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코민테른은 사회주의계 근로자 및 사회주의 단체의 국제적 조직으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를 코민테른(Comintern : 제3인터내셔널 1919-1943)이라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한 당이 자국 정부를 옹호하는 사회 배외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간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내란으로 전화할 방침을 내건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볼셰비키)'과 각국 사회민주당의 좌파들은 짐머발트(1915)와 키엔탈(1916)에서 두 번의 회의를 갖고, 1919년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 조직으로서 제2인터내셔널을 대신할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하였다.(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사회주의의 달성이라는 노선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2인터내셔널과 구별된다)
여기에는 30개국 대표 51명이 참가했는데,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 터키, 페르시아 등도 참가했다. 이러한 제3인터내셔널은 제7차 대회(1934)에 이르기까지 명실상부하게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구심체였으나, 이후 점차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각국의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의 창조적 활동이 강조됨에 따라, 코민테른 중앙부로부터 각 국 지부에 대한 지도와 원조는 급속히 형식화되었다.
1. 코민테른의 배경
레닌은 1차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제2인터내셔널의 전쟁지지를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단정한 후 이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1차대전의 와중에서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을 성공시켜 소비에트 정권을 탄생시켰고, 다음 해에는 유럽의 수정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결별하는 의미에서 당명을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1919년 2월 3일 스위스의 베른에서는 영국노동당을 비롯한 제2인터내셔널의 우파들이 모여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을 중심으로 러시아혁명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아닌 엘리트 당의 혁명과 독재로 귀결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했다. 우파의 제2인터내셔널의 재건에 맞서서 또한 당시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서 레닌을 비롯한 좌파는 1919년 3월 2-6일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모여 독자적으로 코민테른, 일명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했다.
2. 코민테른 세계 대회
1차대회(1919년3월 2-6일, 모스크바)
마르크스주의를 계승, 발전시킨 레닌주의에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 즉 제국주의시대에서의 자본주의의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독재의 필연성을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부활시키는 강령이 채택되었다.또한 러시아혁명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내전에 대한 연합국들의 개입과 지원에 반대하여 러시아혁명을 방위할 것을 결의했다.
2차대회(1920년 7-8월, 모스크바)
유럽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고취하고, 코민테른에 참여한 일부 우파들을 제거하기 위해 ‘21개조의 가입조건’을 제시했다. “코민테른의 모든 결의와 결정을 승인하고 실행하는 강령을 만들고, 당명을 공산당으로 고치고, 민주적 중앙집권제로 조직하고, 제국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수호하고, 자국의 제국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고, 수정주의자들을 제거할 것”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식민지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야하며, 이에 성공한 민족적 민주주의 정부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거치지 않고도 프롤레타리아 선진국의 원조를 받아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제시했다.
3차대회(1921 6-7월, 모스크바)
유럽에서의 혁명운동의 실패와 침체를 인정하여 직접적 정권탈취보다는 일상적 투쟁을 통한 대중획득을 위해 ‘대중 속으로’라는 표어로 상징되는 ‘통일전선전술’을 채택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전술’을 강조했는데 이는 반자본주의 세력, 특히 사민당과 그 영향하에 있는 노동조합에게 공동투쟁을 제의하고, 공동의 통일전선을 형성하되, 그들과는 독자적인 노선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4차대회(1922년 11-12월, 모스크바)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전술’을 채택했다. 대회는 유럽에서 자본의 공세가 강화되고 있으며, 파시즘이야말로 강화되는 자본의 공세의 가장 쳠예한 형태라고 규정하고, 이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전체에 확산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전술에 의한 노동자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제시했다. 또한 통일전선전술을 민족해방운동에도 적용하여 중국에서는 1924년 1월 제1차 국공합작으로 ‘반제통일전선’를 결성하게 되었다.
5차대회(1923년 10월, 모스크바)
독일의 작센주와 튀링겐주에서 수립되었던 사민당과 공산당의 연립노동자 정권이 실패로 끝난 경험과 관련하여 통일전선전술을 재검토한 후, 통일전선에서도 공산당은 고유의 혁명성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지도자간의 위로부터의 통일뿐만 아니라 노동자간의 아래로부터의 통일도 병행할 것을 강조했다.
