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락진(柳洛鎭)

Θ 생애 초기

1928826일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에서 태어난 그는 5살 되던 1933년 아버지를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가 소학교(8년제)를 거쳐, 일본에서 사범학교(5년제)를 졸업하였다. 19462월귀국한 후 고향에 정착하였다.

Θ 남로당 활동

1947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해 활동하였다. 1950년국민대학교에 입학, 한국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1950928일 유엔군의 9.28 서울수복 이후 전북 순창 회문산 등지로 입산, 남로당 남원군당 선전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 등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였다. 19523월 지리산에서 체포된 뒤 광주 포로수용소(현 전남대병원 인근)에 수감되었고, 1952330일 비상사태하의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5210월 민간 재판소로 이양되면서 5년으로 감형되었다.

Θ 사회 활동

1957103일 비전향 상태로 만기 출소, 1957년 한국전쟁 당시 입산했다 옥고를 치른 신애덕을 만나 결혼, 이듬해부터 1963년까지 건축공사 현장에서 근무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1964년에는 2급 건축기사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19713월까지 전라남도 보성군 예당중학교 교사로 8년간 근무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혁신당 조직 활동으로 수배를 받아서 1963년 체포. 후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풀려났다. 류낙진은 그뒤 19713월 통혁당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서울지법 원심에서는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72년서울고법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88년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배우 문근영과 외조부 류낙진

Θ 만년(晩年)

19902월 전향서를 제출한 후 19년 만에 보안관찰자처분대상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19947월 김영삼정부 때 사건 조작 논란을 낳은 구국전위사건으로 또다시 국가안전기획부에 체포되어 서울지법에서 무기선고, 서울고법에서 8년선고 받아 복역중 ,국제 사면위원회등 국제기구와 광주 지역 재야 인사들의 석방 운동으로 1999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2002530일 광주지법에서 백운산지구 빨치산 위령비 비문을 작성했다하여 불구속 입건됐다가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선고(국가보안법 7조 위반))를 받았다.19805월에는 동생 류영선이 전남 도청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그러나 류영선은 검찰이 조사한 1995.7.18 기록에 의하면 사망당시 27세의 회사원이었으며 526일 시위구경을 하다가 YWCA에서 계엄군이 아니라 시민군의 M-16 총탄에 사망한것으로 되어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이다). 출소 후에는 광주광역시로 낙향, 그곳에 거주하면서 수감 기간에 익힌 실력을 바탕으로 후학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냈다.2005412345분경 수감중 받은 고문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 78세였다.

○수상경력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미협)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서협)

광주시미술대전 특선 3, 입선 7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추천작가

전라남도 미술대전 특선 3, 입선 7

전라남도미술대전 추천작가

전국무등미술대전 입, 특선 8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회원

국제서법예술연합한국본부 회원

가족

처 신애덕(1932 ~ )

아들 : 류진우

아들 : 류식

동생 : 류영선(1952 ~ 1980)

: 류선영(배우 문근영의 엄마)

사위: 문홍근(배우 문근영의 아버지)

■ 류낙진 사망관련 뉴스(2005.4 당시)

류낙진 장례, 민족통일장으로 치르기로

지난 1일밤(2005.04.01 1140) 사망한 고 류락진에 대한 장례가 '민족통일장'으로 치러진다.

류락진 장례위원회는 2일 오후 유족대표와 통일광장, 범민련, 광주전남민중연대 등 지역시민사회단체 인사들과 장례위원회 구성을 위한 모임을 갖고 고 류락진에 대한 장례를 고인이 평소 조국통일과 민족 화합에 힘써온 행적을 기려 '통일애국열사 고 류락진 민족통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어 장례위원회는 오는 5일 오전 광주 동구 장동 범민련 사무실 앞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영락공원을 거쳐 경기도 파주 비전향 장기수 들이 영면해있는 보광사 장지로 향할 예정이다.

장례위원회는 또 범민련 남측본부와 광주전남연합, 광주전남통일연대, 광주전남민중연대소속 원로들을 고문으로, 소속 단체 대표들은 장례위원을 맡기로 했다. 또 장례위원장에 이규제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홍번 범민련 광주전남연합 의장, 임방규 통일광장 대표로, 호상에는 양심수 출신 기세문 선생과 광주전남통일연대 이명한 상임공동대표가, 집행위원장에는 박상춘 범민련 광주전남연합 사무국장이 각각 맡기로 했다.

한편 이날 새벽 류낙진과 함께 '구국전위'사건으로 함께 복역했던 안재구가 다녀갔고 하루 전 타계한 고 윤영규 장례위원을 맡은 정희곤 전교조 광주지부장과 고 윤 의 유가족이 빈소를 찾아 서로를 위로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이날 오후에는 전 백양사 주지이자 류낙진과 함께 재야 운동을 이끌었던 지선스님이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어제 새벽부터 광주 북구 용봉동 현대병원 빈소에는 과거 통일운동을 함께 했던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통일광장 회원으로 기세문, 권낙기, 임방규, 안희숙, 변숙현, 박길한, 김해석, 안학섭, 문상봉, 서순정, 윤성남, 김영승 등이 어제 새벽 소식을 듣고 급히 내려와 분향했다.

기세문 은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우리가 살아오면서 죽을 고비를 몇십번이나 넘겼는데 이제 편한 맘을 가져라고 했다""예전같으면 말을 하지 못했을 텐데 왠지 그냥 류선생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옥중생활 중 공안당국의 전향공작으로 류낙진과 함께 고생했던 안학섭 도 "0.75평에 10명을 한꺼번에 넣어놓고 한 사람씩 꺼내 전향서를 작성하라고 고문하던 시절이 생각난다""몸이 아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훌쩍 갈 줄은 몰랐다"고 비통해 했다.

