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7일 오후 3시부터 5시 30분까지 국회 도서관 소 회의실에서 박주선, 안효대,송호창의원실이 공동 주최하고 지역차별 극복을 위한 시민행동이 주관한 정책토론회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세분외에도 새누리당 안용준의원,새정치 민주연합 신학용,유인태의원등이 참석하였습니다. 사회는 서태식 상임위원 , 발제 사회는 임두만 칼럼니스트, 패널로는 박경신 고려대 교수 ,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고재일 시사인 기자,주동식 대표 이승훈 대표등이 발제를 하였습니다. 내빈으로는 투계로 유명한 송영 작가님께서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셨습니다.(출처 지역평등시민연대)
우리나라 온/오프라인의 혐오 발언은 그 종류와 성격이 상당히 다양하지만 가장 규모가 크고 장기적이며 악질적인 것이 특정 지역 즉 호남에 대한 혐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제 발제는 호남 지역에 대한 혐오 발언의 현황과 심각성을 짚어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점,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1. 호남에 대한 혐오, 왜 인종주의인가?
(슬라이드 2) 온/오프라인에서 갈수록 심각성을 더해가는 호남 지역 및 호남 출신, 호남의 정치성향에 대한 혐오감의 뿌리에 일종의 인종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호남에 대한 공격을 지역감정 또는 지역차별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그게 어떻게 인종주의가 될 수 있느냐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사전적인 개념의 인종주의를 기준으로 한다면 호남에 대한 혐오는 인종주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의 핵심은 ‘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차별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흑인이나 유대인이 그렇게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호남 사람, 영남 사람, 충청도 사람들도 자신의 출생지를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타고난 조건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타고난 조건을 이유로 사람을 비난하고 모욕하기 시작하면 무슨 수를 써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같은 인종집단 내부의 유전적 차이에 비해 훨씬 사소하다고 합니다. 결국 인종주의적 관점이란 과학적인 근거보다는 다른 사회적 집단을 증오하기 위한 자신들만의 편협한 논거를 과학과 합리라는 외피로 포장한 것입니다. 1965년 유엔총회에서도 지역차별을 인종주의의 한 갈래로 규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호남혐오증에 인종주의적 편견이 내재돼있다는 것은 온라인에서 호남을 폄하하는 표현에서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호남을 공격할 때 쓰이는 종특 즉, 종족 특성이라는 표현은 호남이 애초부터 대한민국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다는 편견을 깔고 있습니다. 호남에 대한 공격을 나름대로 다른 인종에 대한 그것으로 포장하여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세월호 사건에서도 이런 편견과 악의는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슬라이드 3)
-역시 또.. 설마 했더니 전라국이네요.. 아무리 대한민국서 제일 가깝고 가기 쉬운 해외라 해도 전라국으로 여행가는건 아니라고 들었어요(yas0****)
-한국인이 안죽고 절라디언이 죽어 다행이지 않겠노 ㅋㅋㅋㅋㅋㅋㅋ(cafe****)
-선장이 잘못했네. 다른 나라 해역에 들어 갈 땐 반드시 사전에 통보해야 하는데 그냥 들어가니까 쳐들어오는줄 알고 그쪽에서 어뢰 쏜듯(dori****).
이 댓글들은 우리나라 최대의 인터넷 포털인 네이버의 세월호 관련 기사에 달린 것들입니다. 아시다시피 호남 지역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장소일뿐,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호남은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댓글들은 그런 사실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안 좋은 사건이 전라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호남 출신이고 청해진해운의 청해진이 과거 완도의 지명이라는 이유로 그 회사도 호남 회사라는 소문이 인터넷에서 광범위하게 퍼졌습니다. 지금도 막무가내로 이준석은 호남 출신이고 이런 사건이 일어난 호남은 악마의 땅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 댓글의 표현을 주목해보십시오. 전라국, 해외, 한국인이 아닌 절라디언, 다른 나라 해역 등등 어떻게든 호남과 대한민국을 분리해서 별개의 것으로 인식시키려는 악의가 담겨 있습니다. 호남을 향한 저주와 증오가 합리적인 근거나 논리가 아닌, 한번 덧씌우면 어떤 노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악마적인 인종주의적 프레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프레임
호남 사람들도 어떻게든 저 잔인한 인종주의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투리를 고치고 표준말을 사용하거나 호적을 옮기는 것들이 어떻게든 저 인종주의의 굴레를 벗어나 보려는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호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것도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호남놈들, 어떻게 고향을 숨기고 사투리마저 고치느냐? 정말 무서운 놈들, 사기꾼 본능에 철저한 놈들이라는 비난이 따라옵니다.
호남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홍어다, 절라디언이다, 일곱시다, 까보전이다 등의 모욕을 감수해야 합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정당한 의견을 말해도 그 말을 한 사람이 호남 출신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면 그 발언의 가치는 땅에 떨어집니다. 까보전-까고 보니 전라도더라-하는 표현이 이러한 폭력성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무리 좋은 의견, 옳은 말을 해도 그 말을 한 사람이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가치나 진정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노력이 전혀 무의미해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떤 선택이 남게 될까요? 이것은 매우 무서운 결론으로 이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알던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여러 사람 모인 곳에서 “ 호남 사람들은 목회자들도 자기들끼리만 뭉친다” 는 얘기를 하더군요. 자리가 자리인지라 길게 얘기하지는 못했지만 호남에 대한 질시와 혐오가 성직자 신분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죽어라고 증오하니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감추고, 죽어라고 왕따를 시키니까 왕따들끼리 뭉쳐서 자기를 보호하고 아픈 상처를 위로하겠다는데 그것마저도 용납할 수 없나 봅니다.
슬픈 것은 이러한 논리가 우리나라의 진보세력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신안 섬노예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한민국의 인터넷 세상이 온통 호남을 저주하고 증오하는 의견들로 넘쳐났습니다(슬라이드 4).
-저기 경찰하고 섬주민하고 다 한통속이라 탈출도 못한다더라. 여행가려 했는데 무서워서 가겠냐 ㅎㄷㄷ 빨리 여행금지구역으로 지정해야한다.
-역시.........그곳이랑께. 경찰도 동네주민 노예주인 터미널 직원들 모두 한통속이랑께. 이끼 실사판이랑께
-삼성 이병철:전라도 출신은 뽑지말고 뽑더라도 요직에는 앉히지마라ᆢ명언이지
-우리나라도 링컨같은 대통령이 나와서 전라도 노예해방 선언해야될듯
-저 직장 이번에 여수쪽으로 발령받았는데... 정말 많이 위험한가요? ㄷㄷ..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많이 위험한가요??? 여수쪽에는 특히나 섬 많잖습니까
저희 지역차별극복시민행동이 이 문제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만, 섬노예 사건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법적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논리로도 저 사건을 호남과 호남 출신들 전체와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 댓글들은 섬노예 사건=호남, 호남=섬노예 주범들이라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습니다.
진보 진영의 선배와 이 문제로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 호남 사람들도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욕을 먹지 않을 것” 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여쭤봤습니다. “ 섬노예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과 관련이 없는 호남 사람이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 신안군 섬마다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염전노예 찾아내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다 욕을 먹어야 한다는 겁니까? 도대체 그게 가능한 얘기입니까?” 그 선배님, 이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으시더군요.
좀더 유명한 사례가 있습니다(슬라이드 5). 지난 2002년 대선 다음날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진보 논객 한 분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습니다. “ 어떻게 95%가 나오느냐? 민주노동당도 있는데 왜 민주당만 찍느냐? 니들끼리 전라인민공화국이나 만들어라.” 당시 호남의 노무현 후보 지지 몰표에 대한 비아냥과 적대감을 담은 포스팅이었습니다.
웃기는 것은 그 진보 논객이 이명박정권 탄생 이후 “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나라가 이렇게 엉망이 되느냐?” 며 울분을 토했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은 보수세력을 반대하고 보수정권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앞장서서 보수세력의 집권을 반대해온 호남의 정치적 선택에 대해서는 ‘ 지역주의’ 라는 딱지를 붙이는 이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진보진영에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인종주의적 호남혐오증 아니면 설명이 어려운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호남은 무슨 짓을 해도 까보전이고, 알보칠이라는 인종주의적 편견의 진보형 버전이 바로 호남에 대한 지역주의, 토호세력이라는 딱지라고 봅니다. 호남 지역구에서 다선 의원의 배출을 막자는 이런저런 논의도 결국 이런 인종주의적 편견의 연장선에 있다고 봅니다. 호남 니들은 표만 주고, 앞에 나서지는 말라는 거죠. 정치 지도자를 만들지 말고 다른 지역 정치 지도자를 지지하기만 하라는 겁니다.
호남 호적과 사투리를 감추면 고향조차 숨기는 사기꾼이라고 경멸하고, 그래서 호남 사람이라고 드러내고 살면 홍어, 절라디언이라고 욕하고, 왕따를 피해서 모이면 지들끼리만 똘똘 뭉친다고 욕하고, 표는 자신들에게 달라면서도 정작 지지해주면 지역주의라고 비웃습니다.
혐오발언들의 내용이 악랄한 것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호남이 어떤 노력을 해도 저 저주와 증오의 프레임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호남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호남을 욕하는 논리를 그대로 이어가보면 호남 사람들은 모두 이 나라를 떠나거나 심지어 모조리 몰살을 당하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이거 과장이라고 보십니까? 지금도 일베 들어가 보면 홍어, 절라디언 몰살시켜야 한다는 저주의 외침이 수없이 올라오고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원론적으로 이것은 이 나라 공동체를 공중분해시키는 내란의 범죄라고 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목소리는 너무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에는 성 소수자, 다문화 가정 등 소수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인권에 대한 민감성/감수성이 높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반려동물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호남 사람들이 당하는 모욕과 고통, 끔찍한 소외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곧장 지역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지역차별을 고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지역주의입니까? 불이야 외치는 자가 방화범이 되고, 강도를 신고하는 사람이 강도로 몰리는 세상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3. 소수 루저들의 문제다?
호남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 문제될 때마다 나오는 전형적인 반응이 ‘ 철이 안 든 몇몇 소수 루저들의 일탈 행동일 뿐, 너무 심각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이런 의견을 믿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저런 진단이 사실이라면 정말 안심하고, 시간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안타깝지만 호남 증오 현상이 소수 루저들만의 일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혐오 발언이 주로 생산되는 일베의 경우 동시 접속자 수가 2만~3만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2012년 말 기준으로 일베 회원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은 13만 명에 이른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비교하자면 정기구독자 100만 명에 어떤 형태로건 글을 기고하는 필자가 10만 명이 넘는 일간지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언론매체는 많지 않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조중동이나 KBS, MBC, SBS에 맞먹는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대 언론매체가 매일매일, 순간순간 호남에 대한 저주와 증오, 홍어들 다 때려죽이고 몰살시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거 나라 망할 일 아닙니까?
상당히 정밀한 데이터와 정제된 논리를 갖추지 않으면 저런 지지층, 독자층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베의 일반 사용자들에게 논리와 이념, 데이터를 제공하는 고급 사용자층 즉 지식인들이 배후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일베가 팩트를 강조하는 것도 나름 근거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호남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이랄까, 패륜적인 행위만 아주 상세하게 모아놓은 파일을 인터넷으로 받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대단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호남 사람들의 온갖 약점을 어쩌면 그리도 상세하게 모아놓았는지 충격이더군요. 그 파일이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두 가지 측면이었습니다.
