나 노조 간부가 담당했다. 서울대 병원 노동조합이 이러한 역할을 하니까, 병원노련도 같이 결합할 수 있었다(최경숙 구술).”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볼 때, 간호사위원회(준)가 노동조합이 전개해 야만 할 활동들을 추진하고 또한 노동조합의 간부들까지 배출하자, 병원 노련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간부들은 간호사위원회(준)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활동보다 노동조합의 조직체계로 재편시키려 하였다. 병원노 련은 직종위원회 육성정책을 추진하면서 1991년에 간호사위원회(준)를 노동조합의 조직체계로 재편시켰는데, 서울대병원 노동조합 간부는 이러한 재편의 의도를 간호사위원회(준)에 대한 노동조합 간부의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경쟁심리에서 찾고 있다.
“ 간준위는 간호사들이 모이면 너무 좋고, 재미있었지만, 사실 활동 가를 배출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간준위에서 활동했던 사람 들이 주로 노조 간부를 담당했다. 그런 간준위를 해산한 것은 오류였다고 생각하지만,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간호사가 아닌 지역별 노조 위원장들이 간준위에 대해서 경쟁하는 심리도 존재했었다. 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거나 아주 열심히 하는 곳은 좀 덜한데, 권위주 의적인 곳은 더했다. 간준위와 같은 횡적 조직들을 잘 살려왔으면, 훨씬더 중요한 기능을 했을 텐데, 참으로 아쉽다. 그 당시에는 기업별 노조와 끊임없이 부딪쳤다(전귀늠 구술).”
하지만 간호사위원회(준)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체계로 재편된 것의 의의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노동현장의 수평적 조직으로서의 정체 성, 특히 기업별 노조를 넘어서는 전국적 조직력을 강화하려 했던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이를 최선임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노조는 산별노조 건설투쟁이 개별 병원으로 막혀 있는 상황을 뚫어 보고자 직종별 조직 활동을 했었다. 기업별 종적 조직체계가 아니라 지역단위 혹은 전국단위의 횡적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민했었다. 특히 간호사 조직화 초기부터 노조만 가지고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 했었기 때문에, 그 정신을 되살리려 했었다. 하지만 노조라는 조직체계 내에서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매우 희석되었다. 연맹으로 편재되고 난 이후, 그 활동의 영역이 없어지거나,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닌데, 간준위가 슬슬 약화되어 활동하지 못하였다. 노조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최선임 구술).”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적이고 수평적 조직화 사업이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체계뿐만 아니라 노동현장의 다양한 소모임 체계를 활용하였다.
1994년 10월 5일에서 10월 8일까지 개최되었던 전국간호사대회가 대표 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에는 총 40개 병원의 활동가 74명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논의되었던 핵심 내용은 병원 신경영전략과 노동조합의 대응, 간호사 현장조직강화를 위한 과제, 인력확보를 위한 투쟁 방향, 그리고 간호사 업무기준의 마련을 위한 워크숍(설문조사 및 토론) 등이었다. 당시 간호사위원회(준)의 조직사업은 직종위원회 확대를 위해 연맹과 상시적으로 논의하고 집행하는 것, 중앙 지도구심을 만들기 위해 기획회의와 대표자회의를 격월로 정례화시키는 것, 중앙사무국의 연구부·편집부의 활성화와 통일성 확보를 위해 연 2회의 공동수련회를 하는 것, 그리고 전임자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사무국원의 1일전임 등을 시도하는 것 등이었다. 물론 지역본부의 간호사위원회의 활성화를 위한 활동지원과 교육이나 행사의 교류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1998년 2월 산별노조가 결성되고 난 이후에도 지속 되었다. 간호사위원회(준)가 간호사위원회로 발전하고 난 이후, 간호사 위원회는 간호사 스스로 단결된 힘으로 간호사들의 이해와 요구를 올바 르게 대변하고 보건의료인으로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병원노련 산하 직종위원회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정립하였다. “간호사 한테 노동조합은 굉장히 중요한 중심축이다 보니, 산별노조의 직종 위원 회로 편재되었다. 1998년도에는 산별노조를 만들면서, 산별노조에 대한 어떤 기대와 희망이 컸을 때였고, 산별노조 안에서 좀 더 큰 틀로 활동해 보자고 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조직을 발전적으로 정리를 하고, 산별노조 직종위원회로서의 형식과 내용으로 새롭게 질적인 발전을 준비 하자고 했던 것이다(현정희 구술).”
