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18
“정치인이 가진 영향력 클수록 광범위하게 문제제기 허용돼야…
정치인 주장·활동에 대해선 언론 보도 내용만으로도 의혹 제기 가능하다는 게 취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부부(夫婦)를 '종북(從北)'이라고 표현한 정치평론가 변희재씨와 이를 인용 보도한 언론사에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 판결을 내린 서울고법 판결에 대해 전직 대법관들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기존 대법원 판례를 이번 재판부가 반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지난 8일 배상 판결을 내렸던 서울고법 민사13부(재판장 고의영)가 과거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면서도 본래 취지대로 해석하지 않고 재판부 입맛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지난 2002년 1월과 12월 두 차례 내린 '이념 논쟁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대한 판결은 이후 수많은 유사 사건들에 대한 시금석(試金石)으로 작용했다. 1·2심 재판부들은 이 대법원 판결에 기초해 정치인에 대한 이념이나 사상 검증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왔다. 한 전직 대법관은 문제의 판결문을 정독한 뒤 “언뜻 보면 대법원 판례를 그대로 인용해 판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뒤 필요한 부분만 대법원 판례를 끼워 맞춘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2002년 대법원 판례는 '공적인 존재(정치인)가 가진 국가·사회적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존재가 가진 정치적 이념은 국가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며 '그 존재가 가진 정치적 이념은 더욱 철저히 공개되고 검증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의문이나 의혹은 광범위하게 문제 제기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정치인에 대한 이념적 성향에 대한 검증은 정치인 개인에 대한 명예 보호라는 명분에 따라 봉쇄돼서는 안 되고, 찬반 토론이라는 공개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것이 민주적 방법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은 무차별적인 의혹 제기나 모욕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봤지만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이를 명예훼손으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울고법은 최근 이정희 부부에 대한 판결에서 "정치인에 대한 의혹 제기는 폭넓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면서도 "종북이나 주사파에 대한 의혹 제기는 일반적인 정치 이념의 경우보다 신중함과 엄격함이 요구된다"고 판결했다.
대법관 출신 A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은 종북·주사파들처럼 국가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세력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의혹 제기를 널리 허용해야 한다는 취지인데도 서울고법은 반대로 종북·주사파에 대한 의혹 제기에 대해 정확하고, 빈틈없는 근거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례가 종북이나 주사파에 대한 정치 이념적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명예훼손 책임을 물려서는 안 된는다는 취지인데도 서울고법은 종북이나 주사파에 대한 이념적 공격에 대해 보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의혹을 제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대법원 판결과 반대되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서울고법은 또 "변씨가 이정희 대표 부부가 종북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기 위한 구체적인 근거나 정황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법관 출신 B 교수는 "정치인들의 주장과 활동에 대한 언론 보도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의혹 제기가 가능하다는 게 기존 대법원 판례 취지"라며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의혹 제기는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욕설·비방을 하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린 게 아니라면 의혹 제기, 해소 과정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대로라면 변희재씨가 트위터에 이정희 대표 부부에 대해 종북 세력이라고 의혹을 제기한 것은 당시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문제 제기가 되면서 논란이 된 상황인 만큼 변씨의 이 대표 부부에 대한 종북 의혹 제기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C 변호사는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들에 대해 정체성이나 활동에 대한 의혹 제기는 원천적으로 봉쇄돼버리고, 국가 안위를 해치는 위험성이 있더라도 국민은 의혹 제기조차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방치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앞서 이 대표가 변씨를 형사 고소한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도 "종북은 특정인의 대북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양한 생각을 포함하는 다의적이고 넓은 개념"이라면서 변씨와 언론사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검찰 관계자는 "2심 재판부가 종북 개념을 굉장히 좁게 해석한 건 아쉬운 부분"이라고 밝혀 전직 대법관들과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검찰 무혐의 처분에 대해 이 대표가 각각 '항고'와 '재항고'를 했지만 서울고법 형사부와 대법원에서도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이번 서울고법 재판부가 유달리 '튀는’ 판결을 내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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