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남서쪽 약 1km 지점 해상에서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하였는데, 탑승하고 있던 승조원 104명 중 58명이 구조되었으나, 나머지 46명의 실종자는 수색과 선체 인양이 되었으나, 결국 해군 장병은 40명이 사망하였고 6명(이창기 원사, 최한권 상사, 박경수 중사, 장진선 하사, 강태민 일병, 정태준 이병)이 실종되었다.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
772함(艦)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칠흑(漆黑)의 어두움도 서해(西海)의 그 어떤 급류(急流)도 당신들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 작전지역(作戰地域)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772함 나와라. 가스터빈실 서승원 하사 대답하라. 디젤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 그대 임무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가기 전에 귀대(歸隊)하라.
772함 나와라. 유도조정실 안경환 중사 나오라. 보수공작실 박경수 중사 대답하라. 후타실 이용상 병장 응답하라. 거치른 물살 헤치고 바다위로 부상(浮上)하라. 온 힘을 다하며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
772함 나와라. 기관조정실 장철희 이병 대답하라. 사병식당 이창기 원사 응답하라. 우리가 내려간다. SSU팀이 내려 갈 때 까지 버티고 견디라.
772함 수병은 응답하라. 호명하는 수병은 즉시 대답하기 바란다.
남기훈 상사, 신선준 중사, 김종헌 중사, 박보람 하사, 이상민 병장(1988년생), 김선명 상병, 강태민 일병, 심영빈 하사, 조정규 하사, 정태준 이병, 박정훈 상병, 임재엽 하사, 조지훈 일병, 김동진 하사, 정종율 중사, 김태석 중사, 최한권 상사, 박성균 하사, 서대호 하사, 방일민 하사, 박석원 중사, 이상민 병장(1989년생), 차균석 하사, 정범구 상병, 이상준 하사, 강현구 병장, 이상희 병장, 이재민 병장, 안동엽 상병, 나현민 일병, 조진영 하사, 문영욱 하사, 손수민 하사, 김선호 일병, 민평기 중사, 강준 중사, 최정환 중사, 김경수 중사, 문규석 중사.
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戰線)의 초계(哨戒)는 이제 전우(戰友)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命令)이다.
대한민국을 보우(保佑)하시는 하느님이시여, 아직도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 우리 772함 수병을 구원(救援)하소서.
우리 마흔 여섯 명의 대한(大韓)의 아들들을 차가운 해저(海底)에 외롭게 두지 마시고 온 국민이 기다리는 따듯한 집으로 생환(生還)시켜 주소서. 부디 그렇게 해 주소서.
◐ 천암함 순직 장병 46인 프로필
1. 서대호 중사
경남 의령, 마산공고, 할머니와 부모님, 형
천안함의 ‘분위기 메이커’
서 중사는 입버릇이 있었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육군 말고 해병대 정도는 가야죠”라고 늘 말했다. 해병대는 못 갔지만 지난해 9월 해군 부사관 224기로 입대하며 서해를 지켰다. 내연 부사관으로 기관실에서 힘들게 일했지만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원래 천안함을 타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대천함’을 탈 예정이었는데 이 배가 출동을 가는 바람에 자리가 비는 천안함을 대신 타게 됐다. 그는 오락시간에 승조원들을 기쁘게 하는 천안함의 가수이자 분위기메이커였다. 어머니 안민자 씨는 “우리 아들은 평택으로 간 지 얼마 안 됐다”며 “가끔 육지에 나와서도 돈 쓸 일이 없다고 ‘엄마 아빠 다 가지세요’라고 했던 아들인데…”라며 오열했다.
2. 차균석 중사
제주 서귀포, 한라대, 부모님과 남동생
보고싶은 그 갈색 머리-눈빛
“형. 이제는 보내줄게. 내가 형한테 철없이 덤비고 까불고 그랬던 거…. 왜 그랬는지 모르고 있었지? 형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형하고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형한테 관심 받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이제 알겠지? 형, 잘 가. 진짜 내가 가장 사랑하고 믿었던…. 우리 형. 안녕.” 제주도 사나이 차 중사는 동생 균진 씨에게 늘 커다란 ‘나무’였다. 차 중사가 서귀포중을 다닐 때 담임 오순길 씨(42)는 “눈빛과 머리색이 갈색이라 ‘브라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기억했다. 학교 밴드부에서는 트럼펫도 잘 불었다. 부사관 월급을 받으면 후배들부터 챙기고, 집에서 농사지은 감귤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던 자상한 수병이었다.
3. 문영욱 중사
경북 성주, 동아대, 외삼촌
홀어머니 여의고 군 입대
문 중사는 2007년 9월 홀어머니를 여의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학비를 벌려고 6개월 뒤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문 중사의 외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고생만 하던 영욱이가 ‘살길을 찾겠다’며 입대한 지 1년 만에 사고를 당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친구 이주현 씨도 슬픔에 못 이겨 문 중사의 미니홈피에 글을 남겼다. “네가 없었다면 난 어떻게 되어 있을까. 네가 있어서 정말 든든했다. 매일매일 생각하고 있단다. 아직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너무나 후회되는 것이 많구나. 너희 어머니 보내드리고 널 지킬 거라고 약속했는데…. 약속도 못 지켰는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소중한 친구야.”