6차대회(1928년 7-9월, 모스크바)
1924년 1월 레닌의 사망 후 권력투쟁과정에서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서 ‘일국혁명론’을 주장한 스탈린이 1925년에 권력을 잡은 후 처음 열리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먼저 이전까지의 대회에서의 결정들을 포함한 완성된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은 자본주의의 자유경쟁단계에서의 독점자본주의, 즉 제국주의로의 역사적 전환, 제국주의의 위기로서의 , 전후 혁명적 위기와 피시즘의 대두를 이론적으로 개관하면서, 세계자본주의체제의 4대모순으로서 제국주의국가에서의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간의 모순, 제국주의와 식민지간의 모순, 제국주의국가간의 모순, 제국주의국가와 공산주의국가간의 모순을 들면서 이런한 모순의 심화로 결국 자본주의는 몰락하고 공상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둘째로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지부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 결의문은 코민테른의 지부, 즉 각국 공산당들은 제국주의전쟁이 일어날 경우 자국의 제국주의전쟁을 내란으로 전환시키고, 제국주의국가와 소련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사회주의 조국’소련을 방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서의 혁명활동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당시 중국, 인도 , 인도네시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남미에서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찬양하면서 식민지혁명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식민지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서 민족해방운동과 토지혁명이 중심적 과제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압력과 혁명적 노동자와 농민의 압력으로 민족적 부르주아지의 입장은 동요되기 쉽기 때문에 공산당 지도하에 긴밀한 노․농동맹의 결성이 혁명성공에 관건이 된다.
7차대회(1935년 7-8월, 모스크바)
심각한 세계공황 속에서의 독일과 이탈리아 및 일본의 파시즘정권의 전쟁위협에 직면하여 소련이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등과 공동투쟁을 모색하는 가운데 개최되어 <반파쇼투쟁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이에 따르면 파시즘이란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배타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분자들의 공공연한 폭력적 독재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와는 달리 대내적으로는 노동자와 농민 및 지식인의 혁명적 부분에 대한 폭력적 탄압이 조직이며, 대외적으로는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침략이다.
3. 코민테른의 해체(1943년 6월 10일)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각국의 국내외적 정세가 한층 복잡해짐에 따라 각국 노동운동의 문제들을 국제적 중앙부서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곤란하고, 각국 공산당의 지도력 신장을 국제적 중앙부서가 오히려 방해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미국과 영국의 협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코민테른의 해체 이후에도 소련은 각국 공산당을 비공식적으로 지도해왔다.
4. 코민테른의 역사적 의의
코민테른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전세계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창설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인 중앙집권적 정당이며, 이에 가입한 각국 공산당은 일국일당주의 원칙하에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코민테른 지부’로서 코민테른의 강령과 규약 그리고 결의사항을 승인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이었다. 소련 공산당은 코민테른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렸는데 이는 소련공산당이 최초의 공산주의국가 및 코민테른의 실질적 주도세력으로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코민테른은 ‘사회주의 조국 소련’에의 충성을 약속하는 소련공산당의 국제적 전위대가 외었던 것이다.
■ 조선 공산당과 코민테른
【코민테른】
1) 코민테른이란 무엇인가?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제3 국제당 혹은 제3인터내셔널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발기에 의해 1919년 3월 창설되어 1943년 5월 15일 해체된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의 국제적 조직체이다.
