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07

좌익 공산주의는 동서분할 시대 어느 한 편에 섰던 내셔널리스트에겐 매우 곤혹스러운 정치이념이다. 좌익 공산주의는 중도파 및 우파와 구분되는 코민테른 내부의 좌파를 의미하지만 끝내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너른 품이었던 레닌에게조차 “유아적 무질서”라는 비판을 받고 쫓겨났던 비타협 근본주의자들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 진영의 무게에 깊이 눌렸던 우리의 머리를 일정하게 해방시키는 이론적 처방전이기도 하다. 그 역사는 대체로 판네쿡과 보르디가에서 유래한다. 이 노트는 ‘빛나는 전망’에서 펴내고 오세철이 편저한 <좌익 공산주의 - 초판(2008. 9. 1)> 가운데 ‘역사’ 일부분을 재구성한 것이다. 512p 책 전체 분량의 1/5정도만 소화했다. 직접 책을 보는 것만큼 풍부하고 정확한 건 없다. 중괄호{}는 노트 작성자의 숙제다.

a. 판네쿡은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지자였다. 판네쿡은 1905년 2월 혁명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혁명발전을 위한 새로운 평의회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의회는 공격적 혁명 과정의 전술적 도구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맹아적 틀이라고 보았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 이 주제는 판네쿡에 의한 이론적 초점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판네쿡의 관심은 세계혁명이라는 더 넓은 과정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 재조직화의 모델을 나타내는 정도에 주로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판네쿡은 서구의 조건이 러시아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러시아에서의 핵심요인이 짜르에 대한 부르주아의 반대와 농민의 불만이었지만, 독일과 기타 서유럽의 경우는 사민주의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고 의회와 노조의 기나긴 유산으로부터 해방되는 혁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기에 판네쿡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있어서도 새로운 지도자당이 아니고 정치적 삶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가는 도구로써 개념화한다. 판네쿡이 국가사회주의 유형을 향해 노예의 가장 최악의 형태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런 고찰의 결과였다. 그러나 공장평의회를 건설하는 전술로만 프롤레타리아의 공격성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판네쿡의 가설은 실천적 패배라는 고립을 낳았다.

b. 의회주의와 노조운동에 대한 반감 그리고 각 당의 자율성에 대한 네덜란드 사무국(1920년 1월부터 활동)의 강조는 코민테른 리더십과 주된 차이를 보여주었던 첫 공개적인 징후였다. 레닌에 의해 만들어진 볼셰비키의 전통적인 이론과 실천은, 혁명가들이 대중을 각성시키기 위해, 부르주아 정당을 공격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국가 자체를 허물기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서구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대담하게 거부했다. 코민테른 리더십의 반응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모스크바 방송은 4월 30일 사무국을 폐쇄하고 그 기능을 베를린 서기국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로 서구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공산주의 센터를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코민테른 암스테르담 사무국 자신이 중앙권위의 도구가 아니었던가? 이 조치는 네덜란드와 베를린으로 각각 분할 관리된 서유럽 코민테른을 단일화했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기에 서구 공산주의자 전체가 아니라 네덜란드 공산당(CPH)의 좌절이 아닐까?} 판네쿡과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서유럽의 특수한 혁명의 개념화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다면, 독일 좌파 활동가들은 실천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것을 역설하였다. 1918-20년 시기 동안 이런 다양한 시도들은 노동계급 동원화와 급진화라는 큰 과정의 단지 한 측면이었다. {이 또한 코민테른 리더십으로 본다면?}

