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디까지나 물질적 존재이다. 사람이 장구한 진화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과학발전에 의하여 확증된 사실이다.
존재는 사물의 실체이며, 속성은 운동과정에서 표출되는 그의 특성이므로 사물의 의미에 대한 고찰은 의례히 존재와 속성의 두 측면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존재가 있고서야 속성도 있는 것이므로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고자 할 때는 응당 존재론적 고찰을 선행시켜야만 한다.
그러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콩트가 ≪너 자신을 알려면 역사를 알라≫고 했듯이 인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진화과정부터 알아야 한다.
세계는 물질세계이다. 세계는 오직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물질의 형태는 천태만상이다. 고체물질이 있는가 하면 액체물질도 있고 그런가 하면 기체물질도 있다. 또 극소형의 미립자로 존재하는 물질이 있는가 하면 거대한 천체로 존재하는 물질도 있으며, 생명체로 존재하는 물질이 있는가 하면 무생명체로 존재하는 물질도 있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질뿐이다. 비물질로부터 물질이 창출될 수도 없고 물질이 비물질로 전화될 수도 없다.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질로 이루어진 전일적인 통일체인 것이다.
또한 세계의 모든 물질은 예외없이 운동한다. 세계에는 운동하지 않는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은 물질의 기본적 존재방식이며 따라서 매개 물질은 모두 자기의 고유한 운동을 한다. 물질의 존재형태가 다양한 것처럼 그 운동 형태 역시 다양하다. 물질운동의 한 형태는 다른 형태로 전환될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은 다같이 물질의 존재형식이다.
세계의 모든 물질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 즉 모든 사물은 언제나 이러저러한 연장성(길이, 넓이, 높이)을 가지고 일정한 장소에 존재한다. 공간은 위치와 연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물질의 존재형식이다. 공간은 3차원성을 가진다. 다시말하면 모든 물질은 일정한 장소에서 길이, 넓이, 높이를 가지고 하나가 다른 것 옆에 병렬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세계의 모든 물질은 또한 시간 속에 존재한다. 하나의 물질은 다른 물질에 비해 먼저 혹은 뒤늦게 존재하거나 오랜 혹은 짧은 기간 존재한다. 이렇게 시간은 계기성과 지속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물질의 존재형식이다. 공간이 3차원적이라면 시간은 1차원적이다. 다시 말하여 시간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흐른다. 시간은 오직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만 흐르며 비가역적이다.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요컨대 존재란 시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물질적 실체이다. 존재는 어디까지나 유(有)이며 무(無)는 비존재적인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운동은 변화와 발전을 수반한다. 운동 없는 물질적 존재가 없는 것처럼 변화와 발전이 없는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사물이 운동하고 변화발전하는 것은 그가 시공간 속에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물질적 존재는 예외 없이 일정한 환경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그 환경은 부단히 변화한다. 모든 물질들의 존재환경인 자연만을 놓고 보아도 그렇다. 지질학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생물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에도 지표는 끊임없이 변동하여 왔다. 대기, 빗물, 유수, 빙하, 지하수, 호수, 해양생물 등은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기계적 또는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면서 암석을 깨트리고 분해하는 파괴작용을 하고 또 토양, 모래, 돌 따위를 운반하여 여러 가지 운반물을 퇴적했다. 이런 퇴적물이 쌓여 수성암이 되었고 지형은 늘 변해왔다. 이 같은 지구의 외부작용 이외에 또 내부작용으로서 화산작용, 지질현상 등의 비교적 급속한 변화가 있었는가 하면 지각이 완만하게 융기 또는 침몰하는 변화도 있었다. 이리하여 새로운 지층이 생기고 대륙과 섬들의 분포도 변하여 온 것이다. 한편 지구 위의 기후도 부단히 변화여 왔다.
이같이 환경이 변하면 그에 상응하게 물질 자체도 변화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물질은 자기의 존재를 이어갈 수가 없게 된다.
