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민당(1994.7.8~1995.5.31)
가. 합당 배경과 과정
1994년 야권은 국회의원보궐선거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수권능력을 갖춘 강력한 야당의 결성을 위해 범야권의 총결집이 필요하다’는 인식 속에 범야권대 통합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1993년 7월 이기택 민주당 대표∙김동길 통일국민당 대표∙이종찬 새한국당 대표 등 야3당 대표가 회동을 시작한 이후 1994년 1월 초까 지 모두 네 차례의 회동을 갖고 야권통합을 논의해 왔다.
이 과정에서 야3당은 야권통합이라는 원론적인 원칙에는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범야권통합 협상은 각 정당의 상황과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하여 쉽게 진척되지 못하였다. 특히 야당대표 회동에 참석하지 않고 있던 신정치개혁당의 경우에는 반민자당∙비민주당 성향의 제3세력의 결집을 주장하고 있어 범야권통합의 성사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편 1994년 2월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범야권 대통합과는 달리 통일국민당, 신정 치개혁당, 무소속의원 등이 제3교섭단체 구성을 추진하는 흐름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언론에서는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대표와 통일국민당 한영수 의원이 중심이 되어 ‘임시국회 전 원내교섭단체 결성, 임시국회 후 정당 출범’을 위해 통일국민당, 새한당, 신정치개혁당 및 무소속의원들의 서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연이어 보도하였다.
야권통합이 민주당 중심의 범야권 대통합, 군소정당과 무소속 중심의 제3교섭단체 결성 등 2가지 양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3월 15일 민주당 이기택 대표는 취임1주년 기자회견을 열고 강력한 야당건설을 위해 통일국민당, 새한국당, 신정치개혁당 등 제도권뿐만 아니라 재야 및 시민단체까지 망라하는 명실상부한 범야권통합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군소야당들의 반응은 그다지 적극 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통일국민당 김동길 대표는 1994년 3월 13일 무소속 양순직∙ 임춘원∙김진영 의원 등과 만나 원내교섭단체 구성 및 제3당 창당문제를 논의하는 한편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대표와도 수차례 접촉하며 제3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어 4월 3일에는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대표가 “국민당과는 이미 원내교섭단체를 갖춘 제3당의 복원이 시급한 과제라는 데 의견을 모았으며, 조만간 당내에 제3당 강화를 위한 기획단을 발족시켜 구체적 작업에 들어 갈 것”임을 밝혔다. 새한국당 이종찬 대표만이 민주당 중심의 야권강화론을 표방할 뿐이었다.
이처럼 야권통합 양상이 민주당을 중심으로 단선적 움직임을 보이다 제3원내교섭 단체 결성이 추진되면서 복선구조로 변화되는 가운데 4월 16일 이기택∙김동길∙이종찬 등 야3당 대표는 회동을 통해 범야권통합 추진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한편 구체적인 통합작업에 들어가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거대여당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야당의 구축과 1995년 지방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한 야권통합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각 정당의 통합계획은 동상이몽이었다. 뿐만 아니라 각 정당은 내부적으로도 통일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통일국민당의 당내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외부적으로는 김동길 대표를 중심으로 야권대통합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위한 노력이 지배적 양상이었다. 4월 15일 실시된 통일국민당 전국 지구당위원장 연수에서도 교섭단체 구성이 당 재건의 돌파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김동길 대표가 야3당 대표회담에서 야권통합추진에 합의한 것에 대해서도 당내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처럼 범야권대통합의 실현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어 가던 5월 11일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신 양김시대 청산’과 민주당을 제외한 통일국민당∙새한당∙신정치개혁당의 제3세력화를 주장하며 반민자∙비민주 제3세력의 결집을 직접적으로 제안하였다. 이후 통일국민당 김동길 대표와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대표는 1994년 5월 26일 회동에서 양당 합당에 전격적으로 합의하였고, 이를 계기로 야권통합의 기본틀은 급변하였다. 그동안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 혁당은 수차례의 접촉을 통해 여러 측면의 통합논의를 진행해 왔으나 지분문제로 인하여 실질적인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대표회동에서 김동길 대표가 박찬종 대표의 공동대표를 보장하고, 박찬종 대표는 지분배분 문제를 김동길 대표에게 일임하면서 합당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의 합당 선언에도 불구하고 야권의 대통합 원칙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합당 선언 이틀 후인 5월 28일 민주당, 통일국민당, 새한국당 등 야3당 대표는 다시 회동을 갖고 야권대통합을 계속 추진해 간다는 원칙을 재확인하였다. 이 자리에서 통일국민당 김동길 대표는 동시 통합에 앞서 신정치 개혁당과의 통합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의 합당이 종결이 아니라 야권통합의 과정임을 시사하였다.
▲통일국민당∙신정치개혁당 양당통합선언 기자회견(1994년 5월 30일)
이후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은 당무회의를 통해 통합방침을 확정짓고, 1994년 5월 30일 국회에서 통일국민당 김동길 대표와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대표의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양당간의 당 대 당 합당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들은 통합선언문에서 “개방과 무한경쟁이라는 세계조류와 통일시대를 맞아 실종된 정치의 복원과 발전을 위해 통합한다. (……) 야권이 낡은 사고와 타성으로 시대적 소임을 다하지 못한 그 동안의 잘못된 정치노정을 겸허히 반성하고 진취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힘을 모아 정치의 주역이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나. 정당등록(신설합당)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의 합당선언으로 야권통합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자 신설합당 되는 통합정당이 어떠한 모습으로 재탄생할까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초점은 원내교섭단체 구성여부였다. 합당선언 상황에서 양당의 국회의원 수는 통일국민당이 12명, 신정치개혁당이 1명으로 13명에 불과하였고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7명의 의원을 더 필요로 했다. 이에 적극적으로 의원영입에 나선 결과 1994년 6월 7일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의 합당을 전제로 양순직, 임춘원, 박규식, 김진영의 원 등 무소속 국회의원 4명이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소속의원은 총 17명으로 늘어 났다.
합당선언 이후 양당은 본격적으로 합당절차를 진행하였다. 신정치개혁당은 6월 9 일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합당을 의결하는 한편 합당의 권한을 위임받는 수임기구 및 기타 위임사항에 대해 대표최고위원인 박찬종 대표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하였다. 통일국민당 또한 6월 29일 정기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신정치개혁당과의 합당을 의결하는 한편 당명을 신민당으로 변경하고 당무회의를 합당 수임기구로 지정하는 등 합당 관련 사항을 의결하였다. 이후 양당은 총 12명의 합당 실무협상기구를 구성하고 합당을 위한 세부 내용을 협의해 나갔다. 실무협상기구를 통해 양당은 7월 4일 당헌∙지도체제 등에 관해 합의하였고, 7월 6일 합당수임기관 합동회의를 개최하여 합당을 의결하였다.13) 합당수임기구 합동회의는 양당이 새로운 당명인 신민당으로 신설합당할것을 의결하는 한편 9월 중 개최하는 통합전당대회까지 통일국민당 김동길 대표최고 위원과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대표최고위원을 공동대표로 선출하였다. 또한 최고위원은 통일국민당 최고위원 9명 전원을 유임하는 한편, 추가 선임은 공동대표에게 위임하였다.