c. 거의 전적으로 지역 공장 또는 작업장 조직에 기반 하였던 독일 산별노조운동은 상세한 이데올로기적 정의 없이 자발적으로 나타났다. 지역 조직화는 대개 기존 노조에 대한 불만과 반-관료주의 추구에 의해 정의된다. {사민주의 영향을 받은 기존 노조와 볼셰비키가 대립했음으로} 이후 분화과정에서 많은 부분은 생디칼리즘을 모델로 바라보았지만 일부는 혁명적 공장조직에 관심을 돌렸고, 그것을 전통적인 노동조합(trade unions)과 구별하여 “workers’ union”이라고 불렀다. 이론적 기초는 “단일조직” 개념이며 공산주의 운동과 협력할 의지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평의회 체계에 기초해 조직된 미래 국가상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생디칼주의적 공장조직과는 상이했다. 기업의 경계선을 따라 조직되어 지역과 전국 네트워크로 묶이고, 결국 하나의 대규모 노조로 합쳐지는 이 조직유형의 최고 목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기존노조에 대해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에게 반하여 배치된, 자본주의적 권력 시스템의 기구 - 대중에 반한 리더들의 도구”라는 입장을 가진 판네쿡에 의해 즉각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동시에 판네쿡은 새로운 조직이 오직 직접적인 혁명투쟁 시기에만 관료화 논리를 벗어날 수 있고 사실상 노조로 변질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도 경고했다.

d. 판네쿡은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는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전략적 요구에 기반한 실천적 필연성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운동의 근본적 임무는 행동을 통해 노동계급을 동원화함으로써 수동성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계급 양극화의 시기에 의회주의 전술에 복귀하는 것은 운동을 탈동원화하고 궁극적인 패배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 공산주의자 좌파(KAPD)의 강령 초안은 이러한 영감으로부터 작성됐다. 그들의 전략적 기초는 객관적인 혁명적 조건이 과잉 성숙되었으며 진정한 문제는 주관적인 발전이라는 것, 즉 독일 혁명의 주된 문제는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자기-의식 발전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평의회 원칙의 인정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헤게모니의 모든 제도들에 대항하여 투쟁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레닌주의자와는 다르게 전통적인 노조, 선거행위를 평의회 사고에 대한 사보타지라고 주장했다. KAPD의 형성과 함께 좌익 공산주의 대안의 기본적인 윤곽이 확고히 마련되면서 점차 코민테른과의 대립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사실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가 출간되기 전까지 좌익 공산주의는 코민테른에 배척당하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서구에서 레닌주의 성격 및 그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판네쿡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은 세계혁명, 비타협적 계급투쟁, 전투적 반-의회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e. 판네쿡은 디츠겐적인 출발점에 서서 혁명을 어떠한 논리적 일관성도 거부하는 상호작용들의 복합적 과정으로 인식했다. 그는 혁명의 발전과정에서 결정적이고 선차적인 것은 혁명적인 자기-활동으로부터 나오는 정화 행동이라고 보았다. 판네쿡은 혁명적 실천의 동구적 형태와 서구적 형태를 구분했다. 동구에서의 전술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집합적 지향의 농촌사회와 문화적 지배이며 서구 노동자들과 달리 러시아, 아시아 대중들은 부르주아 문화, 전통의 무력화 효과를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 사회의 내적 성격은 완전히 상이하며, 마을 공동체주의의 오랜 전통 때문에 농민들은 원시적이고, 열린 태도로 공산주의와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서구에서는 오랜 부르주아 문명화가 대중들의 사고와 감성에 철저히 침투했다는 것이다. 독일 혁명에서 그것은 특히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본 판네쿡은 서유럽에서 주된 전술적 문제는 혁명적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미성숙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공리처럼 여겼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에 대한 강조는 그로 하여금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 러시아 볼셰비즘의 엘리트주의적 전위 양자 모두를 거부하게 했다. 그 같은 접근은 대중 자신이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사회주의 핵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에 따르면 코민테른이 옹호하는 전위주의적 정당 모델은 어떤 점에서 혁명적 발전의 주요한 장애가 되는 것이다.