4. 이창기 준위(실종1)
경기 양평, 인하공전, 부인과 1남
후배 구하고 산화한 ‘맏형’
천안함 전파탐지팀장이었던 이 준위는 동료들을 구하려다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숙연케 했다. 전파탐지팀장은 주로 함수에서 근무한다. 이 때문에 다른 전파탐지팀장 9명은 모두 생존했다. 둘째 형 이성기 씨(45)는 “후배들을 구하려고 함미에 달려갔다가 사고를 당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준위는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에서 속초함 전탐사로 참전해 전투유공 표창을 받는 등 ‘베테랑 해군’으로 통했다. 이 준위는 2일 준사관 선발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동료 하사의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대신 천안함에 탔다. 천안함 함장 최원일 중령과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함께하면서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다.
5. 김태석 원사
경기 성남, 성남서고, 부인과 3녀
자상했던 세 딸의 아빠
김 원사는 세 딸의 자상한 아빠였다. 막 한글을 깨친 여섯 살배기 막내딸은 TV에서 아빠 이름이 처음 나왔을 때 신기해하며 큰 소리로 읽었다. 이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빠가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부인 이수정 씨(36)는 “남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다”며 “아이가 뉴스에 아빠 이름만 나오면 시무룩해져서 내색할 수도 없었다”고 밝혔다. 김 원사는 천안함에서 근무할 때 단 한 건의 장비사고도 일으키지 않은 모범 군인이다. 1973년 경기 성남시에서 태어나 성남서고를 졸업한 그는 1993년 해군 부사관으로 임관한 뒤 지난해부터 천안함에서 근무했다. 실종자 수색을 중단하고 선체 인양에 나서자고 말했던 김태원 씨가 그의 친형이다.
6. 정종율 상사
전남 곡성, 인하공전, 부인과 1남
“사랑해” 닭살 돋던 그 말
정 상사에게는 세 살배기 아들이 있다. 그는 이번 훈련을 가기 전 미니홈피에 “우리 또 2세를 만들자”며 둘째 아이를 낳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아내에게는 결혼한 지 4년이나 지났어도 늘 ‘사랑한다’고 닭살 돋게 말하던 자상한 남편이었다. 정 상사와 함께 근무하다 전역한 전상우 씨는 “항상 수병들에게 친형처럼 너무나 잘해주셨던 분”이라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솔선수범하고 격려해 주셨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정 상사는 침몰 사건 전 유도탄고속함(PKG)인 서후원함으로 인사 예보를 받은 상태였다. 평택 2함대사령관 표창, 기술행정학교상 등 각종 상을 받는 명단에도 수시로 이름을 올렸다.
7. 조정규 중사
경남 창원, 창원공고, 부모님과 형
홈피 제목 ‘좀 더 나은 곳으로’
조 중사의 미니홈피 제목은 ‘좀 더 나은 곳으로’이다. 15일 이 미니홈피는 누리꾼들의 애도의 글로 가득 찼다. 누리꾼 배민주 씨는 “좀 더 나은 곳 이곳으로 돌아오세요. 온 국민들이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떠한 무서움도, 추움도, 고통도 당신을 잡으려 하지 못할 것”이라고 적었다. 후임 이용관 씨는 “조 중사님, 박보람 중사님이랑 빨리 나오셔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 많이 춥잖아요…”라고 적어 놨다. 조 중사는 초임 하사일 때부터 소속 부대장 표창을 받을 정도로 모범 군인이었다. 당직근무가 아닐 때도 기관조종실과 가스터빈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봉급을 쪼개 형의 학비도 뒷바라지할 만큼 우애도 깊었다.
8. 최정환 상사
충북 충주, 용산고, 부인과 1녀
석달된 딸 두고 그 먼길 가다니
어린 딸을 마음껏 안고 싶다던 꿈이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지난해 결혼한 최 상사는 평소 석 달 된 딸을 제대로 안아주지 못했다. 여린 성격 탓이었다. 자신의 큰 손 때문에 딸이 다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그는 “딸이 크는 것을 자주 보고 싶다”며 천안함을 마지막으로 육상근무를 자원했다. 그의 큰 손은 천안함에서 ‘약손’으로 통했다. 의무장인 그는 부상을 입은 대원들을 어머니처럼 세심히 보살폈다. 2008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를 추억하며 최 상사의 부인은 눈물을 흘렸다. “매일 남편이 탄 배 이야기만 나와서 TV는 켜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기적을 바랐어요.”