합당 수임기구 합동회의를 통해 합당이 의결된 이후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은 김동길과 박찬종을 공동대표로, 임춘원을 사무총장 및 회계책임자로 하여 1994년 7월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설합당 등록을 신청한 후 7월 8일 등록절차를 완료하고 공식 출범하였다. 등록신청된 신민당의 당원수는 법정당원 10만 535명과 일반당원 386만 4,081명을 합하여 총 387만 4,616명이었다. 이 중 신정치개혁당의 당원수는 1만 8,761명인데 비해 통일국민당의 당원수가 385만 5,855명으로 통일국민당 당원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한편 지구당의 경우에는 양당이 완전한 조정을 이루어내지 못해 정당법의 정당등록 규정에 의해 120일 이내에 보완하여 등록하도록 조치되었다.
13) 통일국민당이 정기전당대회에서 당명을 신민당으로 변경한 것은 통합선언 이후 신당 명칭에 대한 양당의 공동공모 결과 신민당이 다수를 점하여 양당의‘당명심사실무회의’에서 신민당으로 결정하였고, 보궐선거를 앞두고 양당의 법적 통합이 지연될 경우에 대비하여 신정치 개혁당 측의 양해 아래 통일국민당의 당명을 신민당으로 변경하기로 합의하였다.
【 강령 및 기본정책 】
<전 문>
우리 신민당은 안으로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고 밖으로 인류의 평화공존과 번영을 이끌어갈 합리적 역량을 갖춘, 민족통 일국가를 지향하는 국민정당이다. 우리 당은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족적 시민민주주의와 합리적인 시장경제, 정의로운 시민복자사회의 이념을 바탕으로 지역성, 계층성, 세대성의 근원인 분단의 질곡을 극복하여, 모든 한민족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을 향유하는 국민시대를 선도할 것임을 다짐하면서 우리의 강령과 기본정책을 밝힌다.
1. 민족적 시민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국민적 정치세력의 결합체
2. 깨끗한 정치, 생산정치, 책임정치, 국민정치로 국정개혁
3. 신뢰구축과 민족동질성 회복으로 통일을 주도
4. 합리적 시장경제의 발전, 국가경쟁력 강화, 국민복지 향상, 경제정의 실현
5.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법질서 준수, 지역∙계층 간 갈등해소, 복지시민사회 건설
6. 자율성과 책임의식 고양, 시민공동체의식 배양과 교육의 국제경쟁력 제고
7. 성숙한 시민문화, 창조적인 민족문화 창달
8. 과학기술발전을 통한 국가경제발전과 국민복지 향상 기여, 21세기 과학 선진국 실현
9. 평등한 사회구조의 정착으로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 환경 조성
10. 자연을 보호하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
다. 전당대회를 둘러싼 당권경쟁과 당내갈등
신민당은 출범 직후 1994년 8월 2일 실시된 3개 선거구의 보궐선거 중 대구 수성구갑 선거구에 옥중에 있던 박철언의 부인 현경자를 공천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두 선거구에서는 10% 이하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저조한 결과를 보여 합당의 파급효 과가 현실로 증폭되어 나타나지 않았다. 보궐선거 이후 오히려 당권경쟁을 둘러싼 당내 갈등에 휘말려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내갈등은 합당 당시 당헌 부칙 1조에 규정한‘1994년 9월 통합전당대회 개최’로 부터 시작되었다.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은 합당 당시 합의서 1항을 통해 1994년 9월 중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지도부를 새로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합의서 이행 을 위한 실무각서에도 최초의 통합전당대회는 수임기구합동회의 의장단에 전권을 주며 최초의 전당대회에서 새로이 의장단을 구성한다고 명기하였다.
그러나 보궐선거 후 전당대회소집을 앞두고 신민당은 전당대회의 성격에 대해 이견을 보이며 김동길 대표 측과 양순직 최고위원 측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김동길 대표는 전당대회 성격을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계기로 규정하고 대표 경선이 필요 없다는 입장을 보인 반면, 양순직 최고위원은 당 체제 개편을 주장하며 당권에 도전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당권문제를 놓고 대립하던 김동길 대표와 양순직 최고위원은 8월 27일 최고위원∙고문∙의원 연석회의에서 전당대회 대표경선 여부를 놓고 심한 언쟁을 벌이며 갈등을 표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순직 최고위원은 합당 전‘대권후보 김동길 - 당권 양순직 체제’로 역할을 분담한다는 비밀각서가 있었음을 공개하였다. 이후 김동길 대표는 8월 29일‘전당대회에 나서지 않겠다’는 내용과 함께 대표직 사퇴서를 박찬 종 대표에게 제출하고 잠적하였다. 그러나 9월 5일 다시 대표직 복귀를 선언하면서 당내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김동길 대표는 당무에 복귀하자마자 9월 9일 당무위원 50명의 인사를 단행하여 당무회의를 장악하였고, 9월 17일 열린 제1차 당무회의를 통해 전당대회를 1995년 3월 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양순직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한 소위 비주류 측은 전당대회 연기 결정과 무관하게 전당대회 날짜를 10월 10일로 결정하는 등 전당대회 개최를 위한 절차를 밟아 나가는 한편 박찬종 공동대표를 대표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임춘원 사무총장은 중앙상무위원 133인의 소집요구 서명을 받아 9월 26일 중앙당 총무국에 전당대회소집요구서를 접수하고‘전당대회의장 정상구’명의의 전당대회 개최공고를 언론에 게재하였다.14)
14) 김동길 대표 측에서는 합당수임기구 합동회의 의장이었던 정상구 전 최고위원의 명의를 도용하여 전당대회 소집을 요구했다고 주장하였 고, 10월 9일 중앙일보를 통해 신민당 당권수호 비상대책위원회와 지구당 위원장 일동 명의로 10월 10일 임시전당대회의 불법을 알리는 광고기사에 자필서명 된 정상구의 불법 전당대회 해명서를 함께 실었다(동아일보, 1994년 10월 9일자)
이에 김동길 대표와 주류 측은 임춘원 사무총장을 당기위원회에 회부하는 한편 10 월 10일 전당대회 저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임춘원 사무총장은 9월 26일 기자간담 회를 갖고 1995년 3월로 미룬 전당대회의 즉각적인 소집을 요구하며 사무총장의 사퇴를 선언하는 한편 김동길 대표의 사임을 촉구하였다. 전당대회를 둘러싸고 양측이 갈등하는 가운데 김동길 대표 측은 9월 30일 2차 당무회의를 개최하여 당무회의가 전당대회 소집을 의결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한편“합당수임기구 합동회의 의장 정상구는 현 신민당 전당대회의장이 아니다”라는 유권해석을 내림으로써 10∙10 전당대 회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불법 전당대회 참석시 엄중 징계조치할 것임을 경고하였다.15)
15) 당시 임시전당 대회 소집공고에 대한 안내문과 의결사항 통보는 공동대표 김동길∙박찬종의 명의로 직인이 찍혀 발송되었고, 이후 김동길 대표는 사문서 위조 등을 이유로 고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0월 10일 박찬종 대표, 임춘원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 측은 김동길 공동대표 중심의 주류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당대회를 강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전당대회 강행과 저지를 위해 폭력배를 동원하였고, 결국 전당대회는 난투극 끝에 비주류 측이 박찬종을 단독 당대표로 선출한 후 폐회되었으나 각목을 휘두르는 등 폭력이 난무하면서‘각목 전당대회’라는 오명을 남겼다.16)
16) 비주류 측은 폭력배 100여 명을 동원하여 주류 측이 대회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주류 측은 용인대 체육학과 학생 60여 명을 동원하여 전당대회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경찰조사에서 사실로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폭력배를 동원한 킥복싱협회장 어준 기가 구속되고 용인대생 2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신민당 전당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각목을 든 주류 측 청년들이 당사를 지키고 있다(1994년 10월 10일)
폭력 전당대회의 후유증은 상당히 심각하였다. 10월 10일 전당대회 이후 신민당은 대표최고위원 박찬종 명의로 당 대표 변경을 포함한 중앙당 변경등록신청서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틀 뒤인 10월 12일 김동길 대표 측은 임시전 당대회 무효확인소송과 중앙당등록변경신청정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출하여 양측의 갈등은 법정공방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1월 3 일 신민당의 중앙당변경등록 신청을 각하하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당헌상 정상구를 전당대회의장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으므로 임시전당대회는 당헌에 의하여 정당한 권한을 부여받지 아니한 자에 의하여 소집된 것으로 판단하였고, 따라서 변경등록신청 또한 적법한 절차에 의한 임시전당대회 결의에 기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10월 10일 임시전당대회의 적법성은 부인되었다.