2) 코민테른의 창립과 목적
국제공산당의 목적은 각국 공산당들 사이의 연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함으로써 자본주의제도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세우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국제공산당규약은 레닌주의적인 당 생활원칙에 근거하여 국제공산당의 기구와 지도기관들의 기능을 규정하였다. 국제공산당의 최고기관은 대회이고 대회와 대회사이의 지도기관은 집행위원회였으며 당의 일상 사업은 집행위원회가 선거한 상무위원회가 지도하였다. 매개 나라에는 1국1당의 원칙에 따라 국제공산당지부를 두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조선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 중 만주에서 활동한 이들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국제공산당은 창건되어 해산될 때까지 7차례의 대회를 가졌으며, 제 7차대회에서는 노선을 이전의 계급투쟁에서 반제국주의투쟁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노선변화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성격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수 있는 이념의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초기 조선공산당】
1) 초기 조선공산당의 성립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당적 조직은 1918년 노령(露領)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이었다. 이어 1919년과 1920년에 걸쳐 국내에서도 여러 공산주의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화요파, 서울파, 상해파, 등으로 불리우게 되는 이들 그룹은 당시 국제혁명운동의 지도 기관 역할을 하면서 국제공산당으로도 일컬어지고 있던 제3인터내셔날, 곧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 지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각 그룹 사이에서는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부 그룹의 연합에 의해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출범한다. 조선공산당은 1928년 7월부터 9월까지 열린 코민테른 제6차 대회의 46차 회의(9월 1일)에서 코민테른의 조선 지부로 정식 승인을 받았다.
2) 초기 조선공산당의 해체
코민테른은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의 지부 승인을 취소했다. 다시 말해서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을 받고 나서 채 반 년이 지나기도 전에 해산 지시를 받은 것이다. 코민테른에 따르면, “해산의 주요 원인은 당 내부가 주로 소부르주아지로 이루어졌으며 노동자의 투쟁과 무관한 단체이며 늘 서로 다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지부승인 취소와 함께 ‘조선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 곧 12월 테제를 통해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파벌 투쟁을 극복하고 대중에 기초한 당을 재건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1929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17년간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이 바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1) 조선 공산당 재건운동(1929~1931년)
1930년대 초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대규모 투쟁이 계속 일어났다. 이러한 대중 투쟁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그 대표적인 보기로 1930년 1월의 부산 조선방직 파업, 1930년 5월과 6월의 신흥 장풍탄광 파업, 1930년 8월의 평양 고무공장 동맹 파업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파업 투쟁, 1929년 가을부터 다음 해 7월까지 계속된 용천 불이농장 소작쟁의, 1930년 3월의 정평농민동맹 집회 해금 투쟁, 1930년 7월의 단천 삼림조합 반대 투쟁, 1931년 5월의 홍원 호세(戶稅) 연납 진정 시위 투쟁, 1931년 11월의 삼척 도로 공사비 불납 시위 투쟁, 1932년 3월의 양산농민조합 폭동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농민 폭동 등을 들 수 있다.
국내의 불안정한 정세뿐만 아니라 국외에도 세계적인 공황으로 인해 제국주의 전쟁의 위기가 점차 현실화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세계 각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해 투쟁할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러한 혁명적 정세관은 이 시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사회주의자들은 빠른 기간 안에 당을 재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먼저 주도권을 잡기위하여 종래의 분파 조직의 연장선에서 각각 그룹을 만들어 당 재건을 위한 준비 조직을 꾸리는 데 재건 운동의 주안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은 당 재건의 기초로서의 대중 역량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혁명적 대중조직을 결성하고 그 조직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대중 투쟁을 벌여나갔다. ‘투쟁을 통한 조직화’ 라는 방침은 사회주의자들을 대중과 강고하게 결합시키는 계기로 작용함과 동시에 대중에게 조직의 의미를 각인시키고 대중의 의식을 고조시키는 성과를 낳았다.
그러나 대규모의 대중 투쟁은 곧바로 일제의 탄압을 초래했다. 대중투쟁의 결과 혁명적 대중조직은 물론 그것을 지도하는 당 재건 준비조직의 존재가 드러났고 조선공산당 재건의 기초가 되어야 할 선진적 대중 가운데 다수가 투옥되었다. 여기에 이미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지시한 바 있었던 코민테른이 1930년과 1931년에 걸쳐 경쟁적으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고 있던 각 분파에게 해체를 지시함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2)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과 혁명적 대중조직운동(1931년-1937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방침은 1931년 말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한 계기는 이 해 9월에 일어난 만주사변에 의해 주어졌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들은 만주사변과 그에 따른 ‘제2차 제국주의 세계 대전’이 조선 혁명의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사회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괴뢰 만주국의 건립, 곧 일제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지배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따라서 빠른 시간 안에 조선 혁명을 이룰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당 조직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계기는 1932년 초부터 대중 투쟁이 급격하게 퇴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의 동맹 파업 건수, 농민의 소작 쟁의 건수, 학생의 동맹 휴학 건수가 모두 1931년을 정점으로 1932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1932년 이후에는 파업투쟁의 규모나 전투성도 점차 줄어들었다.