9. 이상준 중사
부산, 동의대, 부모님과 누나 2명
눈에 밟히는 늦둥이 아들아
위로 누나 두 명이 있는 이 중사는 어머니 김미영 씨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아들이다. 2008년 12월 해군 부사관 219기로 입대한 늦둥이가 처음으로 군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 김 씨는 늦둥이가 무척이나 대견하고 뿌듯했다. 천안함 장병들의 사격 능력을 높이는 데 일등으로 공헌한 주인공이 바로 아들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아주 반가웠다. 험한 해군 함정에서 생활하는 아들의 모습을 본 뒤로는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늠름한 아들이 늘 자랑스러웠다. 이 중사는 동의대 특수체육학과를 다니다 직업군인의 길을 택했다. 김 씨는 “그렇게 좁은 배에서 생활하다가 이런 변을 당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10. 김동진 중사
부산, 부산디지털고, 부모님
용돈 10만원 쪼개 복지관 기부
김 중사는 뇌종양 수술을 받은 홀어머니 홍수향 씨(45)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지난해 9월 해군 부사관 224기로 입대했다. 고향인 부산의 이웃들은 “쥐꼬리만 한 월급을 어머니의 치료비와 생활비로 몽땅 드렸던 효자였다”고 입을 모았다. 한 달 용돈 10만 원을 쪼개 유니세프와 복지관에 기부도 했다. 매주 교회에 나가 봉사활동도 했다. 그는 “어머니와 자신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김 중사의 어머니는 “우리 새끼 자다가 갔대요. 자다가 가면 고통도 없다는데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흐느꼈다. 휴가를 나오면 항상 정복을 입고 동네 인사를 다닐 정도로 해군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11. 문규석 원사
전남 구례, 금정고, 부인과 2녀
부재중 전화 남기고 떠나
“생의 마지막 전화였는데….” 문 원사 가족들의 마음속에는 너무나 큰 후회가 남았다. 초등학교 2, 4학년 두 딸을 둔 문 원사는 출동할 때면 늘 가족사진을 보는 정 많던 가장이었다. 문 원사는 천안함 침몰사건 5분 전 딸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미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사건 후 가족들은 “생의 마지막 전화를 못 받았으니 어떡하느냐”며 오열했다. 이날 가족들은 차분히 TV로 인양 모습을 지켜봤다. 전남 구례군 출생인 문 원사는 1994년 해군 부사관 152기 전자하사로 임관한 후 다양한 함정의 전자장비를 다뤄온 해군 전자 분야의 엘리트다. 학점은행제를 통해 주경야독 끝에 한국교육개발원 정보통신공학과를 졸업했다.
12. 박석원 상사
충남 천안, 천안중앙고, 부모님
추운 밤 당신의 커피 한잔
“아들아. 네가 나오는 모습을 차마 직접 볼 수 없단다. 미안하다….” 박 상사의 아버지 박병규 씨(54)와 어머니 남상분 씨(47)는 현장에서 천안함이 인양되는 장면을 지켜볼 수 없었다. 이들은 평택에 있는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 머물렀다. 박 상사의 작은아버지 박정규 씨가 이들을 대신해 백령도에서 천안함의 인양 상황을 지켜봤다. 박 씨는 “형님이 현장에 있었다면 기절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충남 천안 출생인 박 상사는 2002년 해군 부사관 192기 병기하사로 임관 후 지난해 7월 천안함으로 부임했다. 그는 추운 밤 날씨 속에서도 함교 외부에서 근무하는 사병을 위해 따뜻한 차를 손수 타주는 등 자상한 부사관으로 알려졌다.
13. 손수민 중사
울산, 무룡고, 할머니와 부모님, 여동생
갑자기 끊긴 마지막 전화
여자친구 김모 씨는 사건 당일 손 중사와 한참 통화를 했다.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전화가 뚝 끊겼다. 늘 그랬듯 손 중사가 다시 전화를 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30분 뒤 TV에서는 천안함 침몰 뉴스가 나왔다. 김 씨와 친구들은 손 중사의 수영 실력을 이제 볼 수 없게 됐다. 천안함 축구동아리 회장이었던 그의 축구실력도 하늘로 날아갔다. 친척동생 수빈 씨는 “형. 크고 나서는 형한테 단 한 번도 매달려 본 적이 없는데, 이런 일이 닥치니 이젠 정말 단 한 번만 매달려 떼쓰고 싶다”라며 흐느꼈다. 그가 천안함의 통기(군 통신체계 암호담당) 직별장을 맡은 뒤로는 단 한 건의 보안 사고도 없었다.
14. 박성균 중사
경남 창원, 창원전문대, 부모님과 남동생
“담에 보자”던 일기가 마지막
“인양 끝나고 함미를 열면 짠하고 나올 거지? 적당히 하고 빨리 나온나.” 친구들은 박 중사의 미니홈피에 이렇게 적었다. 박 중사는 지난달 11일 “간다. 담에 보자. 5년 뒤에 만나자. 다∼∼같이”라고 미니홈피에 마지막 일기를 썼다. 친구 표하림 씨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박 중사의 사진을 올려놓고 “성균이 밥 한 끼라도 못 먹으면 미치는 아이인거 너네도 다 알잖아. 아직 너무 어리다 아이가…. 살아있제? 배고파 죽을 것 같아서 지금 발 동동 구르고 있제? 특유의 네 말투. 네 웃음소리 너무 그립다 아이가”라고 적었다. 지난해 9월 해군 부사관 222기로 입대해 천안함이 첫 근무지였던 박 중사는 틈틈이 전문서적을 공부할 정도로 자기계발에 열정적이었다.
15. 민평기 상사
충남 부여, 부여고, 부모님과 형 두명
검도… 야구… 만능 스포츠맨
민 상사는 행정장이면서도 전투 배치나 각종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함교와 외부갑판으로 올라가 정보영상을 촬영하는 군인으로 유명했다. 힘든 일일수록 오히려 솔선수범하는 부사관으로 통하다 보니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선배들에게는 맡은 바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고 책임감이 남달리 강해 믿음을 주는 후배였다. 검도 유단자일 뿐만 아니라 야구, 테니스, 당구 등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 충남 부여군 출생인 그는 1997년 12월 해군 부사관 169기 행정하사로 임관한 후 제2함대 군수지원단, 조함단, 인방사 인사참모실 등을 거쳐 지난해 2월 천안함으로 부임했다. 2군지단장, 조함단장 표창을 받은 경력도 있다.