하지만 간호사위원회가 수립했던 활동방향의 전략적 목표는 간호사 들의 지위와 역할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병원노동조합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보건의료산업 노동조합운동의 전략적 목표를 노동현장 에서 실현하려는 과정이자 직종을 중심으로 한 ‘횡적 조직체계’ 를 구축하 려는 과정이었다. 간호사위원회는 간준위의 활동을 계승하려 하였다. 그래서 간호사위원회는 간호사 직종의 이해를 내세우면서 전국적인 공동실 천을 전개하였고, 보건의료연맹의 직종위원회로서 노동현장의 조직기반을 활성화시켰다. 이는 현장조직을 강화하고 조합원의 참여를 확대하여 현장조직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가고, 공동사업이나 실천을 통해 산별노 조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직종위원회는 단위노조의 현장조 직의 강화를 위한 직종체계의 필요성 인식과 활동내용에 대한 모범이 확대되고, 다른 직종의 위원회에 대한 검토나 시도가 연맹과의 결합 속에서 추진되는 것으로 되었지만, 조직 내적으로는 상당한 쟁점, 즉 “‘노동 현장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활동가 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조직운영이 냐, 혹은 수직적인 노조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운영이냐’의 문제, 그리고 조직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정파적 경쟁과 갈등의 문제(최경숙 구술)”가 주요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그렇지만 산업별 노조는 수평적인 조직활동의 체계, 예를 들면, 직종위원회이든 혹은 현장활동위원회이든 기업별 조직체계를 넘어서서 활동할 수 있는 수평적 조직체계와 그러한 수평적 조직활동을 지역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조직체계가 유기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수평적 조직체 계는 기업별로 다양하고 특성화되어 있었던 조합원들의 이해를 전국적이고 계급적인 이해로 통일시킬 수 있고, 또한 기업을 넘어서는 다양한 조직활동의 경험 및 활동가 간의 관계를 축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평적 조직체계가 직종별 이해와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할 경우, 산업 내에 존재하는 직종별 이해의 차이를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존재 한다. 이러한 한계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체계로 극복되어야 한다.
2) 노동현장의 소모임 조직활동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대의원의 현장활동 강화’ 를 조직자원 형성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조직자원을 형성하기 위한 대의원의 임무는 조직위원회 회의 정례화, 조직위원회별 모임 정례화, 과모임 및 부문별 모임 정례화, 소모임 조직, 조합원 고충처리 등의 활동을 토대로 조직 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대의원의 이러한 활동은 곧 노동조합 조직력의 근간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의원이 조직하고 참여했던 소모임은 조합원의 일상적인 문화활동과 연계된 노동조합의 자원이었다. 소모 임은 대의원과 조합원, 조합원 간의 소통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공간이 었고, 조합원 간의 친밀도가 매우 높아지는 공간이었다. 노동조합과 조합원 간의 가교였던 것이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도 출범 이후, 대의원과 조직위원들은 다양한 소모임이 구성되도록 조직하거나 혹은 각종 소모임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노동조합운동 초기의 대표적인 소모임은 고운소리회, 민속연 구회, 넝쿨(노래반), 풍물반, 축구반, 탁구반, 그림반, 사진반, 영화반, 산수놀이반, 연극반, 늘푸른글터(문학반), 휘파람(율동패), 건강세상 알찬간호 등이었다. 그리고 취미교실 및 각 부서별 모임 등도 있었다. 노동 조합은 이처럼 다양한 소모임들을 관리하고 지원하였다. 1987년~1988 년에 대표적인 14개 소모임에서 활동하는 조합원은 205명이었다. 취미 교실이나 각 부서별 모임을 제외하고 본다면, 조합원 5% 이상이 소모임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 1989년에 8개의 소모임 (민속연구회, 고운소리회, 넝쿨노래반, 그림동네, 영상회, 축구반, 탁구반, 산수놀이반)을 노동조합의 집행체계인 문화부의 산하 조직으로 재편하였다(서울대병원노조 1989. 25).” 그래서 각종 소모임은 문화활동의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운영되었지만, 각종 소모임을 이끄는 주체는 학생운 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활동가들이었다. 각종 소모임이 노동조합 운동의 문화활동을 넘어서서 조직활동의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 동력이었다.
