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편향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실린 것보다 안 실린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아래와 같은 사실들이 새 교과서에 반영되어야 균형이 잡힌다.
1. 김일성이 소련군 장교로서 스탈린에게 불려가 면접시험을 본 뒤 합격되어 지도자로 선택되었고, 소련군이 써준 시나리오대로 괴뢰정권을 세웠다는 역사적 사실.
2. 1945년 9월20일 스탈린이 소련군에 명령하여 북한에서 親蘇공산 정권을 세우도록 한 사실과 이것이 38선 분단의 직접 원인이란 사실.
3. 소련군이 북한에서 벌인 강간·약탈, 신의주 학생 반공의거와 소련군의 武力진압.
4. 정권수립을 위하여 북한에서 한 선거는 반대가 불가능한 원천적 부정선거였다는 사실.
5. 6·25 이전의 38도선상의 무력충돌은 거의가 북한군의 도발에 대한 국군의 대응이었다는 사실.
6. 미군 파병 결단으로 대한민국을 구한 트루먼의 역할. 그가 중공군 불법 침략 후 국내외로 한국 포기론이 일어날 때 이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휴전협상 때 반공 포로 강제송환을 반대하였다는 사실.
7. 중공군의 불법 개입이 이산가족의 비극을 부르고 북진통일을 좌절시켰다는 사실.
8. 6·25 전쟁중 전사한 한국군, 미군, 유엔군, 소년병의 숫자.
9. 한국을 도운 고마운 나라들 이야기(참전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10. 한국을 구한 白善燁(백선엽) 장군의 다부동 전투와 6사단의 춘천 방어전.
11. 이승만이 미국을 압박, 한미상호방위조약에 합의하도록 만든 반공포로 석방의 역사적 의미.
12. 북한과 중공군이 국군포로 6만 명 이상을 불법 억류, 지금껏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
13. 북한군에 의한 납북 및 학살 통계. 특히 좌익에 의한 영광 대학살(2만1225명 피살).
14. 남한의 공산주의 세력이 갑자기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게 된 것은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이란 사실.
15. 李承晩(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할 때 북한엔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단독 정권이 들어서 토지개혁, 국유화 조치 등 정부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16. 이승만 초대 내각은 독립투사 일색이란 사실.
17. 김일성이 정권 수립을 위하여 친일파를 중용한 사실. 동생 김영주는 일본 헌병 보조원이었지만 북한노동당 2인자까지 올랐고, 북한공군은 일본군 조종사 출신들이 만들었다.
18.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중임에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려고 노력한 점. 예컨대 선거를 중단시키지 않았고, 언론검열을 하지 않았으며 국회 문을 닫지 않았다는 사실.
19.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민주화, 산업화의 밑거름이 된 세계적 성공 사례라는 점.
20. 역대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견제, 민주화를 도운 점.
21. 5·16은 군사정변이었지만 그 뒤의 전면적 개혁으로 혁명적 발전을 가져온 사실.
22. 이병철, 정주영 같은 위대한 기업인의 역할
23. 서울올림픽의 역사적 기여(동구 및 소련 공산권 붕괴, 북방정책 등에 끼친 영향)
24. 김대중 정권의 이른바 햇볕정책은 미화하면서, 현대그룹을 앞세우고 국정원을 시켜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 등으로 4억5000만 달러를 불법 송금한 사건은 묵살.
25. 좌파정권 하에서 反헌법적 종북좌파 세력의 득세로 국가적 무질서가 초래된 사실.
26.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여 공비에게 참살된 반공소년 이승복 이야기(노동운동을 하다가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이야기는 집중 소개).
27. 건국의 초석, 호국의 간성, 근대화의 견인차,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해온 국군의 역사적 역할.
28. 민족의 활동공간을 세계로 넓힌 대한민국의 개방화·해양화의 역사적 의미, 그리고 해양인의 奮鬪(분투).
29.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종교의 역할.
30. 북한정권이 민족사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는 이유.
*추가해야 할 내용: 유엔이 북한정권의 反인도범죄에 대한 제재결의를 하여 안보리 의제로 채택된 사실. 헌법재판소가 설립 이후 처음으로 통합진보당을 위헌정당으로 규정, 해산시킨 사실. 미군이 흥남철수 때 북한의 민간인 10만 명을 구출한 사실.
※ UN결의,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사건, 6·25 전쟁발발, 주체사상, 북한 對南도발, 북한 실태 서술 비교표를 참고하세요.
■ 공산주의와 싸운 사람을 미워하고 이용당한 사람을 존경하는 교과서
2015.12.14 趙甲濟
왜 이승만을 폄하하고 김구 김규식을 미화하는가? 계급투쟁론적 가치기준으로 써졌다는 증거이다.