이후 김동길 대표 측과 양순직 최고위원 측의 ‘당권보장 양해각서의 진위시비’는 신민당 내 갈등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당권보장 양해각서의 진위시비’는 전당대회 직후 10월 11일 김동길 대표가 텔레비전에 출연해“ 합의서는 임춘원씨가 조작한 것이다. (……) 원본이 있으면 가지고 오라”며 문제의 각서에 대한 뒤늦은 반박을 재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양순직 의원은 다음 날 문제의 합의각서 원본을 공개하고 김동길 대표의 도덕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김동길 대표는 또다시“ 나의 모든 정치생명을 걸고 위조임을 확신하며 위조범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라고 재반박하였다. 그러나 재반박에도 불구하고 양순직 최고위원은 10월 17일 김동길 대표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다. 이처럼 양측이 이전투구식 양태를 보이며 대립하는 가운데 11월 5일 검찰은 문제의 각서에 있는 서명이 김동길 대표의 친필인 것으로 판정하였다. 김동길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을 정계에서 떠나게 하려는 음모라고 반박하였지만 결국 불구속 기소되었다.
10∙10 전당대회 이후 벌어진 당내 세력다툼은 양측 모두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내갈등은 좀처럼 봉합되지 않았다. 김동길 대표 측은 11월 9일 당무회의를 개최하고 공동대표 박찬종과 임춘원 의원에 대해 2년간 당원권을 정지하고 지구당위원장 등 당직자 37인을 제명하는 중앙당당기위원회의 상벌안을 승인하며 반격을 가하였다. 또한 당헌개정을 통하여 지도체제를 공동대표최고위원제에서 대표최고위원제로 변경하고 김동길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 후 11월 12일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표자 변경등록을 신청하였다.
상황이 반전되자 이번에는 박찬종 대표측이 반발하고 나섰다. 11월 14일 박찬종 대표는 11월 9일 개최된 당무회의는 본인의 동의 없이 소집된 것으로 불법이며, 불법 당무회의를 통해 개정된 당헌과 단독대표로의 변경은 무효라는 소견서를 중앙선거관리 위원회에 제출하였다. 또한 11월 15일에는 김국환, 김병환, 송차갑, 김동주 등 지구당 위원장 4명이 사문서 위조 및 행사를 이유로 김동길 대표와 박구인 사무총장을 고발하 였고, 16일에는 김국환 외 31명의 당원이 정당대표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과 당무회 의결의부존재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국 김동길 대표는 11월 28일 중앙선거관 리위원회에 공식 공문을 접수하여 당헌 및 대표자 변경등록신청을 철회하였다.
라. 공동대표 동반사퇴와 제2의 당내갈등
신민당의 당내갈등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가는 가운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2월 14일 신민당의 4분기 국고보조금 지급 보류를 결정하였다. 1994년 8월 박찬종 대표는 당내갈등이 고조되면서 국고보조금 수령자로 등록돼 있는 박구일 사무총장의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의를 제기하였고, 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공동대표의 이의제기를 이유로 “박찬종∙김동길 공동대표가 합의하여 수령인을 지정해 오면 보조금을 지급하게 될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신민당이 수령할 국고보조금은 약 7억 2,000만 원이었으며, 국고보조금은 신민당 당권싸움의 원인 중 하나였던 반면 갈등속에서도 당을 유지하게 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조금 지급중단은 당 존속에 있어 중요한 문제였고, 신민당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국고보조금 지급중단으로 당내갈등에 대한 비난여론과 당 존속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당내에는 중도파를 중심으로 갈등봉합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를 위해 제기된 대안은 두 공동대표가 동반사퇴하고 새로이 당을 정비하자는 것이었다. 위기상황이 극단에 이르자 김동길 대표 측은 박찬종 대표 측에 동반사퇴를 제의하였고, 박찬종 대표도 이를 수용하였다. 결국 박찬종∙김동길 공동대표는 12월 15일과 16일 연이어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후 공동대표 사표처리와 대표 권한대행 선출 과정은 오히려 제2의 갈등을 불러왔다. 두 대표의 동반사퇴 이후 1994년 12월 19일 열린 제7차 당무회의에서는 박찬종 대표의 사퇴서만이 수리되었고, 이어 12월 21일 개최된 최고위원회의에서는 공동대표의 사표처리 문제와 박찬종 대표 권한대행 선출 문제를 놓고 양측이 공방을 벌였다. 결국 최고위원회의는 결론 없이 유회되었으나 다음 날 중도파로 분류되던 유수호, 김용환, 조순환 의원이 당권경쟁에 따른 당 내분을 이유로 탈당하였고,17) 이를 계기로 신민당 내분은 또다시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17) 세 의원은 한결같이“해보는 데까지 해봤으나 결코 당을 정상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라고 탈당 소견을 밝혔다. 김동길 대표 측 인사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당무회의는 박찬종 대표의 사퇴서만 수리하였고, 김동길 대표의 사퇴서는“김 대표의 진의를 파악해 보겠 다”며 유보하였다. 또한 양순직 최고위원 등 비주류 측이 제기한 김동길 대표에 대한 소송취하를 사퇴서 수리의 전제조건으로 내걸면서도 비주류 측에 내린 징계조치는 철회하지 않았다. 한편 비주류 측은 양순직 최고위원을 대표권한대행에 지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내분 수습 실패와 당권싸움의 재개가 중도파를 탈당에 이르게 만든 것이었다.