16. 신선준 상사
울산, 울산공고, 아버지, 누나
네살때 여읜 어머니 곁으로
신 상사는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리고 아버지 손에 컸다. 아버지 신국현 씨(59)에게 아들은 각별했다. 아들을 잃은 신 씨는 아들 생일인 2일 평택 제2함대사령부에서 “특별히 식사 1인분을 더 달라”고 해 혼자 아들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는 “능력이 됐다면 군생활하는 걸 막았을 텐데 너무 미안하다”며 “선준이를 미워할 수 있는 기억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거라도 떠올릴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신 상사는 천안함 중사회 임원 역할을 맡아 수병들에게는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해주는 큰형 역할을 했다. 신 상사는 울산에서 출생해 2001년 해군신병 465기로 입대한 후 지난해 천안함에 부임했다.
17. 정태준 일병(실종2)
부산, 동의과학대, 부모님과 여동생
집안 형편 어렵자 자원 입대
집안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보겠다며 4개월 전 해군에 입대했다. 지난해 정 일병의 어머니(44)는 가슴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았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전세금을 빼 수술비를 댔다. 집안 형편이 기울자 동의과학대 1학년 전기과에 재학 중이던 정 일병은 입대를 결심했다. 의젓하던 아들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돌아오지 않자 정 일병의 부모는 인양작업을 지켜보겠다며 백령도로 달려갔지만 결국 아들을 보지 못했다. 부산 사상구 주례동에 있는 정 일병의 집에는 고등학생인 여동생만 남았다. 정 일병의 이웃들은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몇 달 전에도 얼굴을 보곤 했다”며 “갑작스러운 비보에 이웃들도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18. 임재엽 중사
대전, 우송대, 부모님과 형 누나
부드러운 ‘함상의 해결사’
임 중사는 천안함에서 ‘해결사’로 통했다. 함 내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나섰다. 후배들을 아우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도 유명했다. 항상 얼굴에는 기름이 묻어 있을 정도로 성실했다. 대전 우송대 1학년 재학 중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할 정도로 ‘진짜 사나이’였다. 누나 재선 씨는 그의 미니홈피에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까. 무척 보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임 중사는 실종자 수색작업에 나섰던 민간 잠수사 홍웅 씨(27)의 친구다. 홍씨는 “재엽이 누나와 재엽이가 돌아오면 다시 만나자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며 “재엽이는 정말 착하고 군생활도 열심히 한 친구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19. 장진선 중사(실종3)
강원 동해, 한국항공전문학교, 부모님과 여동생
선박조종사 꿈꾸던 학구파
장 중사가 다니던 한국항공전문학교 항공정비과 친구들에 따르면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아 통장에는 늘 100만 원가량의 잔액이 있었다. 소형선박조종사 등 국가기술자격증 취득을 준비하던 학구파였다. 2008년 12월 해군 부사관 219기로 입대한 그는 ‘친구들이 좋아하는 친구’였다. 자취를 같이한 친구 전범석 씨는 “5월에 휴가를 나오면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가기로 약속했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여동생 진희 씨는 그의 미니홈피에 “오빠 빨리 와. 나 무서워. 오빠 기다리는 사람들 이렇게 많은데 안 오면 진짜…. 제발 기도할게. 꼭 돌아와 빨리”라고 썼다. 주인을 잃어버린 장 중사의 미니홈피 제목은 ‘기다려라 다시 돌아온다’이다.
20. 방일민 중사
서울, 김포대, 부모님과 남동생
장병 밥 챙겨주던 ‘어머니’
방 중사는 경기 김포시 양촌면 학운리 마을에서 효자로 통했다. 형편이 어렵던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2007년 3월 해군 214기 조리하사로 입대했다. 방 중사는 천안함 장병들에게 든든하게 밥을 챙겨주는 ‘어머니’였다. 그는 휴가 때마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음식 솜씨를 검증받기도 했다. 남동생만이 지키고 있는 방 중사의 집은 김포시의 개발계획에 따라 헐리지만 가족들은 아직 이주대책도 세우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동생 동민 씨는 이렇게 말했다. “형. 이제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죄스러워서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우리 엄마 어떻게 할 거야. 몰래 화장실 가서 눈물 흘리는 우리 아빠 어떻게 할 거야. 이렇게 가 버리면 엄마 아빠 어떻게 할 거냐고….”
21. 심영빈 중사
강원 동해, 강원대, 부모님과 남동생
‘천안함의 천사’ 효성도 지극
심 중사는 술을 잘 못했다. 그러나 회식 자리는 빠지지 않았다. 군 동료들은 그에게 목숨처럼 소중했다. 선후임병들은 그를 ‘천안함의 천사’라고 불렀다. 단기 부사관인 심 중사의 전역일은 이미 한참 지났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해 부모님의 짐을 덜어주려고 장기복무를 신청했던 것. 가족들은 “고향과 가까운 동해1함대로 오면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심 중사는 “젊었을 때 외지에서 고생을 해야 나중에 좋고, 더 위험한 일일수록 돈도 더 벌 수 있다”며 평택 근무를 고집했다. 강원 동해시 고향 주민들은 “월급을 몽땅 송금하는 효자였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심 중사는 또 다른 산화자인 장진선 중사(22)와 강원 동해시 광희고등학교 선후배 간이다.
