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이적단체

정치 2015. 10. 25. 19:08

<출처 키백과>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에서 이적단체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말한다(국가보안법 제7조제3). 이적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며, 미수범 및 예비·음모도 처벌한다.

이적단체에 대하여 대법원은 '반국가단체 등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 변란을 선전·선동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합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적단체를 인정할 때에는 유추해석이나 확대해석을 금지하는 죄형법정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서 단체가 지향하는 노선이나 목적, 활동 등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위험성이 있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아래는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판결한 단체들이다.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1989년 대법원 판결)

◾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1997년 대법원 판결)

◾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1997년 대법원 판결)

◾ 한국청년단체협의회 (2004년 대법원 판결)[4]

◾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2010년 대법원 판결)[5]

◾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2012년 대법원 판결)[6]

◾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자통)

◾ 청주통일청년회

◾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청년모임 소풍

◾ 코리아연대 : 총책 조씨의 주도 아래 북한의 대남혁명론을 국내에서 실천하기 위해 21세기 코리아연구소 등 6개 단체가 연대해 201111월에 구성한 단체로서 북한 대남혁명노선을 추종하며 인터넷 신문 '21세기 민족일보', 팟캐스트 '코리아 포커스', 월간 '레지스탕스' 등을 통해 북한 로동신문, 조선중앙통신 등에 게시된 기사, 성명서 등을 게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전대협 동우회' 다음카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全國大學生代表者協議會)19876월 민주화운동(6월 항쟁)이 고조되면서 8월에 결성된 전국적인 대학생 조직인 전국 대학 총학생회 협의체로 약칭은 전대협이다. 1993년 해체하여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으로 전환했다. 기치는 구국의 강철대오. 설립목적은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평화통일, 민중연대, 학원자주화, 학생통일단결이다. 전대협은 19935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다시 태어난다.

시위 참여 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이한열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198775일 연세대학교에서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회의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전국적인 대학생 대중조직의 건설을 결의하였다. 819일 충남대학교에서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장 이인영을 의장으로 하여 1기 전대협 출범식을 가졌다. 전대협은 이전에 여러 개의 조직이었던 학생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통합 조직으로서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19893기 전대협은 민간 통일운동으로 임수경을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보냈다. 임수경은 제3국을 통해 방북하였으며 문익환 목사와 함께 군사분계선으로 내려왔으나 곧 구속된다. 이 사건을 기획, 지원한 임종석 3기 의장도 임수경과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은 호외를 발행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박홍, 이도형, 윤치영 등이 전대협을 친북이적행위자, 주사파 집단으로 규정하여 비판하였다.

전대협 진군가

일어섰다 우리 청년학생들 - 민족의 해방을 위해 - 뭉치었다 우리 어깨를 걸고 - 전대협의 깃발아래 - 강철같은 우리의 대오 - 총칼로 짓밟는 너 - 조금만 더 쳐다오 -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 아 전대협이여 - 우리의 자랑이여 - 나가자 투쟁이다 - 승리의 그 한 길로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연혁

1987년 대통령 선거참여 투쟁

1988년 남북 학생회담 추진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19918월 남북청년학생해외통일대축전 참가 후 방북

역대 의장

1기 이인영(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2기 오영식(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3기 임종석(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4기 송갑석(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5기 김종식(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6기 태재준(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전대협 약사

1기 전대협

전대협의 건설은 열사들의 죽음과 그들의 뒤를 투쟁으로 이어가고자 했던 100만 학도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 결정체이다. 서울대의 박종철 열사가 정권의 잔혹한 물고문으로 죽음을 당하고 이에 분노하여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69일 연세대의 이한열 열사가 또다시 정권의 최루탄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였다. 민중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으며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준비를 겸하여 연세대에 모인 전국의 총학생회장님들은 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벌여 나가기 위하여 조직결성에 합의하기에 이른다.

이어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그 해 819일 충남대에서 역사적인 전대협 1기 출범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그때는 출발의 의미가 있었던지라 참여인원은 3,500명에 그쳤고 아직 지구, 지역별로 정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총학생회장님들의 협의체수준에 있었다.

