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각스님 페이스북

현각 스님은 미국 예일대에서 철학과 문학을하버드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했으며 1990년 대학원 재학 시절 숭산(1927~2004) 스님의 설법을 듣고 1992년 출가했다현정사 주지화계사 국제선원 선원장 등을 지냈으며 불교 경전 영역과 법문을 통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써왔다.

2016.07.27

이 사람들의 마음을 100% 이해하고 100% 동감합니다. 나도 이 접은 정신 자연스럽게 떠날 수 밖에 없다. 이번 해는 승려생활 25년째임으로 반성하면서 주한 외국스님들의 오르지 조계종의 데커레이션이다-- 이게는 내 25년간 경험이다. 그 외국인 교수님들과 그 4-5년 전에 KAIST 그만했던 노벨상 총장도 마찬가진 생각일 것이다. 참 슬픈 현상이다.

요새 그리스에선 하고 있는 선/요가 수련 마치자마다 이번 8월 중성에 한국으로 마지막 공식 방문한다. 앞으로 한참 동안 서양에서만 머물다. 화계사()으로 가서 은사스님의 부도탑 앞에 참배, 지방에서 행사 참석, 그리고 사요나라 준비. 물론 환속 안하지만은 현대인들이 참다운 화두선 공부 할 수 있도록 유럽에서나 미국에서 활동할 포그스 것이다.

숭산스님께서 45년전에 한국불교위해서 새 문열었다. 나와 한 100명 외국인 출가자들이 그 포용하는 대문으로 들어왔다. 참 넓고 현대인들에게 딱 맞는 정신.... (그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열쇠를 오르지 계룡산 숭산선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종단 그 문 자꾸자꾸 접게 만들어서 지난 2-3년간만 한 7, 8, 9 명 외국인 승려들 환속했고 나도 요새는 내 유럽 상좌들에게 조계 출가 생활로 절대로 권하지 못 함. 내가 어떻게 그 조선시대 정신에게만 얼리는 교육으로 이 합리주의 바탕에서 자랑했던 서양 사람들은 (특히 서양 여자들) 보낼 수 있을까? 대신에 난 그 신심 있는 애들이 계룡산으로나 한 유명한 일본 선방으로 보냅니다. 다른 서양 스님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숭산스님이 세우신 혁명적인 화계사 국제선원을 완전히 해체 시키는 송설정 등등 대단해요. 다시 조선시대로 인도 해줬다! 한국 선불교 전세계 전파했던 누구나 자기 본성품을 볼 수 있는 열린 그 자리는 그냥 기복 종교로 귀복시켰다. 왜냐하면 기복 = $. 참 슬픈 일이다...

서울대 왔던 외국인 교수들, 줄줄이 떠난다(2016.07.26)


○현각스님, "조계종과 한국 떠난다고 한 적 없다"

□ 자현스님 페이스북 반박 글 

자현스님은 동국대 철학과와 불교학과 졸업성균관대 동양철학 비교철학동국대 미술사학 불교건축고려대 불교철학동국대 역사교육학 한국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 취득현재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4교구 본사 월정사 교무국장조계종 교육아사리불교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2016.07.30

나도 조계종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이지만, 현각스님이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 분은 특별한 능력이 없이 하버드라는 한국인의 저급한 환상 덕분에, 처음부터 조계종의 상위 1에 속했던 사람이다.

이런 그의 환경은 자신만의 식견이 있다면 무언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럼에도 역동적인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즉 이 분의 관점과 내공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국내외에서 박사를 받은 승려가 160명이 넘고 있다. 이제는 하버드 출신 외국인이라는 점만으로는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관심부재가 결국 그를 비판 속에 떠나게 한 동인은 아니었을까?

25년 동안 조계종에 빨대만 꽂고서 가장 좋은 조건 속에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그 조건을 비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도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많은 한국 스님들이 있다.

이 분들의 절대다수는 제아무리 노력해도 상위 1가 되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이에 비하면 하버드 간판에 곧장 금수저를 물려주니 한국불교가 만만했던 게다.

자신의 주장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논리적인 당위성이나 실천적인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분에게는 이런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는 그의 비판이 재벌 2세가 우리나라 재벌문화 참 개판이야라고 말하는 푸념이상으로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2016.07.31

현각의 비판은 외국승려가 얼마나 이기적인 시각에서 한국문화를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각이 제기한 조계종의 문제는 유교적 관습·남녀·국적 차별·형식주의 기복祈福주의·스님과 신도의 차등 외국승려는 장식품 이라는 총 6가지이다.