물질의 변화발전은 저차원의 것으로부터 고차원의 것으로 진행되는 형태와 구조, 기능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다윈도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와 같이 점진적이다.
어류로부터 파충류로의 진화과정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어류는 수중에서만 살 수 있다. 오늘도 그러하지만 파충류가 출현하고 번성하던 시기인 고생대와 중생대에는 어류의 필수적 생존환경인 강이나 호수가 가뭄에 말라 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새로운 강과 호수를 찾아 헤매던 어류들에게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적 변화가 일어났다. 육지에서도 호흡할 수 있는 폐가 생겨나고 물 속에서 헤엄치는 데 이용되던 지느러미는 육지에서도 걸을 수 있는 발로 변했다. 이는 수중이라는 생존환경에 적응되었던 어류의 육체적 구조와 기능의 고차원적 변화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류로부터 파충류로의 진화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존재의 본질과 그 운동의 일반적 법칙은 대체로 이러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자연의 물질적 존재 및 그 변화발전의 일반적 법칙과 무관한 것인가.
똘스또이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계심을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이미 있으니 내가 있게 된 원인이 없을 수 없다. 만물의 큰 원인을 하나님이라 이르는 것이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이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과학을 믿고 현실을 긍정하는 한에서 이 논리를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계의 근원은 그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물질이다. 세계의 모든 것은 물질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인간도 다름아닌 물질발전의 최고 산물이다. 말하자면 자연진화의 필연적 소산이 바로 인간이다.
우주의 장구한 진화과정에서 태양계의 행성으로 태어난 지구위에는 점차 생명물질이 창출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고 이에 따라 무생명물질로부터 생명물질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물질세계의 진화에서 하나의 획기적 사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위대한 전환은 약 40억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생명물질의 물질적 조성에서 중요한 자리를 점하는 것은 단백질과 핵산과 같은 고분자화합물이다. 단백물체를 이루는 고분자화합물의 조성에는 탄소, 수소, 산소, 질소 등 무기물에도 있는 원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지구가 생겨날 때 그 표면에는 다른 무기물질과 함께 이러한 원소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이 결합되고 분해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아미노산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아미노산의 형성은 단백질과 핵산의 형성을 담보하는 물질적 전제가 갖추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단백질과 핵산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실로 무생명물질로부터 생명물질로 진화하는 데서 거대한 사변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무생명물질로부터 생명물질로의 진화가 완성된 것은 물로 아니며 그것은 다만 생명체가 창출될 수 있는 소재의 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생명체는 단순한 단백물체가 아니라 전일적 구조를 가진 유기적 조직체이다. 고분자유기물질들은 여러 단계에 걸치는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 마침내 전일적인 구조를 가진 생명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생명체에서는 그 구성부분을 이루는 물질들의 작용이 전일체로서의 생명체를 보존하는 방향에서 일정한 순차에 따라 조화롭게 연결되어 진행된다.
그리하여 생명체를 이루는 물질적 요소들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조직화된 체계를 이루게 되었고 이러한 구조와 조직화 수준의 본질적 우월성으로 하여 생명물질은 무생명 물질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새로운 운동속성을 가지고 고차원적인 형태의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 운동은 어디까지나 자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방향에서 합목적적으로 진행되며 그 과정에서 생명체는 자체의 구조와 조직화 수준을 높여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지구상에 생겨난 최초의 생명체는 단세포생명체였는데 그로부터 다세포생명체로 이행되었고 그 뒤를 이어 고등한 동식물이 생겨나는 등 진화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취를 감춘 것도 있고 퇴화한 것도 있지만 총체적으로 생명물질은 저차원으로부터 고차원으로 간단없이 발전해 왔다.
생명체의 발전정도는 그 구조와 조직화수준 그리고 생활력의 발전정도에서 표출된다. 고차원의 생명체는 저차원의 생명체보다 기관들과 기능이 분화되어 있으며 구조도 복잡하다. 동물이 식물에 비해 구조와 조직화 수준이 더 높고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다. 식물보다 발전된 생명체인 동물의 발전정도는 중추신경계통, 뇌수의 발전정도에서 집약적으로 표출된다.