f. 서유럽의 전술적 선택을 개관하면서, 판테쿡은 좌익 공산주의와 생디칼리즘 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 주력했는데, 양자의 주된 분기점은 사회의 구조, 상부구조에 대한 태도에 있다는 것이었다. 좌익 공산주의와 달리 생디칼리스트는 사회의 지적ㆍ문화적 영역을 부르주아에게 남겨주는 것에 만족하고, 생디칼주의적 정부는 자본주의 질서의 물질적ㆍ정신적 요인들을 분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후 자본가 재그룹화의 가능성을 남긴다고 보았다. 판네쿡이 이 같은 주장을 발전시키고 있을 때, 레닌은 코민테른 2차 대회를 준비하면서 좌익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자신의 전략적 분석을 발전시켰다. 레닌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향한 단축 시기가 필요하다고 가정했다. 서구 혁명이 늦어지는 장기적 싸움이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공산주의자는 가장 반동적인 제도라 할지라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들어가서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와 의회 속으로”는 좌익주의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한 레닌의 처방이었다.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리더의 영향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레닌은 대중 조직에 침투하는 예외적인 수단들을 요구한다. 레닌은 논쟁 전반에 걸쳐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 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하고, 특히 절대적 집중화와 강력한 규율이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는 근본적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g. 레닌 저작 중 아마도 가장 강력한 것으로 묘사되는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에서 레닌은 신랄한 언어를 동원하여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의 전술적 책략의 부재를 비난했다. 특히 판네쿡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서는 “특별히 견실한, 그리고 특별히 우둔한” 것으로 지적했다. 레닌은 당 조직화의 전위모델을 좌파가 부정하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이해 앞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완전히 무장해제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독일 입장은 불법이 불필요했던 국가에서 태어난 “불행”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말한 뒤, 그들은 “대중들의 정당이 아닌 써클 즉, 지식인주의의 가장 나쁜 측면을 닮은 지식인, 소수 노동자들의 그룹”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으로 결론 내렸다. 판네쿡은 레닌의 주장에 짧게 대응했다. 그는 레닌 정식은 독창성과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것이 레닌이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과제는 레닌의 주장에 대해 또 다른 주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레닌 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전통적인 의회주의, 노조운동 전술에 대한 레닌의 방어는 민족국가로서 소련(Soviet Union)의 역할, 그리고 제3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사명간의 모순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그 모순을 분석하면서 경제 재개발에 대한 소련의 급박한 필요성을 지적했다.

h. 판네쿡은 소련의 정치적 요구가 서구에서 공산주의자 전술을 결정하는 데 핵심 요소로 되고, 코민테른은 서유럽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소련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소련이 잠재적으로 혁명에 대한 반동적 방해물이 되고, 반혁명의 승리를 가져올 힘들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했다. 판네툭은 러시아 혁명의 정체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한 첫 번째 공산주의 이론가로 등장했다. 레닌에 답변하는 주된 과업은 호르터에게 남겨졌다. “당신의 전술은 러시아에서 뛰어난 전술이었고 그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서유럽엔 무엇을 입증했는가?” 호르터의 분석은 판네쿡과 비슷했지만 상이한 몇 가지 점도 존재했다. 판네쿡은 서유럽 혁명의 늦은 진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 때문이라고 본 반면, 호르터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 장애물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리적 힘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관점에 따라 호르터는 확고한 맑스주의 원칙, 당 집권화, 철의 규율을 강조했다. {레닌ㆍ코민테른 주장과 다른 것이라고?} 1920년 좌익 공산주의는 분기된 다양한 입장들을 포괄하는 분파적 그룹ㆍ당ㆍ저널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그들을 연계시켰던 것은 러시아 모델의 서유럽 적용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반-관료주의 추구, 비타협적 혁명적 행동주의에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보르디가가 주도하는 반-의회주의 공산주의자가 상당한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i. 보르디가의 반-의회주의도 판네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좌익 공산주의의 조직화 이론은 거부했다. 그는 강고하고 규율이 선 레닌주의-형태의 정당을 강조하였고 평의회 및 공장조직을 생디칼리스트적 이탈로 비난했다. 서유럽 혁명개념에 대해 아이러니한 경멸을 가지고 반응했던 트로츠키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동질적 별개였다. 신경제정책으로 표현된 1921년의 변화된 환경은 판네쿡으로 하여금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판네쿡은 처음 러시아 공산주의가 구체적인 경제체제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spiritual reality)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련은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적은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서구에서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7월이 되면서 판네쿡은 두 달 전에 진단한 바가 현실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관료주의적 엘리트 지배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생산체제에 대한 자본가 지배에서 당 독재로 그 정부가 변화하였을 뿐 자본가는 노동자 통제에 의해 단지 제약되고 있을 뿐인 상태라는 것이다.