反대한민국적 계급투쟁史觀으로 써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계급투쟁론의 핵심인 反국가-反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 서 있다. 자연히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의 사회주의-전체주의 정권을 비호하게 되어 있다. 채택률이 가장 높은 미래엔 교과서의 경우 建國 과정을 설명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李承晩-韓民黨 세력의 역사적 업적을 묵살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여 건국을 반대한 김구-김규식의 左右합작 노선을 높게 평가한다. 이 교과서가 이승만-한민당 세력을 폄하하는 것은 이들이 공산주의 노선에 반대하였기 때문이고, 이들이 김구-김규식 노선을 칭송한 것은 그들이 공산주의를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투쟁론에 입각하면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가 없고, 자유민주 노선을 걷는 대한민국을 높게 평가할 수가 없다.
미래엔 교과서는 건국의 주인공인 李承晩의 역할은 고의적으로 축소하고 무시한다. 이승만을 비판할 때만 그의 이름을 明記한다. 공산당 반대, 신탁통치 반대, 美蘇 공동위원회 반대, 북한에서의 공산정권 출범에 대응한 남한 내의 정부 수립 제안, 左右합작 반대, 남한 총선에 의한 건국 운동, 건국 문제의 유엔 회부 관철, 유엔의 남북한 총선 결의, 김일성 주도의 남북협상 반대, 5월 총선, 국회 구성과 자유민주주의 헌법제정, 건국 선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주도한 이는 이승만이고 그를 뒷받침한 것은 한민당이었다. 미 軍政도 한때 이승만 노선에 반대하였으나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탄 그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승만의 주도적 역할을 언급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누구의 노력에 의하여 대한민국이 세워졌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대신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인물과 노선에 대하여는 우호적으로 크게 다뤘다. 건국에 반대한 좌익 주도의 무장반란인 4.3 사건과 여순 14연대 반란을 '무장봉기'라고 미화하고 진압한 국군을 부정적으로 기술하였다. 공산당에 이용당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칭송하였다. 主客이 전도된 이런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대한민국 건국은 공산주의를 반대하였으므로 나쁘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미래엔은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2.)이란 글을 실었다.
<미 군정 아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시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면서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는 글을 '38도선을 넘는 김구 일행' 사진과 함께 실었다. 김구의 이 글을 비판 없이 소개하면 학생들은 이승만을 미워하고 건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될 것인데, 미래엔 교과서엔 아무런 비판이 없다.
김구와 김규식의 오점인 평양의 남북협상도 긍정적으로만 소개한다. <이 회의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설명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문구를 연상시킨다. 교과서라면 이 공동성명을 비판적으로 소개해야 한다. 이미 정권을 세운 북한 공산 집단이 주한미군 철수와 대한민국 건국의 방해를 위하여 짜낸 음모라는 점을 설명하여야 학생들이 속지 않는다.
李承晩 세력이 미 군정 당국, 소련, 북한정권, 남한의 좌익들 요구에 굴복, 좌우합작 노선을 수용하였더라면 대한민국 건국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체코 등 東歐(동구)의 공산화 과정은 좌우합작을 거쳤다.
*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한 金九, 金奎植
소련의 스탈린은 1945년 9월에 이미 현지의 소련군 사령부(연해주 군관구 군사 위원회와 25군 사령부)에 북한에 공산 정권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려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였다.이 결정적 명령을 교과서에서 소개한 것은 교학사뿐이고 좌편향 5種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소련의 분단 책임을 덮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남북 분단은 美蘇의 공동 책임이 아니라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기로 한 스탈린의 책임이다.
梁東安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사'(玄音社)에서 이런 요지의 설명을 했다.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1946년 초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인민민주주의정권'을 구성, '민주개혁'이란 명칭하의 사회주의화 작업을 급속하게 실천해갔다. 47년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인 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인민경제계획을 실천하면서 생산관계를 사회주의화하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인민집단군이라는 독자적 정규군까지 조직했다. 이러한 북한의 사회주의화는 유혈혁명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이전 상태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시점부터서 한반도는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되지 않는 한 평화적인 수단으로는 통일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미 47년 8월부터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남북통일인민정권을 수립하자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었다. 남한의 좌익 세력은 북한 주둔 소련군의 지휘를 받아 남한 사회를 혼란시키고, 미국으로 하여금 美蘇 共委에서 소련의 요구(남한의 우익 진영 배제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폭동과 군중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48년 초의 상황에서 북한엔 이미 소련이 세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 섰고 이 세력은 남한의 좌익들을 선동, 남한에 反共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되지 못하게 하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김구 김규식이 내세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는 '북한만의 단독 정권'이 현존하는 상황을 완전히 오판한 것이었다. 북한이 핵무장하였는데 한국은 절대로 핵무장도 방어망도 건설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李承晩의 建國 노선에 반대한 金九, 金奎植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金九, 金奎植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이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하여 대한민국 建國을 방해하려 하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명서는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북한과 接境(접경)하고 있어 군대를 철수하더라도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지만 미군은 한번 철수하면 한국이 남침을 당하더라도 제때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었다. 6.25 남침의 가장 큰 원인은 남침 1년 전의 주한미군 철수였다. 그럼에도 兩金 씨는 공산주의자들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에 內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南侵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南侵의 초대장이었다. 그럼에도 金九, 金奎植은 김일성의 말을 믿고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 성명서는 또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全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주도할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근로인민당, 북조선농민동맹 등 56개 단체였다. 金九, 金奎植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즉 李承晩 세력 등 자유진영을 제외하고, 남북한 공산세력이 뭉쳐 공산국가를 만드는 데 김구, 김규식이 가담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金九, 金奎植은 이용당했다.