국회의원 3명의 탈당으로 원내의석이 15석에서 12석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12월 23일 재개된 최고위원회의에서 주류 측은 궐위된 대표최고위원의 권한대행으로 김복동을 선출하였고, 신민당은 1995년 1월 11일 대표최고위원을 박찬종에서 김복동으로 변경하는 변경등록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청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박찬종, 양순직 등 13인은 최고위원회의 결정을 수용할 수 없다며 대표자 변경등록신청이 무효라는 이의서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며 반발하였다.18) 이와 관련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월 19일 신민당의 중앙당변경등록신청을 각하하였다. 최고위원 회의체 구성상에 치유할 수 없는 요건의 흠결이 있다는 것이 각하 이유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제7차 당무회의가 정당한 소집권자인 공동대표최고위원에 의하여 적법하게 소집된 것으로 볼수 없으므로, 그 당무회의에서 선출된 문창모, 이필선, 박철언은 최고위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최고위원회의는 자격이 없는 최고위원을 제외하면 당헌상의 의사정족수 및 의결정족수에 미달되기 때문에 그 최고위원회의 결의에 의한 권한대행자의 선출은 적법하지 못한 것으로 결정 하였다.
18) 이의서에는“김복동 최고위원을 권한대행자로 선출하고, 사퇴서 제출로 대표직을 수행할 수 없는 김동길 전 공동대표를 존속키로 한 결의는 불법무도한 행위였으며, 권한 없는 자가 소집하고 당무위원이 아닌 자가 참석한 당무회의의 의결은 원천적으로 불법 무효인 바 이에 따른 신민당 공동대표 권한대행변경등록신청은 사실무효라는 이의서를 제출하니 각하해 주시기를 강력히 요망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이후 비주류와 중도계로 분류되던 한영수∙양순직∙박한상∙박영록 등 최고위원 4명은 1995년 1월 23일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김동길∙박찬종 공동대표의 사퇴서를 일괄수리하고, 한영수∙박한상 두 최고위원을 새 대표권한대행으로 선출하였다. 그 러나 이러한 결정 과정에서 주류 측이 최고위원회의가 예정된 중앙당사의 출입문을 봉쇄해 회의장소를 국회 귀빈식당으로 변경해야 했다. 또한 한영수 등 비주류 측 최 고위원들이 박구일 사무총장에게 대표등록변경 신청에 필요한 당인과 직인을 건네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였다.
한편 최고위원회의의 적법성과 관련하여서도 김복동 최고위원 중심의 주류 측은 “양순직∙박철언∙김동길∙박찬종씨 등의 최고위원 자격 유무가 명확하지 않은 만큼 최고위원 수는 비주류와 중도파가 주장하는 6명이 아니라 9명으로 봐야 한다”라 며 성원미달에 의한 최고위원회의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또한 당의 공식결정은 최종적으로 당무회의를 거쳐야 하는 만큼 이날 최고위원회의만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표등록을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주류 측은 자격에 논란이 없는 6명의 최고위원 가운데 김복동, 정상구를 제외한 4명이 모인 만큼 아무런 하자가 없다며 최고위원회의 결정의 적법성을 주장하며 1995년 1월 2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표자변경등록을 신청하였다.
최고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주류 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표자변경등록신청서를 제출하자 최고위원 김복동 외 당무위원 21명은 1월 26일 권한대행자를 선출한 최고 위원회에 대한 이의서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의를 제기한 요지는 정당한 소집권자인 의장이 아닌 박영록이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한 점,19) 김동길∙박찬종 대표최고위원은 당 대표직만 사퇴한 것이지 최고위원까지 사퇴한 것이 아니므로 정족수는 9인이라는 점, 양순직은 당원자격에 문제가 있어 의결정족수에 포함될 수 없으므로 의결정족수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 최고위원회의 소집통지 등 절차 상의 하자가 있다는 점 등이었다. 그러나 1995년 1월 27일 김동길∙박찬종은 서면으 로 대표최고위원회의 권한대행자 선출에 이의가 없다는 지지 동의서를 제출하였고, 2월 1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대표자 변경등록신청을 수리하면서 한영수∙박한상 권한대행체제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로써 1994년 10월 10일 폭력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전개되어 왔던 당권경쟁은 수습국면을 맞게 되었다.
19) 박영록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회의요건 미구비를 이유로 무효결정을 내린 1994년 12월 23일 최고위원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자 이므로 최고위원회 소집권자인 의장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마. 김복동 대표체제의 출범과 자유민주연합과의 신설합당: 신민당의 소멸 장기간의 당내갈등을 거친 신민당은 1995년 2월 한영수∙박한상 권한대행체제가 공식출범하면서 사분오열된 당내 정비와 야권통합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다시 야권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김종필 전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이 탈당 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야권통합은 주요 정 치사안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신민당 대행지도부는‘선 체제정비 후 통합협상’의 원칙을 내세웠고, 이러한 원칙에 따라 최고위원회의는 3월 7일 전당대회를 소집하여 새 지도부를 선출하고 이와 함께 야권통합수임기구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신민당의 야권통합 논의는 다소 미루어지게 되었다.
3월 7일로 예정되었던 신민당 전당대회는 한차례 연기된 이후 3월 27일 서울 롯데 월드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전당대회에서 신민당은 당헌을 개정하여 지도체제를 집단 지도체제에서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로 변경하였고, 김복동 의원을 대표로 선출하였 다. 당 대표 선출에서는 김복동∙양순직 의원과 정상구∙박한상 전 의원 등 4명이 출마하여 경선을 실시하였다. 1차 투표에서 김복동∙양순직 의원이 각각 1, 2위를 차지하였으나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2차 투표를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1차 투표 직후 양순직 의원이 후보사퇴를 선언하여 김복동 의원이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또한 임춘원, 한영수, 조중연, 정상구, 박영록, 이필선 등 6명이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전당대회에서는 민주당 혹은 자유민주연합과의 통합을 위한 야권통합 수임기구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였고, 김복동 대표도 당선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당내 여론을 수렴 해 6월 지방선거 전에 야권통합을 반드시 이뤄내겠다”라며 본격적인 야권통합의 추진 의사를 밝혔다. 신민당의 당헌 개정과 대표자 변경은 1995년 4월 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정식으로 수리되었다.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새 대표로 선출된 김복동 의원(1995년 3월 27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복동 대표체제의 출범으로 당내갈등이 일단락되자 신민당은 본격적인 통합협상을 시작하였다. 1차적인 통합논의 대상은 민주당이었다. 김복동 대표가 대표선출 당시 야권통합을 기치로 내세웠고, 민주당 또한 4월 10일까지 통합 협상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우는 등 적극적으로 통합에 나서면서 신민당과 민주당의 통합논의는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신민당은 1995년 4월 3일 김복동 대표를 위원장으로 야권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20) 민주당 또한 4월 6일 이기택 총재 를 위원장으로 야권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양당은 실무대표회담과 실무협상을 통해 당 대 당 통합, 당명 민주당, 이기택∙김복동 공동대표제 등 3대 원칙에 합의 하는 등 실질적인 통합작업을 진행해 갔다.