1기 전대협은 이어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단일화와 비판적 지지, 그리고 민중후보지지 등의 입장으로 갈라져 효과적인 대통령선거를 치르는데 많은 한계를 가져왔으나 6월항쟁이라는 엄청난 대중항쟁을 이끌어낸 선배님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전국조직의 결성은 그에 비길 수 없게끔 역사가 기억한다 할 것이다.

2기 전대협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1988년은 1987년 대통령선거패배의 교훈과 아픔을 딛고 새로운 전진을 해야할 시기였으며 총선과 올림픽이 열리는 등 중요한 한해였다. 2기 전대협은 알다시피 419이후 얼어붙었던 통일운동의 재건과 개척으로 역사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유세에서 처음으로 발표된 기호2번 김중기, 유재석후보의 서한 사랑하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우여러분께 드리는 글은 학생운동권과 정국에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그것은 금기의 영역인 <통일>이라는 두 글자를 다시 광장으로 끌고 나오는 역사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에 수천 수만의 가슴을 울리며 급속도로 퍼져갔다. 이러한 흐름은 그해 426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의 창출과 515한반도의 통일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막아져서는 안됩니다의 장문의 편지를 써놓고 명동성당 옥상에서 투신한 서울대 조성만 열사의 항거와 맞물려 더욱 기세를 올려 100만 학도의 거족적인 통일운동을 가져왔다.

전대협은 610815남북학생회담투쟁을 전개하면서 한반도 통일의 문제를 내외에 제기하였고 분단의 원흉인 미국의 문제와 노태우정권의 반통일 행각을 폭로하였으며 올림픽을 남북공동으로 치를 것을 제기하였다. 하반기 들어서도 전대협은 투쟁을 멈추지 않고 전두환, 이순자 구속 처벌투쟁을 힘차게 12월말까지 벌여나가 마침내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다.

3기 전대협

철규를 묻기 전에 노태우를 묻고 가자! 축전의 도시 평양으로

1988년 거세게 몰아쳤던 통일의 열풍은 노태우 정권으로 하여금 정권유지의 위기의식으로 닥쳐 왔고 그들은 정국돌파용으로 공안정국을 조장하였다. 공안정국은 1988년 일시적으로 조성되었던 여러 가지 해금조치가 다시금 철저하게 국가보안법의 테두리 안으로 묶이고 애국인사들과 학생들이 감옥으로 줄을 이었다. 그러나 청년학생의 통일운동은 사회각계각층으로 제기되었으며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은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해 413일 영원한 통일의 청춘 고 문익환 목사는 단독 방북을 결행하여 김일성주석과 만나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고 현대중공업은 역사적인 100일파업을 벌였다.

3기 전대협은 문목사의 방북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아울러 그해 7월에 있는 제13차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통일원에 정식으로 신청을 하는 등 통일투쟁을 이어갈 준비를 하였다.

한편으로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에 대한 지지와 지원으로 노학선봉대를 만들어 울산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대의 이철규열사가 정권의 처참한 고문으로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하여 광주시내 수원지에서 시체로 발견되자 전대협은 명동성당구국대단식투쟁을 하는 등 열사의 한을 풀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여세를 몰아 마침내 630일 역사상 최초로 전대협대표 임수경 학우를 평양으로 보냈으며 그 자리에서 조선학생위원회 김창룡 위원장과 함께 공동으로 통일선언을 발표하였다.

3기 전대협은 1988년의 상과를 이어받아 폭압적인 공안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남과 북의 만남을 직접적으로 성사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4기 전대협

친미 파쇼 야합 민자당을 분쇄하고 범민족대회 사수하자!

1990년은 학생운동의 재()도약기였다. 1989년 공안정국의 터널을 헤쳐온 학생운동은 운동의 대중화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조직의 혁신과 간부 혁신, 과학생회의 강화라는 기치를 걸고 1년 내내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그리고 90122일은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친미파 소야합 민자당의 결성과 전국노동조합 협의회의 건설이었다.