이에 대해 梁東安(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이것은 美蘇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해온 것, 즉 남한의 우익진영을 배제하고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단지 美蘇공위 때는 소련이 배제하려 했던 김구와 김규식 및 그들의 추종정당과 단체들을 추가로 참여시킨 점이 다를 뿐이다. 김구, 김규식 등이 이제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당 지배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성명의 내용대로 진행되어서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권이 수립되면 그 다음에 생길 통일정부가 소련이 원하는 공산정권이 될 것은 너무나도 自明한 것이었다. 요컨대 4.30 성명도 공산당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소련의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초래할 문건이었다.”
金奎植은 평양에 가 있을 때 김일성이 주최한 초대연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북조선으로 오니 북조선은 살 토대가 있다. 남쪽은 공장이 없고 미국 차관만 가져오고 여기 공장은 일하고 있으며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5월6일)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남조선에는 도처에 부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북조선의 공장은 남조선의 공장보다도 충실한 생산을 하고 있다. 소련인은 그다지 표면에 나서지 않는데 남조선 미국인은 너무나 간섭이 심하여 현재 군정부에는 부패가 심하다.”
金九, 金奎植은 5월6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4.30 공동성명이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自讚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확언했다.”
4.30 성명대로 통일조국이 건설되면 자유진영이 배제된 공산국가가 될 것이다. 金奎植, 金九는 사실상 공산국가 건설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확언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당시 이미 북한엔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북조선 당국자’란 말 자체가 정부를 전제로 한다. 남한엔 ‘남조선 당국자’로 불릴 만한 조직도 사람도 없었다. 美軍政이 있을 뿐이었다. 反대한민국적 階級鬪爭史觀(계급투쟁사관)에 입각한 좌편향 교과서들이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감상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미화하는 진정한 이유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 5.10 선거를 惡評한 金九, 金奎植
두 金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0 선거는 투표율 90% 이상의 참여로 공정하게 치러졌다. 김구는 그러나 “선거가 부자유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되었다”는 논평을 냈다. 유엔감시기구도 공정하다고 평한 선거를 惡評(악평)한 것이다. 양동안 교수는 이렇게 논평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민국 건국을 훼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제헌국회가 開院되고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말한 데 대하여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라고 말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6월7일보다 조직적으로 5.10 선거 무효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키로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김구, 김규식은 나중엔 북한에 대해서도 정부 수립 움직임을 비판하여 兩非論을 보이기도 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분단정권 반대는 남한의 대한민국에만 타격을 줄 뿐 북한의 단독정권에는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었고, 남한의 정치체제가 개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고 평했다.
李承晩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은 소련군에 의해 공산화되어 이미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으니 남한의 갈 길은 북에 조직된 공산군의 武力 앞에 굴복하여 공산화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 국가를 세워서 반공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해 자유통일을 진행하든지 두 가지가 있었다. 여기에 제3의 길이란 한국엔 없었다. 金九와 金奎植, 兩金은 북한에 가서 이미 양성된 공산군의 실태를 보고 남한에 정부를 수립해도 곧 붉은 군대가 쳐내려와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建國할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소련과 북한공산정권의 편을 들어 정부수립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해방정국의 迷兒가 되고 말았다.” (아래 대화록 참조)
그는 또 이렇게 설명했다.
“金九와 金奎植은 북의 공산집단이 머지않아 남침해 올 것을 알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두 金은 그럴 일은 없다고 거짓성명을 하였다. 정부를 수립해 봐야 곧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의 강력한 建國 반대였다. 그대로 있다가 공산화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민족통일이었다. 金九는 西山大師의 漢詩 구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를 愛誦(애송)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눈길을 金九는 옳게 걸어갔는가? 과연 김구를 따르는 용공통일의 길이 옳았던 것인가? 반세기 이상을 신문과 방송이 김구 찬양 일색인데 과연 그 추종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말이다. 김구는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하였던 공로는 1945년까지 혁혁하였다.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한국 사회가 지금도 金九 예찬론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 金九-劉馭萬 대화 비망록
UN 한국위원회의 중국 대표인 劉馭萬(유어만) 公使는 1948년 7월11일 오전 11시 金九의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劉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英文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李承晩에게 전달했다. 이 문서는 梨花莊에 보존되어 있다. 이 대화는 金九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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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馭萬: 나는 선생님의 어떤 면보다도 정직한 분이란 점에서 존경해 왔습니다. 나도 비록 외교관이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부임하게 된 것은 나로선 최초의 외교관 임무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입니다.