당시 소모임에 관해서 전찬례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소모임은 맨 처음에 풍물반으로 시작됐죠, 노동조합 초창기에 소모임 활동은 기본이었어요. 조합원들 스스로 삼삼오오 소모임을 만들어 퇴근 후에 활동했어요. 소모임 활동은 노동조합의 주축이 된 것 같아요(전찬례 구술,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에서, 2010.4.5. 서향숙 구술).”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각종 소모임으로 노동현장의 핵심 간부 및 활동가를 양성하고 조직하였던 것이다. “노동조합의 핵심 과제는 소모임의 일상활동을 충실히 채워나가는 것, 소모임 간의 연대를 횡적으로 조직하는 것, 그리고 노조활동과 소모임 간 연관성을 강화하는 것 등이었다(서울대병원노조 1991c. 185).”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집행체계로 재편된 활동을 중심으로 노동현장의 일상활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조합원의 소모임이 활성화된 주요 이유는 먼저 노동현장의 소모임을 조직하는 활동에 집중했던 대의원들과 조직위원들의 역할이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대의원을, “노동조합의 꽃, 노동조합의 핏줄, 노동 조합의 뿌리, 노동조합의 골간, 노동조합의 허리 등으로 비유하였고, 대의원에 의해 조직이 좌우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서울대병원노조 1991a.25).” 대의원의 역할과 과제는 조합원의 의견과 요구를 정확히 모아야 하는 것, 조합원 전체가 조합활동을 같이 할 수 있도록 노조집행부와 조합원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 현장 내 문제를 대의원이 책임을 지고 지도 하는 것, 노동조합 간 연대활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현장을 조직화하는 것이었다(이향춘 구술).”
또한 대의원과 조직위원들은 구체적으로 소모임 조직활동을 통해 조합원 간에 존재하는 실천 역량의 격차해소, 조합원 간 상호 소통과 이해의 도모, 신규 직원이나 비조합원을 조합으로 가입, 그리고 조합원의 조합탈퇴 예방 등과 같은 조직자원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곧 조합원의 단결력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조합원을 확대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대의원과 조직위원들의 모임을 정례화한 상태에서 교육을 수시로 추진하였고, 조합원의 상태를 공유하였다.
다음으로는 조합원의 다양한 문화적 요구를 파악·수렴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각 부서의 과별 모임을 활성화시킨 노동조합의 역할이 었다. 각 부서의 과별 모임은 병원 조직체계의 가장 밑바탕이었고 대의 원이 활동하는 핵심적인 공간이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조합원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 과별 모임을 적극 추진하였고, 특히 1995년 부터 과모임 비용, 간담회 비용, 조직활동 비용 등을 조합예산에서 보다 많이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그 동안 과모임이 불가능했던 부서에서조차 식사 시간을 이용한 모임이 가능해졌다. 과별 모임은 조합원들 간의 문화적 소통과 조직적 응집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소모임은 양적 으로도 중요했지만, 조합원들에게 많은 참여를 유도하고 노조에 대한 지지기반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했다. 소모임 활동 자체가 노동조합운동과 관련된 교육선전활동 및 정책활동의 연장이 되었고, 정책적 의제를 중심으로 투쟁의 주체가 형성되는 계기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이지만, ‘건강세상 알찬간호 모임’ 은 다음과 같은 내용, 즉 전문직으로서의 간호에 대하여, 의료개방을 맞이하는 간호사의 입장, 간호사가 보는 여성문제, 매스컴에 비친 간호사의 모습에 대한 고찰, 타병원 단체협약에 관한 조사, 간호사 업무의 효율성에 대하여, 간호사 역할의 역사적 변천과정과 학제에 대하여 등을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여 자료집을 발간하기도 했었고, 이러한 내용들로 ‘간호사 심포지엄’ 이나 ‘간호사 교실’ 등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모임 활동은 노조의 역할을 소모임이 대신하면서 조합원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여 노동조합은 일상적인 투쟁에 소모임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이 1990년대 초반부터 노동현장 및 간부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또한 각종 소모임의 조직원들이 완전한 노동현장의 활동가들로 변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운동의 소모임 활동이 상당부분 침체되었다. 소모임에 참여하는 조합원이나 모임의 횟수가 줄어들었고, 소모임이 노동조합의 투쟁과 조직을 투영시키는 차원의 활동을 전개하기가 쉽지 않았다. 핵심적인 이유는 소모임을 조직하는 활동가가 축소되거나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들을 조합원들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노동조합운동의 주요한 활동가들이 전국적인 조직의 중앙이나 조직으로 파견되어 활동하는 현상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대의원들이나 비전임 간부들이 소모임을 꾸려갔다면, 지금은 개미허리처럼 비전임 간부들이 축소되고, 다양한 소모임도 사라졌다(김진경 구술).”