j. 판네쿡의 이 같은 변화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에 침투한 서구자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전 과정은 서구와의 화해를 향한 소비에트 내외 정책의 변모와 그 정책의 코민테른 전술로의 확장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리더십의 관점에서 볼 때, 서구에서의 혁명적 공세는 소비에트 경제의 재구축을 위협할 수 있는 파괴,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코민테른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과거 운동의 통제를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서구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의 주요 임무가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대신 자본주의 경제를 재형성하는 것을 도와 소련을 방어하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판네쿡은 러시아 공산주의자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공산주의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판네쿡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최근 배운 것을 잊어버려야 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k. {러시아 지배냐 서유럽 지배냐?} 좌익 공산주의가 직면한 이론적 문제들 중 혁명조직의 문제는 가장 첨예하고 가장 크게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판네쿡은 기존 입장을 수정하여 단일조직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치권력은 느슨하게 조직된 당에 결집된 계급의식적인 공산주의자와 조율하며 움직이는, 그리고 명확한 목표를 지향하고, 강력한 정신적 투쟁을 이끄는 노동자 평의회에 의해 장악되어야 한다고 확언한다. 좌익 공산주의가 급격하게 해체되는 1922년, 그들 그룹 중 가장 두드러졌던 KAPD-Berlin은 많은 이론적 리더십을 빼앗기고 무모하고 교조적인 봉기 호소만을 하게 된다. 이 같은 분절화와 주변화 과정은 1923년 가장 잘 볼 수 있는 데 여러 분파에서 연속적인 변절과 제명이 발행한다.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레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영구적인 혁명적 반-관료주의 대안으로 바꾸어내는 데 실패했다. 평의회 운동이 쇠퇴하면서 그들의 이론은 긴박성을 잃고 추상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 실패의 여러 가지에는 이론적 분석의 부적절성과 평의회가 특정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데 원인이 크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좌익 공산주의는 최소한 반-의회주의 사회주의가 취할 수 있는 가능한 형태를 보여주었고 그 실현과정에서의 주요 장애를 확인하는 데 기여했다.

l. 1889년 나폴리에서 태어난 보르디가는 비타협적 맑스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네 가지 축을 고수한다. (1) 반의회주의 : 보르디가는 혁명적 목적에 선거행위를 복속시크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1918년까지 기권주의자는 아니었다. 1913년 그는 무정부주의에 반대하는 글을 쓴다. (2) 혁명적 생디칼리즘 반대 : 보르디가는 당 활동에 조합 활동이 복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조에 당을 복속시키는 혁명적 생디칼리즘에 반대했다. 당이 특히 공장평의회나 일반적으로 경제행위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그람시의 반대편에 선 이유다. (3) 개량주의 반대 : 보르디가는 계급투쟁에 대해 기다려보자는 태도를 지닌 숙련주의와 우파의 축출을 주창했다. 혁명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당의 순결화는 필연적 모토였다. (4) 전쟁과 군사주의 반대 : “동원명령이 떨어지면 무제한의 총파업을 선언하고, 전쟁선포에 대해서는 무장봉기로 대응하여야 한다”고 보르디가는 말한다. 보르디가의 이런 네 가지 축은 레닌으로 하여금 가장 원칙적인 동지로 보게 만들었다. 보르디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 독재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소비에트는 본질적으로 혁명기관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르디가가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전술 채택에 반대하여 얻은 교훈 가운데는 이런 내용도 있다. “반파시즘은 자유주의 또는 좌파당과의 동맹이 통일된 부르주아 반동의 타격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장하기 때문에 파시즘의 최악의 산물이다.” 통일전선 문제는 보르디가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을 가져온다.

