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2015.08.29
이 경우는 이승만 박정희를 동네북, 김대중 노무현을 성역시하는 한국 언론의 일반적 성향과도 관계가 있다. 김대중 김정일의 음모를 알고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음모이다. 심층취재/김정일-김대중의 ‘주한미군 中立化’ 密約의 전모
- 평양에서 두 사람이 합의한 내용은 駐韓미군의 역할을 평화유지군으로 둔갑시켜 對北억지력을 제거하는 것이었음이 비로소 확인되었다. 이런 발상은 김대중이 임동원을 통하여 먼저 제안한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동맹군을 無力化시키는 密約을 敵將과 한 셈이다.
적중한 김일성 예언
1977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東獨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에게 김일성은 이런 말을 하였다. 독일 통일 후 입수한 회담록에서 옮긴다.
"남한에서 朴正熙 같은 사람이 정권을 잡지 않고 정당한 민주인사가 정권을 잡는다면 그 사람이 反共주의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면 통일의 문제는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남한에서 민주인사가 권력을 잡으면 조선의 평화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남한에서 민주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면 노동자와 농민이 그들의 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군대는 물러가야 합니다. 남한 민중이 그들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들은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김일성은 남한이 민주화되면 반공주의자가 집권해도, 노동자와 농민들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므로 對南공작에 유리하고, 특히 남한사람들 손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1980년대 金泳三 같은 민주투사들은 "좌익은 군사정권에 대한 반발로 생긴 것이므로 민주화만 되면 사라질 것이다"고 했었는데, 김일성의 전략판단이 적중하고, 金泳三의 막연한 낙관론은 빗나갔다.
故黃長燁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남한 정권에서 미국과 일본의 지원을 떼버리면 양쪽의 갓끈이 떨어진 갓 모양으로 되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 버리는 가엾은 신세가 되고 만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주한미군 철수와 韓美동맹 와해를 가장 중요한 對南적화공작 목표로 설정, 끈질기게 추진해온 이유는 한국과 1 대 1로 대결하면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지위 변경’이란 속임수
북한의 연방제 통일안은 통일정책이 아니라 對南적화전략을 위장하기 위한 전술이다. 연방제는 두 개의 체제와 이념을 그냥 두고 중앙정부를 만들어 통일한 것으로 하자는 뻔한 사기이지만, 이를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연방제의 뒷면이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와해'이기 때문이다. 연방제는 주한미군 철수用이라고 보면 된다.
이 전략을 간파한 韓美 두 나라는 駐韓미군 문제를 남북간에 협상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해왔다. 주한미군이 존재하게 된 것은 김일성의 6·25 南侵(남침) 때문이다. 주한미군은 1949년 6월에 철수하였다. 김일성의 南侵은 주한미군 철수가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 나간 주한미군을 불러들인 게 김일성이다. 북한정권이 주한미군을 몰아내려는 책동을 60년간 하고 있는 것은 미군이 나가면 再남침으로 통일하려는 속셈이다. 강도가 경비원을 몰아내고 부잣집을 털려고 하는 것과 같다. 주한미군 문제를 북한정권과 논의하는 것은, 한번 털린 적이 있는 부잣집 주인이 그 강도를 상대로 경비원의 철수를 의논하는 것과 같다.
韓美 두 나라의 완강한 자세를 피해가기 위하여 북한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한미군의 역할 및 지위 변경'이란 속임수를 꺼낸다. 2002년 7월 통일연구원에서 발간한 '남북한 실질적 통합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위상과 역할 연구'란 책(허문영, 조민, 홍관희, 김수암)은 북한의 속셈을 잘 정리하였다.
