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21
조동근(명지대 교수)
2015년 9월 13일, 김대환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노동시장 개혁과 관련해 노사정이 대타협을 이루었다고 발표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1차 노사정 대타협 이후 무려 17년만의 대타협이기에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노사정 간에 대타협을 했다는 내용은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연상시킨다. 지록위마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으로 사실(事實)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강압(强壓)으로 인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교수신문’이 선정한 2014년의 사자성어가 ‘지록위마’였다. 설문에 응한 교수들 중 27.8%가 선택했다고 한다. 뒤집어 보면 집단 지성의 눈에 비친 한국의 사회상이 바로 ‘지록위마’였고, 이는 선견지명일 수 있다. 지록위마의 유래는 알려진 그대로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죽으면서 맏아들 ‘부소’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환관 ‘조고’가 계략을 부려 부소를 죽이고 그의 어린 동생 ‘호해’를 왕좌에 앉힌다. 조고는 그를 무력화 시킬 계략으로 ‘지록위마’를 주장한다. 조고의 위세에 눌린 신하들도 조고의 ‘지록위마’를 인정한다. 조고는 지록위마를 부인한 신하를 모두 죽인다. 결국 호해는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고 권좌에서 물러난다. 조고는 호해가 물러난 후 부소의 아들 ‘자영’을 3세 황제로 세웠으나 똑똑한 3세 황제는 조고를 죽인다.
일각에서는 노사정 대타협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알곡이 아닌 쭉정이를 알곡으로 국민 앞에서 치부했으니” 지록위마의 비판을 자초한 것은 사실이다.
이해관계자에게 ‘이해의 실타래’를 풀라는 주문
이번 노사정 합의는 소위 ‘agree to disagree’로 집약된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눈’도 있고 하니, 차후 더 논의하자는 것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노사가 서로 등을 보이지 않고 합의라는 형태로 ‘노동개혁의 출발점’을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결코 ‘가시적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핵심 쟁점인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에 대해서, 노사 간 충분한 협의를 거쳐 추진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결론을 내지 못했다. 노동계는 곳곳에 안전장치를 두었다. 정부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되며, 충분한 노사협의를 보장해야 한다는 식이다. 임금피크제 역시 정부가 노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친다는 내용을 담았을 뿐이다. 노사정의 ‘미봉’은 노사정 회의체 성격에 비춰볼 때 필연적이다. 서로 이해가 다른 상대가 있기 때문에, ‘선언적 합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 개혁에 성공한 나라들의 공통점은 ‘이해관계자들로 하여금 손을 떼게’ 한 것이다. 독일의 ‘하르츠 위원회’는 이해관계자들을 배제하고 15명의 ‘전문가’로만 구성했다. 2002년 2월 22일 위원회가 구성되고 불과 10개월 만에 입법화가 이루어져 2003년 1월 1일 첫 번째 하르츠 개혁이 시행되었다. 최근 영국 캐머런의 보수당 정권도 노동개혁을 노사정 타협에 의존하지 않고 ‘경제, 혁신, 노동’을 통합해 경제장관(business secretary)이 책임지고 주도하도록 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1987년 10월에 체결된 아일랜드 ‘사회연대협약’이 그것이다. 당시 아일랜드의 구조개혁은 정부가 주도했다. 이를 지켜보던 제 1야당과 전국노조연합이 정부의 구조개혁에 동참해 협약을 맺은 것이다. 정부, 주요 사용자그룹, 노조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의 노사정과는 세팅이 전혀 다르다.
O 노사정 합의의 쟁점: 일반해고와 임금피크제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매우 낮다. 경영상의 긴절한 이유에 의한 ‘정리해고’와 범법 등을 저질렀을 때의 ‘징계해고’ 외에는 마땅한 해고 수단이 없다. 따라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업무 저성과자 등을 해고할 수 있도록 ‘일반해고’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일반해고와 관련된 노사정 합의문을 보면 그 기준이 매우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기준은 명료해야 한다.”는 일반적 원칙과 반대로 간 것이다. 노사 및 관련 전문가의 참여 하에 근로계약 전반에 관한 제도 개선 방향을 마련하고, 제도 개선 시까지의 분쟁 예방과 오남용 방지를 위해 노사정은 공정한 평가 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2중 3중의 안전장치를 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노동계는 ‘일반 해고’를 ‘쉬운 해고’로 몰아가고 있다.