1990년 상반기 전대협은 이 시대의 정치야합 민자당에 대한 규탄투쟁과 광주항쟁 10년의 의미를 살리며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을 외치며 투쟁을 전개하였다. 절정은 59일 전국적인 반민자 투쟁이었으며 이어 광주 전남대에서의 4기 출범식은 정권의 혹독한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4만 명이 모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어떤 학생은 자전거를 타고 광주까지 오기도 했으며 당시 용성 총련 대유공전 신장호 열사는 기차 안까지 검문을 하는 전경을 피해 열차에서 뛰어내리다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4기 전대협은 그해 역사상 처음으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분투하였으며 이것은 전국민적인 통일 열기를 몰아왔다. 범민족대회는 1988년 청년학생들의 투쟁의 성과를 받아 안아 남측의 1,114명의 애국인사들이 북측에 제안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4기 전대협은 운동의 대중화를 이루고 범민족 대회를 사수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5기 전대협

조국은 싸우고 있다! 100만 학도의 사랑 투쟁 영광 오늘 청춘은 빛난다!

5기 전대협은 강경대열사와 함께 거리에서 출발을 알렸다. 정권과 학생운동간의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은 1991년 다시 공안정국형성을 기도하는 강경정책을 불렀고 이것은 급기야 명지대의 새내기였던 강경대학우를 쇠파이프로 죽이는 사태를 야기하였다.

그 사건이 있기 전 명지대의 학자투집회에서 총학생회장 박광철학형이 경찰에게 잡히자 학우들은 총학생회장구출과 학원자주 승리를 위한 명지인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으로 몰려가 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대오가 밀리고 정찰임무를 맡았던 강경대학우가 미처 퇴로를 찾지 못한 와중에 백골단들이 몰려들어 쇠파이프로 죽인 것이다. 이 사건은 노태우정권의 폭력성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이후 박승희, 천세용, 김영균, 박창수, 김철수열사 등등 차마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청년학생과 노동자, 고등학생, 주부의 죽음을 불렀다.

전대협은 거의 이틀이 멀다하고 전국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전대협은 정권의 1주일 전부터의 원천봉쇄를 뚫고 경희대로 진입하여 범민족대회를 성사시켰고 아울러 남과 북과 해외의 통일운동조직인 조국통일 범민족연합이 결성되었다.

6기 전대협

불패의 신화 전대협이여! 민주정부 수립하라!

1992년은 노태우 정권의 5년 학정을 폭로하고 심판하여 전국민의 단결된 힘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하는 해였다. 

6기 전대협은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자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대선 방침에 대한 의견들을 수렴하였으며 한양대에서 8만 여명이 결집한 가운데 출범식을 치르고 민주정부수립을 결의하였다. 아울러 그해 8월 범민족대회장소인 중앙대를 겹겹이 둘러싼 전경들에 의하여 서울대로 장소를 옮겨 빗속에서 200만의 통일기관차 조국통일 범민족 청년학생연합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중앙대 침탈로 태재준의장님을 비롯한 많은 지역의장님들을 빼앗겼다.

6기 전대협은 공정선거 감시단활동, 민주정부수립선봉대활동을 통하여 노태우정권과 민자당의 실정을 폭로하고 민주후보가 당선되도록 하기 위하여 투쟁을 벌였으나 정권교체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직의 발전을 더욱 가속화하여 지역별로 협의체를 극복하고 연합체로 전환하였고 한총련 건설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게 하여 전대협 6년의 막을 내리고 한총련의 시대의 막을 올렸다.

국보법 폐지·빨치산 추모 등 종복노선 누구 누구인가

2013.03.04. 뉴데일리

지금 국회에선 이적단체 '전대협'출신 의원들이

國會로 진출한 利敵단체 '전대협출신 인사들

김태년-이인영 등 민통당 내 전대협 출신 당선자들

▲ 19876월 항쟁에 참여했던 이인영 의원과 우상호 의원. 전대협 1기 지도부가 모 대학 집회에 참석해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再錄 2012528일자 보도>

노무현 정권의 주요 인맥이었던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출신 운동권 세력이 대거 국회로 진출했다. 19대 총선 전대협 출신 당선자는 김태년, 이인영, 임수경, 오영식, 우상호, 정청래, 최재성, 박홍근 등이다.