또 다른 이유는 소모임 활동의 자발성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조합이 소모임 조직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제기된 것이 지만, 소모임에 참여하는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에 의한 지시하달 방식에 의한 활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아주 많았었다. 조합원들이 소모임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현장 활동가로 변화되지 못한 것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전귀늠 구술).” 마지막으로 노동조합의 투쟁과 맞물려 소모임의 일상활동이 불규칙했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는데 소모임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 인해 소모임의 일상활동이 불규칙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각 시기에 따라 일정 정도 소모임 활동의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구연업 구술).”
3) 투쟁의제별 현장토론 조직활동
노동조합의 임금과 단체협약을 중심으로 일상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노동조합은 이러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조합원의 참여를 유도한다.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능동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투쟁을 전개 해야만 자본과의 관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 분의 경우, 조합원이 노동조합의 활동에 일상적으로 참여하기 어렵기 때문에, 조합원은 노동조합의 간부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위임한 상태에서 노동을 한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경우, 조합원을 다양한 투쟁의 권리주체로 나서게 했는데, 대표적인 전략은 제반 투쟁의 과정에서 조직했던 현장분임토의였다. 1991년 7월부터 1992년 6월 말까지 진행되었던 현장분임토의 주요 의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노조의 존재 의미와 문제점, 단체협약 요구안, 현장의 고충처리 문제, ILO가입과 노동법 개정 문제, 전국노동자대회 참가와 관련된 문제, 1992년 임금인상 요구 초안 만들기, 의료민주화 내용, 해고자 원직복직 문제, 노조의 발전과제(서 울대병원노조 1992, 256)” 등이 현장토론의 핵심 의제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노동현장의 조합원 및 대의원들과 현장토론으로 소통하고, 이러한 현장토론의 결과를 바탕으로 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였다.
현장분임토의는 노동조합이 현장과 소통하면서 조합원을 투쟁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과정이자 조합원의 요구에 조응하는 투쟁의 전략과 목표를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대부분의 임·단투및 주요 투쟁의 요구사항을 결정하기 이전에 전개했던 사전 조사, 그리고 노동조합의 투쟁의제에 대한 사전 조사를 거치고 난 이후에 투쟁의 전략과 목표를 결정했고, 사전 조사활동은 조합원의 현장분임토의를 조직하면서 이루어졌다. “저희는 부서별로 조합원 분임토론을 많이 했다.
교섭 안건을 정할 때도 그러했다. 조합원들의 분임토의 결과는 노동조합의 투쟁전략과 목표를 수립하는 실질적 힘이었다. 조합원들은 분임토의 과정에서 투쟁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노조에 대한 주인의식을 보유할 수있었다(김유미 구술).”