<북한은 주한미군을 對南 적화전략목표 달성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다. 즉, 북한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한반도의 공산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韓美동맹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기본인식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요구 주장은 1990년대 들어 약간의 전술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90~92년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은 주한미군의 역할변경을 조건으로 주한미군의 주둔을 인정할 수도 있다는 발언도 간헐적으로 제기해왔다. 평화군축연구소 이삼로는 “주한미군은 주둔하되 남북의 통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언급하였고, 아태평화위 이종혁은 “미북 양측이 평화조약을 모색하는 동안 미군이 한반도에서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북한군판문점대표부 이찬복은 “주한미군의 역할이 對北억제로부터 한반도 전체의 안정자와 균형자로 변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이 이처럼 공식적으로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일관되게 요구하면서도 주한미군의 역할변경을 거론하고 있는 이유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궁극적 목표로 하되, 그 중간 단계로서 미군을 ‘평화유지군’ 등으로 역할 변경시킴으로써 주한미군의 지위와 성격을 변경시켜 궁극적으로 韓美동맹체제를 약화시키려는 것이다.>
김대중의 ‘外軍철수 주장’
김일성이 남한에서 정권을 잡아주기를 바랐던 ‘민주인사’ 중 1번은 김대중씨였을 것이다. 남한의 유력한 정치인 중 유일하게 북한정권이 내세운 연방제안에 동조한 이가 그였다.
1980년 5월17일 계엄확대 조치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김대중씨를 연행, 그가 1973년에 在日북한공작원들과 함께 만든 反국가단체 韓民統 사건을 수사, 재판에서 死刑선고까지 받도록 하였다. 有罪가 선고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자료는 중앙정보부의 '金大中 연방제 판단 보고서'였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북괴의 ‘남북연방제’안은 4·19 직후인 1960년 8월 당시 我國의 불안한 정국과 국내 혁신 정당 및 학생층의 비등한 통일논의에 편승, 최초로 제의한 이래 현재까지도 그들의 핵심적 통일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북괴는 이를 통해 한반도 현상을 인정하는 듯한 공존 인상을 부각시켜 통일문제의 민족 내부화와 주한미군의 철수를 촉진시키고 한국內 각계각층 대중과의 광범한 통일 전선을 형성, 聯共 합작 여건을 조성하는 등 對南 폭력 적화혁명 기반을 강화하고자 적극 획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북괴 연방제안과 金大中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표현상 차이를 제외하고는 同 연방제안의 성격, 활동(기능) 및 기구 구성 면 등에서 쌍방이 일치하고 있다.
金大中의 연방제 통일주장은 북괴의 주장과 동일함은 물론 金大中도 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연방제와 함께 '한반도의 外軍 철수'를 주장함으로써 同 연방제를 내세워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하려는 북괴의 전략적 기도에 영합하였다. 북괴는 그의 이 같은 태도를 중시, 그를 '민주인사'로 규정하였고, "민주인사 집권時 연방제로 통일을 실현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金大中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면 평화적 통일이 실현되었을 것"(1975년 5월17일 金日成·日 마이니치신문 기자회견)이라고 피력하였다. 1973년 8월28일에는 '金大中 사건'을 들어 남북대화의 일방적 파탄을 선언(남북조절위 북측 공동위원장 김영주 성명)하는 등 그의 활동을 적극 비호한 바 있다.
이로 볼 때 金大中은 북괴가 對南적화 전략 추진의 여건 조성책으로 제시해 온 '남북연방제'안에 사실상 동조함으로써 북괴를 고무시킴은 물론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 주장으로 敵을 이롭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대중씨는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 신문에서 "피의자는 한국에서 유엔군 등 外軍의 철수를 주장한 사실이 있나요"라고 묻자 이렇게 진술하였다.
"제가 外軍철수를 주장한 것은 남북간에 전쟁억제협정을 체결하고 미·소·일·중 4大國의 지원협력 결의 후 철수하라는 것이었지, 現시점에서 철수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金大中씨가 일본에서 주도적으로 만든 韓民統의 1973년 8월13일자 발기문에는 "한반도를 중립화하고 남북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한다"고 적혀 있다. 1980년 金日成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발표 연설에서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지고 있는 북과 남의 두 지역을 하나의 연방국가로 통일하는 조건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 중립국가로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또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것입니다"고 밝혔다. 중립국가가 된다는 것은 韓美 동맹 관계를 폐기,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金大中씨는 평민당 총재 시절인 1989년 6월3일 광주 교육대학의 시국 강연회에 참석하여 "장차 이 나라가 통일이 되면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국가로 가게 될 것으로 본다"고 밝힌 적이 있다. 김대중이 견지해온 연방제․중립국화․외군철수는 모두 주한미군 철수와 韓美동맹 해체를 전제로 하거나 목표로 하는 것이다.