또한 대규모 농민 폭동도 함경도의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대중투쟁의 고조가 당 재건과 조선 혁명에 직결될 것이라는 기대도 점차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코민테른은 1931년 말 이른바 ‘신지도 이론’을 통해서 모든 재건운동세력은 혁명적 대중조직의 건설을 당 재건운동의 출발로 삼을 것, 혁명적 대중조직 안에서 획득된 전위적 활동가로 구성되는 공산주의자 그룹을 당 재건의 매개 조직으로 할 것, 공산주의자 그룹은 횡적으로 연락하지 말고 활동 상황을 직접 코민테른에 보고할 것, 이 과정에서 당 재건의 토대가 확립되었을 때 코민테른이 파견한 전권 위원의 주도 아래 그룹 대표자 회의를 열어 당을 재건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조직 노선을 채택했다. 새로운 노선의 핵심은 사회주의 운동의 역량을 생산 현장에서 대중과 결합하고 대중의 투쟁을 지도하는 데 투입함으로써 당 재건의 대중적 토대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먼저 생산 현장에서 혁명적 농민 조합과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이어 지역별, 산업별 위원회와 전국적 적색노동조합위원회를 조직한 뒤 혁명적 대중 조직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선발된 정예분자로 각지에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을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주안점은 혁명적 대중 조직을 강화하는 데 두어졌다.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당 재건 준비 조직과는 달리 재건될 당의 정치적, 조직적 주도권을 갖는 조직이 아니었다. 이 조직의 일차적인 과제는 직접적인 당 재건이 아니라 대중 운동을 활성화하고 대중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데 있었다. 대중에 대한 지도를 통해 전위적 활동가를 육성한 후, 일정 정도 조직 역량이 성숙했을 때 당 재건운동의 한 부분으로 전환되는 과도적인 정치 조직이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여러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의 결성과 활동을 통해 당 재건의 가능성이 성숙했다고 판단되는 시기에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이들 그룹의 대표자 회의나 열성자 대회(또는 전국적 정치 신문 발간) 등의 방식으로 당을 재건한다는 방침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콤그룹(안동콤그룹 등), 그룹(경성재건그룹, 조공재건경성준비그룹, 경성공자주의자그룹 등), 공산주의자협의회(영주군공산주의자협의회,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등), 위원회(강릉공작위원회, 삼척노농공작위원회 등), 협의회(경성노농협의회, 고성사회운동자협의회 등), 동맹(함북공산주의자동맹, 웅기열성자협의동맹, 목포공산주의자동맹, 지도전위동맹, 영동적우동맹, 온성노농동맹 등), 당(울진공작당), 트로이카(경성트로이카) 등 다양한 명칭의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이 전국 각지에서 결성되었다. 이들 그룹은 다른 그룹과의 공동 투쟁 및 통일을 모색했다.
나아가 혁명적 대중 조직의 강화라는 방침에 따라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러한 조직 노선의 변화와 함께 생산 현장의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이전 시기의 계급 대 계급 전술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기를 들자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이재유 그룹의 경우, 1935년 초까지는 민족 부르주아지, 민족개량주의자, 사회 민주주의자를 모두 적대 세력으로 간주한 데 비해서 1936년 초를 전후로는 인텔리를 포함한 소부르주아지에 대한 적극적인 포섭 정책을 채택했다.
3) 일제 전시 파쇼 체제하에서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1937년-1945년)
종전에는 이 시기의 사회주의 운동을 암흑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1937년 이후에도 새로운 방침에 입각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규정한 가장 큰 요인은 코민테른이 채택한 새로운 통일 전선 방침과 중일전쟁(1937년)에서 태평양전쟁(1941년)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전시 파쇼 체제였다. 코민테른은 1935년 들어 파시즘의 대두에 맞서기 위해서는 식민지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를 포함하는 반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정한 바 있었다.