20) 신민당 야권통합추진위원회는 위원장 김복동 대표 외 임춘원, 한영수, 조중연, 정상구, 박영록, 이필선, 박구일, 서선호, 나이균, 이원범, 임광순, 고병현, 이병희, 강병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민당은 잠복해 있던 계파 갈등으로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표출하였고, 통합추진위원회 내에서도 이견이 팽팽히 맞서며 갈등양상을 보였다. 통합 논의 초반 1995년 3월 30일 김복동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통합수임기구 구성을 제안하였으나 최고위원간 이견으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 또한 첫 통합실무회담 개최 전날 당무회의에서는 김동길∙조일현∙박구일∙문창모∙현경자∙강부자 의원 등 현역의원 6명이“통합선언에 앞서 내각제 등 권력구조 문제에 대한 합의와 신민당 당명 관철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하며 이견을 보였다.
당내문제 이외에 양당간 지분배분 문제도 협상과정의 중요한 장애가 되었다. 양당은 지분배분에 대한 협상 결과 민주당 7, 신민당 3이라는 원칙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민주당은 신민당 지분에 대해 전 지역을 총괄하여 30% 배분을 주장한 반면, 신민당은 서울 및 호남지역 지분에 있어서도 30% 배분을 주장하면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였다. 지분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자 민주당은 통합의 진척을 위하여‘선 통합선언’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은 내부적으로 통합선언 전 지분문제를 명확히 합의해야 한다는 신중파의 반대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다 4월 20일에서 선 통합선언을 수용하였다.
▲민주당 이기택 총재와 신민당 김복동 대표가 양당 합당을 선언한 후 악수하고 있다(1995년 4월 21일)
이에 따라 이기택 총재와 김복동 대표는 4월 21일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양당의 정치적 통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통합선언 3일 만에 양당은 공동대표제 문제로 충돌하였다. 민주당은 법적공동대표제를 통합전당대회때까지 유지하는 것으로, 신민당은 전당대회 이후에도 계속 보장하는 것으로 인식하면서 이해의 오류가 발생하였고, 이를 두고 양당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결국 신민당은 4월 26일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민주당과의 통합협상 결렬을 공식 선언하였고, 대외적으로 통합선언까지 발표한 민주당과 신민당의 통합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민주당과 신민당의 통합결렬은 신민당과 자유민주연합과의 통합이라는 새로운 결과를 이끌어내었다. 통합무산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신민당은 비공개 회동을 통해 자유민주연합에 통합을 제의하였고, 자유민주연합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전격적으로 통합을 합의하였다. 5월 6일 김복동 대표가 김종필 총재를 방문하여 협상을 논의하는 등 비공식적 협상을 통해 통합을 진행하던 양당은 5월 9일 완전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통합선언에 앞서 신민당 내부의 통합반대파는 심하게 반발하였다. 통합추 진회의에서는 5월 11일과 12일 연이어 통합문제를 놓고 논의를 벌였으나 격론 속에 결론을 내지 못하였고, 이로써 예정된 통합선언도 연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복동 대표는 5월 16일 통합추진위원회를 개최하고 불참한 통합반대파 위원 2명의 자격을 박탈한 후 새로운 추진위원을 임명하여 통합에 찬성하는 9명의 위원만이 참석한 가운데 통합을 의결하였다. 또한 같은 날 오후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와 공동기자 회견을 통해 당 대 당 통합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어 1995년 5월 20일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설합당등록을 신청하였다.
내부적으로 완전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 상황에서 통합이 선언되자 임춘원 최고위원 등 신민당 내 통합반대파는 통합추진위원회의 통합의결이 “김복동 대표 측이 통합추진위원 2명을 자파 인사로 불법 교체한 가운데 이뤄진 것”이라며 통합선언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통합반대파는 박영록을 위원장으로 하는 신민당수호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정당 합류에 반대하며 강하게 저항하는 한편, 통합추진에 맞서 독자적인 임시전당대회 개최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통합반대파 통합추진위원 8명은 합당금지 가처분신청과 김복동 대표 직무정지처분신청을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하였다. 이로써 신민당은 1994년 10월 10일 전당대회로 인하여 불거진 당권갈등 이후 또 한번 당내문제로 법적 공방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연합과의 정당합당 등록신청이 5 월 3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수리되면서 신민당은 신설합당한 자유민주연합으로 공식 출범하였다. 이로써 1994년 7월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의 신설합당으로 출범한 신민당은 끊이지 않는 당내갈등으로 파행을 겪어오다 10개월여만에 소멸하였다
2. 자유민주연합(1995.4.3~1995.5.31)
가. 창당배경
자유민주연합은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이었던 김종필이 탈당하여 1995년 4월 3일 창당한 정당이다. 3당합당을 통해 창당된 민주자유당은 출범 이후 당내 계파간 당권 경쟁으로 계속하여 당내갈등 양상을 보였다. 1990년 말 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추진과정에서 김종필 대표최고위원은 당내∙외적으로 퇴진압력을 받아왔고, 결국 1995년 1월 10일 김영삼 대통령은 김종필 대표최고위원과의 극비회동을 통해 2선 퇴진을 통고하였다. 이로써 민주자유당의 지도체제 갈등은 종국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김종필 대표최고위원은 1월 19일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김종필 대표최고위원은 1월 27일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회동하 여 내각제 개헌을 목표로 하는 신당창당에 합의하는 등 신당창당 준비에 돌입하였다. 결국 김종필 전대표최고위원은 2월 9일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자유당 탈당선언과 함께 내각제를 기본 강령으로 한 신당창당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김종필 전 대표최고위원은 기자회견에서‘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3당합당 정신이 훼절된 이상 김영삼 대통령과의 관계를 청산할 수밖에 없다” 라고 탈당 이유를 밝혔다. 한편 신당창당과 관련하여“ 대통령중심제는 독선과 독단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 (……) 의원내각제를 실시해 권력의 과도한 집중과 전횡의 위험성을 제도적으로 시정해야 한다”며 의원내각제 구현이 신당의 주요 강령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나. 창당준비위원회
김종필 전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의 창당선언을 시작으로 신당 창당에 동참한 인사들은 창당준비를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고 신당의 이름을 ‘자유민주연합’으로 결정 하는 등 신당 창당을 위한 발기인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종근, 김용환, 이긍규, 구자춘, 조부영, 유수호, 정태영, 김진영 등 현역의원 9명이 신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세력을 규합한 자유민주연합(가칭)은 1995년 2월 21일 서울 소피텔 앰버서더호텔에서 창당발기인 대회를 개최하여 박준규 전 국회의장을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신고를 완료하였다.