생명은 생명체의 어느 한 특정한 기관의 속성이 아니라 전일적인 유기체로서의 생명체의 속성이며 또 생명체의 생명활동은 생명체를 이루는 모든 기관들에 의해 보장된다. 그렇다고 하여 생명체를 이루는 모든 기관의 역할이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모든 기관들 중에서 중추신경계통, 뇌수는 특수한 자리를 차지한다.
동물은 장구한 진화의 과정을 거쳐오면서 각이한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가지 기관들이 분화되고 구조가 보다 복잡해졌다. 이에 따라 여러 기관들의 작용상 통일성을 보장하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받아들이며 그와 관련하여 생명체의 활동을 전반적으로 지휘하는 조직인 신경계통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동물의 진화가 간단없이 지속되면서 신경계통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그 필연적 소산으로서 중추신경체계가 발생하였으며 마침내 뇌수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뇌수는 동물의 기관 가운데서 가장 발전된 기관으로서 생명유기체의 내적 활동과 외부세계의 상호작용을 통일적으로 관할하는 가장 고급한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동물의 생활능력이 발전하고 동물이 주위환경과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를 맺음에 따라 동물의 뇌수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으며 신생대에 이르러 지구위에는 대단히 발달된 뇌수를 가진 고등동물인 유인원(원숭이의 일종)이 출현하게 되었다.
유인원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기후가 온화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산림지대들에서 무리를 지어 나무 위에서 살았다. 네 발로 걸아다니면서 앞발로는 나무가지를 휘어잡아 열매를 따먹었고 뒷발로는 몸을 의지했다.
그후 지구상에는 자연기후조건의 심한 변동이 생겼다. 무성한 산림이 없어지고 기후가 몹시 차졌던 것이다. 그곳에서 생존하기 어렵게 된 유인원들은 기후가 온화한 넓은 평지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인원들의 지상생활여건은 수상생활여건과는 전혀 달랐다. 식생활의 경우 나무열매뿐만 아니라 짐승도 잡아먹게 되었고 이로 인해 돌이나 나무막대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먼 곳을 살펴보는 일이 관습화되어 갔고 동작도 전례없이 민첩해졌다. 그 까닭으로 유인원들은 수상생활을 할 때에 나무를 잡고 몸을 지지하는 데 사용하던 뒷발로 직립보행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유인원이 인간으로 진화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유인원이 직립보행을 하면서부터 몸의 형태와 기관, 그 기능이 인간화되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인원은 몸의 형태가 행위에 편리하고 조화롭게 발전했다. 머리는 커지고 가슴은 넓어졌으며 다리는 길어진 반면에 허리와 목은 가늘어졌다. 허리가 가늘어진 것은 좌우전후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요, 또 발을 헛디디는 경우에도 주요기관이 들어 있는 상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목이 가늘어진 것은 몸 전체가 넘어져도 뇌수가 들어있는 머리가 깨지지 않게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네발로 기어다니던 유인원들이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게 되자 시야가 훨씬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생활적 요구가 급격히 다양해졌으며 또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대상도 많아졌다. 특히 유인원들은 수상생활을 할 때보다 다종다양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유인원의 뇌수는 비할 바 없이 발달되었다. 60만년 전에 살았다는 쟈바원인의 뇌수조차도 고릴라의 뇌수보다 두 배나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뇌수의 발달은 인간에게 추상적 사유능력을 가져다주었다. 유인원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의 가장 세밀한 것들까지 샅샅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변화들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다니는 길을 잘 알게 되었으며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인원들이 지상생활을 시작한 첫 시기부터 그 길을 머리로 상상하여 땅바닥에 그린다든가 남에게 전달한다던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직립보행이 오래 지속되고 이로 인해 뇌수가 발달하면서 그들은 자기가 늘 다니는 길을 땅바닥이나 손바닥에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공간과 공간적 관계들을 감각기관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하였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사유에 의해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추상적 사유능력의 발전은 자연과의 관계에서나 인간상호간의 관계에서 행동의 결과와 과정을 예상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자기들이 이용하던 나무막대기나 돌을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가 쓰면 아주 합리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도구를 닳아 못쓰게 될 때까지 계속 사용하면 이롭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무렵에는 매우 새로운 생각이었고 또 인간의 생활을 뿌리까지 변화시킨 변혁적인 것이었다.