22. 박경수 상사(실종4)
경기 수원, 삼일공고, 부인과 1녀
연평해전서 용맹 떨친 그 사람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도 살아 돌아온 역전의 용사. 하지만 천안함에서 박 상사의 운명은 너무 야속했다. 그는 연평해전 당시 참수리호 보수사로 참전해 국무총리 전투유공표창을 수상했을 정도로 용맹한 군인이었다. 하지만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려 한동안 배를 타지 못하다가 이를 극복하고 다시 배에 올랐다. 어머니 이기옥 씨는 “연평해전 때도 고생했는데, 아들아. 왜 배를 탔나”라며 눈물을 흘렸다. 사촌형 박경식 씨(36)는 “경수는 진정한 대한민국 해군”이라고 말했다. 박 상사는 10년 전 혼인신고만 한 아내와 곧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었는데 사고를 당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23. 남기훈 원사
충북 청주, 삼례공고, 부인과 아들 3명
아내에게 바친 십자수 선물
남 원사는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사격통제 분야 1인자로 통한다. 2006년부터 천안함의 사격통제를 담당하는 ‘사통장’으로 근무했다. 큰형이 7년 전 지병으로 숨지자 집안에서 맏형 역할도 했다. 신장병을 앓는 아버지의 병원비도, 작고한 큰형의 병원비도 혼자서 감당했다. 동생 남기만 씨(32)는 “뒷굽이 떨어진 신발을 신어 뭐라고 했지만 ‘괜찮다’며 웃던 형이 생각나 더 슬프다”고 말했다. 부인과 세 아들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다. 경기 평택시 해군아파트 그의 집 거실에는 십자수가 걸려 있다. 함정에서 시간 날 때마다 한땀 한땀 직접 수를 놓아 결혼 4주년 기념으로 아내에게 선물한 자상함이 묻어난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영신에게.’
24. 강준 상사
전남 고흥, 창원전문대, 부인
아내와 미뤘던 결혼식 앞두고…
“따뜻한 봄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행복해했는데… 결국 차가운 바닷속에 스러졌어요.” 강 상사는 해군 부사관으로 경남 진해에서 함께 근무했던 박현주 씨와 5월에 정식 결혼할 예정이었다. 강 상사는 잦은 출동 임무로 결혼식을 못 올렸음에도 매주 박 씨와 장애아동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해왔다. 하지만 결혼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사고를 당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더구나 최근 육상 근무가 결정돼 이번 출항이 마지막 해상작전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매형 김철수 씨는 “혼인신고도 마쳤는데 정작 처남이 없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강 상사는 천안함에서 보급업무를 담당했다. 강 상사 아내의 동생도 해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25. 안동엽 병장
서울, 경기대, 부모님
분위기 잘 띄우던 ‘꽃미남’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꽃미남’인 안동엽 병장은 평소 “해군은 항해 중에도 깔끔한 용모를 갖춰야 한다”고 말해왔다. 동료 승조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그는 함내에서 오락과 운동을 주선하며 분위기를 잘 띄웠다. 그러나 뼛속까지 군인이던 안 병장도 “땅을 밟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함정이 기지에 정박해도 배 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천안함 승조원들은 육지를 밟고 서있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 김영란 씨(54)는 “어릴 때부터 말썽 한 번 안 피운 착한 아들이었어요. 낮에도 4시간 정도는 혼자서 잘 자는 아이였는데 바닷속에서도 잘 참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면 눈물만 나오네요. 이제 영원히 땅 위에 데리고 있을 수 있겠네요…”라며 흐느꼈다.
26. 조진영 중사
부산, 영산대, 아버지
자나깨나 홀아버지 걱정
조 중사는 고향에서 효자로 통했다. 올여름에는 부산에서 홀로 지내시는 아버지께 모아둔 돈으로 에어컨을 사드리려고 했다. 주변 동료들에게도 “열심히 군 생활을 해서 포상금을 받으면 아버지에게 ‘시원한 선물’을 드릴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해군 부사관 217기로 입대한 조 중사는 부대 안에서도 ‘똑똑한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2008년 부사관 능력평가 이론시험에서는 100점을 맞았다. 그래도 조 중사는 만족하지 않았다. 포술능력평가도 최고점을 받겠다며 불철주야 공부하는 등 후임병들의 모범이 됐다. 부산의 이웃 주민들은 “정말로 착한 효자였습니다. 빨리 구조를 했으면 벌써 살아와 부산 집에 왔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27. 이상민 하사(88년생)
전남 순천, 천안대, 아버지와 남동생
전출명령 마다한 ‘큰 상민이’
천안함보다 임무가 상대적으로 쉬운 지원정(YTL)으로 전출 명령이 났지만 남고 싶다며 함장과 면담하고 계속 천안함에서 근무했다. 사고 이틀 전 아버지 이재우 씨에게 “별일 없으세요?”라고 안부전화를 했다. 전남 순천시에서 태어나 천안대 산업디자인학과를 휴학하고 2008년 4월 입대했다. 5월 제대를 앞두고 인터넷 미니홈피에 ‘복잡했던 두 해가 지나갔다. 먼 훗날은 멀리에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여기까지 와버렸다’라고 썼다. 사고 뒤 성남함을 타고 사고해역으로 간 아버지 이 씨는 “부모에게 잘하는, 듬직한 장남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매사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솔선수범하던 군인이었다.