다. 정당등록
1995년 2월 21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킨 자유민주연합(가칭)은 지구당 창당대회를 통해 창당에 필요한 법정지구당을 조직하는 한편 정강∙정책 및 당헌∙당규를 마련하는 등 구체적인 창당작업을 진행하였다. 이후 27개의 지구당을 구축하는 등 창당요건을 구비한 자유민주연합(가칭)은 1995년 3월 3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중앙당창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자유민주연합 중앙당 창당대회(1995년 3월 30일)
3,296명의 대의원 중 3,28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창당대회에서 자유민주연합(가칭)은 당헌, 강령 및 기본정책을 채택하고 전당대회 의결 및 승인에 관한 사항을 차기 전당대회까지 당무회의에 위임하도록 결정하였다. 또한 당헌 부칙 조항에 따라 창당준비위원회 집행위원회의 제청을 통해 김종필을 당 총재로 선출하였다. 이어 김종필 총재는 박준규 전 국회의장을 최고고문으로, 정석모∙구자춘∙김용환∙최각규∙김용채∙김경오를 부총재로 지명하여 전당대회 동의를 받았다.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4월 3일 정당등록 신청절차를 완료하여 신설정당으로 공식 출범하였다. 그러나 자유민주연합은 창당 후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1995년 6월로 예정된 제1회 전국 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신민당과 신설합당하여 새로운 자유민주연합으로 거듭나면서 공식적으로 등록된 기간은 58일에 불과하였다.
【강 령】
우리는 근대화로 이룩된 광복 50년의 국가저력을 바탕으로 하여 의회민주정치를 확립하고 민족 재도약의 웅대한 역정을 펼쳐야 할 신세기 앞에 다가서 있다. 여기, 우리 자유민주연합은 이 시대의 소명을 수행할 가장 책임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을 토대로 모두가 훈훈하고 보람있게 사는 선진문화복지국가를 건설하고 민족대통합의 위업을 이루어 낼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의 강령을 밝힌다.
1. 우리는 의원내각제를 추진하여 권력의 독선과 전횡을 막고 의회의 권능을 확립하여 주권재민의 참된 책임정치를 실현한다.
2. 우리는 완벽한 지방자치의 실시로 주민자치의 시대를 열고 지방의 특색과 토양에 맞는 생활정치를 실천한다.
3. 우리는 질 높고 안정된 성장 속에서 중산층의 권익을 보호∙신장하고 농어민∙노동자 및 저소득층 모두의 중산층화를 위하여 지원과 복지를 확충한다.
4.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정보화시대, 고도지식산업사회에 부응키 위하여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진흥시킨다.
5. 우리는 도덕과 신의가 지켜지며 자율과 책임이 강조되는 사회를 건설하여 모두가 서로 믿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
6. 우리는 교육의 기본을 인성의 함양에 두고 교육의 자율화로 개성과 창의를 제고하며 문화예술의 창달에 진력한다.
7. 우리는 민족에 대한 존엄과 사랑을 견지하는 가운데 자유민주체제를 토대로 한 평화통일을 차분하게 추구한다.
8. 우리는 안보를 굳건히 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한 능동적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성숙한 성원이 된다.
3. (신설합당) 자유민주연합(1995.5.31∼2006.3.10)
가. 신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합당
1) 합당배경
1995년 6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신생 자유민주연합과 신민당이 신설합당하여 1995년 5월 31일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민주자유당 김종필 전 대표최고위원이 탈당 후 1995년 4월 창당한 정당이었고, 신민당은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이 1994년 7월 신설합당한 정당이었다.
신민당은 창당 이후 끊이지 않는 당내갈등으로 인하여 심각한 혼란속에 급격하게 당세가 약화되었다. 1995년 3월 김복동 대표체제를 출범시키며 당내갈등을 일단락하 고 민주당과의 통합에 나서 1995년 4월 21일에는 민주당과 당 대 당 통합을 선언하였 으나, 이마저도 공동대표 등록문제로 인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민주당과의 통합이 무산되면서 신민당은 선거 후 좌초될 수 있는 위기감이 팽배하 였고, 실제로 취약한 지지기반과 인물난으로 인하여 광역단체장후보를 전혀 공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신민당은 민주당과의 통합무산 직후 비공개 회동을 통해 자유민주연합에 통합을 제의하였고, 선거를 앞두고 당세확장을 꾀하던 신생정당 자유민주 연합의 입장에서 신민당은 좋은 통합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양당간의 이해관계가 부합되면서 자유민주연합과 신민당의 통합협상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1995년 4월 후 반 양당의 고위 당직자들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개별적인 접촉을 갖기 시작하였고, 합당협상이 구체화되면서 4월 29일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와 신민당 김복동 최고 대표위원이 회동하여 원칙적 차원의 합당에 합의하였다.
2) 합당과정
양당 대표간 합당원칙 합의에 따라 자유민주연합 구자춘∙김용환∙조부영 의원과 신민당 임춘원∙박구익∙조일현 의원이 합당교섭대표로 나서 1995년 4월 30일부터 당명과 지도체제 등 구체적인 합당협상을 벌였다. 이후 5월 9일 교섭대표들은 5차 회동에서 합당에 관한 모든 문제를 타결하고 합당합의서에 서명하였으며, 5월 16일 김종필 총재와 김복동 대표가 전격적으로 합당을 공동선언하였다.
이에 신민당은 5월 16일 당내 야권통합추진위원회를 열고 자유민주연합과의 당 대 당 통합을 의결하는 한편 5명의 합당추진위원과 합동수임기구 위원을 임명하였 다. 자유민주연합도 5월 17일 당무회의를 열고 신민당과의 합당을 의결하며 5인의 합당추진위원 구성을 김종필 총재에게 일임하는 한편 합동수임기구는 당무위원 전원으 로 구성할 것을 의결하였다. 이후 양당은 5월 17일 국회도서관에서 양당의 합당수임 기구 위원 47명(자유민주연합 25명, 신민당 22명) 중 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임기관 합동회의를 개최하여 당명을‘자유민주연합’으로 하고 김종필을 당 대표로 하여 신설합당할 것을 의결하였다. 한편 수임기구 합동회의에서 논의되지 아니한 사항은 새로 구성될 합당추진위원회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기로 결정하고, 자유민주연합과 신민당 5인씩으로 10명의 합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와 신민당 김복동 대표가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양당 합당을 선언하고 있다(1995년 5월 16일)
합당추진위원회는 5월 19일 자유민주연합 부총재실에서 9명의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신설합당할 자유민주연합의 강령∙기본정책∙당헌제정안을 의결하였다. 의결된 강령과 기본정책은‘ 구 자유민주연합’의 강령과 기본정책을 승계하였다. 또한 김종필 ‘ 구 자유민주연합’총재를 신당 총재로, 김복동‘ 구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수석부총재로 추대할 것을 최종 확정하는 한편 당헌 중 ‘총재는 주요 당무에 관하여 수석부총재와 협의하고’라는 내용을 삽입하는 등 몇 가지 조항을 신설하도록 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창당선언문을 통하여 합당의 목적과 목표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창당선언문 주요내용>
오늘 우리는 자유민주연합과 신민당이 자유민주연합으로 합당하였음을 선언한다. (……) 자유민주의 새로운 도약이 시작될 것으로 자부하며 (……) 국민행복과 나라발전과 조국통일을 위해 정진할 것을 굳게 약속한다. (……) 자유민주를 신봉하고 권력정치집단, 절대권력구조에 반대하는 정당, 단체, 개인 모두의 연합과 단결을 위해 혼신(渾身)할 것을 다짐한다. (……) 우리의 현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절실한 정치체제는 바로 의원내각제임을 확신하며 우리는 이를 국민통합의 바탕 위에서 진지하게 실현해 나갈 것이다.