첫째, 비록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된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특정 주제의 자료를 그렇게 모을 정도라면 일상적으로 그런 자료를 다루는 사람 즉 상당한 학문적 훈련을 받은 지식인일 거라는 점. 둘째, 그 파일을 만든 본인에게 금전적으로나 학문적 업적으로나 직접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님에도 그런 작업에 매달릴 수 있는 그 증오와 집념.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지식인들은 이 나라 전체의 자원을 이용해 나라의 미래를 모색하는 역할로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훈련받은 지식과 전문성을 활용해 이 나라 공동체를 뿌리째 흔드는 일을 한다는 게 저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악의를 집요하게 실천에 옮긴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이해관계와는 좀더 다른 집단 무의식과 집단지성이랄까 그런 것을 확인한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향 아닌 다른 지역을 비하하는 표현들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런 비하가 꼭 호남만을 향한 것도 아닙니다. 영남 보리문둥이, 강원도 감자바위 등. 그런 점에서 이 문제를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 분들이 결정적으로 놓치시는 게 있습니다. 그런 소프트한 폄하 발언 등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호남 증오 발언과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 점을 놓치면 왜 호남 지역을 향한 혐오 발언이 유난히 폭력적이고 악의적인지, 왜 지속적으로 강화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호남 혐오는 우리나라 기득권층이 정권을 재창출하고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경제적이고 비용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방치한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거나 약화될 수 없는 사회적 메커니즘입니다.
홍어족, 절라디언, 펭귄/쩔뚝이(김대중 전 대통령을 혐오하는 발언), 까보전, 알보칠 등 호남 혐오발언의 폭탄 세례를 퍼붓기만 하면 대통령 선거나 총선, 지방선거 등에서 땅 짚고 헤엄치기로 손쉽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현상이 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서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고, 그 집단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 호남 혐오 현상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화되고 악질화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일베의 등장과 영향력 강화가 이러한 진단을 뚜렷하게 증명해줍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군부 엘리트들의 물리력을 기반으로 손쉽게 정권을 창출하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즉, 범보수진영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주자가 흔히 군사정권이라고 불리는 군부 출신 정치 엘리트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87년 체제가 들어선 이후 이들 군부 엘리트들의 물리력을 배경으로 한 집권 연장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선거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는 합법적인 권력을 창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범 보수 진영의 대표주자를 바꾸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즉, 물리력을 통하지 않고 의제 설정과 데이터 발굴, 논리 구축, 이미지 메이킹 등을 통해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이 정권 창출과 유지의 주도 세력이 되는 겁니다. 조선일보 등 메이저 언론사들이 ‘ 대통령을 만드는 신문’ 의 역할을 자임하고 실천에 옮겼던 것이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슬라이드 6).
일베는 이러한 노력이 이제 메이저 언론 등을 활용한 제도권의 범위를 벗어나 확산되는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베에 철없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호남 혐오 논리의 수용층이며, 이들에게 논리와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은 보다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고급 지식인 계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베에서 호남 혐오 콘텐츠가 유포되고 일종의 대중적 검증을 거친 뒤 네이버나 기타 인터넷 코뮤니티로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베 현상은 증오심에 물들고 기득권 옹호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지식인들의 왜곡된 논리에 젊은이들이 포섭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시급하게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일부 철없는 루저들의 일탈이기 때문에 그냥 방치해도 된다는 논리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 것입니다. 이 문제를 그냥 방치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 나중에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4. 심각한 후유증 불가피
경제학에서 외부효과(Externality)란 것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기업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오폐수를 근처 하천에 방류하면 악취가 발생하고 인근 주민들의 건강이 나빠집니다. 문제는 주민 치료비나 하천 정화 비용을 해당 기업이 지불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폐수를 발생시키면서 얻은 이윤은 기업의 소유인데 그 피해 비용은 주민들과 지역사회, 국가 전체가 지불합니다. 게다가 기업이 얻는 이윤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총량 비교하면 비용이 더 큰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지역차별과 혐오발언이 이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호남 혐오 발언을 부추겨서 이익을 얻는 집단은 소수의 기득권 세력인 반면 그 피해는 호남만이 아니라 전국민에게 돌아갑니다. 혐오발언 조장을 통해 기득권 집단이 얻는 이익이 10 정도라면 이 민족의 현재와 미래에 끼치는 후유증은 1백, 1천, 1만을 뛰어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호남 혐오와 왕따는 일종의 사회적 학살이라고 봐야 합니다(슬라이드 7). 산업화가 본격화되던 1970년 호남(광주 전남 전북)의 인구는 565만2000명으로 전국의 20.4%였지만 40년이 지난 2010년 호남의 인구는 506만 명,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0.2%로 반토막이 났습니다. 줄어든 인구는 먹고살 길을 찾아 수도권이나 영남의 공업지구로 옮겨갔다고 봐야 합니다.
호남 인구가 국내에서 단순히 수평 이동한 것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을까요? 호남 출신에 대한 혐오나 기피, 왕따 등을 고려해보면 이들이 낯선 타향 땅에 잘 적응해서 살았을 거라는 해피엔딩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호남 출향민들이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고 육체적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간접적인 자료가 서울시 저소득층의 출신 지역 분포입니다. KDI가 1981년 서울시 저소득층의 출신지역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호남 32.6%, 충청 17.9%, 서울 16.4%, 영남 12.6% 등의 비율로 나옵니다. 1990년 현대사회연구소가 서울지역 저소득층 가구주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비슷합니다. 출신지별로 호남(34.7%), 충청(23.4%), 영남(13.4%), 서울(11.3%), 경기(8.9%)등의 비율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경제적 지위의 추락은 생활의 여유와 신체적 건강을 포함한 삶의 전반적인 조건이 취약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호남 출향민들이 타향 땅에 뿌리박고 삶의 터전을 장만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규모의 숫자가 열악한 조건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소득 낙후, 교육 혜택의 소외, 건강의 악화, 3D 분야 종사에 따른 생존 압력 등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광주항쟁의 경우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호남에 대한 사회적 학살에서는 수십 년에 걸쳐 수만 또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희생됐다고 봅니다. 일부 사람들은 앞으로 호남이 아메리칸 인디언처럼 소수화되어 소멸의 길을 걷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합니다.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피해 외에 정신적인 후유증이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상처는 비교적 쉽게 아물고 치료되지만 정신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치료하기도 어렵습니다. 호남을 향해 퍼부어지는 온갖 저주와 모욕이 그냥 장난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질까요? 지금 호남 사람들이 반박도 못하고 죽은 듯이 지내니까 앞으로도 그냥저냥 저렇게 살 것 같습니까?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때려도 헤헤 웃으면서 언제까지나 그냥 그렇게 지나갈 것 같습니까?
인간이란 것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모욕감은 절대 그냥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육체의 상처와 달리 정신적인 고통과 모욕감 등 상처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오히려 더 증폭되고 악화되기 쉽습니다. 이것이 임계점을 지나 폭발하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다가 아메리카 인디언과 달리 호남은 쉽게 짓밟을 수 있을 만큼 소수가 아닙니다. 호남 거주민과 호남 출신들 즉, 호남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적게 잡아도 전체 국민의 20~25% 수준입니다. 전국민의 4분의 1 또는 5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모욕당하고 저주와 증오, 왕따의 대상이 되는 나라가 과연 제대로 운영되고 유지되고 건강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 외부의 어떤 세력이 작심하고 이런 상황을 악용하려고 든다면 이 문제는 우리 내부의 화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과거 인터넷에서 지역간 악플 경쟁이 벌어질 때 말투나 표현이 이상한 사람들이 끼어드는 사례가 발견된 적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이간질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요, 호남 왕따나 저주, 증오, 모욕 현상이 지속될 경우 우리나라가 외부의 악의적 이간책이나 공작에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무엇보다 호남 차별과 증오, 혐오 현상은 이 나라의 정신적 생태계를 심각하게 훼손하게 될 것으로 우려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아닌,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어떤 집단에 포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욕과 차별, 공격을 당하게 된다면 그런 사회는 더 이상 정의와 공평, 합리주의와 법치주의의 질서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서로를 도와서 발전으로 나아가는 선순환의 생태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공격해서 다함께 몰락하는 악순환의 생태계가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최근 연세대에서 원주 캠퍼스 학생들을 원세대생이라고 부르고 성골, 진골을 따진다는 기사가 나와서 충격을 주었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호남 왕따 현상과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연세대는 몇 년 전 연고전에서도 총학생회 차원에서 호남을 비하하는 플래카드를 거리에 내걸어 문제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봅니다.
5.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 문제의 피해자이자 당사자인 호남 출신들 그 중에서도 호남 출신 엘리트들이 이 문제의 해결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의외로 호남 출신 엘리트들이 이 문제의 해결에 소극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 이렇게 한다고 해서 뭐가 해결되겠느냐?” 는 반응이 많았고 심지어 “ 이런 일을 하더라도 호남 사람이 앞에 나서면 안 된다” 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자기검열 또는 패배의식이 심각한 상태라고 봅니다. 이것은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호남 정치엘리트들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거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커지는 괴물이니 아예 입 밖에 꺼내지도 말고 모르는 척해라” 는 것입니다.
호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입장에서 이런 태도도 이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호남에 무슨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공화국에서 당연하게 보장되는 최소한의 권리, 인간적인 모욕과 증오, 공격을 피하게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이런 것도 요구할 수 없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아닐 것이고 그런 대접을 감수하는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라 합법적인 노예 신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호남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칼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똑같이 칼을 들고 대항하자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서 “ 그 칼 내려놓으라” 고 요구하자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조차도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그런 발언 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냥 칼로 난도질하는대로 그냥 죽으라는 얘기밖에 더 됩니까?
그런 소극적인 대응 방식으로 호남 혐오 현상이 조금이라도 개선된다면, 하다못해 그냥 현상유지라도 된다면 그런 대응 방식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한 나라의 동포들을 향해 홍어니 절라디언이니 하는 인종주의적 공격과 함께 “ 사내놈들은 때려죽이고 계집들은 강간하자” 는 추잡한 목소리가 저렇게 공공연하게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10여년 전만 해도 이런 식의 노골적인 공격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슬라이드 8).
이 문제는 인간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으로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기본 원칙은 개인마다 자신의 행동에 상응하는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이고 정의의 기초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호남 혐오와 저주, 증오만은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고 왕따를 시켜도 거기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법제화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합리적이고 신중한 자세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 법제화 처벌 기준은 △친고죄 조항에 대한 재검토
△집단모욕죄의 적용 확대 △장기적으로 고의성을 띤 행동의 제재 등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법률 전문가와 시민단체 여러분들의 폭넓은 의견 수렴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표를 마치면서 두 가지 점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호남에 대한 혐오나 증오, 왕따 현상에서 호남의 책임을 무조건 외면하고 호남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일방적 주장, 흑백논리를 펼치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 어렵지만, 저는 이 문제의 전향적 해결을 위해 가해자 못지 않게 피해자인 호남도 적극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호남과 영남 나아가 전국의 양심적인 엘리트들의 동참이 없이는 이 문제의 해결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로 이익을 보는 것은 소수일뿐 실은 호남과 영남 나아가 대한민국이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우리 안의 일베vs우리 밖의 일베
▲고재열 시사IN 문화팀장발제문 발표(2014.07.07)
우리 안의 괴물, 일베는 어떻게 성장했나?
