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25일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5월부터 차례로 미국, 일본, 중국을 순방하며 주변국들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식이 끝난 후 고이즈미 일 총리와 첫 정상회담을 가졌고, 고이즈미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일본으로 초청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6월 7일 일본을 방문하여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 총리와 회담을 가졌으며, 이어서 10월 8일 아세안+3와 10월 20일 APEC에서도〈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는 한·일간의 협력 관계를 증진시키기고 역사문제를 비롯한 한일 양국간의 문제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2004년 7월 21일과 12월 17일 제주와 일본 가고시마현, 그리고 2005년 6월 20일과 11월 18일 서울과 부산 APEC에서 각각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러한 만남은 한·일간의 ‘실용적 셔틀외교’를 정례화 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 등을 둘러싼 한·일간의 마찰로 인해 지속되지 못하였다. 2006년 9월 26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취임을 계기로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노력이 재개되어 2006년 10월 9일 서울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아베 일 총리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 초기 한·일 양국 정상 간의 현안은 주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협력관계 구축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한·일 정상은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한〈6자회담〉의 개최를 위해 노력하였다. 2003년에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간의 협력 강화와 한일 FTA 체결 협상의 조기 시행, 비자면제, 북·일관계 개선 등에 대한 협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2004년과 2005년을 지나면서 고이즈미 일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문제로 한국과 중국의 일본에 대한 비판이 거세어지면서〈한·일정상회담〉도 중단되게 되었다. 이후 2006년 9월 아베 신조 총리의 취임과 함께 한국과 일본 정상 외교가 다시 재개되었으며, 한·일 양국 정상은 북한 핵실험을 포함한 북핵문제 해결과 한·일간의 역사 문제의 해결을 위해 협력할 것을 재확인 하였다.
2003년 6월 7일의 정상회담에서 한·일 양국 정상은 공동 성명을 통해, 1998년 10월에 발표된 “한·일 공동선언 :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의 정신에 따라 동북아시대 한·일 관계를 위한 새로운 비전의 제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참여정부의 대일외교기반 구축을 3대목표로 설정하였다. 양국 정상은 북핵문제는 한반도 및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안정 및 국제적 핵 비확산체제에 심각한 위협이라는 인식을 공유하였고,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은 용인될 수 없으며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위한 한·일간의 협력을 재확인 하였다. 이 이외에도 일본의 유사법제 문제와 한일 FTA 체결 노력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발리에서 열린 아세안+3와 태국에서 열린 APEC 기간에 각각 개최된〈한·일정상회담〉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2004년 7월 21일 제주와 12월 17일 가고시마현에서 열린 두 차례의〈한·일정상회담〉에서는, 2005년 한·일 우정의 해를 맞아 항구적인 비자면제, 김포―하네다 항공편 증편 추진에 대해 협의하였다. 북핵문제는〈6자회담〉의 틀 안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데 인식을 공유하였으며, 북한의 조속한〈6자회담〉 참가와 핵포기를 위한 전략적 결단 촉구하고,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 신중하고 냉정하게 처리할 것에 대해 합의하였다.
2005년 6월 20일 서울과 11월 18의 부산 APEC에서 열린〈한·일정상회담〉에서는 주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문제가 논의되었다. 노 대통령은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육문제,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에 대한 거부의사를 전달하였고, 고이즈미 총리는 이에 대해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과거 전쟁에 대해 반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였지만, 노 대통령은 이를 선의로 해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한·일 간에 협력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11월 18일의〈한·일정상회담〉은 3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열린 것으로서, 한·일 간의 불편한 관계를 보여주었다.
아베 일 총리가 취임하고 재개된 2006년 10월 9일의〈한·일정상회담〉에서는 한·일 간의 역사문제 극복을 위한 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조기 발족 등의 노력에 합의하였고, 양국은 동해의 원만한 해양질서 유지를 위한 상호협력, 북한 핵문제와〈6자회담〉 재개합의에 환영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회담의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또 한일 양국이 역사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각각 기자회견을 여는 등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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