m. 코민테른은 이탈리아에 대중정당이 들어서길 원했고 보르디가를 길들이려 했다. 보르디가는 코민테른 부의장을 제안한 지노비예프의 청을 거절한다. 1925년은 본격적으로 보르디가 경향과 코민테른의 러시아 지도부의 전쟁이 일어난 중요한 해다. 또한 그 해는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와 러시아공산당 및 코민테른이 대립한 시기였다. 3-4월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는 트로츠키에 우호적인 보르디가의 글을 출판 금지시켰다. 6월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볼셰비키화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공격을 한다. 가공적 기초위에 대중 정당을 건설하는 것을 비난하고 공산주의당의 집중화를 부정하는 공장세포 체계를 비난한다. 공장세포 체계는 내적인 삶을 불구화시키고 노동자들을 공장이라는 좁은 경계 속에 가둔다고 비판한다. 첫째, 세포에 의한 지역부분의 대체는 단일한 지도력을 가진 능동적 집합체로서의 혁명당의 유기적 삶을 말살시킨다. 이는 중앙집권화의 부정이며 연방주의의 관료주의적 승리이다. 둘째, 볼셰비키화는 특수주의와 개인주의의 편을 든다. 당은 전문영역에 부속된 개별 노동자의 합이 되었다. 이 결과 당의 통일을 깨뜨리는 조합주의와 노동자주의가 되었다. 셋째, 당에서의 지식분자의 역할을 제한하는 대신, 세포체계는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노동자가 특정한 경제문제에만 토론하게 만들고 인텔리가 권위를 독점한다. 넷째, 노동계급 출신의 지도자는 당의 프롤레타리아성격을 보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기회주의의 인텔리보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영향력에 의해 흡수되기 쉽기 때문이다.

n. 보르디가 경향은 그람시 지도력아래 제거되었다. 유명한 “리옹테제”는 망명중인 공산주의좌파의 지향점이 된다. 이 테제는 첫째, “노동자연방공화국”을 맑스주의의 포기로 비판하며 그람시 정치를 비난한다. 둘째, 보르디가의 당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한다. 계급투쟁이 최종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당은 다음의 세 가지 수준에서 행동해야 한다. (1) 이론 : 맑스주의는 복잡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2) 조직 : 당은 소규모 인자의 소수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객관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혁명은 조직의 문제가 아니다.” 당은 “역사적 발전의 요소이며 산물이다.” 따라서 테제는 자원론과 숙명론을 거부한다. (3) 개입 : 당은 다른 당과 독립적으로 계급투쟁에 참여한다. 셋째, 보르디가 경향의 입장은 권위에 복종하는 자발성을 대체하는 어떤 규율도 거부한다. 볼셰비키화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당들이 복종하는 퇴행의 위험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 위험 때문에 분파를 구성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러한 퇴행으로 토출되는 역사적 전망은 무엇인가? 하나는 자본주의의 안정화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의 위험이다. 보르디가는 1926년 확대집행위원회에 마지막으로 참여하였는데 트로츠키와 장시간 토론할 기회였고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투쟁에 이탈리아 좌파의 연대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는 “분파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다”라고 회상하며 분파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코민테른 내에서 마지막 투쟁이었다.

