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기억은 시간이 흘러가면 희미해지고 대부분 사라진다. 몇 년 후까지 기억하는 것은 극히 일부다. 정보기술(IT)은 이런 상식을 바꿔 놓았다. 오래전 인터넷에 생각 없이 올린 글이나 사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10년 전에 서비스에 가입하기 위해 제출한 개인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고 있어 불안해하기도 한다. 디지털 정보는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검색 엔진이 복제한 정보까지 찾아주기 때문에 흔적을 지우기도, 가리기도 힘들다. 그래서 과거엔 필요 없었던 새로운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바로 '잊힐 권리'.

◇ 잊힐 권리를 보장하라

온라인 공간에서 잊힐 권리를 처음 주창한 사람은 영국 옥스퍼드대 빅토르 마이어 쇤베르거 교수다. 그는 2009년 저서 '잊힐 권리(Delete the virtue of forgetting in the digital age)'에서 잊힐 권리를 자유·평등권 같이 인권의 일부로 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쇤베르거 교수는 소비자들이 앞으로는 잊힐 권리를 보장해주는 서비스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인터넷에는 망각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메신저 서비스 '스냅챗'이다. 스냅챗으로 보낸 메시지는 수신자가 확인만 하면 곧 사라진다. 사진·동영상·메모 등을 보내고 상대가 열람하면 10초 안에 메시지가 없어진다. 서로 대화하고 공유하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애반 스피겔과 바비 머피가 2011년 공동 창업한 스냅챗은 부모의 감시를 피하고 싶은 미국 청소년에게 인기다. 스냅챗으로 공유하는 사진은 하루에 4억장이 넘는다. 스냅챗은 페이스북이 30억달러(3조원)에 인수하겠다는 제의를 뿌리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스냅챗은 서버에 사진을 남긴 것으로 나타나 미국 정부의 감찰을 받게 됐다.

SK플래닛의 미국 현지 법인 '틱톡플래닛'이 개발한 '프랭클리메신저도 핵심 기능이 대화 삭제다. 스냅챗처럼 대화 내용을 확인하면 10초 후 자동 삭제한다. 이미 보낸 메시지도 상대방이 확인하기 전이라면 취소·삭제가 가능하다. 작년 9월 미국에서 먼저 서비스를 시작해 인기를 끌자 한국 서비스도 시작했다.

각종 메신저에는 잊힐 권리를 반영한 기능이 속속 추가되고 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메신저 '마이피플''5초 메시지'란 비밀 대화 기능을 넣었다. 보내는 사람이 1, 3, 5, 10초로 시간 설정을 해놓으면 수신자가 그 시간 동안만 문자나 사진을 볼 수 있다. 트위터에도 비슷한 기능이 생겼다. 메시지를 쓰고 마지막에 트윗을 유지할 시간을 적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메시지 끝에 ’#1H'라고 써놓으면 게시 1시간 후 트윗이 사라진다.

◇ 인터넷 흔적을 지워주는 업체들

개인이나 기업이 인터넷에 남긴 흔적이나 악의적인 비방 글을 지워주는 업체도 성업 중이다. '산타크루즈 캐스팅컴퍼니'는 연예인·모델 에이전시 사업을 하면서 연예인 평판 관리용으로 이런 서비스를 개발했다. 의뢰인의 위임을 받아서 국내외 인터넷 기업에 명예훼손이나 비방성 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하는 서비스다. 현재 회사 고객 가운데 연예인은 5%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95%는 기업과 일반인이다. 이 회사 김나경 팀장은 "일반인들은 동영상 삭제를 원하는 경우가 많고, 기업은 제품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삭제해달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맥신코리아'는 정치인 평판 관리가 전문이다. 이 회사는 요즘 지방선거 출마 예정인 후보의 전화를 많이 받는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정당 공천을 받거나 표를 얻는 데 있어서 온라인 평판이 중요해졌다""나쁜 평판을 지우고 삭제가 힘들 경우엔 우호적인 글을 대거 올려 나쁜 평판을 밀어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포털 업체에 직접 연락을 해서 자신에 대한 비방·명예훼손성 글을 가려주거나 삭제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도 많다. 네이버는 "명예훼손 글을 안 보이도록 해달라는 '블라인드처리 요청이 하루 300건 정도 들어온다"고 밝혔다. 자신이 어떻게 명예훼손을 당했는지 설명하면 30일간 해당 글을 블라인드 처리한다. 이후 해당 콘텐츠를 올린 사람이 이 조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글을 삭제한다. 콘텐츠를 올린 사람이 이의 신청을 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한다. 네이버는 "심의 요청은 일주일에 10건 정도"라고 밝혔다.

미국과 유럽은 잊힐 권리를 법으로 보호하기 시작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이르면 올해부터 개인이 게재한 정보와 타인이 자신에 대해 쓴 글까지 필요 시 삭제할 수 있도록 정보보호법을 개정해 적용한다. 유럽사법재판소는 13일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한 정보 검색 결과를 삭제해달라는 스페인 남성의 요청을 구글이 받아들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도 작년 18세 이하 미성년자는 구글·페이스북에 자신에 관한 기록을 지워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