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2
장대홍 교수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도날드 트럼프라는 돌풍을 만나 혼란스러운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승승장구하는 현상을 두고 정치전문가들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는 결국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고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과 맞대결을 벌여 참패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공화당의 지도부가 반트럼프 연합전선을 구축해서 그의 지명을 저지해보려 하고 있지만 성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재 트럼프에게는 그의 독특한 언행과 정치적 행보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결과가 우리의 안보와 경제적 이해에도 직접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트럼프 현상을 더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현실에 대한 불만과 좌절감을 반영하며, 지지층이 주로 보수적 성향의 백인 계층임은 사실이다. 그는 천만 명이 넘는 불법체류자를 모두 강제 추방하겠다거나 강간범을 미국으로 보내는 멕시코 정부로 하여금 50피트의 이민유입 차단 방벽을 건설하게 만들겠다고 호언하는가 하면, 이슬람교도의 입국 잠정금지, 테러범의 고문과 가족처형, 수입상품에 대한 징벌적 관세부과로 자국산업 보호와 같은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공약을 거침없이 내놓는다. 북한의 핵개발 위협에 대해서는 중국에 압력을 행사해서 김정은 정권이 사라지게 하겠다고도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정적이나 비우호적 언론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와 성적비하 발언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트럼프가 정치적 온당성(political correctness)을 무시한 채 쏟아내는 막말에도 불구하고, 열광적 지지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정치전문가들이 트럼프 현상을 일종의 ‘우익 포퓰리즘 (right-wing populism)’으로 해석하는 것은, 존 루캑이 지적한대로, 대중의 공포와 증오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1) 백인 주류층이 그들의 전통적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위협하는 정치, 사회, 경제적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시원스러운 처방을 내놓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에 분노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거칠게 말하는 트럼프에 민심이 쏠리는 현상이라는 해석이다. 전형적 사례는 최근 큰 주목을 받고 있는 ‘미국적 권위주의의 대두론 (The Rise of American Authoritarianism)’이다.2) 미국적 권위주의론은 정치이론으로서 공감할 여지가 있지만 허점투성이다. 가장 큰 약점은 비이성적 대중정서로 트럼프 현상을 설명하려다 보니 권위주의의 성격을 편향되게 해석하고, 트럼프의 능력이나 확장성을 과대평가한다는 데 있다. 중요한 몇 가지를 들어보기로 하자.
먼저, 소위 ‘우익 포퓰리즘’이란 보다 보편적 개념인 (좌파) 포퓰리즘 (left-wing populism), 즉 민중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녀온 사회다. 애초부터 특권 계층이 없었던 역사적 이유도 있지만, 건국 주역들이 고안한 정교한 민주정치 제도와 헌법정신이 확립된 덕분이다. 오늘날 미국 보수층과 공화당의 정신적 기반도 이런 자유주의 성향과 민주정치 제도였다. 역사적인 아이러니지만 미국 민주당의 원조격인 정당은 공화당이란 이름으로 출발하였고, 민중주의적 성향이 강한 오늘날의 민주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반 투표권(universal suffrage)의 확대, 유럽식 복지주의,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확산됨에 따라, 민주당은 친복지주의, 친노조, 거대정부, (미국식)리버럴리즘, 민중주의를 옹호하는 정당으로 변모해왔다. 이런 민주당의 성격은 대공황(Great Depression) 시기의 루즈벨트, 1960년대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을 거치면서 뚜렷해졌고 대불황(Great Recession)과 오바마 정권의 등장으로 강화되었다.
오바마는 이런 민주당의 변화 기류를 잘 활용한 인물로서, 아마도 미국 역사상 가장 좌파적 성향이 강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구조적인 경기불황과 반자본주의 성향의 미디어에 힘입어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특성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려고 적극적으로 애쓴 정치인이다. 그는 재임기간 중 일관되게 복지비용 지출 증대, 정부규제 확대, 오바마케어의 도입, 동성 간 결혼 합법화, 불법이민자의 급증과 같은 변화를 주도하거나 방치하였다. 그는 이런 변화들을 도덕적 우월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는 거대정부, 사회정의와 도덕정치를 앞세웠던 지미 카터대통령의 현대판이자, 반자유적 정치성향을 가진 권위주의적 정치인이다. 원래 좌파 포퓰리즘, 즉 민중주의는 도덕적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런 정치성향의 오바마 정권이 거둔 성적은 초라하기만 하다. 흑인과 소수계층의 빈곤, 인종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국방비 지출 감소와 더불어 안보위협은 증가하였으며, 사상 최고수준을 기록한 정부부채는 경제성장의 걸림돌이자 미래 세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현재 드러나고 있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표심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등장을 바라는 심정이라기보다는 민주당식의 좌파 권위주의를 막지 못한 공화당 정치인에 대한 반발의 성격이 강하다.