‘일간 베스트 저장소’, 이른바 ‘일베’가 여전히 논란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를 ‘홍어’ 로 부르며 희롱하고, 여성을 ‘김치년’이라 부르며 비하하고, 이주노동자 자녀를 강간하겠다고 예고하고, 박정희·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무조건적으로 칭송하는 이 사이트 이용자들의 일탈이 언론에 두루 보도되었다. 이곳에 광고하는 업체에 대한 불매운동이 시작되자 광고 대행사들이 광고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일베에 대한 여론은 일방적이었다. 일베는 혐오스러운 글이 올라오는 곳이고 일베 이용 자들은 ‘찌질이’ ‘루저’일 것이라는 반응이 일반적이었다. ‘남자친구가 일베한다’는 것은 젊은 여성의 고민 상담꺼리였다. 일베를 옹호하고 두둔하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일베 현상은 싱겁게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과연 그럴까? 언론의 고발 보도와 대중의 낙인이 일베 현상을 잠재울수 있을까?
일베는 여전히 건재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자 일베는 건재함을 증명했다.
일베 밖에서는 모두가 ‘국가의 부재’를 한탄할 때 일베 안에서는 국민의 미개함을 꾸짖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죽였냐? 박근혜 대통령은 할만큼 했다. 유족이 벼슬이냐?’며 정부를 두둔했 고, ‘세월호 침몰 사건을 이용하려는 무리가 있다! 나라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라며 정부를 옹호했다.
세월호 참사 때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국가의 무능을 질타했다. 그것은 공동의 화평을 추구하는 ‘공화국’의 전제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업발전과 민주화를 통해 이룩한 나라가 최소한 이 정도는 지켜주겠지, 이 정도는 기대할수 있겠지, 하는 전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한탄했다. 사고 발생 원인과, 사고발생과정, 그리고 사고수습과정에서 이 전제는 연이어 무너졌다.
일베는 일종의 세계관이다. 그들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와 책임의 문제에 대해서 인식을 공유한다. “국민 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한데 대통령만 신적인 존재가 돼서 국민의 모든 니즈를 충족시키길 기대하는게 말도 안 되는 거지. 국민이 모여서 국가가 되는건데 국민이 미개하니까 국가도 미개한 것 아니겠냐”라는 정몽준 막내아들의 말은 이런 일베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왜 맨날 국가탓만 하느냐, 너희들이 못나서 당한 일이다’라며 국가가 아니라 국민 개인의 책임으 로 돌린다.
모든 국민이 슬픔을 공유할 때 일베는 슬픔에 공감하려 하지 않고, 그 슬픔과 선긋기를 한다.
이런 논리다. ‘너의 불행은 어쩔 수 없어. 나는 4년제 대학인데, 너는 아니잖아! 나는 남자인데, 너는 아니잖아! 우리 부모는 돈이 있는데, 너는 아니잖아! 나는 학벌이 있는데, 너는 아니잖아’라며 현재의 행복과 불행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로 설명한다.
반면 그들은 ‘국가의 의무 불이행’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보호받는 범주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국가가 저들까지 보호하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버리는 카드’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이 세월호 유가족의 불행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인지가 설명이 된다. ‘버리는 카드’의 불행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버리는 카드’인 사람과 그들을 동정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든다고 역정을 낸다. 일베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국민들에게 질타를 받았던 KBS 간부들의 생각이었고 설화를 일으킨 새누리당 의원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지방선거의 마지막 구호는 ‘박근혜 대통령을 살리자’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베적 사고는 박근혜 대통령까지 이어진다. 흔히 말하는 ‘유체이탈 화법’이 가능한 이유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와 관련해 국가에 책임이 있고 그 최종 책임자가 본인이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직후에 행한 다음의 발언과 이후 상당기간 사과를 하지 않고 버틴 것은 이런 인식에서 나온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이튿날, 박근혜 대통령이 실종자 가족이 모여 있는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데 대해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을 해서, 책임질 사람은 모두 엄벌토록 할 것이다.” 많은 언론은 이 발언을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 준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이 발언의 핵심은 다른 데 있었다. 이 결정적 발언으로 대통령은, ‘시스템의 최종 책임자’에서 ‘구름 위의 심판자’로 자신을 옮겨놓았다. 시스템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최종 책임자는 자신의 책임을 말하는 대신 ‘책임질 사람에 대한 색출 의지’를 과시하는 단죄자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침몰하는 시스템에서, 대통령은 그렇게 가장 먼저 ‘탈출’했다.”(‘국가도 기다리라고만 할 것인가’, 시사IN 345호)
일베와 재특회는 일란성 쌍둥이, 재특회를 보면 일베가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일베는 세계관의 문제다. 일베 현상을 피상적으로만 보는 우리가 참고해야 할 책이 한권 있다.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 씨가 쓴 <거리로 나온 넷우익>(원제 <인터넷과 애국: 재특회의 ‘어둠’을 좇아서>)이 바로 그 책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신세대 우익 단체로 ‘조선학교 무상교육 반대’ ‘외국국적 주민에 대한 생활보호 지원금 지급 반대’ ‘불법 입국자 추방’ ‘핵무장 추진’을 주장하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을 탐사 보도 한 책이다. 많은 재특회 간부와 회원들을 일일이 인터뷰하고 집요하게 취재해서 쓴 책이다.
일본 누리꾼들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게시판인 ‘2채널’의 보수 성향 이용자들이 만든 재특회 와 한국의 일베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둘의 행태를 보면 마치 평행이론의 사례인듯 일본과 한국의 청년 우익 세력이 서로 조율하며 행동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군국주의 일본을 칭송하며 종군 위안부를 부정하는 재특회의 모습과 독재정권을 칭찬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을 매도하는 일베의 모습이, 재일 한국인과 부락민을 비하하는 재특회의 모습과 호남과 여성을 비하하는 일베의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유사하다.
야스다 씨가 재특회 회원들에게 가입 동기와 관련해 가장 자주 들은 말이 ‘진실에 눈을 떴다’ ‘진실을 알게 되었다’였다. 인터넷을 통해 재특회의 주장을 접하고 감화해서 가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젊은 재특회 여성회원은 “2채널에서 정보를 검색하거나 ‘혐한류’를 읽거나 하면서 재일 특권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대로는 일본을 반일 세력에 빼앗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넷우익’이라 불리는 일본의 신흥 우익은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확장되었다. ‘ 변형 오타쿠’ ‘공격적인 은둔형 외톨이’로 묘사되는 이들은 ‘일베충’으로 묘사되는 일베 이용자들 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일베 이용자들과 다른 점은 훨씬 조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2006년 ‘동아시아문제연구회’를 조직했다가 2007년 ‘재특회’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재특회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애당초 식민 지배는 없었으며, 강제 연행이나 종군위안부 등은 좌익 세력의 날조에 지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은 한반도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근대화를 도왔으며, 교육의 부흥에 힘썼다.’ 제국주의 일본의 자리에 박정희나 전두환의 이름을 넣으면 그대로 일베들의 주장, 즉 ‘일베올로기(일베+이데올로기)’가 된다.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재일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재특회는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 등이 자학사관을 가르치며 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조장한다면서 엘리트 좌파를 비난한다. 이는 호남인 혐오를 조장하고 진보 인사를 ‘좌좀(좌파 좀비)’이라고 매도하는 일베의 논리 구조와 흡사하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속성도 닮았다. 야스다 씨는 “내가 접한 재특회 회원들은 친구나 가족에게 활동 사실을 감추거나 처음부터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반쯤 포기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라고 전했다. 일베 이용자들은 자신이 일베 이용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일밍아웃(일베+커밍아웃)’이라고 말한다.
1만명 이상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고 전국에 34개 지부가 구축된 재특회는 일본 보수우익 단체 중 최대 규모로 꼽힌다. 경비원 출신의 사쿠라이 마코토(닉네임)라는 탁월한 리더를 가진 재특회가 조직력에서 우위를 보인다면 일베는 인터넷 공간의 활용에서 한수 위다. 일베는 25단계 의 등급을 두어 추천을 많이 받는 회원일수록 등급을 올릴수 있게 했다. 일종의 게임 요소를 사이트 운용에 도입한 것이다.
약자를 강자로 둔갑시키고, 자신들은 약자 코스프레
흥미로운 것은 양쪽이 ‘이슈 파이팅’을 하는 프레임까지도 닮았다는 점이다. 둘다 자신들을 ‘ 이념적 소수자’, 즉 약자로 규정하며 누리꾼의 피해의식을 자극한다. 재특회 회원인 니시무라 히토시 씨는 “끝도 없이 일본을 모욕하고, 날조된 역사로 보상금을 타내려 하고, 일본에서 일본인 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정치 활동을 하는 재일 한국인에게 항의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재특회 회원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재특회는 유엔 인종차별위원회에 보낸 항의문 에서 재일 한국인을 ‘외국에서 온 백인’으로, 그리고 일본인을 ‘원래 살던 흑인’에 비유하며 차별 받고 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일베 이용자에게도 일베는 ‘이념 해방구’다. 오프라인이나 다른 온라인 공간에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 지난해 동국대 정 아무개 교수는 일베에서 ‘신상이 털리는’ 곤욕을 치렀다. 강의 시간에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이유에서인데 수강생이 일베에 관련 내용을 올리면서 본인의 페이스북 글들이 캡처되는 등 수난을 당했다. 해당 교수는 그런 문제 제기가 일베에 ‘고발’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재특회의 중요한 프레임 중 하나는 좌파 집단을 부르주아 엘리트 집단으로 규정한다는 점이 다. 요네다 류지 재특회 홍보국장은 “우리는 일종의 계급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은 특권 에 대한 비판이고, 엘리트 비판이다. 원래 좌익은 사회의 엘리트다. 예전의 전공투 운동도 사실은 엘리트 운동이었다”라고 말했다. 진보 성향 인물을 비하하며 ‘씹선비’라고 부르는 일베 이용자들 의 인식과 비슷하다.
문제 제기의 방식이 ‘혐오 발화’(인종·특징·외모 등을 이유로 타인을 모욕하는 언동)라는 점도 똑같다. 재특회 회원들은 일제강점기 때의 표현인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을 비롯해 ‘바퀴벌레 조선인’ ‘쫑코’ 등으로 비하해서 표현하고 집회할 때마다 “우리는 조선인을 죽이러 왔다”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런 표현 방식에 대해 홋카이도 지부장인 후지타 세이론(닉네임)은 “ 운동은 충격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나가라’ ‘쫓아내라’ 같은 말은 분명 반감을 산다. 하지만 그 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라고 말했다.
한국 인터넷 문화에서 ‘혐오 발화’가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한 것은 2008년 촛불집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전까지는 부정적인 인터넷 문화로 배척되던 ‘혐오 발화’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보편화되었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가 인기를 끌었던 비결도 바로 이런 혐오 발화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욕으로 도배한 그의 글은 조회수가 폭발했다. 이런 ‘혐오 발화’는 ‘가카 헌정 방송’을 표방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까지 이어졌다. ‘진보 성향 누리꾼들도 이 명박 대통령에게 그러지 않았느냐’며 일베 이용자들이 극단적인 표현을 거리낌없이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그 반동이다.
