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2000.05.11
현구도대로만 가면 후보는 문제 없어... 하지만 "영남후보론" 현실화하면 끝장
지난 4ㆍ13 총선에서 1당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둔 뒤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던 한나라당이 요즘 「그들만의 리그」 준비로 부산하다. 오는 5월 31일 전당대회에서 총재 및 부총재단의 경선이 결정되자 당헌ㆍ당규 개정 작업 등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총선 과정에서부터 일찌감치 총재 경선 참여를 선언했던 강삼재 의원이 김덕룡 부총재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등 이회창 총재로는 대선 승리가 어렵다고 보는 이른바 「반창 그룹」의 전략적 제휴 움직임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당권을 둘러싼 「반창 그룹」과 「친창 그룹」간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총재 경선이 당 안팎에서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회창 대세론」이 이미 굳어져 흥행에서 최고의 조건인 「스릴」이 없어진 탓이다.
*제16대 국회의원선거
실제로 한나라당은 전반적으로 이번 총선을 승리로 이끈 이 총재가 승리하는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비주류 대학살」로 불리는 2ㆍ18 공천 파동으로 견제 세력들이 상당수 제거된 데다가 이번 총선 당선자 중 최소한 70∼80명이 이 총재 직계로 분류되고 있는 만큼 이 총재의 압승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김덕룡 부총재의 경우 총재 경선에 참여한다는 원칙을 밝히고 있으나 과연 참여할지는 미지수다. 총재 경선은 고작해야 강삼재 의원이 어느 정도 선전할 것이냐는 점에서만 주목을 받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이로 인해 당 안팎의 관심은 정작 총재 및 부총재 경선보다는 벌써부터 이 총재가 2년 뒤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에 모아지고 있다.
●"당권만 유지하면 대권도 따놓은 당상"
이 총재가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한나라당 내 관계자들은 이 총재에 대한 호불호 여부를 떠나서 대체적으로 「현재 구도대로만 가면 승리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전망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 총재가 2년 뒤 대선까지 당권만 잘 유지한다면 대권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관계자는 그 이유로 『한나라당의 지역 기반인 영남 유권자들이 15대 총선까지만 해도 김영삼 전 대통령 등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 지도자에 따라 움직였으나 이번 총선을 계기로 정치 지도자 중심이 아니라 「반 DJ」 세력을 지지하는 이른바 세력 중심 투표 행태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영남 유권자들이 이회창은 별로라고 여기면서도 한나라당 후보들에게 몰표를 안겨준 것은 이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민주당에서는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1당이 되는 데 견인차였던 영남 지역을 분열시키기만 하면 2002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있다고 보겠지만 그렇게 되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한다. 집권당인 민주당이 영남 출신 대권 후보를 내세우거나 영남 출신 인사를 중용해 대선 후보를 지원하게 만드는 식으로 영남 지역을 분열시키려고 하더라도 영남 유권자들은 16대 총선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선에서도「반 DJ」세력을 지지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이 총재로서는 그 때까지 당권만 유지하고 있으면 대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총재가 대선 때까지 당권을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쉽지만은 않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당 관계자들이 주저하지 않고 최대 장애물로 꼽는 것은 「영남 후보론」이다. 「대구ㆍ경북(TK) 지역과 부산ㆍ경남(PK) 지역을 합한 영남 출신 정치인이 반 DJ 세력을 대표해 대권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영남 후보론이 확산될 경우 이 총재로서는 대선 후보 경선이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 "지역구도에 따른 반사이익일 뿐"
한 정치평론가는 『이번에는 영남권 의원들이 「창」밑으로 모이겠지만 나중에 「영남 후보론」으로 헤쳐 모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영남 후보론이 점진적으로 확산되면 이 총재는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현재까지 영남 후보론의 기수로 꼽혀 온 정치인들은 강삼재, 강재섭, 최병렬, 박희태 의원 등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들 정치인 대부분 세력이 없다는 점에서 영남 후보론이 현실적으로 이 총재에게 타격을 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주장한다.