실제로 현장분임토의는 노동조합운동에서 조합원 중심의 현장 민주 주의를 강화하는 과정이었다. 노동조합의 주요한 의사결정이 아래로부터 이루어지면서 노동조합운동의 관료화를 예방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장 분임토의는 조합원 스스로 노동조합의 투쟁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게 하였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간부는 현장분임토의의 필요성과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현장분임토의는 간부와 열심조합원 위주의 활동으로 부터 탈피하여 다수 조합원이 조직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하는 조합원 중심의 활동이었다. 노조 간부들도 제반 투쟁에서 현장분임 토의의 결과를 투쟁의 전략과 목표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현장분임토의를 정례화하여 조합원의 일상적인 노동조합 활동의 참여를 통해 자주적 단결을 향상하였고, 가능하면, 모든 조합 내 정책이나 사업을 조합원 스스로 현장분임토의를 통해 결정하게 하려고 하였다(전찬례 구술). ”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대의원과 조직위원들은 현장분임토의를 주도하면서 조합원의 참여를 극대화하려 하였다. 우선 현장분임토의에 참여하는 조합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발언하게 하였다. 발언 시간이나 서기도 현장분임토의를 시작하면서 정하였다. 당시 분임토의에 관해 최선임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말을 잘하지 못하는 조합원도 현장분임토의에서 만큼은 정해진 시간 내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시간만큼은 모두가 주인이었다(김유미 구술).” 다음으로는 조합원이 토론의 내용과 결론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키고 집행하게 하였다. 현장분 임토의의 서기는 조합원의 발언이 끝날 때마다 기록한 내용을 공개적으로 확인시켰다. “이것은 조합원의 개인적 발언을 조직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과정이었다. 또한 현장분임토의에서 결론을 내야 할 경우, 결론에 대해서 반드시 따르고 실천하도록 결의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리도록 하였다(최선임 구술).”
이처럼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투쟁력은 간부가 열심히 일하는 것만 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전체가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할 때,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조직력은 노동현장의 분임 토의를 기반으로 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장분임토의도 노동조합의 간부나 대의원 또는 활동가의 의견을 중심으로 토론이 진행 되곤 하여, 형식적인 절차에 머무르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조합 원은 현장분임토의에 참여하더라도, 일상적 투쟁의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고민의 정도가 그리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전찬례 구술).”
4) 자발적 투쟁을 통한 조직활동
노동현장에서 조합원의 힘이 공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노동현장 곳곳에서 조합원들의 투쟁이 자발적으로 진행된다는 의미이지만, 조합 원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노동조합의 간부들만이 투쟁에 참여하는 현상은 정반대의 경우이다.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볼 때, 조합원들의 자발 적인 투쟁은 조직력의 자원을 확인하는 과정이자 조직력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과정이 된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1987년에서 1990년까지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투쟁을 세 번이나 경험하였다. 대표적 사례가 1987년 급식과 노동자들의 인력확보를 위한 파업투쟁, 1990년 급식과 노동자들의 부당인사 철회투쟁과 간호사들의 근무시간 개악저지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은 조합원 스스로 결정하여 전개되었지만, 노동조합의 조직자 원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먼저,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자발적인 투쟁에 사후적으로 결합하였지만, 노동현장의 투쟁력을 바탕으로 병원으로부터 성과를 얻을 수 있었고, 조직자원의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서울대병원 급식과 노동자들은 1987년 10월 22일부터 10월 23일까지 파업농성투쟁을 전개하면서 인력을 보충하라고 요구하였고, 노동조합은 병원 측과 24시간 동안 11차례를 교섭하여 32명의 인력을 보충하기로 합의하였다. 서울대 병원 노동조합은 급식과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투쟁에서 조합원 조직으로 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파업을 주도했던 윤봉자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급식과 조합원들의 투쟁 이후, 조합원들은 당당해졌다. 옛날처럼 죽어지내지 않고 큰소리치면서 일했다. 그것은 조합이 있어서 가능했다. 조합이 있어서 쫓겨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고, 노동조합과 관련해서는 동료들 간의 단합이 잘 이루어졌다(윤봉자 구술). ” 또한 투쟁의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단결력이 강화되었다. 급식과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투쟁은, “병원의 사무직원들이 고용직이 급식과 노동자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우하였기 때문에, 급식과 조합원들은 인간적인 대우에 욕망의 차원에서 똘똘 뭉쳐 투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전찬례 구술).” 심지어 노조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급식과 조합원조차 병원의 탄압에 저항하면서 단결하였다.
