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존경과 덕으로 추앙받는 왕후장상이다. 그는 이제 선과 덕의 일반화가 되었다. 글쓴이도 이 일반화를 비껴 갈수 없었다. 또 유재석? 지겹지 않은 지겨움이 정말 오래도 간다. 그가 지금 최고의 이목을 받고 있는것은 기정사실이다. 그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에 눈과 귀가 쏠려 있다. 그의 행언에 촛점이 맞춰져 있고 부지기수로 찬탄을 해대고 있다.
존경과 덕이 없는 공석(空席)에 보편적 표본으로의 자리메김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벗과 술이 있으니 즐겁지 아니한가? 더더욱 지혜롭고 덕이 있는 친구와 함께 하니 더 즐겁지 아니한가? 이전투구에 덕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옹졸한 세상에 그 배려의 따스함이 반갑지 아니한가? 천상천하 유재석의 덕의 공포(公布) 섬렵의 시대이다. 21세기 문화창달의 골든에이지는 버라이어티었고 그 아이콘은 유재석이었다. 그러나 그 가늠의 확신성은 달리될수 있다.
인간의 한계는 딱 그만치였다. 유재석의 한계도 딱 그만치였다. 그의 직업군은 그 적정량이 보장이 되었다. 형이상학적 신으로의 귀화는 인간을 거부하였다. 유재석도 인간이었기에 그 신이 될수 없었다. 인간의 본이란 그 숨길수 없는 욕망과 자제력의 끝없는 갈등이다. 의지란것은 보여질때 최선을 다하고 살핌이 모자랄때 그 정도는 침몰하는 것이다. 보여지는 가치는 인류생존의 필연적 가치지만 그 가치의 내재된 욕망은 결국은 이율배반인 것이다. 그 허구는 누구나 존재하는 인간의 평등이다. 유재석 또한 공통의 사항이다. 한번을 갖추고 백번을 버리나 백번을 갖추고 한번을 버리나 그 욕망은 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진정성의 착각에 빠질때가 많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매사 이치를 정교하게 정립시킬수가 없다. 그러기에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의 인의예지를 본성으로까지 귀결시킨다면 엄청난 모순투성일것이다. 그 또한 오십보 백보일테니까 말이이다.
한국사회에서 경계를 하는것은 이분법적 구분이다. 분열과 대립의 부정적 측면이 짙은 좌우에 대한 인식때문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이념의 방향성의 가치측도는 논결이 없다. 사상의 자유는 의지로 끊을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지의 표현은 무한한 자유로의 방임일수는 없다. 우리는 현실적 자각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지향하는 동조세력에 가입을 하게 된다. 한국사회의 이념의 근간이 되는 우파와 좌파적 지향이다.
그래서 유재석은 어떤 정치적 이념과 사상을 추구하고 어떤 정치적 세력을 지향하는 것일까? 에 대한 거창한 화두를 던져보게 된다. 이념적 산물은 그 배경의 특성에 의해 특정되어지기도 하고 경험에 의해 소산되어지기도 하고 지식에 의해 창출되어지기도 한다. 인간의 사고는 끝없는 만물의 창조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사건이나 현상만으로 일도양단을 한다는것은 우매롭기는 하다. 인간의 생각은 무한정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수 없이 일도양단의 판단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지성이라는 슬기보다 본능이라는 감정에 충실하게 된다. 이것은 동물의 선천적인 당연한 본의이기도 하다.
이상의 논거로 논지를 풀어보게 된다.
절제의 미덕이라는것이 있다. 유재석이 복잡다단한 대중매체에서 이미지화에 성공한것은 절제의 미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품성이 좋으면 행실이 좋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을 유재석에게 완벽하게 적용시키기는 무리하게 보여진다. 물론 개그맨이라는 직업의 특성상을 감안해서라도 그의 애초의 발자취는 이를 쉽게 용납하게 하지 않는것 같다. 왜 그러냐에 대한 분석은 너무 유치한것 같아 각자의 판단에 맡겨보고자 한다. 권리만큼 의무가 따르듯이 품격이 높으면 그에 걸맞는 처신과 행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함양됨으로써 순화된 인격이 형성된다. 유재석을 이렇게 비춰보고 싶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처세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처세술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누구에게나 쉽게 통용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증명과 반증 또한 어렵다. 그것은 선천적 기류일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유재석은 부드러운 이미지화를 독점시킨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간과할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한국사회의 좌우 대립 이념에 자신의 사상을 현출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보와 보수의 독보적인 인정을 만들게 한 중요한 처세술이다. 이에 그 정당성을 논거하기에 앞서 비근한 예로서 김제동과의 차이로 정립시킬수 있을것이다.
권력이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방패이기도 하지만 군림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정체이기도 하다. 굴복되어지는것은 굴종의 민감스러운 치욕으로 그 한계를 용납하지 않으며 그러기에 그 권력으로 보독을 한다. 이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이에 김제동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백주의 자유를 신뢰한 착각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절제의 결여를 김제동은 스스로 초래했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의지이든 무의식이든 그 어떤 진리적 가치를 떠나서 그는 영악하지 못했다.
좌우의 대립이념에 자신을 표출시키면 일방은 얻고 일방은 잃기 마련인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정당성을 아무리 주장하고 체계적이고 합리적 논거를 제시한들 그 효과는 미약하고 한정적일수 밖에 없다. 총론의 논거와 같이 인간은 감정적일수 밖에 없기때문에 자신의 사상적 지향점이 일치되지 않으면 저항과 반발을 하게 마련이다. 이에 지탄하기에 앞서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의 발로이다. 그러기에 절제의 미덕이 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재석의 직업군이 정치적 입지에 있게 되면 그의 보편적 선의 이미지는 침몰할수 밖에 없다. 정치는 어차피 양단을 하게 마련인것이다. 아무리 잘 살핀들 어차피 정책적으로 어느 한편으로 기울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작금의 천상천하 화평의 덕은 어쩔수 없이 틀어질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만인의 보편적 지지와 공감대를 형성시키는것이 대단히 어렵다. 이것이 어쩔수 없는 정치세계이다. 특히 성숙이 결여된 한국정치의 의식의 난맥이다.
유재석에게도 신념이 있다. 그에게도 지향점이 있다. 한국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계파적 양단에서 이념적 동조는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것이다. 그의 사상과 이념은 설시한 바와 같이 배경의 특성에 의해 경험에 의해 지식에 의해 그 획이 그어졌을것이다. 그의 근친 프로그램에서 친족상도에서 길라잡이가 사상적 가치척도로서 간과할수 없음이 유추되어지는 경험적 추론을 배제할수 없다. 필자의 느낌속에 그의 행보는 이미 정해졌다. 내재된 그의 이념이 발로될지 그것은 알수없는 일이다. 유재석이 보수냐 진보냐?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마음속에 그 해답을 근접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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