김대중, 처음으로 주한미군 지위 변경 언급
김대중씨는 대통령이 되자 평소의 소신을 실천에 옮긴다. 그는 먼저 주한미군 문제를 남북간에 논의해선 안 된다는 대원칙을 깬다. 1999년 4월6일자 세계일보는 1면 머리기사에서 ‘주한미군 지위 변경 議題 상정. 정부, 4자회담에. 對北적대서 중립적 위치로’라는 제목으로 김대중 정부의 입장 변화를 다루었다. 이 신문은 ‘정부 당국자는 4월5일 이 달 말로 예상되는 4자 회담 5차 본회담 긴장완화 분과위에서 駐韓미군 지위 변경 문제를 議題로 올려 협상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중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하였다.
이날 오후 육군과 공군 장성 진급자 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金 대통령은 “최근 북한이 주한미군이 평화군이라면 주둔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고 있지 않지만 북한이 처음으로 이런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 또한 북한의 태도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대통령의 발언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조선일보(4월7일자)는 ‘북의 또 다른 트로이의 목마’라는 제목의 社說에서 주한미군 문제는 성격상 4者회담의 議題가 될 수 없다고 못 박고, 도대체 이 정부가 어디까지 후퇴할 것인지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개탄했다.
북한정권이 주한미군 無力化를 위하여 고안한 ‘주한미군 지위변경=평화유지군화’에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은 그의 평소 소신을 반영한 것이지만, 기존의 對北정책에서 근본적으로 이탈하는 것이었다. 김대중의 이런 긍정적 발언은 김정일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1999년 4월19일 국회는 康仁德 통일부 장관을 불러 김대중의 발언을 추궁하였다.
*金命潤(김명윤) 의원: 康(강)장관, 일전에 駐韓미군에 대한 지위문제에 대해서 평화유지군으로 남아도 좋다는 청와대 발표가 있었다가 곧 다시 정정하는 듯한 해명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으로 하여금 이러한 경솔한 발표를 하게 한 경위를 통일부 康장관은 알고 계십니까?
*康仁德(통일부장관): 구체적으로 현장에 제가 없었습니다마는 나중에 청와대 당국으로부터 대체로 들었습니다. 그것은 대통령께서 무슨 보고를 들으시고 얘기한 것이 아니고 그날 신문에 그러한 기사가 나와 있었기 때문에 장성급 진급자들의 신고를 받으시고 대화하는 속에서 안전보장에 대한 얘기를 말씀하시면서 이 사실은 확인된 것도 아니지만 이런 방면으로 북쪽도 변화될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서라고 그럴까, 그런 문제에 대해서 말씀이 계셨다는 말씀을 저는 간접적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金命潤: 아니, 북쪽에서 그런 얘기한 적 전혀 없다고 이렇게 또 확인까지 됐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무슨 신문을 어디서 봤어요? 이것이 대단히 예민한 문제입니다. 이 미군주둔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生死에 관한 문제에요. 이런 예민하고 중차대한 문제를 대통령이 어디 신문을 보다니, 우리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앉은 데서 난데없이 미군을 평화유지군으로 남을 수 있게 한다는, 남아도 좋다 하는 쪽으로…
*康仁德: 주한미군이라는 것은 상호방위조약에 의해서 여기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韓美간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 누가 여기에 개입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지위를 바꿔야 할 그런 시기에 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강인덕 장관은 애써 대통령 발언을 변호하지만 주도면밀한 김대중씨는 ‘주한미군 지위 변경’에 동조한다는 뜻을 김정일에게 전하기 위하여 언론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그 1년 뒤 김대중을 평양에서 만났을 때 ‘대통령의 그런 뜻을 읽었다’고 말하였다.