유교적 관습·남녀·국적 차별·형식주의은 한국적 특징인 유교문화 부분이다. 즉 한국불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더구나 25년이나 살고도 우리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교문화는 좋든 싫든 동아시아의 전통문화다. 그 속에 살려고 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이 적응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그의 비판을 받아들일 수 없다.

기복祈福주의·스님과 신도의 차등은 모든 종교에서 확인되는 부분으로 조계종만의 문제적 특징은 아니다. 현각은 기복주의가 자본과 관련된다고 한다. 100프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불교는 타종교에 비해서 아직 우려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중앙일보의 730일 기사는 현각의 비판과 함께, 강남 봉은사의 2015년 수입은 2108700만원조계사는 2004900만원이라는 내용을 올렸다. 한 번만 생각해 보자. 이 금액이 진짜 많은가?

이들 사찰이 깔고 않아 있는 부동산 가치만 수조원대 이상이다. 그런데도 410억의 수입이 많은가? 그것도 순수익이 아니라 총수입이 410억인데??? 이정도면 기업으로 말하면 부도수준이다. 즉 현각이 우려하는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의 차등은 종교집단에서는 당연하다. 세상 어느 종교에서 성직자와 신도가 평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즉 당연한 정도의 얘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끝으로 외국승려는 장식품이라는 비판. 100프로 동의한다. 그런데 현각처럼 25년이 지나도 한국말이나 한글이 제대로 안 되는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비판을 하기에 앞서 최소한의 노력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한국인 승려들은 출가하면 5년 정도는 보통 50만원 안팎의 생활비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기도하면서 100만원 남짓 받으며 살아가는 정도이다. 이것도 그나마 기복으로 돈을 밝혔기 때문에 가능한 조건이다.

종교는 승자독식구조가 가장 심한 집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계종 승려의 50프로 정도는 이정도 수준에서 살아간다. 가끔 언론에 나와서 문제가 되는 분들은 상위 5프로에 속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마치 재벌과 일반서민의 관계를 생각하면 되겠다.

즉 대다수는 법정 최저 생계 이하의 빈곤층인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기독교와 달리 종교인 과세를 찬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과세해도 과세대상자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외국인은 우리말이 서툴러서 기도를 하지 못한다. 또 상담도 되지 않는다. 즉 자본을 생산해 낼 수 없는, 전적으로 더부살이 집단인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정 문화 때문에 이들에게는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 과연 이 이상 어떻게 해줘야할까?

한국승려가 이들을 모시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현각의 조계종 비판은 내용도 없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2016.08.01

한국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 현각이라는 오만한 이방인을 만들었다.

현각은 1998MBC의 일요스페셜 <만행>을 통해서 한국불교에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다. 왜 하필 현각이 주인공으로 선정되었을까? 그것은 며칠 전 현각이 비판한 부분 중 일부(유교적 관습·남녀·국적 차별·형식주의)인 한국의 고질적인 유교문화의 잔재 때문이다.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하버드라는 학력이 당시로서는 신출내기 출가자인 현각을 주목받게 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각의 한국불교 내에서의 위치는, 당신이 비판한 유교문화에 의해서 만들어진 셈이다.

이후 현각은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1·2(열림원, 1999)를 통해서 화려하게 안착한다.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의 강조점 역시 하버드였다. 90년대 후반만 해도, 하버드는 진짜 먹히는 카드였다. 80년대 김용옥선생이 고려대에서 부교수로 들어가서 3년만에 정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핵심은 하버드였다. 당시 교수체계는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정교수로 승진하는 체계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정교수는 의미가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교수사회에서 정교수는 학교에서 면직 처리할 수 있는 통제권 너머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정교수에서 종신고용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용 뒤 3년만에 정교수가 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버드의 힘이었다.

현각은 최근의 불교비판이 사회문제화 되자, 중앙일보에 이메일을 보내서 한국어가 부족해서 생긴 오해라는 방어논리를 전개했다. 25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한국어가 서툰 분이 1999년 책을 썼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책의 서지사항을 보면 이 책에 허문영이라는 분이 깊이 간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술에 의한 대필은 언제나 있는 출판의 관행이다.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의 책들은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대필자를 명시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허문영이라는 분의 이름이 박혀 있는 것은 이 책의 상당부분이 이 분에 의해서 찬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행>이라는 다큐를 보고 출판사에서 기획해서 책을 팔아서 이윤을 챙길 목적으로 기획 출판된 책이 바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1·2인 것이다.

나 역시 30여종의 서적을 출판한 사람이다. 그래서 출판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지식이 있다. 그래서 단언하건데 이런 전문적인 기획출판에는 대규모의 윤색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즉 당시 현각은 당신이 비판한 기복불교보다도 더 심각한 비윤리적인 자본주의와 타협했던 것이다.