증오와 미움을 부르는 ‘혐오발화’의 일상화
선의가 아닌 악의에 호소하는 방식은 인터넷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2009년 겨울 재특회는 교토의 조선제1초급학교에서 기습 시위를 벌였다. 학교 앞 공원을 학교 운동장처럼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일본의 많은 인권단체가 초등학생 앞에서 시위한 것을 맹비난했지만 재특회 회원들은 개의치 않았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한 회원은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재특회가 했다. 정의의 싸움이다. 나는 용기를 얻었다”라고 말했다. 재특회에 이 학교 문제를 제보했던 일 본인은 “재특회가 다소 거친건 사실이지만, 그들의 주장은 우리의 마음속 외침이기도 하다”라고 변호했다.
여기에 치졸한 소영웅주의가 더해지면서 운동은 더욱 과격해진다. 나중에 재특회를 탈퇴한 나카타니 다쓰이치로 씨는 “우리 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았다. 그래서 거기에 부응하려고 다들 필사적이었다. 그게 무서워서 내심 움찔했지만, 그래도 내달렸다. 블로그나 동영상의 조회수를 늘리려면 과격한 방향으로 치달릴 수밖에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비슷한 양태가 일베에도 나타난다. 덕분에 비밀이 없다. 일베 이용자들의 소영웅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국정원이 안보교육 명목으로 이용자들을 몰래 초대해서 접대해도 이들의 인증샷 때문 에 바로 탄로가 난다. 미디어워치 변희재 대표와 탈북 영화감독 정성산씨가 강연한 내용, 그리고 교육에 초대된 이용자들이 국정원 ‘절대시계(일베 회원들은 국정원 마크가 있는 시계를 이렇게 부른다)’와 스마트폰 케이스, <어느 지식인의 죽음>과 <빠이 전교조> 책 한권씩과 5만원어치 문 화상품권을 받았다는 사실도 곧바로 알려졌다.
이렇게 친하게 지내다가도 이탈하면 가차 없이 비난한다. 재특회 지부장 출신의 한 탈퇴자는
“이견을 제시하면 ‘조선인과 좌익의 앞잡이’라며 배제당한다. 언제부터인가 무슨 일이든 소동을 일으키는게 목적이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극우 언론인으로 추앙받던 조갑제씨가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주장은 허황된 것”이라는 글을 쓴 후 일베 이용자들에게 ‘종북’으 로 몰리는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한류 드라마를 많이 방영한다는 이유로, 반공 재벌 미즈노 시게오가 설립하고 대표적인 보수 신문(<산케이 신문>)을 계열사로 둔 후지TV를 쳐부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재특회나, 삼성 설립자 이병철 회장의 장손이 설립한 CJ 계열의 케이블 채널(tvN)을 종북방송이라고 비난하는 일베의 모습은 정확히 겹친다.
야스다 씨는 재특회가 과격한 방식 때문에 다른 보수 우익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지만 계속 확장세라며 해마다 수입이 비약적으로 느는데 거의 전액이 기부금이라는 사실, ‘활동에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활동비만은 내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그는 “재특회는 ‘ 강력한 자력’이 있다. 무언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분노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국가적인 분위기로 확산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수 언론까지 일베를 공격하는 상황이지만 이 상황이 일베의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될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야스다 씨는 책에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재특회와 그 관계자를 취재하다 보면 허탈한 일이 너 무도 많다. 동영상과 인터넷만 보고 얼마나 나쁜녀석인가 생각해 긴장하지만, 실제로 만나면 평범하다고밖에 할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사람 좋은 아저씨나 착해 보이는 아줌마, 예의 바른 젊은이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작은 증오가 재특회를 만들고 키운다. 거리에서 소리치는 녀석들은 그 위의 고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저변에는 복잡하게 뒤엉킨 증오의 지하수맥이 펼쳐 져 있다.”
<보론> 공감 사회의 그늘
- 세계관(世界觀)의 일치뿐만 아니라 세계감(世界感)의 일치까지 요구하는 사회
(최근 SNS 상에서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반목이 생기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어서 이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헐~’ ‘즐~’ ‘대박!’…. 청소년들이 주로 쓰는 감탄사였다가 어른들까지 쓰게 된 단어들이다.
형용사에 ‘개’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개더워’ ‘개멋있다’ ‘개불쌍해’ 이런 단어는 아직 어른들은 쓰지 않지만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왜 이런 단어들이 그리 많이 쓰일까?
청소년 문제 전문가들은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단순히 겉멋 들려서가 아니라 감정의 강도를 공유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네가 그렇게 강하게 느꼈어, 나도 그렇거든’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단지 ‘네 생각에 나도 동의해’ 정도로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강도까지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시대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혹은 카카오스토리) 밴드 등의 서비스를 통해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기성세대 역시 ‘공감능력’이 중요시된다. 그래서 이런 서비스에는 ‘좋아요’ ‘멋져요’ ‘부러워요’ ‘싫어요’ 이모티콘이 있어 공감을 표시하게 해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으면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소통의 시대는 공감의 시대다. 열심히 소통하고 공감하라며 충고한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공감치’라며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공감의 시대에도 그늘이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인하지 못하던 시대를 거친 우리는 ‘나와 다른 감정의 강도’를 가진 사람도 용인하지 못한다.
처음에 즐겁게 SNS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자신과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SNS 서비스는 ‘친구 끊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불편한 생각을 덜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렇게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분리하기 시작하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다른 은하계에 살게 된다.
그런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감정의 강도에 따라서 분리가 일어난다. 몇 번의 큰 사회적 사건을 거치면서 나와 감정의 강도가 다른 사람들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슬퍼서 이렇게 분향소도 방문하고 우울하게 지내는데 너는 왜 그리 밝고 가족 여행까지 가는거야?’라며 상대방과 관계를 끊는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슬픔에의 강요를 겪었다면 월드컵 때는 기쁨에의 억제를 강요받았다. ‘ 내가 세월호 참사를 잊고 월드컵에 빠져도 되는 것일까?’ ‘월드컵은 브라질 철거민의 눈물 위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즐겨도 되는 것일까?’ 식의 자기 검열이 이루어지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사용하는 SNS에서 남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왜 사람들은 강정의 슬픔을 잊은거지?’ ‘왜 밀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거야?’ 라는 생각들이 집단적인 감정의 일치화를 강요한다. 내 SNS 타임라인에서 나와 비슷한 감정의 파장이 느껴져야 안심한다. 혹시나 내가 그런 문제에 무심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적절히 맞장구 쳐주고 가끔씩 감정을 발산한다. 공감치가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이런 공감의 강요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그래서 SNS 공간에서는 때로 ‘집단지성’이 아니라 ‘ 집단 무의식’이 작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게을리 하고 ‘그래서? 그래서 우리 편은 어떻게 생각하면 되는거야,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거야’라며 온라인 준거집단의 판단에 기댄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기 시작한다.
일치에 대한 강박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다. 분단 사회였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공격받았다. 그래서 내 생각이 보편적인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강요받았다. 예전에 사고의 일치를 강요받았던 것처럼 지금은 감정의 강도를 맞춰줄 것을 강요받고 있다. 이것은 부자유스럽다.
김수영 시인의 시 ‘김일성 만세’를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김수영 시인은 “‘김일성 만세’ /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 인정하는데 있는데 /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이라고 절규했다. 마찬가지다. ‘내 생각이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인가?’라고 불 안한 시대가 정상이 아니듯 ‘내가 다른 사람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라고 불안한 시대도 정상이 아니다.
강요받은 공감은 공감이 아니다.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공감은 자발적 관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누구나 스스로의 관심을 좇을 권리가 있다. 이것을 허용하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자발적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공감이 진정한 힘을 갖는다. 내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에서 남의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진정성이 나온다.
3. 모욕죄의 보호법익 및 법원의 현행 적용방식에 대한 헌법적 평가
○박경신(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가연(金加娟) 변호사
- 1980.10.19(生 서울 서초) · 사법시험 51회·사법연수원 41기
- 소속: 사단법인 오픈넷
▲박경신 고려대 법대교수 발제문 발표(2014.07.07)
<국문초록> 모욕죄는 통설과는 달리 외부적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내부적 명예감정을 보호하는 것이다. 19세기 독일문헌에서 모욕죄가 ‘외부적 명예’를 보호한다고 한것은 해당 언사의 내용이 대상자의 사회적 지위가 요구하는 경외심을 표명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대상자에 대한 제3자의 평가 즉 사회적 평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20세 기 들어와서 모욕죄를 사회적 지위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보호규범으로서 호명할 수 있도록 독일법원의 판례가 바뀌면서 ‘외부적 명예’와 ‘내부적 명예’의 구분은 없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대법원 판례를 살펴보더라도 이와 같은 모욕죄의 객관적 실체가 확인된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명예감정은 타인의 단순한 의견이나 감정의 표현에 의해서 쉽게 훼손될 수 있다. 교수가 학생에게 ‘C’라는 평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학생의 명예감정은 쉽게 손상될 수 있다. 모욕죄는 명예감정을 보호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단순한 의견과 감정의 표명을 제한하게 된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의견과 감정의 표명을 명예감정의 보호를 이유로 제약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 보호의 대원칙인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다. 혐오죄의 보호법익인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감의 파괴는 표현의 자유 제약을 정당화하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될 것이나 모욕죄는 이를 넘어서서 명예감정 전체를 보호영역으로 두고 있기때문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다.
물론 모욕죄는 모든 의견과 감정의 표명이 아니라 그 표명이 경멸적인 언사를 동원하여 이루어질 때만 적용된다. 하지만 무엇이 경멸적인 언사인지에 대해 대법원은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은 화자의 경멸적인 태도가 담겨있는 거의 모든 언사들을 우선 범죄구성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인정한 후에 여러가지 주변정황들을 근거로 형법 제20조의 ‘사회상규’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무죄로 판시하는 2단계 방식의 판시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2단계방식은 명확성의 원칙을 위배한다. 우선 대법원은 경멸적인 태도가 담긴 모든 언사들을 범죄구 성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보고 ‘사회상규’를 근거로 유무죄를 나눈다는 것은 ‘사회상규’가 위법성조각사유가 아니라 범죄구성요건으로 기능함을 뜻한다. ‘사회상규’가 범죄구성요건으로서는 명확성의 원칙을 위반한다.
또 명확성의 원칙은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는 단순히 일반인들에게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통보하는 것을 넘어서서 일반인들이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여 종국적 으로 합법적으로 판단될 표현을 자제하는 현상 즉 ‘위축효과’가 없을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법원이 ‘사회상규’와 같이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위축효과’를 발생시킨다.
혐오죄처럼 국가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감의 보호를 위해 입법을 하는 것은 당연하나 명예감정은 더 높은 차원에서 단순히 타인과의 비교를 매개로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인데 이를 보호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명예감정의 보호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정당한 입법목적이 될수 없다. 또 혐오죄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 해 사회적 소수를 그 소수자의 차별과 핍박에 동원되었던 언사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모욕죄는 그렇지 않은 모든 언사도 처벌하기 때문에 침해의 최소성 원칙도 위배한다.
헌법재판소는 여러 차례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밝힌 바 있는데 1)리딩케이스인 95헌가16 판 결에서 “민주주의는 사회내 여러 다양한 사상과 의견이 자유로운 교환과정을 통하여 여과없이 사회 구석 구석에 전달되고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그 꽃을 피울 수 있게 된다. 또한 언론ㆍ출판의 자유는 인간이 그 생활 속에서 지각하고 사고한 결과를 자유롭게 외부에 표출하고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스스로 공동사회의 일원으로 포섭되는 동시에 자 신의 인격을 발현하는 가장 유효하고도 직접적인 수단으로서 기능한다”라고 하여 의견도 당연 히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포함됨을 밝힌 바 있다.