임동원-김정일의 ‘주한미군 지위 변경 합의’
國情院長(국정원장)이던 임동원씨는 2000년 6월4일 김대중-김정일 회담에 앞서 비밀방북하여 김정일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서 '남측은 북측의 적화통일과 남침위협에, 그리고 북측은 흡수통일과 북침 위협에 서로 시달리고 있는 모순을 해소하기 위하여’ 아래 제안을 하였다고 회고록에서 공개하였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주한미군의 위상에 대해서도 북측이 전향적으로 사고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균형자와 안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주한미군이 현재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대한민국의 안보 책임자가 '북측은 흡수통일과 북침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김정일에게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북한정권이 내부통제용으로 선전하는 '北侵위협'을 임동원씨는 사실로 인정한 셈이다. 韓美동맹군이 北侵(북침)을 꾀한 사실이 있는가? 임동원씨의 말대로라면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게 된다. 南도 北도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 같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안보 책임자가 구경꾼의 입장에 선다는 것 자체가 背任(배임)이다. 주한미군의 중립화와 평화유지군화라는 發想(발상) 자체가 대한민국의 입장이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이 敵(적)을 대함에 있어서 조국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는 뜻이다.
김대중이 임동원을 통하여 김정일에게 제안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균형자와 안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주한미군'이란 말은 그 전에 북한군판문점대표부 이찬복이 한 말-“주한미군의 역할이 對北억제로부터 한반도 전체의 안정자와 균형자로 변형되어야 한다”-과 일치한다. 김대중씨는 북한정권이 주한미군을 無力化(무력화)시키기 위하여 개발한 ‘균형자와 안정자 역할’이란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 이를 김정일에게 다시 던진 셈이다. ‘균형자와 안정자 역할’을 하는 주한미군은 현재의 주한미군이 아니고 對北억지력을 포기한 평화유지군이다. 남북한 사이의 중립군이다. 껍데기 군대이다. 더구나 미국은 그런 군대를 한국에 주둔시킬 이유가 없다. 이는 필연적으로 미군철수와 韓美동맹 해체로 이어진다.
임동원 회고록에 의하면 김정일은 이렇게 和答(화답)하였다.
"김 대통령께서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통일 후에도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데, 사실 제 생각에도 미군주둔이 나쁠 건 없습니다. 다만 미군의 지위와 역할이 변경돼야 한다는 겁니다. 주한미군은 공화국에 대한 적대적 군대가 아니라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군대로서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중략). 미국과 관계정상화가 된다면 미국이 우려하는 모든 안보문제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는 겁니다."
임동원과 김정일이 一瀉千里(일사천리)로 異見(이견) 없이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에 대하여 事前조율을 하는 장면이다. ‘찰떡궁합’이란 표현이 생각난다.
김대중, “그처럼 탁월한 식견을 가진 줄 몰랐다.”
2000년 6월14일 김대중, 김정일이 평양에서 만났을 때 김정일-임동원 사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본 ‘주한미군 지위 변경’은 남북한의 최고 권력자 사이에서 하나의 密約(밀약)으로 굳어진다.
임동원 회고록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이렇게 말하였다.
"1992년 초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남과 북이 싸움 안하기로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미군이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댔습니다. 김 대통령께서는 '통일이 되어도 미군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제 생각과도 일치합니다.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는 것이 남조선 정부로서는 여러 가지 부담이 많겠으나 결국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임동원씨는 (김정일이) 미국측에 전한 말은 "미군의 지위와 역할을 변경하여 북한에 적대적인 군대가 아니라 평화유지군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였다고 회고록에 썼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정상적인 국가관을 가진 이라면 駐韓미군의 無力化(무력화)를 요구한 김정일의 말을 듣고 화를 내든지 이렇게 말하였어야 했다.