한편 직립보행을 하면서 자유로워진 유인원의 앞발도 형태와 기능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유인원의 앞발의 엄지발가락은 기껏해야 두 번째 발가락과 닿을 수 있었을 뿐 나머지 발가락과는 잘 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직립보행을 하면서부터는 나머지 4개의 발가락과 자유롭게 닿을 수 있게 되었고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조화롭게 협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유인원의 앞발이 인간의 손으로, 즉 노동기관으로 전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인원들이 직립보행을 하면서부터 목의 구조도 맑은 소리를 낼 수 있게 변했다. 그래서 외마디 소리밖에 내지 못하던 그들은 똑똑한 음절을 가지고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직립보행에 의한 육체의 형태적 변화, 발전된 뇌수에 의한 추상적 사유능력의 조성, 정교한 손에 의한 보편적 생산노동의 시작, 발달된 발성기관에 의한 언어의 구사, 이 모든 것은 고도로 발전된 새로운 유기체의 창출, 인간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같이 인간은 자연의 장구한 진화과정에서 생겨난 고도로 발전된 자연적 존재이다.
자연적 존재는 자연적 속성을 소지한다. 자연적 속성이란 다름 아닌 생물유기체로서의 속성, 생물학적 속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물학적 속성은 생명물질이 다같이 공통적으로 소지하고 있는 육체적 존재를 유지하려는 본능적 속성이다. 그 가운데서 기본으로 되는 것은 물질대사와 자극에 대한 생물학적 반응, 자기증식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대사는 생물체의 기본적 존재방식이다. 물질대사가 멎으면 생물체의 세포를 이루고 있는 물질들의 비가역적인 분해가 진행되면서 생명체의 활동이 중지된다.
생물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또한 체내와 체외로부터 오는 이러저러한 자극에 대하여 민감한 생물학적 반응을 해야 한다. 즉 외계의 여건이 여러 가지로 변해도 체내의 생리적 상태는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예컨대 추울때에는 혈관을 수축시키고 더울 때에는 열을 발산시켜 체온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건강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극에 대한 반응은 생물유기체로의 내적 균형을 유지하고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증식은 대를 이어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생물학적 속성의 하나이다.
요컨대 인간은 물질의 발전, 자연의 진화가 낳은 고도로 발전된 물질적 존재, 자연적 존재이다. 지금까지의 자연진화사는 자연적 존재는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자연에의 순응은 자연물의 기본적 생존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자연발전의 산아인 인간은 자연의 질서에 묵묵히 순종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에 도전하고 대립하는 존재로 부상하였다. 인간은 자연의 아들로서 자연을 닮은 측면도 있었지만 그것을 전혀 닮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자연을 닮지 않은 측면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옳게 해명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과학적으로 밝히기 위한 선결적 요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생활적 요구는 동물의 그것에 비할 바 없이 높다. 동물의 생활적 요구는 기껏해야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고 졸음이 오면 잠자리를 찾고 번식기가 되면 둥우리를 트는 것과 같은 생리적 요구이다.
물론 인간도 생물학적 존재인 만큼 이러한 생리적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생리적 요구가 아니라 사회적 요구이다. 사회적 요구는 인간의 사회생활과 관련된 요구이다. 그 가운데는 정치생활과 관련된 요구가 있는가 하면 문화생활과 관련된 요구도 있다.