둘째,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노동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을 계기로 의료민주화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조합원들은 1990년 9월 6일부터 10월 4일까지 급식과 조합원에 대한 부당인사발령을 저지하기 위해 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노동조합은 두 번에 걸친 급식과 조합원들의 투쟁에 사후적으로 결합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자 병원 측은 급식과 조합원들의 부당인사발령 저지투쟁에 대해 9월 17일 급식과 조합원 85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하였고, 노동조합도 병원의 인사비리, 입원 수속비리 등을 공개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28일간 계속된 급식과 조합원의 파업투쟁은 전체 조합원의 파업투쟁으로 확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10월 4일 병원의 공권력 개입요청으로 62명의 조합원들이 강제 연행당하고 위원장 등 3명의 노동조합 간부가 구속되고 난 이후에 종료 되었다. 하지만 “서울대병원 노동조합 대의원 전원이 공권력 투입 및 노조간부 구속에 반대하는 철야농성투쟁을 즉각적으로 전개하였다(동아일보 1990/10/07; 한겨레신문 1990/10/07).” 이러한 투쟁은 노동현장의 조직화 역량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노동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을 의료민주화 투쟁과 조직적으로 연계시키면서 노동현장의 투쟁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시켰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노동현장의 다양한 투쟁의제들을 병원 내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의료민주화 투쟁과 결합시켰다. 이것은 의료공공성 투쟁의 정당성을 조직적으로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 1990년 그 당시에는 입원수속비리, 영안실비리 그 다음에 약품처방전의 성분명화 등이 병원 내부의 공공성 이었다. 병원 측에서도 부담을 확 느끼게 되는 부분이었다(김유미 구술).”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볼 때, “노조 결성 직후부터 의료민주화 투쟁을 계속 해왔던 만큼, 1990년 급식과 조합원들의 투쟁을 계기로, 조합원 들도 의료공공성 투쟁이라고 하면 임·단협 못지않게 노조 일상 활동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요(최경숙 구술).”
셋째, 직종별로 존재했던 활동가와 대의원들은 노동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을 선도적으로 조직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1990년 11월 4일부터 1991년 1월 23일까지 전개되었던 ‘간호부 근무시간 개악저지 투쟁’이었다. “서울대병원은 급식과 조합원의 투쟁이 종료되고 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1990년 10월 29일, 근로시간 연장, 임금삭감의 결과를 가져올 근무 시간표를 노조와 상의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11월 4일부터 실시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서울대병원 노동조합 1991b, 59).” 이에 간호직종의 선도적인 활동가와 대의원들은 15차례에 걸친 투쟁회의, 다양한 현장분임토의를 거쳐 간호사들의 전면적인 투쟁을 조직하였다. 선도적인 활동가와 대의원들은 다양한 투쟁 전술, 예를 들면, “본래의 근무 시간표대로 출퇴근, 항의집회(250여 명), 동참서명, 전국간호사 근무시간 실태보고대회, 조직적 항의전화, 보고대 회, 병동 내 대자보, 유인물 부착과 게시판에 개인벽보 붙이기, 명찰달 기, 10분 침묵 피켓시위 등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물론 노동조합도 이러한 투쟁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대외적으로 간호협회와 간호근 무사협회, 환자보호자, ??한겨레신문?? <국민기자>란 게재, 서울지방노동 청, 국회노동위원회를 상대로 한 활동과 투쟁을 병행하였다(서울대병원 노동조합 1991a, 61).”
결국 간호사들과 노동조합은 병원의 탄압과 조합원 전체의 총파업 투쟁으로 확산시키지 못해 투쟁을 종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노동조합은 교대근무시간의 문제를 병원과 차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으며, 또한 투쟁의 과정에서 간호직종의 새로운 활동가들을 양성하였다. 당시를 구연업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근무시간 개악저지투쟁의 과정에서 간호직종 내에 많은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 현장조직이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은 그때 배출된 활동가들 덕분에 1990년대 내내 총파업 위주의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구연업 구술).”