이미 실제 운동 과정을 통해 계급 대 계급 전술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새로운 방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조직 노선을 전환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 나는 종래의 혁명적 대중 조직 대신에 다양한 이름의 광범위한 반일 대중 조직을 새롭게 결성하거나 기존의 합법적 대중 단체에 가입해 이를 활용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혁명적 대중 조직 노선을 고수하면서 반일 대중 조직의 결성을 병행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방식은 갑산에서 가장 철저하게 관철되었다.
원래 갑산에는 갑산공작위원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그런데 갑산의 활동가들은 1937년 1월, 종전의 방침을 좌익적이며 소수의 전위 분자 중심이라고 비판하는 가운데 조직의 이름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바꾸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하부 조직에 ‘항일, 반일’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등 반제 통일전선적 대중조직을 표방했다. 이러한 방침 전환에는 1936년 5월 반제 민족통일전선 방침에 입각해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결성하고 반제 대중조직을 토대로 당을 건설한다는 전망을 확립한 바 있던 만주의 항일 무장투쟁세력의 지도가 작용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원산에서 혁명적 노동 조합 운동을 벌이고 있던 원산 그룹(이주하, 최용달, 이강국 등)도 1937년 6월부터 애국적 민족 부르주아지, 소부르주아지, 인텔리를 포함한 광범위한 인민을 민족 해방 운동에 견인한다는 방침 아래 혁명적 노동 조합 운동과 반제 통일 전선 운동을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반제 민족통일전선 노선으로의 전환도 실제로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일제의 지배가 전시 파쇼 체제로 돌변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아래 사회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은 더욱 비합법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정세의 변화에 따라 공산주의 그룹을 중심으로 운동의 흐름을 이어나갔다. 이 시기 공산주의 그룹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경성콤그룹이었다. 경성콤그룹을 지도한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장순명 등은 이미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과 관련해 검거되었다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활동가들이었다. 경성콤그룹에는 이들 외에도 종래의 분파적 인맥에 얽매이지 않은 다양한 활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다. 경성콤그룹은 서울의 조직을 함경도와 경상도에까지 확대하려고 했으며 노동자와 학생에 대해 활발한 조직 활동을 벌였다,
이밖에도 원산 그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이 이 시기 공산주의자 그룹 가운데 조직의 규모나 활동의 범위에서 돋보이는 존재였다. 특히 함경도의 농촌 지대 및 대규모 공장 지대의 공산주의 그룹은 끊임없이 혁명적 대중조직의 재건 운동을 벌이거나 반제 민족통일전선을 실행에 옮겨 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산주의 그룹은 지하에서 소그룹 또는 써클의 형태로 운동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소그룹화, 지하화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조직의 골간을 보존하려는 사회주의자들의 방침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각 공산주의 그룹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더욱 광범위한 반일 민족통일전선 전술이었다. 특히 태평양전쟁의 종전이 임박해지자 상층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통일 전선 단체를 결성하는 등 상층 통일 전선 전술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두 번째는 결정적 시기의 무장 투쟁 전술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패전과 그에 따른 조선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임박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일제의 패망이 예견될 때 무장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벌여나갔다. 특히 동북항일연군, 화북의 조선의용군 등 국외의 무장 부대와 연계를 도모하는 한편, 군사부나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거나 노농군을 편성하는 등 국내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킬 대중 역량의 육성 및 그것의 준비 활동을 벌인 것이 주목된다. 일제 말기에 전국 각지에 산재한 무장대 가운데 일부도 공산주의 그룹의 이러한 활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4) 일제 파쇼 체제하에서의 조선공산당 당재건 노선의 변화
1930년대 이후 조선에서 실시된 식민지 파쇼정치는, 1920년말에서 1933년에 걸쳐 일본을 포함한 자본주의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공황의 위기와 관련된 것으로서 일본 군국주의체제의 강화 및 해외 침략정책 학대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일본은 공황이 초래한 모든 부담을 자국의 대중과 식민지 민중에게 전가시키려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경제정책을 소위 ‘농공병진’, ‘북선 개척’, ‘지하자원개발’, ‘농촌진흥’, 등의 슬로건 하에 추진하여 조선민중의 빈곤화과정은 극에 달할 정도로 심화되어갔다. 이에 조선민중과 일본제국주의 사이의 갈등은 첨예화되면서 투쟁이 격화되어 간다.