28. 장철희 일병
서울, 우송대, 부모님과 여동생
입대 70여일 ‘천안함의 막내’
천안함 막내였다. 해군으로 입대한 지 70여 일, 천안함에 승선한 지 8일 만에 사고를 당했다. 장 일병은 18일 천안함에 승선한 뒤 최원일 함장과 갑판에서 찍은 사진을 어머니 원모 씨(45)의 휴대전화로 보냈다. 원 씨는 “얼마 전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 보내왔는데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지금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출항 전 할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애정 많은 ‘순수청년’이었다. 대전 우송대에서 철도전기신호를 전공한 장 일병은 철도기관사라는 꿈을 이루려 군 복무 틈틈이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했다. 장 일병의 아버지는 서울 강북경찰서 미아지구대 소속 경찰관. 그는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가 마음을 졸였다.
29. 강태민 상병(실종5)
인천, 홍익대, 부모님과 여동생
배가 좋아 함상 근무 연장
홍익대 조선해양공학과를 휴학하고 지난해 5월 해상병 555기로 해군에 입대한 강 상병은 배를 끔찍이 좋아하던 청년이었다. 함정 근무기간 6개월을 모두 채웠지만 함장에게 잔류 요청을 하고 천안함에 남았다. 천안함 가스터빈실은 그에게 ‘꿈의 무대’였다. 강 상병의 부모는 “아들이 꿈을 키워가던 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며 애통해했다. 강 상병과 신병 교육과정을 함께했다는 한 동기는 천안함 인양 생중계를 지켜보다 “활발하고 사교성이 좋았던 친구”라고 추억하며 “평택 2함대에 근무 중인 우리 모든 동기들은 최고의 친구 한 명을 잃었다”고 말했다. 모든 일에 솔선수범해 동료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30. 강현구 하사
서울, 인하공전, 부모님과 여동생
당신의 야식 참 맛있었어
평소 잘 웃어 천안함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병장임에도 궂은일에 먼저 나섰다. 헌신적으로 일해 후배들에게 모범이 됐다. 늦은 밤에도 승조원들을 위한 야식을 준비하는 자상한 성격이었다. 생존 장병 중 한 명은 “현구는 항상 맛있는 간식을 챙겨주던 우의 깊은 친구였다”라고 말했다. 강현구 병장의 부모는 금지옥엽 외아들을 잃은 충격에 눈물조차 말랐다. 강 병장의 작은아버지 성명 씨는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다. 외아들이어서 충격은 더욱 크다”고 전했다. 강 병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인하공업전문대 컴퓨터공학과를 휴학하고 2008년 7월 해상병 545기로 입대했다. 그해 9월부터 천안함 조리병으로 복무했다. 7월 제대 예정. 유족으로 부친과 모친, 여동생이 있다.
31. 박보람 중사
충남 아산, 평택기계공고, 부모님과 남동생
아내와 미뤘던 결혼식 앞두고…
박 중사는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 박영이 씨(48)를 항상 걱정하던 소문난 효자였다. 충남 아산시 출생으로 2008년 6월 해군 부사관 219기로 임관해 그해 11월 천안함에 부임했다. 동료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다. 입대 직전 어머니에게 14K 금반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 “다음 달에 적금 600만 원을 타요. 약을 지어 드세요”라는 말을 어머니에게 남겼다. 어머니 수술비로 쓰려고 부은 정기적금의 만기가 4월이었다. 유족으로는 박 중사가 항상 자신보다 먼저 챙기던 부모와 남동생이 있다. 어머니 박 씨는 “너무 작아 새끼손가락에만 겨우 들어가지만 아들이 준 이 반지를 평생 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32. 이상민 하사(89년생)
충남 공주, 청양대, 부모님과 누나 3명
드럼 잘 치던 ‘작은 상민이’
지난해 아버지 이병길 씨(62)의 회갑연을 열어 온 가족과 함께 생신을 축하드리며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읽고 볼에 뽀뽀를 하는 등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충남 공주시에서 누나만 3명에 막내로 태어났다. 18일이 아버지의 62번째 생일이었다. 청양대 호텔경영학과 1학년을 마친 뒤 2008년 6월 입대했다. 농구와 축구 등 스포츠를 좋아했고 드럼을 연주하는 등 예체능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 호텔지배인을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매형 이인섭 씨(34)는 “처남은 그동안 받은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부모님 통장에 모두 넣어 드렸던 효자였고 이 집안의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6월 16일이 제대일이었다.
33. 조지훈 상병
서울, 인하공전, 부모님과 여동생
함정 보수업무 꼼꼼히
어머니 정애숙 씨(46)는 틈날 때마다 휴대전화를 열어 아들이 보내준 사진을 보곤 했다. 군대에 간 아들은 휴대전화로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후 메시지와 함께 어머니에게 보내곤 했다. 조 상병의 어머니 사랑은 각별했다고 한다. 조 상병 가족은 어머니가 주로 생계를 책임졌다. “‘나는 잘 있어요. 어머니도 잘 계세요’라고 보낸 아들의 문자메시지가 생각납니다.” 정 씨는 아들 얘기를 꺼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조 상병은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공고를 졸업한 뒤 인하공업전문대 선박해양시스템학과에 진학했다. 조 상병은 함 내에서 함정보수, 화재진압, 방수훈련 등 보수병으로서 함정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업무를 맡았다.