형법 제311조는 “공연히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보통 욕설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욕설은 타인에 대한 증오나 경멸의 표현으로서 극단적이기는 하나 어찌되었든 타인에 대한 평가로서 견해의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타인에 대한 견해표명을 금지하는 형법 제311조에 대해 논의해보 고자 한다.
2008년도에 한나라당이 모욕죄를 친고죄에서 반의사불벌죄로 전환하여 모욕을 당한 사람의 고소가 없이도 검찰이 모욕적 언사를 사용한 자를 처벌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소위 ‘사이버모욕 죄’) 시민단체들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 모욕죄 고소라는 도덕적 장애물을 넘지 않고 자신들에 대한 비난을 입막음하기 위한 입법’이라며 반대하여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많은 문헌이 인터넷공간의 특수성이나 고소요건 폐지의 당부 등을 들어 소위 ‘사이버모욕죄’를 평가한 문헌들은 많이 있으나 모욕죄 자체를 헌법적으로 평가한 경우는 드물었다. 2)
여기서는 모욕죄 자체를 헌법적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그 평가의 대상이 되는 모욕죄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1)헌재 1993.5.13. 91헌바17, 판례집 51,275,284; 헌재 1996.10.4. 93헌가13등, 판례집 82,212,222; 헌재 2001.8.30. 2000헌가9, 판례집 132,134,148 등 참조. 2) 박경신, “모욕죄의 위헌성과 친고죄 조항의 폐지에 대한 정책적 고찰”, 「고려법학」, 2009년 52호, 고려대학교 법학연구원, 263-299쪽. 독일에서는 모욕죄 자체가 명확성의 원칙을 위반한다는 논의가 있다. Ralf Stark, Ehrenschutz in Deutschland 26(1996). 139쪽.
Ⅱ.모욕적 표현도 헌법적 보호를 받는가?
헌법재판소는 일반적으로 가치가 높지 않다고 여겨지는 상업적 표현 및 음란물 등에 대해서 헌법적 보호대상이 된다고 판시한바 있다. 상업적 광고도 언론ㆍ출판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다고 하였으며 3) , 심지어는 “‘청소년이용음란물’ 역시 의사형성적 작용을 하는 의사의 표현ㆍ전파의 형식 중 하나임이 분명하므로 언론ㆍ출판의 자유에 의하여 보호되는 의사표현의 매개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4)고 한 바 있다.
특히 “헌법 제21조 제4항은 ... 언론ㆍ출판의 자유에 대한 제한의 요건을 명시한 규정으로 볼 것이고, 헌법상 표현의 자유의 보호영역 한계를 설정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음란표현도 헌법 제21조가 규정하는 언론ㆍ출판의 자유의 보호영역에는 해당하되, 다만 헌법 제37조 제 2항에 따라 국가 안전보장ㆍ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제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 여야 할 것이다”5)라고 하면서, 음란표현도 헌법 제21조가 규정하는 언론ㆍ출판의 자유의 보호 영역 내에 있다고 보고, 종전에 이와 견해를 달리하여 음란표현은 헌법 제21조가 규정하는 언론ㆍ출판의 자유의 보호영역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는 취지로 판시한 헌법재판소의 의견6)을 변경하였다.
결론적으로 형법 제311조는 공연히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바, 모욕적 언사 도 의사표현에 해당하므로 언론ㆍ출판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의문이 없다. 따라서 이 사건 조항은 헌법적 보호를 받는 모욕적 의사표현을 금지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모욕죄에 대한 헌법적 평가에 앞서 판단해야 할 것이 모욕죄의 보호법익이다. 헌법상 과잉금지원칙 심사 등을 하기 위해서는 모욕죄의 보호법익과 모욕죄처벌에 의한 기본권 제한을 교량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다수설에·대한·문제의·제기·-·모욕죄의·보호법익
우리 다수설은 모욕죄의 보호법익이 명예감정이 아니라 외부적 명예 즉 사회적 평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는 과연 모욕죄의 보호법익이 사회적 평가인가에 대해 다룬다.
우리 형법은 제33장에서 ‘명예에 관한 죄’란 제목하에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대법원은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의 보호법익은 다같이 사람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인 이른바 외부적 명예인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다만 명예훼손은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구체적 사실의 적시를 하여 명예를 침해함을 요하는 것으로서 구체적 사실이 아닌 단순한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의 표현으로서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모욕죄와 다르 다”7)라고 하여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의 보호법익을 동일하게 ‘외부적 명예’ 즉 사회적 평가라고 보고 있다. 또, 다수설에 따르면 모욕죄는 명예훼손죄로부터 독립된 구성요건이지만 양자는 일반법과 특별법의 관계이고 모욕죄는 일반적인 포괄구성요건이며, 따라서 명예의 장에 규정된 개별적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나머지 명예법익훼손행위는 유추적용금지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일반적 포괄구성요건인 모욕죄에 의해 규율되고, 이 한에서 모욕죄는 일반법, 그 밖의 명예에 관한 죄의 개별구성요건은 특별법의 위치에 선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런 사실의 적시 없이 단순한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의 표현으로 사회적 평 가, 즉 외부적 명예를 저하시키는게 과연 가능한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컨대 길을 지나가던 A가 전혀 모르는 사람인 B에게 공연히 “개X끼야”라고 욕을 하는 경우를 상정해보면, 이 경우 B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타인에게 함부로 욕을 하는 A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8)그리고 여기서 B가 A를 모욕죄로 고소한다면, 이는 B가 자신의 사회 적 평가가 저하되었음을 우려해서라기 보다는 그런 욕을 들으면서 느낀 모욕감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전원열 (전)판사도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우리나라 형법 교과서는 侮辱도 名譽毁損과 마찬가지로 그 보호법익이 사람의 外的 名譽라고 보고 있다. 예컨대, 이재상, 형법각론, 박영사, 1996, 182쪽. 즉 명예감정이 모욕죄의 보호법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욕설을 하는 그 행위자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되는 것이지, 구체적 사실내용이 없는 욕설을 당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저하될리는 없으 므로, 위 설명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닌지 의문이다.” 9)
2.·모욕죄의·기원·-·주관적·명예감정의·보호
이에 따라 모욕죄의 유래를 살펴보자. 현행 모욕죄(형법 제311조)는 일본 형법 규정 제231조 (모욕죄)에 기초한 것이다. 일본 형법의 규정은 독일 형법(StGB § 185)에서 계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대만(형법 제309조)을 포함한 위의 4개국 외에 모욕죄 조항을 두고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 없다. 10)참고로 미국은 미연방대법원이 1971년 Cohen판결에서 욕설에 대한 규제 자체를 금지하였다. 11)
7)대법원 1987.5.12. 87도739 참조. 8)전원열, “명예훼손 불법행위에 있어서 위법성 요건의 재구성”, 서울대학교 법학박사학위논문, 2001년 7월, 241쪽. “예컨대 타인을 ‘개새끼’, ‘멍청이’라고 부르더라도 이는 명예훼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욕설이 아무리 더럽고 모욕적이고 추잡하다 하더라도, 대상자의 등급을 떨어뜨리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한, 명예훼손법에 의하여 구제받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Curtis Publishing Co. v. Birdsong, 360 F.2d 344, 348(5th Cir. 1966) 참조.” 9)전원열, 241쪽. 10)“사이버 모욕죄 관련조사”, 국회입법조사처, 2008년11월초, 5쪽. 이 문헌은 프랑스도 모욕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류하나 사문화되어 있고 ‘혐오죄’만이 실제로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James Q. Whitman, “Enforcing Civility and Respect: Three Societies", 109 Yale Law Journal 1279, 1356 (April 2000) 아래는 관련 조항들. Press et Communication, Loi du 29 juillet 1881, Appendix to NOUVEAU CODE PENAL, art 29, 1905, 1933 ch. IV (98th ed. Dalloz 1999( (Fr.)(ord. 6 mai 1944) Every allegation or imputation of a fact that affronts the honor or the esteem of a person or of the organization about which the fact is imputed is a defamation. The publication, whether direct or by means of reproduction, of such allegation or imputation is punishable, even if it is made in dubitative form or if it is aimed at a person or an organization not expressly named, but the identification of which is made possible by the terms of the discourse, ejaculations, threats written or printed, placards, or posters subject to prosecution. Every gross insult, term of contempt or invective that does not include the imputation of any fact is an insult. C. PEN., Contraventions, art. R. 621-2 (96th ed. Dalloz 1999) A nonpublic insult against a person if it has not been preceded by a provocation, shall be punished by a fine contemplated for contraventions of the first class. ... id. Penes, art. 131-12 Punishments for contraventions incurred by the physical person are: (1) Fines. ...id. art. 131-13 The amount of the fine is the following: (1) 250 francs at the most for contraventions of the first class. 11)Cohen v. California, 403 U.S. 15 (1971).