o. 보르디가는 1926년 말 파시스트에 의해 체포되어 3년 추방되었다. 이탈리아 감옥과 해외에 있는 이탈리아 좌파는 투쟁을 계속했으나 보르디가는 점점 정치적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건축엔지니어로 몰두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침묵과 파시스트 경찰에 의한 끊임없는 감시에 놀랐다. 1930년대에 트로츠키가 “보르디가는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고 그와 가까운 사람에게 물었을 때, 그는 “보르디가는 모든 것이 다 맛이 갔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상황이 일어날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고 답했다. 그와 함께 하려는 이탈리아 좌파 성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수한 비공식적 접촉에 제한하면서 모든 접촉을 거절했다. 혁명이 전쟁 후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 보르디가는 1944년에야 다시 표면에 등장한다. 1920년대 동안 이탈리아 좌파는 인터내셔널에서 다른 좌파와 무관하게 남아있지는 않았다. KAPD와 호르터나 판네쿡 같은 이론가에 의해 방어된 테제에 익숙해져있었다. 또한 레닌에 의해 ‘유아적 무질서’로 정의된 ‘극단주의’에 대한 코민테른의 공격에 직면하여 두 흐름 사이에는 일정한 수렴이 있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기권주의 문제, 사민주의와의 통일전선의 거부는 그들 견해의 명확한 정체성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비교적 상대적인 것이었고 그 기간도 짧았다. 코민테른 2차 대회 이후 보르디가는 세계혁명당 건설에 헌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참여에 대한 레닌과 부하린의 테제를 원칙이 아니라 전술문제로 수용했다.

p. 과거의 경험을 재검토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성경과 같이 레닌의 텍스트에 집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에 따라 비판의 도가니로 코민테른 대회들과 다른 당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탈리아 분파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옛 혁명운동의 연속성의 표현이었고 혁명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세력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는 모순이 있었다. 한편으로 러시아 국가는 국제적 투기장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반면 내부적 수준에서는 생산의 사회화에 대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36년의 혁명가들은 어떤 희망도 갖지 못했다. 민주주의, 파시즘, 스탈린주의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동일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탈리아 좌파에게는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동시에 이론적 성찰을 하는 값진 시기이기도 했다. 파시즘과 민주주의 사이의 본질적 차이가 있는가? 파시즘은 모든 나라에서 발전하는가? 인민전선류의 좌파정부의 출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파업의 본질은 혁명적인가? 이러한 질문이 그들에게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대답을 이론적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실천 속에서 해야 했다. 파시즘은 고뇌하는 자본주의의 전형적 산물이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실질적 지배로서의 의회주의의 소멸을 초래했고 전쟁과 혁명은 지배계급을 와해로 이끌었다. 파시스트당이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권력을 잡았다는 것은 한편의 파시즘 다른 편의 민주주의가 적대하지 않는다는 증명이었다. {의회주의 소멸을 초래한 파시즘과 의회주의자들의 민주주의가 적대하지 않았다?} 사실 파시즘은 민주주의의 아들이었고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 좌파의 아들이었다.

q.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양극화는 다음 세계전쟁을 위한 이념적 동원에 유용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선택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선택으로 대체되었다. 인민전선은 부르주아지의 약점의 표현이기는커녕 반대로 그 힘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분파(Bilan: ‘대차대조표’란 뜻)에게는 인민전선보다 반혁명이 승리한 결정적 원인은 러시아라고 보았다. 이념적 수준에서, 러시아의 역할은 자본주의에 의한 억압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사상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러시아 국가는 이중적 본질, 즉 러시아 틀 속에서 그 기원은 프롤레타리아적 이지만 전쟁을 위한 동맹국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였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좌파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달리 소련의 어떠한 방어도 거부했다. “모든 조국에 투쟁하라. 파시스트, 민주주의자 그리고 소비에트와 투쟁하라”(Vercesi). 민주와 파시즘이라는 전선은 더 이상 두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블록이 지원하는 부르주아 두 분파 사이의 문제로 보았다. 그 어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도 정치는 경제전에서 온다. 한편, 이탈리아 좌파의 개념에 따르면 당만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생명과 의식을 줄 수 있었다. {생명과 의식을 주다니? 당이 프롤레타리아트 창조주인가? 과도한 규정일 뿐 아니라 뒤집혀 있지 않은가?} 당으로 이어지는 분파는 혁명과정에서 탈선 할 수 있는 사회학적 프롤레타리아트와 권력 장악을 향한 혁명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구별했다. 혁명적 상황 없이는 혁명정당이 없고, 혁명당 없이 혁명 상황도 없다고 보았다.