이렇게 순식간에 한국불교의 간판인물이 된 이방인에게 한국불교와 한국인은 너무나 우스운 존재였다. 어떤 분은 수십억을 들여서 절을 지어줬고, 강연에서는 언제나 두둑한 강의료가 따라왔다. 현재도 현각의 1회 강연비는 200300만원에 이르고 있다. 빈손으로 배우기 위해서 온 외국인에게 한국불교와 한국인은 너무도 과분하고 부적절한 대우를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불교의 우대는 오히려 현각을 미국우월주의에 갇히게 하고 만다. 25년 이상을 한국에서 산분이 아직도 한국말과 한글이 서툴다는 것이 여러분은 쉽게 납득이 되는가? 왜 이런 형상이 벌어질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에 가면 그 나라 말을 배우려고 하지만, 동남아나 남미 같은 곳에 가면 그곳의 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면에 존재하는 문화적 경시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비슷한 현상이 현각에게서도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한국은 야만의 문화만을 간직한 국가였던 것이다.

현각의 불교비판은 유교적 관습·남녀·국적 차별·형식주의·기복祈福주의·스님과 신도의 차등·외국승려는 장식품이라는 총 6가지이다. 이 중에서 ①②③은 단순한 불교비판이 아니라, 한국문화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조선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유교, 정확하게는 성리학(주자학)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즉 현각은 한국불교를 넘어서 한국문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사실 내가 분노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한국문화를 비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또 우리 역시 이러한 유교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근 1세기에 걸친 노력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면 비판에 앞서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을 먼저 하는 것이 맞다. 그것도 이제 막 한국에 온 승려도 아니고, 30년 가까이 한국생활을 한 분이 불과 몇 달이면 알만한 문제를 거론한단 말인가? 반대로 생각해보자. 어떤 한국인이 미국에서 30년을 살다가 너희의 개인주의는 참 싸가지가 없어. 그래서 난 떠나야겠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의 사고방식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싫었다면 처음부터 비판하고 떠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리고 수십 년을 살았다면 그것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한 상식 밖의 비판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유효한 기재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저급한 비판이 먹힌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사회현상이다).

현각의 한국불교에 대한 ④⑤⑥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불교에서 이런 얘기가 나온 것이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즉 누구나 문제인식을 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아무리 케케묵은 것이라도 또 꺼내서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최소한 30여년의 인연을 정리하고 떠남까지 염두에 둔 간절한 쓴 소리라면, 그래도 무언가 하나 정도는 새로운 것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30여년을 참선한 분의 안목이 이 정도라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참고로 선불교는 예리한 안목을 핵심으로 한다).

현각의 비판이 한국불교에 경종을 울리는 뼈아픈 비판이었다면 더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불교를 위한 건전한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현각이 꺼내든 카드는 마치 남북문제처럼 모두가 알고 있으나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것뿐이다(불교현실을 모르는 분은 고치면 되지 않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는 한국의 인구절벽문제를 애 낳으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범범한 그의 비판은, 한국불교의 낮은 곳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의 투정으로만 들린다.

군대로 치면 현각은 대령쯤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절대 사병의 어려움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의 그의 비판은 날선 것도 아니며, 한국불교에 절대 경종을 울릴 수 없다. 한국사회의 하버드 망령이 그를 대령으로 시작하도록 특권을 주었지만, 이것은 동시에 낮은 자세로 온 수행자를 오만한 이방인으로 머물게 만들었다. 즉 우리의 과분한 관심과 대우가 오히려 한 외국수행자의 한국문화와 불교에 대한 판단마저 그르친 것이다.

2016.08.03

모든 만들어진 신화는 언젠가는 깨어지고, 또 반드시 깨어져야만 한다. 그곳에는 완전히 감추어질 수 없는 드러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는 언제나 우리의 주변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소중한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잊게 된다.

먼 하늘의 별 빛은 아름답지만 그것의 실상은 타오르는 불이며, 고요한 아름다움인 잔잔함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으로 수렴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낭만이 된다. 이것만이 가장 위대한 본질이므로...

2016.08.03

나는 누가 불교를 비판한다고 발끈하는 사람은 아니다. 종교는 진리에 대한 추구인 동시에 인간 각자에 따른 취미판단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수단일 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관점인 게다. 그런데 작금의 현각스님 발언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이 분 언어 속의 행간에서 한국문화에 대한 존중이 전혀 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투철한 애국자는 아니다. 다만 한국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너무 믿었고 또 우리에게 도움을 받고 산 이방인에게 한국이 무시당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현각스님의 비판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자현스님 중앙승가대 교수불교신문 논설위원) 

2016.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