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대통령선거가 예정된 1997년은 1996년 말 신한국당의 노동관계법 단독처리 파문이 확산되면서 여야간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야당은 국회의장의 사퇴권고 결의안을 제출하는 한편 단독처리 된 개정안에 대한 효력가처분 헌법소원을 제기하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반독재투쟁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대대적인 저항에 나섰다. 이와 더불어 1997년 1월 노동계가 전국적인 파업에 나서면서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1997년 1월 말 한보비리 사건이 불거지자 야당의 대여공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새정치국민회의는 한보비리 사건에 대한 특별검사제를 요구하고 나섰고, 2월 19일 한보비리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후 김영삼 대통령의 대국민사과가 이어졌다. 신한국당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북한자금 1만 달러 수수를 폭로하면서 분위기 반전에 나섰다. 그러나 3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의 YTN 인사개입 파문이 일면서 여야는 4월까지 게이트 정국의 혼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국혼란은 한보청문회 실시와 김현철의 구속으로 일단락 되었다.
▲ 김영삼 대통령 내외가 청운동 투표소에서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투표를 했다.
이후 5월 들어 각 정당들이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 선출에 나서면서 정치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는 5월 19일 김대중 총재를, 자유민주연합은 6월 23일 김종필 총재를 각각 제15대 대통령선거 후보자로 선출하였다.
신한국당의 경우에는 6명의 후보가 출마한 경선을 통하여 7월 21일 이회창 전 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민주당은 7월 30일 조순 전 서울시장을 영입 한 후 9월 12일 대통령후보로 추대하였다. 이러한 후보선출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상황은 급속하게 대통령선거 정국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대통령후보 선출과 관련한 각 정당 내부갈등이 확산되었으며, 여야간 공방도 대통령선거 자금에 대한 논란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주요 정당의 대통령후보 선출이 종료되고 본격적인 대통령선거 경쟁이 시작되면서 각 정당 간 그리고 후보 간에는 선거상황에 따른 이합집산이 전개되었다. 가장 앞서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이후 야당 공조체제를 지속해 왔던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후보단일화가 진행되었다. 양당은 내각제와 공동정부 구성을 매개로 단일화 협상을 진행해 나갔다. 결국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을 대통령후보로, 정권 창출 시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을 총리로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 이인제 대통령후보 내외가 제15대 대통령선거 투표를 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후보단일화와는 달리 신한국당은 오히려 내부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선거정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아들의 병력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당내에서는 구 통일민주당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후보교체론이 제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후보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가 탈당하면서 신한국당은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이후 이인제는 11월 10일 국민신당을 창당하였고, 신당의 대통령후보로 나서면서 대통령선거 경쟁구도에 대변화를 가져왔다.
‘대세론’이 거론되며 우위를 점하던 신한국당과 이회창 후보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당내 분열로 인한 위기에 봉착하였고, 대통령선거 경쟁은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파전으로 전개되었다. 어려움에 처한 신한국당은 세력 확장을 위해 선거경쟁에서 열세에 있던 민주당과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결국 11월 7일 양당은 합당에 합의한 후 11월 24일 한나라당을 출범시켰다. 합당협상 결과에 따라 신설합당한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는 이회창으로 단일화되었고, 대신 당 총재는 민주당 조순이 맡게 되었다.
이로써 대통령선거 경쟁은 막바지에 이르러 명확히 3자 대결구도로 재정리 되었다. 한편 기타 군소정당들의 경우에는 공화당이 허경영 후보를, 바른나라정치연합이 김한식 후보를, 통일한국당이 신정일 후보를 내세워 대통령선거 경쟁에 참여하였다.
또한 독자적으로 대통령후보추대운동을 벌여온 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 재야 사회∙노동단체들은‘국민후보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독자후보 추대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1997년 11월 24일 진보적 대중정당을 표방하는 정치결사체인‘건설 국민승리21’을 창당하였고,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국민후보로 추대하였다.
1997년 1년 동안 각 정당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이합집산하여 한나라당, 새정치국민회의, 국민신당의 3당 대결로 진행된 제15대 대통령선거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유효투표의 40.3%인 1,032만 6,275표를 획득하여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39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4번의 대통령선거 출마 끝에 당선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내었다. 또한 선거 전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후보단일화를 통해 공동정부 구성에 합의하면서 최초의 연합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후 1998년 2월 25일‘국민의 정부’로 명명된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다.
김대중 대통령 선거 운동, 취임식
▲ 김대중 대통령 취임연설
-대통령 후보 유세 (대구 두류 공원), 4.11 총선 민의수호 결의대회(96.4.11).
-15대 대통령 후보 전당대회(97.5), 대통령 후보 유세, 국민회의, 자민련 합당 서명식(97년), 김대중 후보 유세(시장, 공장, 택시기사), 투.개표(97.12.18), 승리, 환호"당선" (97.12.19), 당선증, 당선 기자회견
-대통령직 인수 위원회 현판식, 노사정 위원회 현판식, 비상 대책 위원회, 정부 조직 개편 발표, 금융개혁, 30대 재벌 접견, 나까소네 전 일본 수상 접견, I.B.R.D 총재 및 외국인사 접견, 깡드시 IMF 총재 접견, 보도 사진전
-금모으기 운동, 명동성당 미사, 신낙균(문화관광부 장관), 김대중 대통령 국민과의 TV 대화(98.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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