r. (1) 이 시간의 임무는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 다음 전쟁에서 혁명을 준비하기 위하여 좌익공산주의의 모든 정치그룹은 진행되는 흐름에 대항하여 국제주의의 원칙을 부여잡아야 한다. (2) 고립의 미덕 : 보르디가의 이 말을 만족해서가 아니라 비참한 심정으로 그들은 지켰다. 그러나 끔찍한 고립은 모든 혁명가의 삶과 생존의 전제조건이었다. 이들은 미래의 세계공산당이 좌익분파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코민테른과의 연속상태에서 이탈리아 좌파는 시작부터 맑스주의 이론가에게 제기된 문제, 즉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딜레마를 피하지 않았다. 1928-33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는 러시아와 코민테른의 당 내부에서 반혁명의 승리를 가져와 결국 세계전쟁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이라고 그들은 보았다. 힘의 균형이 프롤레타리아트 쪽으로 기울지 않으면 전쟁의 가능성은 항상 열려져 있었다. 룩셈부르크 이론을 발전시킨 벨지움 분파의 미첼에 의하면 자본주의 쇠퇴, 사멸의 특징은 (1) 일반적이고 항상적인 산업의 과잉생산 (2) 계급대립을 가속화시키는 영구적 대량실업 (3) 점진적 농업의 과잉생산 (4) 노동력 착취와 이윤율의 지속적 하락으로부터 오는 자본주의 축적과정의 지연이었다. 이탈리아 좌파의 전통적 입장은 미첼에 의해 방어되었다. 그들이 전념했던 전시경제라는 문제에서 미첼은 전시경제를 실질임금의 개선도, 잉여가치의 전유에 의해 결정되는 경제적 억압도 아니라도 보았다.

s. 분파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모든 공격은 혁명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을 낳았다.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새로운 1917년 10월을 두려워서 세계갈등을 피하고 있다고 믿었다. 역사적 경로에 대한 결정적 입장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분파는 더욱 약화되었다. 혁명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론은 더 이상 현실에 조응하지 못했다. 분파내의 토론은 일관되고 동질적 입장을 도출하지 못했다. 30년대 모든 혁명가들은 러시아 혁명의 본질, 그 교훈과 패배의 원인에 대해 이론적으로 성찰하는 책임이 있었다. 자본주의 영구위기가 필수적인 것이 되는 사회주의 미래의 승리는 볼셰비키와 코민테른의 정치적 오류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통하여 가능할 뿐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맑스주의는 조사의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했다. 어떤 주제도 금기사항이 아니었다. 노동계급의 조직인 계급, 당, 노조, 평의회, 계급투쟁의 형식, 권력 장악 이후의 이행기 그리고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본질이 주요 주제였다. 1917년 멘셰비키는 러시아 혁명이 객관적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무르익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심각한 공황 속에서 많은 혁명가들은 자본주의가 너무 강력해서 극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계혁명의 객관적 존재는 아직도 존재하는가? 이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전 자본주의 체제가 쇠퇴에 접어들었다는 표시였다. 이러한 쇠퇴는 자동적으로 혁명을 낳지 않고 혁명의 기반을 놓는다.