한국전쟁당시 지리산에서 인연을 맺어 평생을 함께 해온 류낙진의 미망인 신애덕 여사는 "생전에 해야 할일들이 많았는데 못하고 가서 너무 한스럽다"며 울먹였다.

현재 유족, 광주전남통일연대, 범민련 인사들은 장례위원회 구성을 위한 모임을 갖고 장례절차와 일정등에 대한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류낙진은 오랜 복역생활로 허리가 좋지 않아 2년전 허리수술을 받았으며 이 후유증으로 지난해 광주 서구 상무지구 우리병원에 한달정도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뒤 큰아들 진우씨 집에서 요양해왔다.

그러던중 2주전부터 기력이 쇠해지고 건강이 악화돼 광주 북구 용봉동 소재 현대병원에 입원했으며 진찰 결과 폐부위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틀 전 상태가 악화돼 이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가 어제밤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류낙진은 평소에도 오랜 복역생활과 고문 후유증 등으로 호흡이 곤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류낙진은 박정희 정권시절 전남 보성 예당중학교 교사로 재직중 1971통혁당 재건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1968824일 박정희 정권 최대 조직사건인 '통일 혁명당' 사건이 밝혀지고 이후 1979년까지 전국 10개 조직을 적발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1514일 류선생을 포함 11명이 북한지령으로 조선노동당 호남지부구성 및 시도단위 지하당조직 건설과 공장, 탄광에 핵심조직, 혁신계정당 침투로 적화통일, 혁명이론을 유도했다는 혐의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국가기관에 의한 고문과 사건 조작의혹이 있다는 주장이 일면서 참여정부 '국가기관 과거사위원회' 조사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통혁당 재건사건으로 구속된 류낙진은 1988년 노태우 정권에 의해 20년형으로 감형된 뒤 1990년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19년만에 가석방됐다

그러나 1994년 다시 구국전위(救國前衛)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러야 했다. 당시이 사건은 수학박사로 미적분학의 권위자이던 안재구(당시 경희대 강사)가 총책으로, 류낙진은 호남책으로 조선노동당의 남조선 지하당인 구국전위를 구성하고, 남한 내의 동향을 북한에 정기적으로 보고했다는 안기부의 혐의 발표가 있었으나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주장이 제기돼기도 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시절 이 지역 재야 인사들이 류락진 석방추진위원회를 통해 양심수로서 최고령인데다가 형기의 절반이상 복역(8년이상)했으며 5.18유가족인점을 들어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자 당시 민주노총 금속연맹 단병호의장과 함께 사상전향제의 후신인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기도 했다. 류낙진은 1999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뒤 감옥생활에서 배운 서예로 후학을 지도해 왔다.

류낙진의 동생 류영선(당시 28)은 전남대 화학과 재학중 1980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남도청부근에서 공수부대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유가족으로는 한국전쟁당시 지리산에서 만나 결혼했던 미망인 신애덕(74)여사, 아들 류진우, 류식, 딸 류소영, 류선영, 며느리 김명희, 정정님, 사위 채명수, 문홍근이 있다. 발인은 5일 오전 8시이며, 빈소는 광주시 북구 용봉동 소재 현대병원.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고령산 소재 보광사.

연화공원 안내석의 글 내용에 불만을 품고 헤처놓은 모습.

장기수 묘역으로 조성되었다가 우익단체에 의하여 파괴되고 난 뒤 연화공원의 현재 모습. ‘연우지석만 홀로 남아 있다.

● 류락진(柳洛鎭.77.광주 북 매곡동) 연보

1928826(양력 109):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에서 출생

1933: 부모 따라 일본땅으로 이주

일본에서 소학교(8년제), 사범학교(5년제) 수학

19462월경: 귀국(고향인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 정착)

19505: 국민대학 수학

1950928일 유엔군 9.28 서울 수복되자 입산(전북 순창 회문산 등지)

19523: 지리산에서 체포, 광주 포로수용소(현 전남대 병원 인근 철길가)에 투옥.

1952330: 비상사태하의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피검(군법재판소에서 사형선고)

195210월경: 민간 재판소로 이양돼 광주지방법원에서 5년 선고

1957103: 비전향 만기출소

1957: 신애덕씨와 결혼.

1958~ 1963년 건축공사 현장에서 근무 (19642급 건축기사 자격취득)

1963년 말 ~ 19713: 전라남도 보성군 예당중.고등학교 교사로 8년 근무

1963: 혁신정당사건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선고

19713: 통혁당 재건사건(호남 총책)으로 피검(서울지법에서 사형선고)

1972: 서울고법에서 무기선고

1972: 대법원에서 무기확정

1972~1989: 5월까지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1980527: 동생(류영선)이 시민군으로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총을 맞아 사망, 본인은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원임.

1989: 전주교도소로 이감

19902: 20년 복역후 감형 출소(보안관찰 대상자 처분)

19947: 구국전위사건으로 구속(서울 지법에서 무기선고, 서울고법에서 8년선고. 대법원 상고포기 형 확정)

1999815: 8.15특별사면으로 비전향 출소(현재까지 보안관찰자 처분)

2002530: 광주지법, 백운산지구 빨치산 위령비 비문 작성 사유로 불구속 입건(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선고(국가보안법 7조 위반))

2001-2003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

2000-현재 통일광장 회원

2005412345분 향년 78세로 사망.

● 수상 경력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미협)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서협)

광주시미술대전 특선 3, 입선 7

광주시 미술대전, 추천작가

전라남도 미술대전 특선 3, 입선 7

전라남도미술대전 추천작가

전국무등미술대전 입, 특선 8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회원

국제서법예술연합한국본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