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69년 전 815일 미국이 한반도에 38도선을 긋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은 없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 존재할 것이다.


1945815일 낮 12(미국 동부시각 814일 밤 10)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떨리는 목소리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불과 9일 전 86, 미국은 일본 서부의 군사도시 히로시마에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4만명이 즉사 또는 치명상을 당하고 도시는 불바다가 됐다. 그래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3일 후 89일 미국은 일본 규슈의 항구도시 나가사키에 또다시 원자탄을 떨어트려 7만명이 즉사하거나 치명상을 입었다. 바로 전날 일본의 항복이 시간문제라고 판단한 소련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미국, 영국, 중국(장제스 정권)과 함께 연합국에 속해 있던 소련은 그해 2월 얄타회담에서 6개월 내로 대일전에 참가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딱 6개월이 되는 날, 그것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뒤에야 얌체같이 대일전에 뛰어든 것이다.

 

히틀러의 나치독일(57일 이미 항복)을 상대로 전쟁을 하느라 이미 많은 병력을 소모한 소련은 형무소 재소자들까지 동원하여 조직한 저질군대를 만주와 한반도 쪽으로 보내기 시작한다. 패색이 짙은 일본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에도 밀고 들어갔다. 89일에는 이미 국경지대인 함경북도 경흥과 웅기를 점령하고 12일까지는 나진과 청진까지 내려갔다.

 

이런 속도라면 8월 말까지면 소련군이 부산까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염려가 있었다. 이에 놀란 미국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15(워싱턴 시각 14) 밤늦게 한반도 중간의 북위 38도선까지만 소련군의 남하를 허용하기로 급히 결정하여 소련에 통고했고, 소련이 이를 즉각 받아들였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은 미국과 같은 편에서 독일을 상대로 싸웠을 뿐, 일본과는 겨우 1주일간 적대관계에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일본과 한반도에 관한 한 소련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으므로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말라는 미국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딘 러스크(Dean Rusk)의 'As I Saw It'
딘 러스크(Dean Rusk)의 ‘As I Saw It’
  

결론부터 말하면, 69년 전 815일 미국이 한반도에 38도선을 긋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은 없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 존재할 것이다.

 

1945815일 낮 12(미국 동부시각 814일 밤 10)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떨리는 목소리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불과 9일 전 86, 미국은 일본 서부의 군사도시 히로시마에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4만명이 즉사 또는 치명상을 당하고 도시는 불바다가 됐다. 그래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3일 후 89일 미국은 일본 규슈의 항구도시 나가사키에 또다시 원자탄을 떨어트려 7만명이 즉사하거나 치명상을 입었다. 바로 전날 일본의 항복이 시간문제라고 판단한 소련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미국, 영국, 중국(장제스 정권)과 함께 연합국에 속해 있던 소련은 그해 2월 얄타회담에서 6개월 내로 대일전에 참가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딱 6개월이 되는 날, 그것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뒤에야 얌체같이 대일전에 뛰어든 것이다.

 

히틀러의 나치독일(57일 이미 항복)을 상대로 전쟁을 하느라 이미 많은 병력을 소모한 소련은 형무소 재소자들까지 동원하여 조직한 저질군대를 만주와 한반도 쪽으로 보내기 시작한다. 패색이 짙은 일본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에도 밀고 들어갔다. 89일에는 이미 국경지대인 함경북도 경흥과 웅기를 점령하고 12일까지는 나진과 청진까지 내려갔다.

 

이런 속도라면 8월 말까지면 소련군이 부산까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염려가 있었다. 이에 놀란 미국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15(워싱턴 시각 14) 밤늦게 한반도 중간의 북위 38도선까지만 소련군의 남하를 허용하기로 급히 결정하여 소련에 통고했고, 소련이 이를 즉각 받아들였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은 미국과 같은 편에서 독일을 상대로 싸웠을 뿐, 일본과는 겨우 1주일간 적대관계에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일본과 한반도에 관한 한 소련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으므로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말라는 미국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Memoirs by Harry S. Truman'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Memoirs by Harry S. Truman’

38선이 그어질 당시의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1955년 출판한 회고록 “Memoirs by Harry S. Truman” (트루먼 회고록)4445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으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한반도의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38선을 그을) 당시에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일을 양국이 분담한다는 편의성 이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일단 한반도에 들어간 소련군은 곧 38도선 이북의 자기네 점령지역을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당시 33·본명 김성주)을 앞세워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독일이 연합국에게 194557일 항복한 뒤, 소련은 전쟁 중 점령한 동부독일을 비롯하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나라들을 전부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미국 정부는 소련이 일단 점령한 나라는 반드시 적화(공산화)시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에서 소련군의 남하를 저지시켰던 것이다. 만일 그때 미국이 38선을 경계선으로 긋지 않았더라면, 당시 1000남쪽 오키나와 주둔 미군보다 지리적으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소련군이 먼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했을 것이 뻔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아예 탄생하지도 못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이 만들어져 우리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억압받는 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1945년 한반도에 38선을 그은 것은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이 점령한 서부독일과 일본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채택하여 오늘날 경제대국들이 되었고 역시 미군이 점령했던 남한은 오늘날 세계 12위 경제강국이 되었지만, 소련군이 점령했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가 1989년 소련의 몰락과 함께 간신히 자유를 되찾았고, 역시 소련군이 점령했던 북한은 아직도 공산독재에 집착하는 무능한 김씨 세습정권에 의해 지구상 가장 가난하고 자유 없는 나라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북하고 종북하는 사람들은 미국 때문에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었으며, 이 때문에 한국전쟁의 비극도 발생하였고 아직까지 우리 민족이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은 우리 민족의 불행의 씨앗"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억지일 뿐이다. 대한민국 초··고 역사 교과서는 반드시 이 점을 분명하게 알려야 미국에 대한 불필요한 적대감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나온 교과서 중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한 책은 아직 한권도 보지 못했다.


일부 교사들이 역사적 진실을 잘 모르거나 알면서도 역사를 왜곡하여 미국이 38선을 그어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았다면서 학생들에게 반미감정을 불어넣고 있다는데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아주 위험한 일이다. 교과서 바로쓰기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최근에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만은 국정교과서 하나로 통일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만시지탄이 있지만 바람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