이 때 사회주의자들은 초기 공산주의운동의 실패, 계속되는 종파ㆍ사대주의자들의 맹목적 폭동과 이에 따르는 손실로 인해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초기 미흡했던 사실들을 인지하여 대중과의 교류를 늘리고 그들을 선동하는 한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인 투쟁에 나선다. 1930년대 농민노동운동은 그 계급 투쟁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민족문제를 심화시키면서 독립운동과의 연계 하에서 발전해 나간 것이다. 농민층의 전층적몰락을 배경으로 고양된 대중운동은 혁명적 농조운동으로 발전하여, 일제권력과 정면대결하여 지주제뿐만이 아니라 식민지체제를 타파하려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농민운동이 당면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차원을 넘어 정치투쟁의 목적의식적으로 전환되어, 30년대 농민운동이 사회운동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성격도 적극적으로 띠게 되었다.
여기에는 혁명적농조운동의 역할도 크게 작용했는데 이 점은 혁명적 노조운동도 마찬가지이다.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은 각종 개량주의적 영향에서 탈각한 혁명적 대중조직으로 정치투쟁을 전면에 내걸고 투쟁하였다. 이들은 노동자의 파업, 농민의 소작쟁의 등을 조직, 지도하고 시위에 대중을 조직・동원하였다. 3・1우동 기념일, 5・1메이데이, 8・1반전데이, 10월 혁명 기념일 등에 격문과 유인물을 뿌리고 대중을 투쟁에 궐기시키는 캄파니아를 전개하였다.
혁명적 노조와 농조는 대중 속에서 지주, 자본가의 착취와 억압에 반대하여 투쟁에 나서도록 호소하거나, 민족적 및 사회적 해방을 위한 정치적 슬로건을 제기하여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저항하여 나서도록 호소하였다. 공산주의자는 노조, 농조를 통하여 노동자・농민의 혁명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위한 교육 활동을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하였다. 그들은 서당, 도서관, 야학회, 독서회, 연극 등의 합법적, 비합법적 집회기관 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이른바 ‘프로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비합법상황에서 노농대중의 교육활동을 위하여 비밀출판물을 발행하였다.
이들 출판물은 항일애국사상의 고취와 함께 노동운동 진영 내의 개량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본질과 행동을 체계적으로 폭로하여 계극적 입장에 대한 각성을 높이거나 계급적 단결의 사상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을 하고, 노동자・농민의 궁극적 해방을 실현하는 데 있어 토지문제의 근본적인 해결과 노농동맹의 강화가 지니는 의의를 선전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전반기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의 운동은 자기활동 속에서 많은 제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주된 결함은 첫째, 좌익모험주의적 편향이었다. 운동의 과정에서 대주의 혁명적 역량을 확보하고 그것을 조직적으로 육성・확대하는 활동이 모자랐으며, 소부르조아적 초조감에 사로잡혀 주도면밀한 준비 없이 투쟁을 조직한 결과 혁명역량에 손실을 초래하는 약점을 드러냈다. 또한 농민운동에서 고용농과 빈농에만 중점을 둠으로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될 층을 배척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그 결과 적지 않은 경우 조직이 광범위한 대중으로부터 이탈하여 운동의 지속성이 보장되지 못하였다.
둘째, 중요한 결함은 운동의 분산성과 지방주의적 경향이었다. 운동의 분산성과 지방주의적 경향, 거기에 좌익모험주의적 편향이 나타남은 물론 당재건의 간판을 내걸고 파벌적 책동을 계속하는 한편 혁명적 노조와 농조를 자기 파벌의 세력 아래 두려고 하였던 것이다.