3) 정당등록(신설합당)
합당 및 관련 내용에 대한 합당추진위원회의 의결 이후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5월 20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중앙당 신설합당등록을 신청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제출된 강령을 통해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을 토대로 선진문화복지국가 건설과 민족대통합의 위업 달성을 주요한 당의 이념과 목표로 내세웠다. 또한 책임정치 실현을 위해 의원내각제를 추진해 나갈 것을 명확히 하였다.
통상적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형식요건 심사를 통해 신청일로부터 수일 내에 정당등록을 수리해 왔다. 그러나 자유민주연합의 신설합당 등록은 신민당 내 일부 인사의 반발과 합당에 대한 이의제기로 다소 지연되었다. 자유민주연합과의 합당을 반대하던 신민당 내 박영록 외 7명은 최고위원회가 1995년 5월 15일 밤 11시에 갑자기 소집절차없이 회의를 개최하여 통합추진위원 서선호∙이병희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였고, 따라서 5월 16일 통합추진위원회의 의결도 과반수 이상이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구 자유민주연합과의 통합결의는 무효라며 이의를 제기하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20일 자유민주연합의 신설정당 등록신청이 이루어지자 이들은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에 정당합당금지가처분을 신청하였다. 또한 5월 22일에는 공식적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설합당등록신청 무효이의서를 제출하였다. 논란이 일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자유민주연합 중앙당 신설합당등록신청과 관련하여 내부 검토에 착수하였다. 이와 함께 논란의 핵심이 되는 전당대회 회의록과 야권통합추진위원회의 소집에 관한 자료보완을 신민당에 요구하였다. 제기된 주요 쟁점사항은 ①신민당의 경우 야권통합추진위원회가 해당 정당의 당헌 등의 규정에 따라 합당결의를 할 수 있는 정당한 기관인지 여부 ②(정당성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합당결의를 한 신민당의 야권통합추진위원회의 구성, 회의소집 절차, 의사 및 의결정족수의 적법성 여부 ③합당을 결의한 수임기관합동회의의 구성 및 회의소집 절차∙의사 및 의결정족수 등의 적법성 여부 등 세 가지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5월 26일 신민당으로부터 관계서류가 제출되자 주요 논쟁점을 비롯한 종합검토를 실시하였다.
21) 정당등록과 관련해 우리나라는 형식적 심사주의를 채택하고 있다(정당법 제16조). 따라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형식적 요건심사는 사실 의 실질여부와 관계없이 제출된 서면∙자료에 의하여 해당법규 등에서 요구하는 요건만으로 실질적인 법률관계의 불일치 여부를 판단한 다. 그러나 실질적 법률관계의 불일치 여부를 심사대상으로 한다는 점에는 형식적 심사와 실질적 심사는 동일하다.
검토결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중앙당 신설합당 등록신청은 형식적 요건을 구비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고, 1995년 5월 31일 중앙당 신설합당 등록신청을 공식 수리하였다. 이로써 자유민주연합은 논란 끝에 정당등록신청 후 11일만에 정당등록 절차를 완료하고 공식출범하였다.
※지구당과 당 지부 및 당 연락소의 소재지와 명칭, 지구당의 대표자 및 당지부와 당연락소 책임자와 회계책임자의 주소, 성명은 120일 이내 보완
이후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9월 13일 신설합당 등록신청시 보완사항으로 남겨 두었던 지구당, 당 지부 및 당 연락소의 소재지와 명칭, 책임자와 회계책임자의 주소, 성명을 추가로 신고하였다. 합당 전 신민당은 192개, 구 자유민주연합은 45개의 지구당을 조직하고 있어 두 정당이 보유한 지구당을 합하면 무려 237개에 달하였고, 이중 34개 지구당은 중복되어 있어 개편대회 대상이 되었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 조정을 통하여 등록 지구당 수를 191개로 축소하였고 이 중 122개의 지구당을 신고하였다. 나머지 69개의 지구당은 사고지구당으로 신고하였으며, 더불어 9개의 당 지부, 그리 고 3개의 당 연락소도 보완하여 신고하였다.
나. 제15대 국회의원선거와 원내 제3당 지위 확립
1)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제3당 입지 구축
자유민주연합과 신민당이 신설합당하여 1995년 5월 31일 신당 자유민주연합으로 재출범한 직후인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짧은 선거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연합은 선거결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선전하여 국회 제3당으로서의 입지를 마련하였다. 광역단체장선거에서는 대전∙충남∙충북∙강원 등 4곳에서 승리하였다. 또한 기초자치단체장선거와 광역의회의원선거에서도 충청권을 중심으로 각각 23곳(10%)과 86석(9.8%)을 차지하며 약진하였다.
동시지방선거 선전에 고무된 자유민주연합은 그 여세를 몰아 의원영입을 통해 당세를 확장하고 1996년 4월 11일 실시될 제15대 국회의원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하였 다. 신설합당 당시 이미 20명의 현역의원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던 자유민주연 합은22) 지방선거를 앞두고 6월 2일 박철언 전 의원이 부인 현경자 의원과 함께 입당하면서 소속의원이 총 21명이 되었다.
22) 1995년 5월 24일 교섭단체 소속의원 명부 제출 당시 20명의 의원은 한영수 대표의원을 비롯하여 강부자, 강우혁, 구자현, 김동길, 김복동, 김용환, 김종필, 김진영, 문창모, 박구일, 박규식, 양순직, 유수호, 이긍규, 이종근, 이학원, 정태영, 조부영, 조일현 등이었다.
지방선거 이후 자유민주연합은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 대비하여 외부인사 영입에 주력하면서 김범명, 함석재 등 민주자유당 현역의원뿐만 아니라 무소속 의원과 구여권 인사들을 영입하여 당세를 확장하였다. 그 결과 자유민주연합은 일부 의원들 의 사직과 사퇴에도 불구하고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전 소속 의원이 총 25명으로 늘어났다.
2)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선전과 당 조직 정비
자유민주연합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이어 1996년 4월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려 50석을 차지하는 선전으로 원내 제3당의 입지를 굳건히 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 제15대 국회 개원에 앞서 당직을 개편하고 새로이 조직을 정비하였다. 조부영 사무총장, 한영수 원내총무, 박구일 정책위의장 등 당 3역을 비롯한 주요당직자들은 당직개편을 앞두고 4월 16일 일괄사표를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민주연합은 4월 22일 이례적으로 사무총장을 우선 임명하고 이틀 뒤 4월 24일 후속 인선을 발표하며 당직개편을 마무리하였다.
