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6월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게 전술핵을 반입하고, 한국군을 현대화 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한국군 4개 사단을 감축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 제안은 대규모의 한국군을 유지하는 것이 한·미 두나라의 재정에 부담을 준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술핵 도입을 환영하면서도 한국군 감축을 받아들이기는 꺼려했다. 이승만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우월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위협하고 있는 이상, 한국의 군대를 규모를 줄여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주한미군에게는 물론, 한국군에게도 핵무기를 제공할 경우에만 군사력 감축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무기의 한국 배치와 연계된 한국군의 감축문제를 둘러싸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은 팽팽히 대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최신 전술핵무기인 어니스트 존 원자 로켓포와 280미리 원자포의 한국군 배치 요구에 대한 미국의 거부를 한국군 현대화와 감축규모의 축소를 위한 지렛대로 적절히 이용하였다.
한국군의 4개 사단 감축을 계속 요구해 온 미국에게 한국정부는 1957년 11월 육군 2개사단과 해병대 1개 대대의 감축으로 현재의 72만 명에서 6만 명을 감축시키는 대신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를 요구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군의 총병력이 62만 명 수준으로 동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8년 1월 미국은 주한미군사령관 조지 데커(George H. Decker) 장군을 통하여 63만 명으로 상향된 최종안을 제시했고, 이승만은 미국 2개 사단의 ‘무기한’ 한국주둔과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를 미국이 확약하는 조건으로 이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거의 2년 간에 걸친 협상 끝에 마침내 한미 양국은 1958년 11월 한국군 감축에 관한 최종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2개 사단이 감축된 한국군은 육군 56만 5천 명(18개 전투사단과 10개 예비사단), 해군 1만 6천 명(60척의 전투함정), 공군 2만 2천4백 명(6개의 전투폭격기 대대를 포함한 10개 전투비행 대대), 그리고 해병대 2만 6천 명(1개 사단)으로 유지되었다.
□ 1·4후퇴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1951년 1월 4일 한국 정부는 부산으로 후퇴했고 유엔군도 서울로부터 철수를 완료했다. 서울 주민 40%이상이 피난했던 이 사건을‘1·4 후퇴’라고 부른다. 중공군은 전쟁 개입 이후 10월과 11월에 걸친 두 번의 대공세를 통해 평양을 탈환하고 북38선 이북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러한 전투의 승리를 확대하기 위해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제3차 대공세를 개시했다. 이 대공세는 신정공세라고도 불리운다. 이 대공세를 통해 공산세력은 서울을 재점령하여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38선 이남까지 진출하여 병력이 증원된 후 춘계 대공세를 준비하여 유엔군을 한반도로부터 격퇴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서울이 재함락되자 미국에서는 전세가 공산측으로 완전히 기울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트루먼행정부는 가용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하여 38선까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공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오면서 보급선이 길어졌다. 미국은 공군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중공군의 후방 보급선을 공격하여 중공군의 계속된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다.