대법원은 이미 ‘전문적 지식, 기능’ 등 직무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경우, 그리고 통상적으로 기대되는 정상적 작업 능력에 현저히 못 미치는 ‘저성과자’의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1987년 4월 대법원에서 해고가 확정된 OO회사의 B씨의 사례가 그것이다. 회사에서 거래사들의 미수금 회수 업무를 담당한 B씨는 2년간의 미수금 회수 실적이 부진해 2년 연속 D등급 판정을 받았으며 잦은 무단결근 등의 이유로 해고됐다. 이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은 B씨의 해고 처분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또한 대법원은 1991년 3월 보험사 직원 A씨가 “해고는 부당하다.”며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 해고는 “회사는 실적이 불량한 사원에 대해 해고 등 징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한 사규에 따른 조치였다. 대법원은 “회사 인사 규정에 따라 A씨를 해고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이처럼 ‘사규에 따른 해고’는 정당하다는 판례가 다수 있다. 따라서 일반 해고를 ‘쉬운 해고’로 몰아세울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임금체계는 ‘성과’급이 아닌 ‘연공’급이기 때문에, 정년을 연장하려면 임금체계를 동시에 바꿔야 한다. 정년연장은 임금피크제와 ‘같은 테이블’ 위에 올려 졌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은 정년연장이 미치는 파급효과를 깊이 천착하지 못하고 먼저 인기 영합적으로 모든 기업의 ‘법정 정년’을 60세로 연장해 주었다. 정책은 순서가 중요하다. 미리 정년연장의 혜택을 받은 노측이 순순히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일 리 없다. 임금피크제는 임금을 깎는 것이기 때문에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이 된다. 정년연장을 할 때, 임금피크제를 일종의 정책조합(패키지)으로 입법화 했으면,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은 노사정 아젠더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노사정 합의에서는 “임금피크제로 절약되는 재원은 청년일자리 창출에 쓴다.”로 돼있다. 하지만 임금피크제는 정년연장에 따른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조치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청년고용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임금피크제는 정년연장과 ‘등가교환’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년연장에 따른 임금피크제 도입을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노동시장 개혁의 본질은 귀족노조 견제
세계경제포럼(WEF), 국제경영개발원(IMD), 세계은행(WB)의 우리나라 노동시장에 대한 평가를 보면, 노사협력, 해고부문 경직성, 노동시장 효율성 등에서 거의 최하위 수준이다. 이처럼 우리의 노동시장은 이중구조가 심각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용직과 임시직에 따라 급여와 보호의 강도가 너무 다르다. ‘조직할 수 있는 10%의 노동자’가 ‘조직할 수 없는 90% 노동자’의 이익을 침탈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득불균형 심화를 말하고 있지만 그 같은 불균형은 노동시장의 이중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대표적 고임금 사업장인 현대자동차 노조는 4년 연속 파업을 결의했다. 금호타이어도 5년간 워크아웃을 끝내자마자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파업 시 노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돼있다. 이른바 ‘5개 독소조항’이 그것이다. 파업 시 사측의 ‘대체근로’를 금지하는 반면, 노조 측의 ‘사업장 점거 파업’을 허용하고 있는 조항이 대표적이다. 사측의 직장폐쇄 요건은 매우 까다롭게 돼있으며, 사측에겐 부당노동행위가 매우 엄격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제한되어 있다. ‘동등한 조건에서의 싸움’(equal footing)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파업이 쉽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노조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파업 권력을 부여한 노조법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노사 간 협상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한국 노동시장에서 시급한 것은 ‘취업규칙 변경’이나 ‘일반해고 요건’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는 현안에서 벗어나 미래 대비 차원에서 현재의 적폐를 청소해야 한다. 노동개혁은 귀족노조의 비대칭적 권력을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임금체계 개편, 경영상 해고, 파견근로제도 개선 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노사 양측이 대등한 입장에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 대부분의 노동문제는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노동시장 관련 제도는 그 나라의 소프트파워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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