34. 김선명 병장
경북 성주, 금오공고, 아버지, 여동생, 남동생
휴가 가면 늘 아버지 일 도와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고 동생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휴가 때마다 건축 일을 하는 아버지 김호엽 씨(50)의 일을 도왔다. 모친은 수년 전 세상을 떠났으며 모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휴가를 기일까지 연기하기도 했다. 김 씨는 “엄마의 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는데도 누구보다 꿋꿋하게 생활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엄마 곁으로 이렇게 빨리 보내게 돼 죄인이 된 심정”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금오공고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녔다. 입영 신체검사에서 상근 예비역으로 선발됐지만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2009년 2월 자원해 현역으로 입대해 해상병 552기가 됐다.
35. 정범구 병장
경기 수원, 강원대, 어머니
바다와 책을 사랑한 청년
자신이 ‘바다의 사나이’라고 생각했고 직업 해군이 되려고 했다. 정 병장 할머니는 “‘배를 타고 나가면 물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어요. 다들 잘해 줘서 군대에 남고 싶어요’라는 말까지 하더니…”라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경기 수원시에서 태어나 2007년 강원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학교 선배들은 “범구가 성격이 좋아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말했다. 태껸 동아리 선배 최상욱 씨(23)는 “동아리 활동에도 열정이 많아 태껸 연습을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2008년 8월 입대했다. 천안함 식당에서 항상 독서를 했다. 정 병장 할머니는 “설 연휴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그 뒤로 전화를 한 번밖에 안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36. 나현민 상병
서울, 광성고, 부모님과 형
못이룬 대입-수학교수의 꿈
나 상병은 11일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았다. 나 상병의 아버지 나재봉 씨(52)는 이날 부대 내 식당에서 미역국을 끓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생일을 다른 유족들과 함께 보냈다. 나 씨는 “지난해 아들의 생일에 가족들과 함께 먹었던 저녁상이 기억난다”며 “올해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 앉아 축하해 주며 생일을 보냈어야 하는데 그때가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며 울먹였다. 나 씨는 아들의 생일날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나 씨는 “현민이가 작년에 대입 시험을 보고 원하는 학교에 입학 못 해 상심이 컸다”며 “군대를 갔다 온 다음 다시 공부해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나 상병은 교수를 꿈꿨다.
37. 박정훈 병장
서울, 한국폴리텍대, 부모님과 남동생
기름때 낀 얼굴엔 늘 웃음이
내연병으로 작업 때문에 얼굴에 항상 기름이 묻어 있었다. 힘든 작업에도 활력이 넘쳤고, 승조원들 사이에 웃음 전도사로 통했다. 한국폴리텍대 산업설비자동화과를 졸업하고 2009년 2월 해상병 553기로 입대해 그해 5월부터 천안함에서 복무했다. 박 병장 어머니 이연화 씨(48)는 끝까지 박 병장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던 이 씨는 “엄마 표정 한 번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효자 녀석이었는데 엄마가 울고 있으면 먼저 간 아들이 얼마나 슬프겠어요”라며 “아들이 마지막으로 좋은 곳으로 갈 때까지 집에 가서도 절대로 안 울 거예요”라고 말했다. 친할아버지도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 가족이다.
38. 이용상 하사
경기 고양, 숭실대, 부모님과 남동생 2명
궂은일 솔선 ‘바다의 사나이’
평소 “푸른 바다가 좋다”고 자주 말했다. 스킨스쿠버 자격증이 있었고, 주변에서 ‘바다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경기 고양시에서 태어나 숭실대 경영정보학과를 휴학하고 2008년 4월 입대했다. 그해 6월 천안함에 배치받았다. 갑판병으로 항상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아 지난해 7월에는 함장상을 받았다. 전우들이 작업 중 다치지 않도록 안전에 신경 썼다. 생일도 잊지 않았다. 다음 달 1일 전역을 앞두고 말년 휴가 때 천안함 동기 병장들과 제주도에 놀러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천안함에 타기 직전 군 복무 중 공부하던 책, 사진과 편지 등 한 상자 분량의 소포를 부모와 남동생 둘이 살고 있는 집으로 보냈다.
39. 김선호 병장
충남 천안, 천안정보산업고, 부모님과 누나
천안함 퀴즈대회서 1등
지난해 4월 해상병 554기로 입대한 김 병장은 입대 전 가족들에게 약속했다. “전역하면 꼭 대학에 입학하겠습니다.” 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천안함 골든벨 퀴즈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포상휴가를 받았던 게 엊그제였다. 김 병장은 함정근무 기간 6개월을 모두 채우고, 육지로 갈 수도 있었지만 “가족적인 천안함이 정말 좋다”며 배에 남았다. 할머니 이옥찬 씨(84)는 “눈웃음을 치던 얼굴이 눈앞에 선해 가슴이 미어진다”며 “직접 가서 보고 싶지만 다리가 불편해 갈 수 없어 너무 안타깝다”며 흐느꼈다. 김 병장은 자랑스러운 ‘해군 가족’의 일원이었다. 아버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조카들까지 모두 해군과 인연을 맺었다.