당직개편 결과 사무총장에는 김용환 의원이 임명되었고, 원내총무에 이정무 의원이 임명되었다. 또한 정책위의장에는 허남훈, 대변인에는 안택수, 총재비서실장에는 이동복 당선자가 각각 임명되었다. 박준규 최고고문, 김복동 수석부총재 체제는 기존 대로 유지되었으며 그 대신 부총재 수를 9명에서 7명으로 축소 조정하였다. 이에 따라 정석모, 정상천, 한영수, 이태섭, 박철언, 배명국 씨가 부총재에 임명 또는 재임명 되었으며, 나머지 1명은 여성저명인사를 영입하여 추후 배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전당대회의장에 오용운, 중앙위의장에 이대엽, 정치발전위원장에 조부영, 정책자문위원장에 박구일, 신설된 생활법제개혁위원장에 이건개, 농어촌대책위원장에 한호선을 각각 임명하였다. 이외에 박철언 부총재가 겸하던 대구와 경북지부장에는 박종근 당선자와 김화남 당선자를 각각 임명하는 등 일부 시도지부장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다. DJP공조와 박태준 총재체제의 형성
1) 연쇄탈당과 국민회의와의 공조
1996년 5월 30일 제15대 국회가 출범한 이후 자유민주연합은 국회의원선거사범에 대한 수사와 신한국당의 야당의원 영입으로 곤경에 처하였다. 신한국당은 제15대 국회 의원선거에서 139석을 얻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면서 무소속 및 야당의원 영입에 나섰고, 이와 함께 검찰은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선거사범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 영향으로 자유민주연합 소속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다. 이에 자유민주연합은 새정치 국민회의와 함께 검찰의 선거사범 수사와 신한국당의 야당인사 영입작업 등을‘야당 파괴폭거’로 규정하고‘선거부정청문회’개최를 요구하는 등 대여 총공세에 나섰다. 5월 22일에는 새정치국민회의, 민주당과 함께 신한국당의 인위적 과반수의석 확보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고, 5월 26일에는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대규모 장외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직후 탈당한 김화남 의원을 비롯하여 1996년 12월 유종수, 황학수, 이재창 의원이 연이어 탈당하면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50석으로 출발한 자유민주연합은 46석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인위적 정계개편과 검찰의 선거사범 수사는 다른 한편으로 자유민주연합이 여당에 공동대응하기 위해 새정치국민회의와 공조체제를 형성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2) 당헌개정과 대통령후보 선출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은 4월 7일 당무회의를 열어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일을 6월 24일로 확정하였다. 이에 전당대회 전 자유민주 연합은 지구당 창당 및 개편대회를 잇달아 여는 한편 4월 25일 당헌개정을 통해 당조직 및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개정된 당헌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조직과 구성의 수를 전반적으로 확대하였다. 지방자치단체와 중앙당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지방자치행정실과 15인 이내로 구성되는 총재 직속의 정세분석위원회를 신설하였다. 상임고문직이 새로이 구성되었고, 전당대회 임원에 있어서도 2명이었던 부의장을 약간 명으로 조정하였다. 중앙위원회의 부의장은 수석부의장을 포함하여 7인에서 11인으로 늘어났고, 의장과 부의장이 궐위된 때에는 당무회의 의결을 거쳐 총재가 임명하여 잔여 임기동안 재임하도록 하였다.
중앙위원회 운영위원회와 관련하여서도 3인이었던 부의장을 수석부의장을 포함한 11인 이내의 부의장이 당연 겸직하도록 변경하였다. 40인 이내였던 당무위원도 50 인 이내로 늘렸으며, 신설된 정책자문위원회, 생활법제개혁위원회, 농어촌대책위원회, 정세분석위원회 각 위원장을 새로이 당무위원에 포함시켰다. 1인이었던 정치발전위원회 부위원장도 약간 명으로 늘렸으며, 정책위원회의 수석부의장과 부의장 수도 수석부의장 2인을 포함한 15인으로 증원하였다. 또한 수석부대변인제도를 도입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 6월 24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제1차 정기전당 대회 및 대통령후보자 선출대회를 개최하고 김종필 총재를 제15대 대통령선거 후보 및 당 총재로 선출하였다. 이어 7월 2일에는 당무회의를 통해 야권후보단일화를 위한 수권위원회를 구성하고 김용환 부총재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7월 3일에는 대통령선거체제를 이끌어 갈 사무총장에 강창희 의원을 새로이 임명하는 한편 김광수∙오용운을 부총재에 임명하는 등 지도부를 일부 개편하였다.
3) 박태준 총재체제의 출범
자유민주연합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이후 시작된 새정치국민회의와의 공조 체제를 1997년까지 유지하였다. 국회활동에 있어서 공동으로 여당에 대응하는 한편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도 야권 단일후보를 내세웠다. 그 결과 1997년 3월 5일 실시된 인천 서구와 수원 장안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단일후보였던 새정치국민회의 조한천 후보와 자유민주연합 이태섭 후보가 나란히 당선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양당의 공조는 제15대 대통령선거를 맞아 대통령후보 단일화와 연합논의로 확대되었다. 계속된 협상 결과 양당은 1997년 10월 27일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후 보단일화에 전격 합의하였다. 합의내용은 대통령선거 단일후보로 김대중 새정치국민 회의 총재를 내세우는 한편 김종필 총재가 차기 공동정부의 국무총리를 맡고 각료배 분 및 지방선거 공천 등에서 동일한 지분을 보장한다는 것, 그리고 19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하고 개헌 후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우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 장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양당은 11월 3일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문 선언 및 서명식을 가졌다.
한편 후보단일화를 이룬 자유민주연합은 대통령선거 승리를 위한 또 다른 선택으 로 박태준 의원을 영입하였다. 과거 민주자유당 대표를 역임했던 박태준은 당내 계파 갈등 속에 1992년 대통령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직하였다. 이후 4년여 의 공백기간을 거쳐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1997년 7월 24일 경북 포항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면서 다시 일선정치에 복귀하였다. 김종필 총재는 후보단일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박태준 의원과 접촉하여 당 총재직을 제안하며 입당을 권고하였고, 박태준 의원이 이를 받아들여 11월 4일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 다. 이로써 자유민주연합과 새정치국민회의의 후보연합은 충청, 호남에 영남이 결합 하는 이른바‘DJT연합’을 형성하면서 세력이 확대되었다.
한편 박태준 의원의 입당 후 자유민주연합은 약속된 총재 추대의 문제를 두고 그 형식과 절차에 있어 다소 논란을 벌였다. 애초 자유민주연합은 당무회의에서 당헌∙ 당규를 고쳐 총재직을 이양한다는 계획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당의 해산이나 합당, 그리고 총재선출은 당무회의에 위임할 수 없다는 조항이 발견되면서 총재 추대방법을 적법한 공식절차를 통해 선출하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13일 김종 필 총재가 총재직을 사임하고, 이후 11월 21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박태준 의원을 당 총재로 선출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와 함께 중앙위원회에서는 김종필 전 총재를 명예총재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1995년 5월 신민당과 신설합당하여 새로운 자유민주연합으로 재출범한 이후 2년 6개월 동안 유지되어 왔던‘김종필 총재 체제’는‘박태준 총재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 제15대 대통 령선거에서 연합후보로 내세웠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998년 공동 여당으로 변모하였다.
▲자유민주연합 중앙위원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박태준 의원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명예총재와 함께 인사 하고 있다(1997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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