사회적 요구는 생리적 요구에 비할 바 없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 요구는 동물들과 같이 변천하는 자연의 섭리에 자기의 육체적 구조와 기능을 적응시켜 순응하는 방식으로는 실현할 수 없다. 사람은 이미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차원의 사회적 요구는 오로지 사회적 방식으로만 실현할 수 있다. 그 방식이란 다름 아닌 사회적 교류와 협력의 방식이다. 인간은 이 방식이 아니고서는 도대체 생활수단과 여건 중 그 어느 하나도 마련할 수 없다. 가령 짐승을 사냥해 음식물을 마련하고자 해도 사회적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몽둥이를 들고 짐승을 때려잡는 사람, 짐승을 함정으로 몰아가는 사람, 잡은 짐승을 가공하여 분배하는 사람 등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한다. 이때의 사람들의 행위는 벌써 개인을 초월한 보편적인 행위이다.
교류와 협력을 기본적 방식으로 하여 역사를 창조해 오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복잡한 사회관계가 형성되었다. 남녀 사이에는 부부관계, 같은 부모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형제관계,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사제관계, 혈통과 언어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는 민족관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동지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는 정치적 수단을 둘러싸고는 정치관계가, 경제적 수단을 둘러싸고는 경제관계가, 문화적 수단을 둘러싸고는 문화관계가 각각 형성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또 언제나 이러한 사회관계 속에 있기 마련이다. 사회에서 가장 높은 사람도 가장 낮은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자연과의 관계를 떠나서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이러저러한 사회관계를 떠나서도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책상 앞에 혼자 앉아 있다. 이 방안에는 아무도 없다. 이때만은 본인만의 나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순간에도 안방에서 아버지가 나를 부르면 나는 ≪예≫라고 대답할 것이다. 혼자 앉아 있는 동안에도 나는 아버지의 자식인 것이다.
밖에 손님이 왔다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손님의 친구인 것이다. 학교에 나가면 배우는 학생이요, 책방에 들르면 손님이요, 버스를 타면 승객이요, 전람회에 가면 관람객이요,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시청자다. 아니 본인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아무개의 몇째 아들이었고 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관계를 떠난 ≪나≫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모든 사회관계를 하나하나 제거해 버린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나는 지금 말을 글로 옮기고 있다. 하찮은 말이요 글이나마 그런 대로 보며 듣는 사람을 머리 속에 전제하면서 하는 말이다. 언제 누가 볼는지는 모르나 본인은 이미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하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모두가 외국사람 아닌 나의 부모, 나의 친구, 나의 스승, 나의 동포에게서 배운 말이다. 나는 지금 우리말로 ≪우리≫라는 것을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유대와 밀접한 연관의 관계 속에서 살며 활동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회관계에 의해 사람들은 유기적으로 결합된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사회이다.
동물이 자연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자연적 존재인 것처럼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사회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은 사회적으로만 자기의 자주적 요구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환경에 순응하는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능동적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자주적 본성이 낳은 필연적 소산이다. 다시말하여 인간은 자주적으로 살고자 자연에 대립하는 하나의 특수한 세계를 창출시켰던 것이다.
사실 인류가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인간을 엄습하던 자연을 어떻게 길들일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인류학이나 역사학에서는 불의 발견, 도구의 제작 등 인류발전의 중요한 전환점들을 열거하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류가 질서 있는 사회를 구성하여 집단생활, 공동체생활을 하였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인공적으로 불을 얻어 사용한 것이나 도구를 만들어 쓴 것도 사회의 발생발전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제한된 능력을 가진 개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적 존재라는 거인이 되어 자기의 자주적 요구를 실현해 나가는 세계에서 가장 힘있는 존재로 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사회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는 것은 또한 자기의 창조적 능력을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만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주적 요구는 창조적 능력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인간의 창조적 능력은 본질에 있어서 사회적 힘이다. 동물은 자연에 순응하는 과정에서 이룩된 능력인 순응력을 생물학적 특성의 형태로 체내에 보유하고 생물학적 유전의 형태로 후대에 전달한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개체적 순응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생존환경을 개조하는 데서 획득된 경험과 힘을 생산도구와 서적과 같은 물질적 및 정신적 재화의 형태로 객관화하여 사회적 교육의 방법으로 후대에게 전달한다.