"그런 평화유지군은 1개 대대로 족한데, 1개 대대로 어떻게 남북한 사이 전쟁을 막습니까? 미국 정부가 미쳤다고 그런 제안을 받습니까? 주한미군은 6·25 남침과 같은 재도발을 막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이 문제는 남북간에 논의할 성질이 아니고 한미간에 결정할 문제니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수년 전에 나온 ‘김대중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김정일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지난번 김 위원장을 만나고 온 임동원 특사로부터 김 위원장의 주한미군에 대한 견해를 전해 듣고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민족문제에 그처럼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군이 있음으로써 세력균형을 유지하게 되면 우리 민족에게도 안정을 보장할 수 있게 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주한미군에 대한 견해’, 즉 韓美동맹 해체를 겨냥한, 敵將의 주한미군 중립화-無力化(무력화) 제안에 감동하여 '탁월한 식견'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김대중 회고록’은 그러나 임동원 회고록과는 달리 김정일이 이 자리에서 ‘북한에 적대적인 군대가 아니라 평화유지군 같은 역할’을 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미군 주둔에 동의하였다는 대목이 빠져 있다. ‘김대중 회고록’만 읽어보면 김정일이 현재의 주한미군이 통일 후까지 있어도 좋다고 한 것처럼 이해된다. 임동원 회고록의 기술이 더 정확한 것은 물론이다.
김대중의 同調(동조)에 기고만장해진 김정일은 "대통령과 제가 본은 다르지만 종씨라서 그런가, 어쩐지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한 것입니다"고 했다. 김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본관이 어디냐'고 묻자 김정일은 '전주 김씨'라고 대답하였다. 김 대통령은 "전주요? 아, 그럼 김 위원장이야말로 진짜 전라도 사람 아니오! 나는 김해 김씨요. 원래 경상도 사람인 셈이지요"라고 했다.
동맹군을 無力化시키기로 敵將과 합의
김대중, 김정일은 주한미군을 중립화, 無力化시키는 데 합의해놓고 서로 추켜 주면서 좋아하고 있다. 김대중은 이로써, 동맹군에게 알리지도 않고 敵前(적전)에서 동맹군을 無力化시키는 합의를 敵將(적장)과 몰래 한 我軍(아군)의 사령관이 된 것이다. 주한미군 無力化 합의는, 대한민국의 생명줄인 韓美동맹을 사실상 해체하자는 것이다. 국군통수권자를 겸하고 있는 대통령에 의한 이보다 더한 利敵(이적)행위는 人類(인류)역사상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그 1년 전(1999년 4월15일) 林東源 당시 외교안보수석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조찬강연에서 “駐韓美軍에 대해 북한의 태도변화 과정 등을 언급한 것이 마치 정부가 駐韓美軍의 지위 변경을 논의하려 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여져 오해가 생겼다”고 해명했었다. 1년 후 김대중과 김정일은 林씨가 부정하였던 주한미군의 지위변경을 논의하고 합의까지 한 것이다. 1년 전 김대중, 임동원의 ‘주한미군 지위 변경’ 관련 발언은 잘 계산된, 김정일에게 보낸 일종의 ‘同意書(동의서)’였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김용순이 미국측에 ‘주한미군 계속 주둔 용인’의 뜻을 전달한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북한노동당 김용순 국제부장과 미국 국무부 아놀드 캔터 정무차관 사이의 회담은 1992년 1월22일 뉴욕에서 열렸다. 이 회담에서 김용순은 미국과의 관계를 改善(개선)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캔터 차관은 국제적인 위기로 치닫고 있던 북한의 핵개발 문제에 대하여 부시 행정부의 의지를 전달했다.
이 회담 직후 캔터 차관은 玄鴻柱(현홍주) 당시 駐美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회담 내용을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玄鴻柱 전 대사는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인정한다는 취지의 김용순 발언을 캔터 차관으로부터 전해 듣고 본국에 보고했다”고 한다.