워커장군을 대신하여 미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장군은 축차방어선을 설정하여 중공군의 대공세에 대비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대규모 신정공세에 밀려 유엔군은 서울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철수와 함께 민간인들의 철수도 이루어졌다. 서울 철수에 대한 보고를 받은 이승만대통령은 전쟁 초기 철수와 달리 매우 추운 겨울에 철수가 이루어져 민간인의 희생과 고통이 매우 클 것으로 우려했다. 전쟁 초기 혼란스러웠던 철수 상황과 달리 1·4 후퇴 당시에는 정부의 통제에 의해 비교적 질서정연하고 신속하게 민간인 및 정부 관리들의 철수가 이루어졌다. 1·4 후퇴 이후 유엔군은 37도선에서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정부는 1·4 후퇴에 직면하여 국민총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국민방위군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국민방위군은 만17세 이상 만 40세 미만의 남자로서 지원에 의해 입대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방위군에 입대한 병력은 50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1·4 후퇴 함께 서둘러 추운 겨울에 후방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방위군 사령부 간부들의 부패로 인하여 수많은 방위군들이 굶어 죽거나 동사했다. 이 사건으로 국민방위군은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역사적의의
서울 지역 뿐만 아니라 흥남에서도 대규모 철수 작전이 이루어졌다. 미 제10군단은 병력·차량·전투물자를 흥남으로부터 철수시키기 위해 125척의 해군 수송선을 동원했다. 국군 제3사단,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이 무사히 철수했다. 흥남철수작전은 10만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차량, 35만톤의 전쟁 물자를 배를 이용해 철수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은 민간인 약 10만명을 같이 철수시켰다. 이 점에서 흥남철수작전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길이 빛날 역사적 작전이었다. 흥남철수작전과 1·4 후퇴 이후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군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확전을 각오하고서라도 중공군을 격퇴시켜야 할지를 결정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은 중공군을 격퇴하기 위해 전술핵무기 사용을 신중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맥아더장군 해임 이후 유엔군은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 하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서울을 재탈환하고 38선 근처에서 공산세력과 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로써 전쟁 시작 이후 양측은 4번에 걸쳐 번갈아 서울을 뺏고 빼앗기면서 결국 38선 근처에서 전선이 고착된 이후 휴전협상이 개시되어 정전할 때까지 전쟁은 지구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 판문점 미루나무 절단사건
1976년 8월 발생한 ‘판문점 미루나무 절단사건’은 1970년대 후반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해방과 분단으로 등장한 대한민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상이한 정치·경제체제를 바탕으로 각각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1950년대 초 3년 간의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고, 한반도에서 배타적 유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책과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 남과 북은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독재체제를 탄생시켰고, 남북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증폭되고 있었다. 남북대화, 베트남의 통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등을 거치면서 한반도의 적대의식은 높아만 갔고, 이러한 팽팽한 긴장이 판문점에서 벌목작업을 둘러싸고 충돌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도끼만행사건’이 있었다. 이날 오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유엔군 제3초소 앞에서 한국인 노무자 5명이 미루나무 가지를 치고 있었다. 현장에는 미군 6명과 한국군 5명 등 11명의 유엔군 장병들이 호위하고 있었는데 이때 2명의 북한군 장교와 10여 명의 북한군이 다가와 “나뭇가지를 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 장교는 관측소의 시야 확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진행했다. 이에 잠시 후 트럭을 타고 온 20여 명의 북한군이 곡괭이와 도끼 등을 휘둘러 미군 장교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를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초소를 부수고 도주하였다. 사건은 단 4분 만에 종료되어, 미군 기동타격대가 출동했을 때 북한군들은 이미군사분계선 너머로 철수한 뒤였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 사령관 리차드 스틸웰은 데프콘 3를 발동하고 미군 방송을 통한 임시발표에서 휴가 중이거나 부대를 떠나있는 전장병에게 즉시 부대복귀를 명령하였다.한국전쟁 이후 ‘데프콘 3’가 발령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인민군과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에 전시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사건 보고를 받고 군사적 응징을 즉각 검토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분노했다. 미국 행정부는 〈긴급 참모회의〉를 열고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미루나무 절단 작전은 1976년 8월 21일 아침 7시에 이루어졌는데 미국은 사실상의 〈전쟁 계획〉의 일환으로 절단작전을 전개하였다. 미국 본토에서는 핵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가 한반도에 배치되었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는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하였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해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까지 수립하였다. 미루나무 절단 작업 시 교전상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 포병이 북한지역 개성의 인민군 막사와 개성 위쪽의 시변까지 포격하여 초토화하고,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의 사용도 고려되었다. 핵전쟁까지 상정한 실질적인 〈전쟁계획〉이다.
8월 21일 오전 한국군 특공대원들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 미루나무를 베어내는 미군 공병대원들을 엄호했다. 별다른 충돌 없이 작업은 40여분 걸려 끝났고, 즉시 북한은 미군 측에게 〈비밀회담〉을 요청했다. 회담에서 북한은 김일성의 ‘유감 표명’ 편지를 낭독하였고 위기상황은 해소되었다.
1992년 4월 평양방송은 김정일의 군사적 지도력을 선전하는 프로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군내에 영도체계를 확립해온 김정일이 적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곤 하였다고 선전하면서 1976년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거론했다. 미루나무 사건을 김정일이 직접 지휘했음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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