그러므로 사회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자연주의적 견지에 서 있었던 희랍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말했듯이 사람들이 천짜는 법은 거미로부터 배우고 노래는 꾀꼬리로부터 배웠다는 식으로는 볼 수 없다. 사람들의 사회적 힘은 오로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회적 방법으로만 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와의 인연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사람은 사회라는 틀 속에서 살면서 상호 이익 또는 재앙이 되는 일에 있어서 하나의 몸의 신경처럼 엉겨있는 것이며 그래서 아무리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는 사회와 인연을 끊고 혼자서 고독하게 사는 데서 그 무슨 행복을 찾아보려고 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옛날 희랍의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시민임을 자처하면서 처자도 조국도 다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인간사회의 모든 거추장스러운 제약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면서 혼자 통 속에서 살았다. 얼마나 편안한 삶이냐, 푸른 하늘을 이불삼고 넓은 대지를 요삼아 자유롭게 사는 세계시민 디오게네스임을 자랑했다. 그는 모처럼 통 속으로 비치고 있는 일광을 막아섰다고 하여 대화상대인 알렉산더대왕을 옆으로 비켜서게 하였다고 한다.
만일 지금도 그가 살아서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런 충고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요. 그러길래 당신과 알렉산더 대왕과의 일화는 20세기가 다 저물어 가는 오늘날 아시아의 우리 한국 어린이까지도 잘 알고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소.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은 당신의 그 통이 어디서 생겼나 하는 것이요. 헌 통 하나 어디서 주워 왔기로서니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할는지 모르나 하여간 그 통의 덕택을 입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 아니요? 그리고 또한 당신고 물만 마시고 사는 것은 아닐테니 그 빵조각은 또 어디서 난 것이요? 세계시민이 갖다 준 것인가요? 손수 만든 빵인가요? 밀가루는 어디서 구하였나요? 동양에는 벽곡이니 생식이니 하여 솔잎 등을 가루고 만들어 물에 풀어 마시고 사는 수도자의 생활방법이 없지는 않소. 그러나 당신은 국가도 필요없다, 민족도 필요없다, 그따위는 도외시한다고 큰소리치지만 오히려 희랍사람들의 신세만 지면서 살아가는게 아니요?
희랍사람들의 신세는 절대로 지고 있으면서 나는 그런 것을 모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 그것도 대단한 문제거리는 아니라고 또 한번 양보하겠소. 그러나 저 유명한 일화로서 전해지고 있는 알렉산더대왕과 만났을 때 어느 나라 말로 문답을 하였나요? 설마 에스페란토어는 없었을 것이니 어떤 세계시민의 용어를 사용하였나요? 나의 짐작으로는 역시 희랍말로 서로 의사를 통하였을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짐작되는군요. 디오게네스 당신은 독특한 개인 디오게네스이기 전에 이미 희랍말을 쓰며 사는 희랍사람이었고 세계시민이기 전에 희랍사람으로서 희랍사람들의 덕택으로 들어앉을 통도, 먹을 빵조각도 얻어서 사는 것이 분명하지 않소?≫
사회를 잃는 것은 공동체를 잃는 것이요, 공동체를 잃는 것은 존재여건을 잃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혹심한 벌은 아마도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일 것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로부터 추방된 개인은 조수가 밀려나간 후 갯벌에 남겨진 물고기의 운명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져 고독하게 지내는 것, 자기의 세계가 아니고 자기와 절연된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은 실로 소름끼치는 것이다.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그 자신과 인간답게 결합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이것보다 더 슬픈 운명을 인간은 모른다.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인간은 세계의 유일한 사회적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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