그렇다면 세계 모욕죄 시스템의 원류라고 볼수 있는 독일의 모욕죄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명예에 관한 죄는 고대 로마법과 게르만법에서 그 연혁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법에서는 명예훼손죄를 의미하는 injuria가 인격침해죄의 하나로 인정되었다. 이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명예 침해(infamatio) 외에 상해, 주거침해 및 사생활침해와 같은 객관화된 개인의 인격권 침해를 포함하였다. 이후 상해, 주거침해 및 사생활침해가 각각 독립된 범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injuria는 명예침해죄로 고정되었고, 이 객관적 관점에서 법적ㆍ도덕적 생활에서의 인격침해를 중시하였다. 이에 반하여 게르만법의 명예에 관한 죄는 명예감정을 침해하여 피해자에게 모욕을 주는 주관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게르만법에서의 명예란 이처럼 인격적 명예감정을 의미하는 주관적 명예개념 위주였다. 이와 같은 로마법의 객관적 관점과 게르만법의 주관적 관점은 18세기 에 이르러 독일의 입법에 의하여 서로 접근하게 되었다. 즉 1794년의 프로이센 일반란트법은 명예에 관한 죄로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두었고(§538 이하), 이러한 태도 가 1851년의 프로이센 형법(§152 이하), 1871년의 독일제국 형법(§185 내지 §200)을 거쳐 현행 독일 형법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고 있다.” 12)
모욕죄는 게르만법의 주관적 관점이 반영된 명예에 관한 죄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구국가 중 에서 유일하게 모욕죄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주관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모욕죄는 공소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사소(Privatklage)에 의해서 기소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어 원칙적으로는 모욕피해자만이 기소를 할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13)
12)박재윤 외,「주석형법(각칙4)제3판」,한국사법행정학회, 2006,제33장 명예에 관한 죄, 372-373참조. 13)Whitman, 1298쪽.단,공익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검찰이 개입할 수 있다. § 376 StPO
독일판례도 명확하게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모욕”은 타인에 대한 존경심의 부재 또는 저평가 또는 경시의 표현을 통해 타인의 명예를 공격하는 것이다. 형법 제186조와 제187조[명예훼손]는 타인에 대한 사실적 명제를 제3자들에게 전달하여 그 제3자가 그 명제의 대상자에 대해 경시하도록 만드는 행위를 처벌한다. 이에 반하여 제185조는 표현자 자신의 경시를 표현하는 행위를 처벌하므로 제3자에게 “모욕적 언사”가 전달 될 필요가 없다. 14)
이렇게 모욕적 언사가 제3자에게 전달되지 않아도 모욕죄가 성립한다는 것은 독일의 모욕죄 의 보호법익이 사회적 평가가 아니라 명예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문헌에서 모욕죄의 보호법익이 ‘외부적 명예’라고 설시하는 것은 ‘제3자의 모욕대상자에 대한 평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욕적 언사가 단순한 증오감의 표현이 아니라 “외부적 기준”에 비추어 모욕대상자를 저평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타인에 대한 단순한 거부는 모욕죄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난 당신이 싫다”라거나 그러한 증오심을 담은 표현은 모욕죄를 성립하지 않는다. 모욕죄는 모욕대상자의 (1) 도덕적 가치, (2) 인간으로서의 가치(예를 들어, 이성적 능력), 또는 (3) 사회적 가치와 같은 기준에 비추어 타인을 저평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하게 된다. 15)
특히 19세기 독일법학자들은 “외부적 명예”의 훼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 외부적”이라는 의미는 언사의 내용이 모욕대상자의 사회적 지위에 동반되는 경외심을 배제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에 따라 독일의 모욕죄 성립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명예에 대한 침해의 정도는 동일한 기준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욕당한 자”의 사교범위를 지배하는 규범에 따라서 다르게 측정되었다.“ 16)
이에 따라 1800년대 초반에는 ‘존경하는’, ‘친애하는’ 등의 존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모욕죄 적용여부가 논의되었다. 17)
즉 모욕대상자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을 때만 모욕죄 피해를 주장할 수 있다 는 것이었다. 사회적 지위는 당연히 그 사람의 평판과는 완전히 다르다. 매우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매우 나쁜 평판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모욕죄의 보호법익은 좋은 평판이 아니라 높은 사회적 지위인 것이었으며 결국 사회적 지위에 대한 침범 여부는 지위의 소유자가 모욕감을 느꼈는가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즉 모욕죄의 보호법익은 명예감정이다. (2013.6.24. 가필) 이것은 독일의 모욕죄가 귀족들간의 결투제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와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귀족이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지위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여 모욕당했다고 생각할 때 그 타인을 주관적으로 징벌하기 위해 결투를 신청하였는데 모욕죄는 이러한 결투 제도의 폭력성을 제거하기 위해 결투제도를 형사벌제도로 치환한 결과로 여겨진다. 18)프랑스의 경우 결투제도를 아예 인정하지 않아 폭행 살인죄로 다룬 것과 대조된다. 19)실제로 1840년 하노버법상의 모욕죄는 조문상으로 모욕행위자의 사회적 지위나 그와 모욕피해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모욕행위자가 모욕피해자에게 존경과 대우를 해야 하는 상황인 경우에만 성립하였다. 20)
1870년 제국형법조항에서부터 이러한 요건이 없어지면서 누구나 모욕죄의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으나 학설이나 판례 상으로는 계속해서 모욕죄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했을 때의 명예감 훼손’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후 1930년대 나치독일하에서 ‘아리안계 독일인’이라면 외국인이나 다른 민족과 달리 최소한의 예우를 받을 수 있다는 논리하에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게 되었고 이때 ‘외부적 명예’와 ‘내부적 명예’사이의 구분도 없어졌다고 한다. 21)
17)Whitman, 1321쪽. 18)W hitman, 1314쪽 (다음의 독일문헌들을 설명하며: Jörg Tenckhoff, Die Bedeutung des Ehrbegriffs für die Systematik der Beleidigungstatbestände 20 (1974); Friedrich Kübler, Ehrenschutz, Selbstbestimmung, und Demokratie, 52 NJW 1281 (1999) (모욕죄의 위헌성을 주장한 논문이며 Beleidigung 형법조항 바로 뒤에 결투에 대한 조항이 있었다가 추후에 결투조항만 폐지되었음을 설명함); Rüdiger Koewius, Die Rechtswirklichkeit der Privatklage 64-95 (1974)) 19)Robert A. Nye, Masculinity and Male Codes of Honor in Modern France 134 (1993) 20)W hitman, 1320쪽 (다음 독일법전을 인용하며: Criminalgesetzbuch für das Königreich Hannover [Criminal Code for the Kingdom of Hannover], v. 8.8.1840 ch. 10, art. 265, reprinted in 2 Sammlung der deutschen Strafgesetzbücher 140 (M. Stenglein ed., Munich, Keiser 1858)). 21)Whitman, 1324쪽.
3.·공연성·문제·및·명예감정의·불명확성·문제
이렇게 모욕죄가 주관적인 명예개념, 즉 명예감정을 보호하기 위하여 생겨난 것이고 법원판결의 대상이 된 사실관계를 볼 때 명예감정이 보호법익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판례와 학계의 다수설은 모욕죄의 보호법익을 외부적 명예로 보고 있는 이유는 크게 보면 (1) 우리나 라의 모욕죄 조항은 일본 및 대만과 같고 독일과 다르게 모욕죄의 구성요건으로 ‘공연성’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2) 주관적인 명예감정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힘들어 법적 보호의 대상으로 하 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2)
공연성에 관하여 보건대, 한 사람이 느끼는 명예감정은 틀림없이 모욕을 공적인 공간에서 당했는가 사적인 공간에서 당했는가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공연성의 요건이 추가된 것은 심대한 모욕감만을 구제하겠다는 입법적 판단일 수 있다.
그런데 ‘명예감정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힘들어 보호법익이 될 수 없다’는 다수설의 주장은 ‘모욕죄는 선험적으로 볼 때 외부적 명예의 훼손에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것이라면 100% 동의한다. 다수설의 뜻대로 모욕죄가 외부적 명예만을 보호한다면 명예감정을 보호하려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므로 헌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법원의 판례들을 객관적으로 해석해보았을 때 법원은 겉으로는 주관적으로는 외부적 명예의 훼손만을 규제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명예 감정의 훼손을 규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판례의·태도·
논리상 단순한 증오감이나 혐오감의 표현이 그 대상의 외부적 명예(즉 평판)을 저하시킨다는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은 위에서 언급하였다. 판례에서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모두 공히 모욕죄의 보호법익을 외부적 명예라고 선언하고는 있지만, 실제 적용된 사례를 보면 모욕의 대상이 받는 감정 즉 내부적 감정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지 모욕적인 말을 옆에서 들은 제3자의 생각을 중심에 두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모욕적 언사로 인정한 욕설의 예를 몇 가지 들면 ① “빨갱이 계집년,”“만신(무당),”“ 첩년” 23) , ② “야 이 개같은 잡년아, 시집을 열두번을 간 년아, 자식을 못 낳는 창녀같은 년” 24) , ③“ 늙은 화냥년의 간나, 너가 화냥질을 했잖아” 25) , ④ “ 저 망할년 저기 오네” 26)등이 있는데, 법원이 이렇게 매우 주관적인 증오와 경멸의 분출들을 타인들이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라고 판단하여 그 사람의 사회적 가치를 낮게 평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또 헌법재판소는 만취된 상태에서 경찰관에게 욕을 한 사람이 제기한 모욕죄 위헌소원 27)에서 합헌결정을 내리면서 모욕죄의 보호법익이 ‘외부적 명예’라고 선해하고 있지만 과연 실제 모욕 죄 고소를 한 경찰관은 만취자로부터 들은 욕 때문이 자신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저해되었다고 생각하였을까?
또한 최근 대법원은 “부모가 그런 식이니 자식도 그런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인하여 “상대방의 기분이 다소 상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너무나 막연하여 그것만으로 곧 상대방의 명예감정을 해하여 형법상 모욕죄를 구성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여 모욕죄의 보호법익을 명예감정으로 보는 듯한 판시를 한 바 있다. 28)
다수설과 달리, 모욕죄는 논리적으로, 비교법-연혁적으로, 판례의 객관적 해석으로 볼 때 그 보호법익은 명예감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모욕죄가 외부적 명예만을 보호해야 한다’는 다수설의 당위적 주장에는 필자는 100% 동의하지만 ‘현재 모욕죄가 외부적 명예만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적 판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필자는 모욕죄의 보호법익이 명예감정이라고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욕죄의 보호법익이 무엇이 되든 헌법적으로 중요한 것은 모욕죄가 ‘객관적 판단이 어려운’ 명예감정을 보호하는 형벌로 존재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다음 장에서 모욕죄가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할 것인데, 모욕죄의 보호법익을 다수설도 이미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명예감정으로 규정해놓고 모욕죄 적용의 불명확성을 따지면 필자의 기획은 ‘아전인수’격 해석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법원이 모욕죄를 해석할 때 다수설이 요구하는대로 ‘외부적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에만 유죄판단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어 법원이 모욕죄를 인정한 표현들 중 ① “노래방하는 건물 주인한테 술을 얻어먹고 돈을 받았겠구나. 그러 니까 차를 빼라고 하지.” 29) , ② “악질 친일분자의 후손” 30) , ③ “보험사기 했잖아!” 31)등의 표현을 보면, ①의 경우는 노래방 주인으로부터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의 적시에 가깝다고 할 것이고, ② 의 경우는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의미로서 이 또한 사실의 적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③의 경우도 보험금을 탔다는 것을 과장되게 비난하는 것으로서 사실의 적시에 가깝다고 보인다. 이러한 판결들은 모두 합헌적 적용이라고 보여진다.
22)주석형법, 379-380쪽. 23)대법원 1981.11.24. 선고 81도2280 판결 24)대법원 1985.10.22. 선고 85도1629 판결 25)대법원 1987.5.12. 선고 87도739 판결 26)대법원 1990.9.25. 선고 90도873 판결 27)헌법재판소 2011.6.30. 2009 헌바 199 형법 제311조 위헌소원 28)대법원 2007.2.22. 선고 2006도8915 판결 29)부산지방법원 2008.7.23. 선고 2008고정889 판결 30)대법원 2007.3.15. 선고 2007도210 판결 31)대법원 2010.6.10. 선고 2010도1777 판결
5.·결론:·명백하고·현존하는·위험의·원칙·위반
모욕죄의 보호법익이 명예감정이라면 그 자체로 위헌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모욕죄의 보호 법익이 명예감정이라면 모욕죄는 우리 헌법재판소도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국가의 존립ㆍ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미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행위에 대해서만 적용된다”고 판시하면서 도입하였다고 볼 수 있는 명백ㆍ현존 위험의 원칙 32)을 위반한다. 33)명백ㆍ현존 위험의 원칙은 표현에 대한 규제는 표현과 해악 사이에 밀접한 인과관계가 있 어서 그 표현이 해악을 초래할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헌법적으로 허용된다는 의미로서 ‘사람이 가득찬 극장에서 불났다고 소리지르기’의 은유로서 명징하게 대표된다. 34)
그렇다면 명예감정의 훼손 즉 모욕이 과연 모욕적 언사의 규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이라고 볼 수 있을까?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 심사는 헌법심사에서 가장 엄격한 심사기준으로서 미연방대법원은 ‘Fuck the Draft’ 35)라는 표현에 대해서 ‘아무리 저급한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남용하여 불쾌해 보이더라도. ... 근본적인 사회적 가치가 연루되어 있다’며 ‘언사는... 사상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설명이 불가능한 감정도 전달한다’면서 언사가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규제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전달기능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판시하였다. 36)기본적으로 ‘불쾌감’은 불쾌한 표현을 처벌할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이 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한 판시이다. Fuck the Draft는 특정 인에 대한 것은 아니고 객관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객관적인 표현의 저급성에서 오는 ‘불쾌감’은 자신에 대한 표현의 저급성에서 오는 ‘모욕감’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모욕죄에 대한 헌법적 평가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물론 모든 모욕감이나 불쾌감이 항상 규제를 정당화하는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모욕죄와는 달리 상당수 국가들이 소수에 대한 언어적 차별이나 혐오적 언사를 ‘혐오죄’로 처벌하고 있고 이는 소수자들의 명예감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37)이 법이 헌법적 으로 정당화되는 이유는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끔찍한 학살 그리고 가장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차별이 인종, 종교 등을 사유로 벌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에 따른 차별을 막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욕죄는 그렇게 중대한 ‘위험’을 발생시키는 언사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모욕감은 그 말 자체보다는 화자와 청자 사이의 관계 및 상대적 지위, 말의 맥락, 청자의 자존감 등에 의 해 발생여부와 그 정도가 달라질 것인데 이에 대한 자세한 규정없이 독일, 일본, 대만, 우리나라의 모욕죄 모두 단순히 ‘모욕’이라는 순환적인 정의만을 담고 있다.