t. 이들은 세계경제가 민족구성으로 되었음을 부인하지 않고, 발전정도가 다르더라도 모든 나라는 계급 사이의 세계적 적대가 제기하는 사회주의로의 혁명이 무르익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객관적 조건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모태는 구체적 국가의 조건의 맥락에서 제기될 수 없고 국제적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혁명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성숙의 기준은 주체적인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의식과 연관되어야 한다. {주관주의라는 부르주아 관념론과 동일하지 않은가?} 결국 주체적 조건인 당이 중요했다. 당을 만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력은 계급의식을 성숙하게 만드는 상황을 반영한다. 혁명적이지 않은 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의식을 구체화하는 것은 분파였다. 전 역사적 과정은 당으로의 분파의 전환을 포함한다. 이탈리아 좌파는 제2인터의 대중정당 상을 거부했다. 코민테른을 비판하면서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혁명노선을 배제시키는 민주집중제의 개념을 거부했다. 선거 메커니즘이 아닌 당 강령으로부터 도출되는 유기적 집중제를 주장했다. 이탈리아 좌파는 러시아 수수께끼를 극히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문제는 어떻게 동시에 노동자국가이면서 세계자본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여기에 모순이 있었다. 맑스주의의 고전적 가르침에 따라 러시아 관료주의를 새로운 계급으로 보는 것은 반대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입장에 문제를 느끼고 집합적 생산수단의 사적 전유로의 진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u. 러시아 수수께끼는 이행기 국가라는 개념 속에서 풀렸다. 어떠한 경우라도 국가는 위험하며 혁명적 핵심을 담아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행기는 국가에 영향을 미치려는 자본주의 법칙의 지배가 남아있다. 국가를 통해 행사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영원한 경제적 모순이 존재한다. 아무리 프롤레타리아 국가라 하더라도 국가를 통한 자본주의적 특권의 재생이 있다. 정치적으로 러시아 사례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기관(당, 노동자평의회, 노동조합)이 국가에 의해 흡수되는 위험을 보였다. 이런 도출은 당보다 더 중요한 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좌파는 실천에서 당 독재의 원칙을 점점 포기해나갔다. 오직 두 당만이 있고 한 당은 권력을 잡고 다른 당은 감옥에 있는 레닌의 공식에 반대하여 비프롤레타리아 당이나 소부르주아 당에 대해 경찰이나 전제적 방식으로 정치투쟁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위험도 지적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기본임무를 사회주의 건설로 생각한 스탈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틀을 부정했다. 물론 사회주의는 생산력의 전례 없는 발전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노동시간의 증가가 필요하다. 이를 그들은 거부했다. 자본주의 경제보다 전 기간 동안 축적의 리듬을 느리게 하면 나아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공산주의는 부족으로부터 풍요로 가는 긴 과정의 산물일 것이다.

[참고]

* <사유재산과 집합재산> Internationalisme no.10, 1946년 : “국가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완전한 발전의 시기에 상응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쇠퇴ㆍ소멸의 시기에 상응하는 형식이다.” “국가자본주의는 하나의 부르주아 분파의 특정 이념적 학파중의 특정한 형태가 아니다. 우리는 민주적 미국과 히틀러의 독일에, ‘노동’의 영국과 ‘소비에트’ 러시아에 내재해있음을 보았다.” “러시아의 경험은 자본주의를 만든 것이 자본가가 아니라 그 반대 즉 자본가를 생기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고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생산의 자본주의적 원칙은 잉여가치의 수혜자로서의 자본가가 법적으로, 심지어 실질적으로 사라진 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 이 경우 잉여가치는 사적 자본주의에서와 같이 잉여가치의 상당량을 추출하기 위하여 생산과정에 재투자된다. 오래전 잉여가치의 존재는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계급을 형성하도록 했다. 기능은 기관을 창조한다. 그들이 생산에 참여하는 기생충이건, 관료이건, 기술자이건 간에, 잉여가치가 높은 월급이나 다양한 특권의 형태로 직접적으로, 또는 국가개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재분배되던 간에, 이는 우리가 새로운 자본가 계급의 출현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 <이탈리아 좌파가 준 교훈> Bilan, 1933년 : “분파의 역할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건을 통해 간부를 교육하고 이러한 사건의 의미와 철저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분파의 작업 없이 러시아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파 없이 레닌 자신도 책벌레로 남아 혁명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분파는 계급조직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는 유일한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