누군가 지금부터 반 DJ 세력을 대표하는 중심 세력으로서 영남 후보론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대선까지 가면 몰라도 대선을 앞두고 갑자기 영남 후보론을 들고 나와 봤자 위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총재의 당권을 위협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애물로 연배가 50세 전후인 중진들이 연합하는 이른바 「50대 연합론」이 꼽히고 있다. 만약 홍사덕, 이부영, 김덕룡, 강삼재, 강재섭 의원 등이 연합할 경우 이 총재로서도 버거운 도전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또한 현실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각자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라 서로 힘을 합치기가 어렵다』며 『예를 들어 DR(김 의원 영문 이니셜)과 강 의원의 경우, DR은 「개혁 연대론」을 내세우고 강 의원은 영남 후보론으로 맞설 것이 분명해 50대 연합론 자체가 실현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설령 영남 후보론이나 50대 연합론이 현실화하더라도 현재 당내에서 전국적으로 60% 가까운 지지 세력을 갖고 있는 정치인은 이 총재 한 명뿐이라는 점에서 그리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많다. 문제는 이 총재의 대권 가도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이같은 당 내외 조건들이 지역 구도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총재를 가까이서 돕고 있는 한 인사조차도 『이 총재가 DJ 이후 지도자로 유력해진 것은 그가 한국 사회의 대안을 제시하고 제대로 된 나라, 사회를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분히 현재의 지역 구도에 따른 반사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이 총재가 지역 정서를 앞세워 앞날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사실 이 총재의 그간 행보에서는, 독자적인 정책 대안을 내거나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정치, 신인본주의 사회, 뉴밀레니엄 리더십 등도 용어는 거창하지만 그 총론적인 주장 아래 이를 뒷받침하는 각론이 제시된 적이 없다. 이 총재의 한 측근 인사는 이에 대해 『그가 자신의 생각을 깊이 정리해 내놓은 이야기가 아니라 남이 써준 글을 그대로 읽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며 『그나마 그런 내용도 당내가 아니라 당 바깥에서 몇몇 사람들이 정리해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에게 우호적인 당 안팎의 인사들이 모두 입을 모아 『이 총재가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영남을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에 우호적인 지역 구도를 활용하는 준비보다는 전국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국가적 비전과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이 총재에 대한 가장 큰 지적은 바로 국가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정책이나 비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제껏 이 총재가 외교, 통상, 경제, 문화, 교육 등 국정 전반에 대해 자신 있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 관계자는 또한 『대법관 출신으로서 이 총재가 오늘날 복잡한 법 체계가 국민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진작에 대안을 내놓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이 총재의 최측근 인사도 이같은 비판을 수용한다. 이 인사는 『야당 총재로서의 역할과 관련한 이 총재의 지지도가 한나라당 지지도의 절반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 것은 이 총재가 그동안 국민이 절실하게 바라고 공감하는 정책과 아젠다(Agendㆍ의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을 안다』고 털어 놓는다. 한길리서치가 지난 98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매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총재의 지지도는 평균 13∼14%에 머물고 있다. 한 정치 평론가는 『이 총재의 위기는 바로 그의 지지도와 한나라당의 지지도 간의 차이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 영남 출신 정치인이 국민들에게 어필하는 정책과 아젠다로 승부를 걸 경우 이 총재는 대권 후보 경쟁에서 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재측이 총선 직후 태스크 포스를 구성, 국정 전반에 걸쳐 이 총재가 대선까지 남은 2년여 기간 동안「DJ 이후 지도자」로서 국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책과 아젠다 개발에 착수한 것은 이같은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총재의 대권 전략 전반과 함께 남북 관계 등 정치 분야의 정책과 아젠다 개발은 측근인 윤여준 당선자(전국구)가 이끌고 있는 외곽 팀에서 맡고 있다. 이 팀은 청와대 등 여권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으나 아직도 노출되지 않는 철통 보안을 자랑하고 있다.
경제 분야의 경우 이번 총선에서 「국부유출론」과 「국가채무론」을 제기해 선거를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당 구도로 이끈 주역인 이한구 정책실장(전국구 당선자)이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을 지낸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과 함께 맡고 있다. 설령 이 총재가 국민들에게 어필하는 정책과 비전을 제시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많다. 한 정치 평론가는 『정치 지도자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그 지도자가 자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른바 「우리 의식(we-feeling)」을 갖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총재의 지지도가 저조한 것도 따지고 보면 국민들을 위한 정책과 아젠다를 제시하지 못한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긴 하지만 유권자들이 이 총재에게「우리 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 총재와 유권자들 간에 그같은 의식이 적은 것은 그가 현장 중심, 대중 중심의 정치를 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 총재가 농촌에서 낮은 인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벤트 성 일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서민들의 삶을 살펴 보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총재의 대권 도전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또 다른 요인으로 그가 정치의 본질인 「사람 장사」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대권 도전이 필마단기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권 후보는 필요한 사람들을 심복으로 삼거나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경쟁자들까지 지지 세력으로 결집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이 총재는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재를 외곽에서 돕고 있는 한 인사는 『이 총재는 어느 누구에게도 완전한 신뢰를 준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서 『지난 97년 대선 때 정치적으로 협력했던 주요 인사들로부터 「총재는 필요할 때만 사람을 찾고 그 상황이 지나면 그 때의 약속을 저버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당의 한 관계자는 『2ㆍ18 공천 파동 당시 당내 중진을 비롯해서 그 동안 총재 측근이라고 자부해 온 그 어느 누구도 나서서 이 총재를 변호해 주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 총재가 정치적으로 침몰할 경우 그와 인간적 의리를 지킬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냐』고 말한다. 2ㆍ18 공천은 이 총재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일부 인사들을 「사천」한 문제점만 없었다면 한국 정치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공천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이 총재의 측근인 이원창 특보(전국구 당선자)는 『이 총재가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봐주는 식의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미덕』이라고 반박한다.
이 특보는 『이 총재는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 중용하지만 신세를 졌더라도 필요치 않은 사람은 중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 특보는 당내 경쟁자들이 이 총재에게 숨막혀 한다는 지적에 대해 『그같은 분위기가 야당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문제는 경쟁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내가 가서 총재에게 따지겠어」라고 총재에게 갔다가 「너무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왔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이는 총재 앞에서 자신 있게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는 경쟁자들의 잘못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특보는 이 총재가 이번 총선에서 당이 1당을 차지한 뒤부터 급격하게 변신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총재는 총선 직후 각 지구당을 순방하는 이른바 「전국 투어」에서 1당을 만들어 준 국민들의 의사를 김대중 정부에 대해 철저한 견제와 감시를 하라는 것으로 받들이고 민생을 보살피는 정치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나 아저씨 같은 포용력 있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마키아벨리는 「군주론(The Prince)」에서 정치 지도자는 비르추나(virtueㆍ전략 또는 리더십)도 갖추어야 하지만 포르추나(fortuneㆍ행운)도 따라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총선에 나타난 유리한 지역 구도가 이총재에게 포르추나라고 한다면,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비르추나를 완벽하게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그를 지켜보는 당 관계자들과 정치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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