5) 각 파별 재건운동
① 화요계(火曜系)
1928년 12월서신이 국제당에서 발표되자 이문서를 가지고 1929년 박람회를 계기로 입국한 ‘모스코’ 공산대학 출신의 청년들은 전국각지에 분산해서 지하운동을 전개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에 착수하다가 1930년 봄에 모두 왜경에 피검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후개당사건”이었다. 함경도 일대에 거의 각 군에 농민운동이 성행하고 농민조직이 기반을 튼튼히 닦고 있었는데, 이는 주로 태평양노동조합, 즉 ‘태노(太勞)’에 지도되는 태노계로서 1930~1931년의 원산, 평양, 부산 총파업과 호응해서 함경도 각군의 농조(農組)사건은 ML 혹은 상해 이렇게 각퐈의 연계공작 밑에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31~1932년 사이에 박헌영, 김형선의 조공재건 콤뮤니스트사건, 속칭 김형선사건이 있었다. 이는 김형선이 상해에서 발행하는 박헌영기관지 ’콤퓨니스트‘를 국내에 반입해서 등사 반포함으로써 조직재건의 기초공작을 했던 것으로 1932년 모두 피검되었다.
② ML계의 조공 재건운동
ML당은 1928년 8월까지 총괴멸 해소되고 말았으며, 그 만주총국과 일본총국은 1,2년을 더 계속하였고, 일본총국은 박낙종, 정희영, 송언필등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었는데 이 일본총국의 핵심인물이 조선에 건너와서 김포, 영등포, 대구, 부산을 전전회합(轉輾會合)하면서 당재건 운동을 전개한 것이 1929, 1930년의 일로 1929년 11ㆍ3광주학생운동사건도 이들의 지도하에 있었다. 또 태로줄에 활동하는 김복만, 강목구등도 모두 ML계였다.
또한 1931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자 일본의 조선운동에 대한 탄압은 본격화해서 조선내에서 지하조직 공작을 진행시키기 어렵게 된 때에 1932년~1935년 사이에 주로 경성을 중심으로 지하조직 공작 내지 조공재건 공작이 이재유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재유는 함남(咸南) 갑산 빈농출신으로 일본서 고학을 하다가 일본총국에 관계한 후 귀국해서 독자적으로 조직활동을 개시했는데 그는 주로 노동자의 조직을 영등포, 용산방면에 갖고 있었고 학생가두층 조직도 많이 갖고 있었다.
③ 상해파(上海派)
1930년~1931년 사이에 각 파들이 맹활동을 하는 사이 상해파도 활동을 개시하였다. 1930년경 상해파의 윤자영, 박윤세, 김철수등의 발기로 만주 조선국내에 일대 조직공작을 전개했는데 이 사건을 ‘조선공산당 재건공작 준비위원회사건’ 라고 하며 가두 인텔리층이 동원된 규모가 가장 컸던 사건이었다.
④ 태노계(太勞系)
태노계는 1930년대부터 함경도 일대에 광범한 기반을 가지고 조직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원산에는 이주하가 알동하고 있었는데 그는 1930~1931년 원산 평양 제네스트를 지도하고 원산에 돌아와 있으면서 조직사업을 전개, 1937년 원산철도국의 사건을 주도하였다.
⑤ 경성 콤 그룹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은 일단의 강화를 가하였다. 이재유, 이주하가 피포, 혹은 도망한 후 이관술, 이순금 남매와 김삼룡, 장순명, 권오직, 등과 협의한 수 경성 콤 그룹을 조직하는 동시에 기관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시 울옥한 박헌영을 지도자로 하고 새로 출옥한 권오성, 정재철, 정태식 등을 모두 운동선상에 도원시켰다. 이 “콤 그룹”은 조선 운동의 퇴조기에서 당시 모든 운동자들이 운동선상에서 이탈해 버리거나 과거를 청산하고 나설 적에 말하자면 운동을 청산치 않은 사람들을 운동선상에 총귈기시킨 것이며 여기에는 ML계도, 상해계도, 화요계도 혼연일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관리한 노조에는 금속ㆍ섬유ㆍ전기ㆍ출판노조등이 있었다.