金九: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일 뿐)
劉: 유엔 위원단의 한 사람으로 上海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며느님과 아드님께서 중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엄 씨도 선생님과 같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 나를 통역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래서 자주 여기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金: 귀하가 말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 없어도 귀하를 위하여 통역할 사람은 있어요.
劉: 나는 오철성이 보내는 편지를 갖고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중국 외무장관 왕시굴도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蔣介石 총통께서도 편지를 직접 쓰려고 하였는데, 외무장관이 오늘 대화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서 쓰시도록 건의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세 통의 편지가 같은 메시지를 선생께 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李 박사와 협력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李 박사와 선생과 金奎植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호하는 데 협조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중국 格言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형제들이 다툴 순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自招해선 안 된다.” 선생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다고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나는 선생의 아들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듣기 거북하시더라도 아들이 자신의 아버님에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습니다만, 제발 그렇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적 敵手로서 서로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金: (심각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사실은 내가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최측근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 당신에게 털어놓는다는 게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지요. 머지않은 장래에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귀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귀하는 기다려주실거죠?
劉: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시지 않도록 권하고 싶어요. 저에게 부과된 메시지 전달은 끝났으므로 허락해주신다면 선생님께서 고민하고 계시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이 될 만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金: (찬성은 아니지만 예의상 승낙한다는 표정을 지음)
劉: 내가 李 박사에게 선생과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할 때마다 그분의 대답은 변함없이 “만약 그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환영하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李 박사께서 부통령직을 선생에게 제의하실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나는 귀하께서 그런 자리를 초월하신 분이라 그런 점에 대하여 제가 언급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선생님께선 “부통령 같은 것은 집어치워!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李 박사와 협력하시고 싶다면 새롭게 구성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적어도, 많은 사람들과 당황하고 있는 선생의 지지자들에게 右翼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선 애국활동의 찬란한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최근 평양에서 열린 소위 남북한 지도자협의회에 관계하신 일은 그런 기록에 타격이 되었습니다. 북중국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우리는 김구 지지자들입니다. 그 분이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선생의 모든 동지들은 선생의 찬란한 과거 업적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金: 나도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신들의 협력자로 간주합니다. 내가 귀하께 이야기했듯이, 모든 사람들이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李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가 만약 정부로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바깥에 머무는 게 낫습니다. 나는 그 더러운 정치싸움에 연관되는 게 싫습니다.
劉: 선생님의 말씀은 오히려 바깥에서 계시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논리를 갖게 합니다. 李 박사께서는 한때 선생님의 동지이셨던 신익희, 이범석, 이청천 씨 같은 분들을 麾下(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신다면 모든 게 한민당 뜻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李 박사께서 國益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싶으셔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견제하면 李 박사를 강화시켜줄 것이고 만약 버리신다면 李 박사를 한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것인데, 선생께서도 한민당이 국가의 운명을 견제 없이 함부로 농단하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金: (정치싸움 등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 한 다음) 더구나 나는 한 특정 정당의 비방전에 의하여 反美주의자로 광범위하게 색칠 당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안에 있으면 미국인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劉: 선생님 말씀은 틀렸습니다. 李 박사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惡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고유한 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이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은 결국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장군도 명예롭게, 창피를 당하지 않고 소환될 것입니다. 가도 괜찮습니다. 귀측이 단결하고 유엔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미국 측이 떠나가는 일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金: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劉: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 미국, 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金: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劉: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지지하니까요.
金: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注: 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劉: 러시아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고 하는 정부가, 북한 정권이 러시아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主權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을 성취할 基地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이 약하게 보일수록 선생께선 조건 없이 (建國을 위하여) 투신하셔야 합니다. (끝)
서울 주재 중화민국 공사였던 劉馭萬은 장개석 총통의 뜻을 받들어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화합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하도록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劉馭萬은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뒤 유엔주재 중화민국 대표부 처장, 駐韓 대사 등을 역임, 1966년에 별세했다.
金九와 劉 공사의 대화를 읽으면 金九가 보인 행동의 모순점이 드러난다. 金九는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注: 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발표한 4.30 성명서 중 “외군이 철수해도 內戰은 없다”는 대목은 완전한 속임수가 된다.
金九는 북한군이 반드시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유일한 수단은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이었다. 金九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요구한 것이 된다. 즉,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장애물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