32)헌재 1990.04.02, 89헌가113, 판례집 제2권, 49, 62 63 참조 33)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은 과잉금지의 원칙의 특별한 케이스로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내용적 규제에 적용되는 원칙으로서 엄격심사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34)성낙인, “제3장 표현의 자유”,「헌법재판소 헌법재판연구」, 1995년 6권, 181쪽 35)당시 베트남참전을 위한 강제징용(draft)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 표현이었다. 36)Cohen v. California, 403 U.S. 15 (1971). 37)박경신, 전게서. 대표적으로는 Council of the European Union - Framework decision on Racism and Xenophobia(19 April 2007)이 있다. 혐오죄의 국가별 정리는 <http://www.legislationline.org/?tid=218&jid=21&less=false>을 참조할 것.
IV.모욕죄의 “2단계” 적용방식의 평가
모욕죄의 적용방식은 명확성의 원칙 입장에서 별도로 평가될 수 있다.
1.·명확성의·원칙에·있어서의·“엄격심사”
형법 제311조는 형벌조항에 해당하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입법이므로 더욱 엄격한 의미의 명확성원칙이 적용된다. 첫째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입법에 있어서 명확성의 원칙은 보다 엄격하게 적용되며 영미법에서 이는 ‘막연하기 때문에 무효(void for vagueness)’라는 원칙으로도 표현된다. 불명확한 규범에 의한 표현의 자유의 규제가 문제되는 것은 ‘위축효과(chilling effect)’ 때문이다. 38) 헌법재판소는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법률은 그 규제로 인해 보호되는 다른 표현에 대하여 위축적 효과가 미치지 않도록 규제되는 표현의 개념을 세밀하고 명확하게 규정할 것이 헌법적으로 요구된다” 39)고 판시한 바 있다. 둘째 모욕죄는 형사벌 조항이므로 ‘국가형 벌권의 자의적(恣意的) 행사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법치국가 형법의 기본원 칙’인 죄형법정주의 40)를 충족시켜야 한다.
물론 모든 법규범의 문언을 완벽하게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입법자는 어느 정도 가치개념을 포함한 일반적, 규범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헌법재판소는 “법문언이 법관의 해석을 통해서, 그 의미내용을 확인해낼 수 있고, 그러한 보충적 해석이 해석자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없다면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41)대법원 또한 “다소 광범위하여 법관의 보충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는 개념을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통상의 해석방법에 의하여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사람이면 당해 처벌법규의 보호 법익과 금지된 행위 및 처벌의 종류와 정도를 알수 있도록 규정하였다면 헌법이 요구하는 처벌 법규의 명확성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42)라고 한다.
38)위축효과에 대한 자세한 설명 및 모욕죄와 관련된 적용에 있어서는 김병성, 임영덕, “미국의 ‘위축효과법리’와 그 시사점- ‘ 사이버모욕죄’ 입법안에 대한 검토”, 「미국헌법연구」, 2009년 제20권 제2호, 미국헌법학회 참조. 논문은 사이버모욕죄 도입 논의에 관한 것이지만 123쪽에서 저자들은 모욕죄 자체의 ‘모욕’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고소라는 적극적인 방법만을 통해서 구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9)헌재 1998.04.30, 95헌가16, 판례집 제10권 1집, 327, 342-342 참조. 40)헌재 1991. 7. 8. 91헌가4, 판례집 3, 336, 340 참조. 헌재 1996. 12. 26. 93헌바65, 판례집8‐2, 785, 792‐793 41)헌재 1998.04.30, 95헌가16, 판례집 10 1, 327, 341 342 참조. 42)대법원 2006.5.11. 선고 2006도920 판결 참조
2.·위법성·요건·-·경멸적·표현
그렇다면 유의미한 것은 ‘모욕’이라는 형법적 개념에 대한 법원의 실제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대법원은 ‘모욕’이란 ‘사실을 적시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만한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제1장에서 다룬,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만한’을 ‘명예감정을 해할만한’으로 대체해야 할지 여부는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이를 문언적으로 보면 모욕죄 구성요건은 ①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추상적 판단의 표현 또는 ②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경멸적 감정의 표현, 이렇게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①의 경우 “추상적”이라 함은 구체적 사실의 적시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사실적 주장의 부재 의 표지이다. 그렇다면 남는 요건은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판단” 뿐이다. 그런데 타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만한 판단’은 타인에 대한 ‘비판’과 다를것이 없다. 결국 모든 ‘비판’이 위법성요건을 충족시키는 범죄행위가 되어버리는 것인데 이러한 해석이 불러일으킬 헌법상 문제는 다언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경멸적 표현’만을 위법행위로 인정하거나 ‘경멸적 표현’을 중심으로 위법성요건의 범위를 인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법원도 “공적인 존재의 공적인 관심사에 관한 문제의 제기가 널리 허용되어야 하지만, ...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어휘를 선택하여야 하고, 아무리 비판을 받아야 할 사항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멸적인 표현으로 인신공격을 가하는 경우에는 정당행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43)모욕죄가 모든 논평이나 비판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며 경멸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할 뿐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법원은 실제 판결들에서는 ① “막무가내로 학교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추태를 부렸다” 44) , ②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냐” 45) , ③ “개똥철학” 46) , ④ “인과응보, 사필귀정” 47) 과 같은 표현들을 유죄로 판단하였으나, ⑤ “말도 안 되는 소리 씨부리고 있네. 들고 차버릴라” 48) , ⑥ “도대체 몇 명을 바보로 만드는 거야? 지만 똑똑하네... 참 나...” 49) , ⑦ “너는 부모도 없냐” 50)와 같은 표현들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하였다. 과연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일반인이 ①, ②, ③, ④와 ⑤, ⑥, ⑦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법원은 표현 자체 외에도 당시의 총체적 정황을 고려하여 ‘그 상황에서 경멸적인 표현’ 여부를 판단하였기 때문에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모욕죄의 해석에 있어서 모욕적 언사와 그렇지 않은 언사를 구별하는 것은 모욕죄의 존립여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하다.
43)대법원 2008. 4. 24. 선고 2006도4408 판결 등 참조. 44)청주지방법원 2009.4.13. 선고 2009고정255 판결 45)광주지방법원 2008.5.21. 선고 2008고정361 판결 46)부산지방법원 2008.10.30. 선고 2008노2229 판결 47)서울중앙지방법원 2006.3.10. 선고 2006고정885 판결 48)부산지방법원 2009.11.5. 2009노2161 판결 49)수원지방법원 2010.4.14. 선고 2009노1456 판결 50)수원지방법원 2009.9.3. 선고 2009노1083 판결
3.·“2단계”·판단법
위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법원의 유무죄 판단기준이 이렇게 불명확한 이유는 법원이 모욕죄 유무죄 판단에 있어서는 2단계 판단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법원이 2단계 판단법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나, 모욕죄 판결문들에 나타난 법원의 논증순서를 분석하여 보면 법원의 모욕죄의 유무죄 판단은 거의 대부분 2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즉 법원은 1단계로 모욕의 범위를 매우 넓게 보아 대부분의 표현이 모욕적 언사라고 판단한 후, 2단계로 그러한 표현이 이루어진 사 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으면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되어 무죄, 그렇지 않으면 유죄라고 판단하고 있다.
여기서 “2단계”라는 표현은 다른 범죄의 유무죄 판단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 해당여부에 대한 판시가 없는데 모욕죄 유무죄 판단에 있어서는 ‘거의 항상’ 정당 행위 해당여부에 대한 판시를 통해 최종적 유무죄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 모욕적인 표현, 예컨대 “씨발 새끼” 51) , “개 같은 년” 52)같이 단순한 욕설이나 욕설은 아니지만 “뚱뚱해서 돼지 같은 것” 53)과 같은 욕설에 가까운 매우 경멸적인 표현들은 이미 1단계를 충족시킴이 어느 정도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욕설과 같이 모욕적임이 명백한 표현만 모욕적 언사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표현에 조금이라도 부정적이거나 경멸적인 평가가 담겨있으면 모욕적이라고 보고 있다.
예컨대 법원은 ① “전근대적 인식으로 가부장의식을 가지고 회사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54), ② “그렇게 소중한 자식을 범법행위의 변명의 방패로 쓰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55)③ “조장들 한심한 인간들임. 불쌍한 인간임.” 56)④“북한의 아이들도 아니구요, 우리 아이들이다.” 57) , 과 같이 그 자체로는 욕설이라거나 그에 이를 정도로 과격하다고 보기 어려운 표현들도 1차적으로 모욕적 언사라고 인정하였다.
법원은 1단계에서 이렇게 조금이라도 부정적이거나 경멸적인 표현은 모두 모욕죄의 구성요건에 해당된다고 판시한 후에 2단계에서 형법 제20조의 위법성조각사유에 의하여 이러한 구성 요건 해당성의 광범성을 제한하고 있다. 즉 “어떤 글이 특히 모욕적인 표현을 포함하는 판단 또는 의견의 표현을 담고 있는 경우에도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통념에 비추어 그 표현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로 볼수 있는 때에는 형법 제20조에 의하여 예외적으로 위법성이 조각된다” 58)고 한다. 그리하여 바로 위에서 예를 든 ①, ②, ③의 모욕적 표현들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되나, ④의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유무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 해당여부이지 형법 제311조의 모욕죄 구성여부가 아닌 것이다. 바로 여기에 모욕죄의 위헌성이 있다.