그러나 조합원의 자발적인 투쟁은 적지 않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자발적인 투쟁이 직종별로 전개되고, 전체 조합원의 투쟁으로 확산 되지 못하면서, 직종 간 대체근로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투쟁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직종 간의 불신을 유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서울대병원노조 1991, 45).” 그리고 노동조합은 자발적인 투쟁에 사후적으로 결합하였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전략과 투쟁전술을 구사하는데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간부의 구속 및 징계 등으로 지도력의 공백상황을 갑작스럽게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맺음말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이 노조건설 초창기에 노동현장을 조직화한 사례(1987년~1992년)는 노동조합운동의 실질적인 조직력을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사례는 현장과 긴밀하게 결합된 활동가들이 각종의 소모임을 조직하여 운영하면서 노동 조합의 투쟁을 조직하거나 활동가들을 재생산하는 조직활동 체계가 유기 적으로 구축되어야 조직력과 투쟁력이 형성·유지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기업별 조직 내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전국적인 조직체계의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또한 그러한 조직체계의 기반은 지역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노동현 장의 조직화와 관련하여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사례가 지니고 있는 함의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조합의 활동가와 간부들이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조합원을 노동조합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할 때, 노동조합은 조직적 힘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1987년부터 1992 년까지 노동현장의 자발적인 투쟁과 다양한 현장투쟁의 의제들을 자신의 조직력으로 해결하면서 노동조합과 조합원 간의 조직적 통일성을 높였지 만, 1993년 병원노련이 합법화되고 난 이후에는 다른 병원의 노동조합들과 함께 공동투쟁 및 공동교섭을 추진하면서 서울대병원이라는 노동현장 만의 독자적인 이해를 추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국적 상급조직은 소속된 다양한 조직들의 다양한 이해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조직의 특정한 이해만을 반영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전국적 상급조직 혹은 산업별 노조를 결성하는 데 주체로 참여하였지만, 전국적 상급조직이나 산업별 노조가 결성되고 난 이후에는 서울대병원 노동현장의 특정한 이해만을 추구할 수 없어서 노동조합과 조합원 간의 조직적 통일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국적 상급조직이나 산업별 노조가 관료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면서 노동현장의 공동화 현상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 기도 하다. 노동조합의 조직발전이 형식적인 조직체계나 조합원의 양적 발전에만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 노동조합의 조직적 힘이 조합원의 공통된 이해에서 형성되고 강화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노동조합의 형식적 체계인 기업별·산업별 체계와 조직적 힘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동현장의 직종별 이해를 간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합원들은 산업적 차원에서 확보 해야만 할 이해뿐만 아니라 직종별 이해도 확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의 사례에서 확인했던 간호직종 노동자들의 전국적 조직화 운동은 노동조합이라는 체계와 함께 노동자들의 수평적이고 횡적인 전국조직이나 전국적인 활동가 조직들을 형성·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형식과 내용이 노동조합으로 협소화시키거나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셋째,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투쟁력은 노동현장에 기반하는 노동조 합운동의 전략과 긴밀하게 연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수의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다 할지라도, 노동현장의 조합원들과 노동조합의 활동가·간부들이 노동조합운동의 주체로 조합원이 각종 모임의 주체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노동조합도 그러한 투쟁을 조직 적인 투쟁 혹은 의제별 투쟁네트워크로 전화시켜 노동조합과 조합원 간의 유기적 관계를 강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현장의 활동가나 간부들을 양성하고, 노동현장의 활동과 관련된 각종 권한을 조합원들 에게 보장·확장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2014 봄 자유인문캠프 공개강연 ‘국가 폭력과 인권’
김영수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저녁 7시, 중앙대 제2의학관(106동) 207호
국가폭력, 의문사, 이내창, 민주화운동기념공원. 과거청산의 계열을 이루는 이들 단어는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극단적 사례로 꼽히는 의문사 피해자 가운데 1989년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이내창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이내창은 25년 만에 광주 망월동 묘지를 떠나 2014년 4월 5일,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안장된다. 우리는 이내창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의 귀환은 우리로 하여금 국가폭력과 인권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의문사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국가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가? 국가폭력과 과거청산,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인권을 지키는 문제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이내창의 귀환은 우리에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묻고 답하도록 요구한다.
<강의 소개> 삶터의 주인이 국가가 아니라 사람인 세상에서 사람들이 잘 사는 것, 이것이 인권의 시작이자 끝이다. 국가는 권력의 주인이 아니라 종복에 불과하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다. 사람들이 국가를 지배하고 관리하면서 사는 세상이 바로 사람들에게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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