퇴임한 아놀드 캔터씨에게 月刊朝鮮 기자가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래 된 일이라, 그리고 긴 이야기 중에 나온 것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못한다. 김용순이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그대로 주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Kim Yong Soon did not exclude the possibility of stationing of US troops in Korea following unification.)는 표현으로 정리하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말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美北협상에서 북한의 목표는 미국과 제대로 된 만남을 가져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에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金大中 대통령은 김정일과 만나고 온 직후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주한미군에 대해서는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주한미군은 한반도에 완전한 평화체제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물론이고 통일된 후에도 東北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북측에 설명했습니다. 주한미군의 필요성에 대한 저의 설명에 북측도 상당한 이해를 보였다는 것을 저는 여러분에게 보고하면서 이것이 이번 평양방문의 큰 성과중 하나라고 말씀드립니다. 만일 한국과 일본에 있는 10만의 미군이 철수한다면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안전과 세력균형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국익을 위해서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저는 여러분에게 이 자리를 빌려 천명하고 싶습니다.”
김대중, 密約을 숨기다
김대중씨는 이 연설에서 김정일이 이해를 보인 주한미군은 현재의 주한미군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버린 중립군(또는 평화유지군)이란 사실을 생략하였다. 그럼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김정일이 지금의 주한미군이 통일 후에도 계속 주둔해도 좋다고 한 것처럼 이해하도록 誤導(오도)하였다.
그때 김대중씨의 속임수를 정확하게 간파한 것은 李東馥(전 自民聯 의원, 전 남북 고위급 회담 대표)씨였다. 그는 “金正日이 그런 말을 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冷笑的(냉소적)이었다. 李씨는 “선전선동의 鬼才인 김정일의 모든 발언은 심리전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주한미군의 역할이 북한군의 남침 위협을 억제하는 방향에서 남북화해 무드 이후 균형자 또는 조정자의 역할로 바뀐다면 더 이상 미국의 정부 의회 언론이 反美운동을 무릅쓰고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켜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남침위협이 있는데도 주한미군을 이렇게 괴롭히는 세력이 있는데 그 위협이 없어졌다고 남북당국이 합의할 경우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할 명분과 근거를 잃게 됩니다. 金正日은 그걸 노리는 것이지요. 그들은 곧 남북한간에 전쟁 위협이 없어졌는데 왜 對北작전계획을 갖고 있느냐 라고 트집을 잡고 나설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주한미군을 평화유지군으로 바꾸려 한다면 미국은 철수를 서두르겠지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김정일과 만나고 온 후 국내외 언론과 인터뷰할 때마다 김정일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에 동의했다고 선전하면서 이를 최대 성과로 꼽았다.
2000년 9월3일 ‘방송의 날’ 기념 방송3社 공동초청 특별대담에서 金大中 대통령은 南北 頂上회담時 자신과 金正日 사이에 駐韓美軍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다시 한 번 밝혔다.
“(김정일의) 답변이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金正日 위원장이 ‘나도 남쪽신문에서 대통령이 말씀한 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대통령이 나하고 똑같이 민족의 장래를 보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큰 나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駐韓美軍이 있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이번에 북한에 가서 그 문제를 확실히 한 것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문제라든가 우리의 국가이익, 東北아시아의 안정 등 큰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여기서도 김정일의 조건부 발언 내용을 전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김대중씨가 은폐한 김정일의 본뜻을 정확히 전달한 이는 임동원 통일부 장관이었다. 그는 2001년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洪思德 의원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였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金正日 위원장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대통령께서 그런 주장을 하시는 것을 우리가 읽었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김용순이 아놀드 캔터를 만나서 최초의 美北(미북) 고위급회담을 할 때 ‘주한미군은 계속 남아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는 점을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敵對(적대)관계에 있는 미군이 있으라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미국과 북한 간에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주한미군이 북한에 대한 敵軍(적군)으로서가 아니라 남과 북 사이에서, 또는 주변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고······’, 그러니까 밸런싱 롤을 말하는 것 같아요. 또 안정의 역할, 스테이버라이징 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역할을 하는 군대로 남아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지정학적 위치가 어떻고 한참 이야기를 했어요.”