다음으로, 트럼프 개인의 자질이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들 수 있다. 트럼프를 권의주의자로, 트럼프 현상을 비이성적인 권위주의를 좋아하는 현상이라는 해석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트럼프는 이념형 정치인이 아닌, 거래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장사꾼이다. 그의 경력 어디를 보더라도 정치적 소신이나 이념적 확신을 찾기 어렵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민주당의 입장에 더 가깝다고 토로한 적도 있다. 트럼프는 입장이 애매한 민주당 지지자였고, 공화당원이 된 경위도 뚜렷하지 않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프로레슬링 협회의 대주주로 있던 경험이 계기가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카지노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자주 개최하였는데, 한 경기 전 인기시합에서 돈 뭉치를 관중들에게 뿌리는 방법으로 이겨서 상대 선수를 삭발하는 권리를 얻었다는 일화가 있다. 트럼프는 이 기간 중에 프로레슬링 선수로서 미네소타 주지사가 되었던 제시 벤츄라와 절친해지기도 하였다.3) 트럼프는 같은 무렵에 견습생(Apprentice)이라는 TV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출연해서‘너는 해고야(You are fired!)’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 덕에 큰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그는 본인이 과장한 것처럼 대단한 경제적인 성취를 한 것도 아님은 이미 드러나 있다. 그는 2억 불에 달하는 재산을 상속받은 부자였고, 카지노나 골프장 같은 부동산 투기로 큰돈을 벌었지만, 손댄 다른 사업들은 초라한 성적을 내고 폐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트럼프는 도덕적으로 기준으로도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다. 이런 경력 때문에 공화당의 이론가들이나 국내외 정치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인기가 오래가지 못하고 끝날 것으로 평가 절하해 왔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지지율이 지속되고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지명, 나아가서는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화당의 표심이 몰리는 가장 큰 이유는 현 공화당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그들은 유권자들이 의회의 다수당으로 만들어 주었고, 티파티 운동으로 정치적 후원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정책의 실패, 큰 정부, 사회갈등 심화, 안보불안 증대와 같은 문제들이 모두 악화되게 방치한 무책임한 집단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당 의회의 집요한 방해, 오바마의 행정명령권(executive order) 남용, 연방최고법원의 애매한 판결에 저항할 방법도 못 찾고, 리버럴 미디어나 정치제도만 탓하는 무능한 집단, 솔직한 말은 못하고 점잔만 빼는 무사안일한 정치꾼들,‘해고되어야 할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제 공화당 지지자들은 정치적 온당성을 무시하고 내뱉는 트럼프의 솔직함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들은 트럼프의 직설적인 화법, 비현실적인 정책, 정치적 신념이 좋아서가 아니라 정치권의 위선과 무사안일을 꾸짖고, 솔직한 말을 할 줄 알고, 싸우는 방법을 아는 트럼프를 통해 정치실험을 하려는 것이다. 정치평론가 패기 누난 (Peggy Noonan)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적 위선이나 무산안일에 빠진 정치꾼들에 막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다수계층이 사용하려는 트럼프 카드이다. 그의 불법 이민의 강제추방, 저가 수입품의 금지와 같은 무모한 공약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념적 정책을 내세우기는 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우월한 협상력을 활용하겠다는 식으로 다분히 장사꾼적인 융통성이나 수단을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이념적으로 편향된 골수 공화당 지지층, 남부 복음주의자를 포함한 보수층에 고르게 퍼져 있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지지층은 민주당 정권의 위선과 정책실패에 실망한 계층에도, 심지어 히스패닉계나 일부 흑인 층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음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지금처럼 공화당의 분열이, 그리고 오바마와 그 아류격인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이, 지속되는 한 트럼프 대통령이 현실화할 여지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든, 민주당이 재집권하든, 미국은 당분간 후진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지지부진한 경제성장과 정치적, 사회적 갈등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행 중 한 가닥 희망은 정치권의 혁신적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된다는 점이다. 특히 공화당은 사후적으로라도 이념적 전열정비, 실질적 전략 수립,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전과 용기를 갖춘 유능한 지도자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이전에 골드워터-벅크리,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으로 이어진 전열정비가 그랬던 것처럼.
총선과 대선 일정이 연이어 잡혀있는 한국의 정치상황에도 비슷한 측면이 많다는 사실에는, 한국판 트럼프가 없고 미국처럼 정치적 실험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빼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능하고, 무사안일, 권력유지 밖에는 여념이 없는, 기회주의나 불투명한 정체성만이 특기인 정치인들이 국정을 주도하고, 그들에 대한 불만도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도 닮았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용기와 실력, 대중적 지지를 결집시킬 역량을 가진 정치 세력만이 유일한 대안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1) John Lukacs, Demoicracy and Populism, Yale University Press, 2005
2) John Lukacs, Demoicracy and Populism, Yale University Press, 2005
3) 제시 벤튜라는 파격적인 궤변과 "공화당이나 민주당 후보에게는 절대 표를 주지 맙시다."라는 선거 구호 하나로 일약 주지사로 선출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임기 중 인기가 급락하자 미련 없이 재선을 포기하고 정치계를 떠난 인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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