⑥ 소련파와 연안파(延安派)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만주침략을 수행하자 중공은 1932년 길림탕원(吉林蕩原)회의를 열고 만주에 있는 조선독립군ㆍ조선공산군ㆍ마적ㆍ장학양(張學良)군 기타 사병들을 편재해서 만주 항일의용군 12군으로 편성하였는데 이 때 김일성은 제3군장 예하에 있다가 갑산 보천보사건(1937년)이후 계속 북한에 침입, 늘 신문에 선전되고 있었다. 그 후 일제의 공세로 어려움에 빠지자 무리들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는데 이들을 소련파라 한다. 연안파는 1936년 조선에서 망명한 최창익이 전위동맹을 만들자 막스주의자 허정숙, 윤공흠, 김창만, 채국번 등 다수는 이에 호응하여 낙양을 거쳐서 연안으로 갔다. 이들 밑에는 훈련받은 조선의용군이 있었으며 이들로 조직된 독립동맹이 있었다. 이것이 연안파의 기초였다.
【결여】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이 벌어지던 1920년대 말에서 1945년에 이르는 시기는 역사상 유례없는 식민지 지배로 평가되는 시기였다. 일제의 폭압은 악법중의 악법인 치안유지법, 투망식 검거, 고문과 악형, 사상 전향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일제는 1925년부터 치안유지법을 내세워 “국체의 변혁이나 사유재산의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이 법의 목표는 조선에서 사회주의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데 있었다. 치안유지법 자체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경찰에 의해 ‘국체의 변혁이나 사유 재산 제도의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을 벌인 것으로 지목된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실로 엄청난 규모에 이르르게 된다. 일제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혐의가 있다고 인정될 경우, 닥치는 대로 검거했다. 검거 뒤에는 경찰과 검찰에서의 취조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취조가 아니었다. 길면 2-3년에 이르는 취조 과정에는 상상을 초월한 고문과 악형이 뒤따랐다. 심지어 검찰에 송치되기 전에 경찰서에서 목숨을 잃는 활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 살아 남으면 장기간의 수형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 치안유지법이라는 악법으로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일제는 사상 전향 정책을 실시했다. 경찰, 검찰, 감옥에서 사회주의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히면 석방과 감형의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전향하지 않는 활동가에게는 일벌백계의 엄벌주의를 적용했다.
이를테면 영흥의 채수철이라는 활동가는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과정에서 면사무소 습격 투쟁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1심에서 무기 징역, 2심에서 20년의 형을 언도받고 해방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복역해야만 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이 벌어진 시기는 역설적으로 한국 변혁 운동의 역사상 가장 활력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사회주의자들은 공장에서, 농촌에서, 광산에서, 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하는 활동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그리하여 1929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한 가운데 위치할 수 있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에서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이라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일제에 대한 투쟁은 해방의 그 날까지 계속되었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전시 파쇼 체제하에서, 비록 공개적인 활동은 할 수 없었지만,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지하에서 해방의 날을 준비하기 위한 투쟁을 벌임으로써 민족 해방 운동의 순결성과 도덕성을 지켜 나갔다.
이러한 투쟁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관여한 사회주의자들이 대중으로부터 정치적, 도덕적 권위를 얻을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었다. 해방 공간에서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에서도 한때는 친사회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고 좌익의 운동 역량이 우익의 운동 역량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역사적 경험과 직결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조선공산당의 재건에도 성공하지 못했고 조선 혁명을 이루는 데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 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라 할 수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좌절한 운동이라고 해서, 이를테면 분파 투쟁의 미청산, 코민테른 권위에의 맹종, 관념적인 계급 혁명론으로의 경도, 수공업적 운동 방식 등 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해서 이 운동을 일방적으로 비판할 수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해방의 희망을 잃고 민족해방운동을 포기한 시기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헌신한 그 당시 유일한 대안이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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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 저,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 아세아출판사 , 1999
성대경 저,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 역사비평사 , 1988
박명서 저, 『통일시대의 북한학강의』, 돌베개 , 1999
한창수 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 지양사 , 1984
강만길 저, 『고쳐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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