51)서울남부지방법원 2010.6.24. 선고 2009고정1825 판결 52)수원지방법원 2010.5.20. 선고 2010고정1457 판결 53)수원지방법원 2007.1.30. 2006고정1777 판결 54)청주지방법원 2006.1.25. 선고 2005고단986 판결 55)대법원 2003.11.28. 선고 2003도3972 판결 56)대법원 2008.7.1. 선고 2008도1433 판결 57)서울북부지방법원 2008.9.25. 선고 2008노635 판결 58)대법원 2008.7.10. 선고 2008도1433판결 등 참조
4.·2단계·판단법의·위헌성
법원의 위와 같은 2단계 판단법은 명확성의 원칙을 심대하게 위반한다. 왜냐하면 모욕적 언사의 범위를 매우 넓게 본 후에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 해당성 여부를 중심으로 유무죄를 판단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모욕죄의 범죄구성요건에 “정당행위의 부재”를 포함시키는 것과 다름없 는데, “정당행위의 부재”는 범죄구성요건으로서 기능하기에는 너무나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형법 제20조 소정의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라 함은 “법질서 전체의 정신이나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사회윤리 내지 사회통념에 비추어 용인될 수 있는 행위를 말하고, 어떠한 행위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정당한 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되는 것인지는 구체적인 사정 아래서 합목적적, 합리적으로 고찰하여 개별적으로 판단되어야 할 것인바, 이와 같은 정당행위를 인정하려면 첫째 그 행위의 동기나 목적의 정당성, 둘째 행위의 수단이나 방법의 상당성, 셋째 보호이익과 침해이익과의 법익권형성, 넷째 긴급성, 다섯째 그 행위 외에 다른 수단이나 방법이 없다는 보충성 등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59)고 한다. 그런데 과연 어떤 일반인이 위와 같은 요건을 갖춘 ‘법질서 전체의 정신이나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사회윤리 내지 사회통념에 비추어 용인될 수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 알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정당행위’라는 개념은 매우 추상적인 것이어서 어떠한 모욕이 과연 이에 해당하는지, 아닌지에 관한 판단은 사람마다의 가치관, 윤리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일반인들에게 있어 공통적으로 정당행위라고 인식될 수 있는 표현행위가 존재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판단주체에 따라 달리 판단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가 존재함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판단주체가 법전문가라 하여도 마찬가지이고, 법집행자의 통상적 해석 을 통하여 그 의미내용이 객관적으로 확정될 수 있다고도 보기 어렵다. 어렴풋한 추측마저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그것은 대단히 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타인을 모욕하는 것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경우가 언제인지 법규의 수범자인 일반인들은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기 전까진 알수 없는 게 현실이다. 사실 법원조차도 무엇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인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일목요연한 기준을 제시한 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형법 제20조가 그 자체로 위헌적으로 불명확하다는 것은 아니다. 형법 제20조 의 ‘정당행위’가 정상적으로 위법성조각사유로 기능할 때는 명확성의 원칙을 위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욕죄에서처럼 2단계 판단법에 의하여 형법 제20조가 실질적으로 범죄구성요건으로서 기능하는 경우라면 ‘정당행위’ 내지는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란 개념은 너무나 불명확 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헌법재판소는 2008헌바157 판결에서 “공익을 해할 목적”의 허위의 통신을 금지하는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1항의 “공익”이 헌법 제37조 제2항의 “국가의 안전보장ㆍ질서유 지”와 헌법 제21조 제4항의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와 비교하여 볼 때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혀 구체화되어 있지 아니하며, 형벌조항의 구성요건으로서 구체적인 표지를 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헌법상 기본권제한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 또는 헌법상 언론ㆍ출판자유 의 한계를 그대로 법률에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할 정도로 그 의미가 불명확하고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위헌을 선언한 바 있지만 60)형법 제310조의 위법성 조각사유인 “오로지 공익을 위하여”에서의 “공익”에 대해서는 위헌을 선언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구성요건해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2단계 판단법에 의하여 구성요건해당성은 인정하되 위법성을 조각시키는 것과는 형사법상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 구성요건은 범죄 행위 의 일반적 유형으로서 정형화되어 있는데 반해, 위법성조각사유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위에 대한 사후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로서 위법성을 조각시켜 범죄의 성립을 부정한다. 즉 형법 각칙 의 범죄유형에 해당하는 행위라면 일반적인 경우는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위법한 행위가 되지만, 예외적으로 일정한 요건을 충족시킨 행위는 특별히 허용되어 정당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성요건해당성이 인정되는 순간 피의자 또는 피고인은 처벌받는것이 원칙이고, 예외적으로 위법성조각사유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처벌을 피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는 누구나 어떠한 방식이든 어떠한 내용이든 간에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표현을 내뱉은 순간 형사처벌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위험은 위법성조각사유의 모호함에 의해 많은 경우 현실화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모욕죄에서 표현 자체의 가벌성 기준이 명확한 것이 중요하다. “표현이 이루어진 사정”은 보통 위법성조각사유에 대한 심리에서 다루어지는데 위에서 말했듯 그 시점은 명확성의 원칙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 되기 때문이다. 61)그런데 위에서 밝혔듯 이 표현 자체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부정적이면 곧바로 위법성요건을 충족시킨 것으로 보기 때 문에 위축효과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2단계 판단방식은 형법 제20조를 위헌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업무방해죄를 규정하는 형법 제314조의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죄의 위헌성을 판단하면서도 이를 암시한 바 있다. 모든 공동파업이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에 해당하고 단지 노동법이 정한 절차를 엄격하게 따른 공동파업 만이 정당화된다는 해석은 헌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노 동법 제4조는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로서 노동법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한 정당한 행위에 대하여 위법성 조각사유에 관한 형법 제20조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것이 단체행동권의 행사로서 노동법상의 요건을 갖추어 헌법적으로 정당화되는 행위를 범죄행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임을 인정하되 다만 위법성을 조각하도록 한 취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한 해석은 헌법상 기 본권의 보호영역을 하위 법률을 통해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62) . 다시 말하자면, 범죄구성요건을 정한 규정이 과잉하게 또는 불명확하게 기본권을 제한하는 경우 그 시점에 이미 과잉금지원칙의 위반이 발생하는 것이지 위법성조각사유를 다른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다고 하여 그 위반이 치유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위법성조각사유 규정이 아무리 최종적인 보호범위를 헌법에 합치하는 정도로 넓히거나 명확히 만든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이 하위의 법률이 헌법의 보호범위를 획정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모욕죄는 바로 이러한 위헌적인 규제로서 법원은 소위 “2단계 판단법”을 적용하고 있는데, 구성요건 해당성 단계에서 폭넓게 모욕을 인정함으로써 형법 제20조가 표현의 자유의 보호영역을 정 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낳게 된다.
59)대법원 2000. 4. 25. 선고 98도2389 판결, 대법원 2009. 12. 24. 선고 2007도6243 판결 등 참조. 60)헌재 2010.12.28, 2008헌바157, 공보 제171호, 132, 7 7 참조. 61)문재완, “사이버모욕죄 신설 어떻게 볼 것인가”, 2008년 11월 13일 법무부 법조언론인클럽 토론회 발표문. 문재완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는 모욕죄의 처벌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이며, 모욕의 범위를 축소하여 욕설에 가까운 분명한 양태의 표현만 모욕죄를 구성한다고 하면, 사회상규 위반여부에 따라 위법성조각사유를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한다. 62) 헌재 2010.04.29, 2009헌바168, 판례집 제22권 1집 하, 74, 83-83 참조
5.·소결
법원은 어떤 언사가 모욕적이며 한 인간의 외부적 명예 또는 평판을 저하시킬만한 표현인지에 대한 일관되며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를 사실상 포기하고, 개별적인 맥락이나 구체적인 정황 하에 모욕적 언사의 상대방이 모욕감을 느꼈는지, 그러한 모욕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인지를 검토하여 모욕죄의 성립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법원의 태도는 개별적인 분쟁의 해결방법으로는 타당할지 몰라도, 일반인들이 결과에 대하여 전혀 예측을 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이렇게 광범위하거나 모호한 법률에 대하여 아무리 법원이 구체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이 조항이 존치하는 한 모욕죄가 자의적이고 악의적으로 남용될 가능성은 항상 남아있는 것이다.
결국 형법 제311조의 존재로 인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은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할만한 의견을 표현할 때, 심지어는 정부의 정책이나 공적인 사안을 비판할 때에도 공권력이 모욕감을 느끼지는 않을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청자가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 분명한 비판적 의견’만을 표출해야 한다는 제한으로 인하여 표현의 자유가 엄청나게 위축되고 있음은 자명하다. 또한 모욕적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표현 전반에 대해서도 위축효과가 심대할 것이다.
물론 입법에 있어서 추상적 가치개념의 사용이 필요한것은 일반적으로 부인할 수 없고, ‘모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언제나 허용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률의 입법목적, 규율의 대상이 되는 법률관계나 행위의 성격, 관련 법규범의 내용 등에 따라서는 명예감 정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러한 개념의 사용이 허용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욕”이라는 행위 자체에 내재된 위험성이나 형법의 입법목적을 고려할 때, ‘모욕’이라는 막연한 개 념을 구성요건요소로 삼아서 표현행위를 규제하고, 나아가 형벌을 부과하는 이 사건 법률조항은 표현의 자유에서 요구하는 명확성의 요청 및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원칙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V.결 론
모욕죄는 통설과는 달리 외부적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내부적 명예감정을 보호 하는 것이다. 19세기 독일문헌에서 모욕죄가 ‘외부적 명예’를 보호한다고 한 것은 해당 언사의 내용이 대상자의 사회적 지위가 요구하는 경외심을 표명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대상자 에 대한 제3자의 평가 즉 사회적 평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와서 모욕죄를 사회적 지위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보호규범으로서 호명할 수 있도록 독일법원의 판례가 바뀌면서 ‘외부적 명예’와 ‘내부적 명예’의 구분은 없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대법원 판례를 살펴보더라도 이와 같은 모욕죄의 객관적 실체가 확인된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명예감정은 타인의 단순한 의견이나 감정의 표현에 의해서 쉽게 훼손될 수 있다. 교수가 학생에게 ‘C’라는 학점을 주는것만으로도 학생의 명예감정은 쉽게 손상될 수 있다.
모욕죄는 명예감정을 보호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단순한 의견과 감정의 표명을 제한하게 된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의견과 감정의 표명을 명예감정의 보호를 이유로 제약하는것은 표현의 자유 보호의 대원칙인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다. 혐오죄의 보호법익인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감의 파괴는 표현의 자유 제약을 정당화하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될 것이나 모욕죄는 이를 넘어서서 명예감정 전체를 보호영역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다.
물론 모욕죄는 모든 의견과 감정의 표명이 아니라 그 표명이 경멸적인 언사를 동원하여 이루어질 때만 적용된다. 하지만 무엇이 경멸적인 언사인지에 대해 대법원은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은 화자의 경멸적인 태도가 담겨있는 거의 모든 언사들을 우선 범죄구성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인정한 후에 여러가지 주변정황들을 근거로 형법 제20조의 ‘사회상규’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무죄로 판시하는 2단계 방식의 판시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2단계방식은 명확성의 원칙을 위배한다. 우선 대법원은 경멸적인 태도가 담긴 모든 언사들을 범죄구성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보고 ‘사회상규’를 근거로 유무죄를 나눈다는 것은 ‘사회상규’가 위법성조각사유가 아니라 범죄구성요건으로 기능함을 뜻한다. ‘사회상규’가 범죄구성요건으로서는 명확성의 원칙을 위반한다.
또 명확성의 원칙은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는 단순히 일반인들에게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통보하는 것을 넘어서서 일반인들이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여 종국적으로 합법적으로 판단될 표현을 자제하는 현상 즉 ‘위축효과’가 없을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법원이 ‘사회상규’와 같이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위축효과’를 발생시 킨다.
혐오죄처럼 국가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감의 보호를 위해 입법을 하는 것은 당연하나 명예감정은 더 높은 차원에서 단순히 타인과의 비교를 매개로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인데 이를 보호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명예감정의 보호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정당한 입법목적이 될 수 없다. 또 혐오죄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적 소수를 그 소수자의 차별과 핍박에 동원되었던 언사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모욕죄는 그렇지 않은 모 든 언사도 처벌하기 때문에 침해의 최소성 원칙도 위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