전대협은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철폐-평화협정체결-연방제통일이라는 북한의 對南노선을 추종하다, 1992·1993년 핵심부서인 정책위원회등이 利敵團體(이적단체) 판정을 받았다.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 前身)의 전대협 수사결과에 따르면 전대협은 主思派(주사파) 지하조직에 장악되어 있었다.主思派에 장악된 전대협의 실체 수사결과,전대협 유인물과 북한방송 대비분석,전대협은 순수학생운동조직인가,전대협의 조직실체등의 공안문건들은 전대협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대협은 87년과 88년 전국사상투쟁위원회와 反美청년회의 배후조종을 받은 데 이어 89~90년에는 자주·민주·통일그룹’(自民統)의 배후조종을 받아왔고, 91년 이후에는 반제청년동맹, 조통그룹 등 主思派지하조직에 장악됐었다(중략) 전대협은 항상 김일성과 한민전(북한의 對南선전매체)을 추종하는 지하혁명 조직에 의해 움직여 왔다.특히전대협은 순수학생운동조직인가문건의 경우 이인영, 오영식 등 과거 전대협 1, 2기 의장들이 모두 主思派 지하조직원이라고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875월 전대협 제1기가 결성된 이후 19916월 현재 전대협 제5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전대협 의장은 모두 主思派 지하혁명 조직에서 파견한 지하 핵심조직원임이 그 동안의 조사과정에서 드러났음. 전대협 제1기 의장 이인영은 198612월 고려대 중심 主體思想 신봉자들이 결성한 主思派 지하조직 전국사상투쟁위원회(전사투위)가 전대협 의장 감으로 사전물색,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시킨 후 의장에 당선시킨 자이고, 전대협 제2기 의장 오영식은 1988120主思派 지하조직 反美청년회 출신이며, 전대협 제3, 4, 5기 의장 임종석, 송갑석(전남대), 김종식(한양대) 등도 主思派 지하조직 자주·민주·통일그룹(자민통)이 전국 학생운동을 주도, 장악하기 위해 전대협에 침투시킨 지하조직원들이었음

전대협의 이 같은 從北노선을 입증이라도 하듯 민통당의 김태년, 오영식, 우상호, 이인영, 정청래, 최재성 당선자들은 열린우리당(민통당의 前身) 의원시절인 20041020일 국가보안법 폐지안에 모두 서명했었다.

이들 전대협 출신 당선자들과 함께 당시 국보법 폐지안에 서명했던 인사들로는 신기남, 양승조, 우윤근, 유기홍, 유승희, 강기정, 강창일, 김영주, 김재윤, 전병헌, 조정식, 윤호중, 이미경, 이상민, 이석현, 김춘진, 김현미, 노웅래, 민병두, 최규성, 최재천, 한명숙, 노영민, 문병호, 윤호중으로 이들 모두 1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진보당(민노당) 19대 총선 당선자로 당시 국보법 폐지안에 서명했던 정치인은 노회찬, 심상정 의원이다.

전대협 출신의 이인영, 오영식, 우상호와 함께 민통당 19대 국회의원 당선자인 강창일, 이목희, 이상민, 문병호, 정청래는 2007년 대표적 從北단체인 한국진보연대 등이 주도한 간첩·빨치산 추모제(1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 추모제) 추모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던 인물들이다.

당시 행사에 소개된 열사 가운데 상당수는 건국 이후 간첩-빨치산 활동으로 추모대상에는 남파 간첩 출신의 금재성·김도한·김남식·신창길·왕영안·윤용기·진태윤·최백근·최남규·최인정, 빨치산 출신의 권양섭·김광길·김병인·김용성·김현순·류낙진·박판수·손윤규·안상운·윤기남·장광명·정대철·정순덕·주명순 등 共産(공산)혁명가들이 포함됐다.

행사장 전시물은 남파간첩 출신과 빨치산 출신들을 가리켜 동지열사로 호칭하며, 각각 통일조국을 위한 사업을 위해 남한에 파견”, “조국통일투쟁에 전념하시다등으로 미화했었다. 진보당 19대 총선 당선자로는 노회찬, 심상정이 당시 행사에 추모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