40. 최한권 원사(실종6)
충남 홍성, 한국폴리텍2대, 어머니, 부인과 1녀
그의 불빛이 생존자 이끌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천안함 생존자들은 “밤에 조명등을 보고 살았다”며 “최 원사에게 감사한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사건 당시 함수에 있던 생존 장병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비상조명등의 불빛을 보면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최 원사의 치밀한 정비 덕분이었다. 최 원사는 천안함 전기장으로 부임한 후 완벽한 정비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기관부 장병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이 엄격하면서도 따듯한 선배로 통했다. 최 원사는 충남 홍성고를 졸업하고 1992년 해군 부사관 136기 전기하사로 임관한 후 참수리 339호 고속정, 전남함 등을 거쳐 지난해 2월 천안함으로 부임했다. 해군 후배들은 아직도 “최 원사 같은 부사관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41. 김종헌 중사
경남 양산, 장안종합고
김종헌 중사는 1976년 9월 7일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태어났다. 장안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12월 해군 부사관 163기 내기하사로 해군생활을 시작했다. 임관 후 광개토대왕함, 익산함, 대청함, 양만춘함 등을 거쳐 올해 3월 천안함에 승선하기 시작했다. 엔진 등 기관장비를 담당한 김 중사는 충무공이순신함장, 양만춘함장, 한일구조훈련전대장 등 여러 표창을 받았고, 지난 2000년에는 부사관 능력평가 우수자로 선정되는 등 내연 분야 최고의 전문가였다. 동료들은 “부모님을 일찍 여읜 고 김 중사가 남동생, 여동생을 대학교육까지 시킨 가장이었다”며 “항상 검소한 생활로 주위에 모범이 됐다”고 그를 기렸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하나가 있다.
42. 김경수 중사
충남 서천, 인천북공고
김경수 중사는 1976년 11월 11일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다. 인천북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5년 12월 해군 부사관 157기로 해군 생활을 시작했다. 음파탐지기를 담당하는 음탐하사로 임관한 뒤 순천함, 서울함, 속초함 등을 거쳐 지난해 1월부터 천안함 음탐장으로 일해 왔다. 김 중사는 군 복무중 22전대장, 속초함장 표창을 받았고, 2007년에는 우수관찰관으로 뽑히는 등 믿음직한 해군 음파탐지 임무의 베테랑이었다. 동료들은 그를 축구, 족구 등 여러 스포츠에 능한 만능 스포츠맨으로 기억한다. 군 관계자는 “운동 경기로 함의 단합을 위해 항상 노력했다”며 “음탐분야 전문성을 인정받은 관찰관 출신으로 후배들의 교육에도 최선을 다했다”고 전했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다.
43. 안경환 중사
경북 예천, 인천제일상고
안경환 중사는 1977년 3월 17일 경북 예천시에서 태어났다. 인천제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8월 해군 부사관 161기로 해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도하사로 임관 후 서울함, 전남함, 목포함, 성남함, 청주함 등을 거쳐 올해 2월 천안함에 승선했다. 안 중사는 천안함의 유도탄을 관장하는 유도장이었다. 1999년 제1연평해전에서는 전남함 유도사로 참전하여 전투유공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21전대장, 인방사령관 표창을 수상하는 등 해군 유도무기 분야의 엘리트로 꼽힌다. 동료들은 자상한 성품과 함정의 전비태세를 위해 수시로 자체 훈련을 하여 후배들을 숙련시키는 군인정신으로 그를 기억한다. 고 안 중사의 미니홈피에는 “벌써 노란 개나리가 피고 벚꽃도 피었단다. 버드나무에도 물이 올라 연두빛 새싹이 돋았어. 성질 급한 진달래는 벌써 꽃망울을 터트렸고. 우리 목련은 함께 보자. 빨리 와”라는 친구들의 글이 쓸쓸히 남겨져 있다. 그는 미혼이다.
44. 서승원 하사
서울, 효성고
서승원 하사는 1989년 11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 효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009년 3월 6일 해군 부사관 222기 내연하사로 임관했다. 이후 2009년 5월 14일 천안함에 부임했다. 군은 서 하사가 “힘든 일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직무에 충시하던 모범적인 부사관이었다”고 전했다. 서 하사는 천안함이 첫 부임지였다. 기관부 생활반장으로 있으면서 후임들의 어려움을 돌봐주는 형같은 존재였다고 동료들은 회상했다. 군 관계자는 “서 하사가 형 같은 존재로 수병들과 사이가 좋아서 서 하사를 친형처럼 따르는 장병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가족으로는 아저비와 어머니가 있다.
45. 이상희 병장
서울, 혜전대
이상희 병장은 1989년 2월 7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혜전대학 호텔조리외식계열을 휴학하고 2008년 4월 14일 해상병 542기로 입대했다. 천안함에는 2008년 6월 4일 부임했다. 이 병장은 천안함에서 조리병으로 복무했다. 고등학교와 대학 호텔조리외식계열을 다니면서 취득한 조리자격증이 5개나 될 정도로 요리에 능했던 이 병장은 이등병때 부터 타 부대에서 전출 요청을 받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군은 전했다. 군 관계자는 이 병장이 “가족같은 천안함 분위기가 좋아서 계속 근무했다”고 전했다. 이 병장은 5월 1일 전역 후 6월쯤 일본으로 연수를 갈 계획이었다. 이 병장은 일식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가족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2명이 있다.
46. 이재민 병장
경남 진주, 진주보건대
1988년 12월9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이재민(22) 병장은 진주보건대 의약학계를 휴학하고, 2008년 4월 해군에 입대(해상병 542기)했다. 같은해 6월 천안함으로 부임했다. 조리병이었던 이 병장은 의학분야에 박식해 항상 장병들의 건강을 생각하며 의학상식을 바탕으로 건강한 음식을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군 관계자는 “이 병장이 조리실에서도 항상 솔선수범하고 후배 조리병들이 쉴 수 있도록 업무를 대신하는 등 모범이 돼왔다"고 밝혔다. 유족으로 할머니와 부모, 여동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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