代를 이어 실천되는 密約
주한미군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균형자와 안정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군대가 아니다. 오로지 북한군의 再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주한미군은, 범인을 잡으러 온 형사이지 범인과 피해자를 말리고 화해를 붙이는 거간꾼이 아니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평화, 안정, 균형자, 안정자 같은 좋은 말을 組合(조합)하여 인식의 혼란을 야기한 다음, 주한미군의 존재 목적을 거간꾼으로 전락시키려 한 셈이다.
2002년 선거 때 노무현 후보는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는 말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고(이 발언에 화가 난 鄭夢準 의원이 지지를 철회하였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뒤엔 동북아 균형자론을 들고 나오더니 드디어 韓美동맹 해체의 제1단계로 갈 가능성이 있는 韓美연합사 해체 작업을 강행하였다. 그것도 북한정권이 核(핵)실험을 한 직후에. 김정일-김대중의, ‘주한미군 중립화(=無力化)에 의한 韓美(한미)동맹의 실질적인 해체 합의’는 노무현 정부에 계승된 것이다.
6·15 선언 2항은 김대중식 연합제안과 김정일의 연방제안을 절충한 통일방안에 합의한 것이다. 김대중식 연합제안은 북한 연방제안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합의는 사실상 연방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봐야 한다. 연방제안은 주한미군 철수용이다. 연방제를 수용했다는 것 자체가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에 합의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김대중, 김정일은 ‘주한미군 無力化(무력화)’ 密約(밀약)을 실천적 약속으로 만들기 위하여 6·15 선언 2항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은 명백하게 헌법을 위반한 6·15 선언의 폐기를 선언하지 못하였다. 한미연합사 해체 합의도 취소시키지 못하였다. 남북한 좌익들은 ‘6·15 선언 실천’을 ‘미군철수와 赤化(적화)통일’의 同義語(동의어)로 쓰고 있다. 김정일과 김대중이 합작하여 대한민국을 함정으로 빠뜨린 게 ‘6·15 선언’인데 이의 폐기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정당이 없다. 그런 점에서 김정일-김대중 密約(밀약)은 한국에서 代(대)를 이어 실천되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씨는 무슨 계산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오해이다. 그는 반공이 國是(국시)이던 1970년대부터 公言(공언)하여 왔던 ‘연방제-외군철수’ 약속을 대통령職(직)을 이용하여 실천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그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다.
한 부자 집 주인이 전에 그 집을 턴 적이 있는 강도를 찾아가 집 경비원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놓고 의논을 하였다. 강도는 “경비원을 그냥 두어도 좋다. 다만 나에게 敵對的(적대적)인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 마을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만 하여야 한다. 그것이 진심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경비원을 무장해제 시킨 뒤 계속 두라”고 요구하였다. 집 주인은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정말 놀랍습니다. 治安(치안)문제에 그처럼 탁월한 識見(식견)을 가지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한다. 집 주인은 돌아와서 식구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강도께서 경비원을 지금 있는 대로 그냥 두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치안문제는 풀렸다. 이젠 다리 뻗고 자자.”
김대중 김정일의 주한미군 중립화 밀약은 우파 정권의 등장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주한미군 중립화를 통일의 한 방도로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미국은 주한미군의 중립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한미동맹 해체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하니까.
한국 언론은 역적모의 수준의 이 김대중 김정일 밀약을 보도한 적이 없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덮고 사소한 데 목숨 거는 한국 언론과 정치의 버릇은, 안보를 자신들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뼈에 사무친 사대주의적 근성의 필연적 발로일 것이다.
이 경우는 이승만 박정희를 동네북, 김대중 노무현을 성역시하는 한국 언론의 일반적 성향과도 관계가 있다. 김대중 김정일의 음모를 알고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음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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