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

親盧-극좌 세력은 2009년에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어야 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역이용, 政界에 복귀, 그 뒤 7년간 대한민국의 발전을 막았으나 이번 총선에서 드디어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더디지만 종국에 가서는 의가 악을 이긴다는 것을 믿고 참으면서 가야 한다"는 이 말은 지난 70년간 한국에서 실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에도 비판적 국회를 유지하였고, 언론 검열을 하지 않았으며, 최대 규모의 선거를 치렀다. 민주주의는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성장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위대한 예언자(그러나 무장한 예언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가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 20대 총선의 力動的(그래서 감동적인) 모습이다.

4월13일 총선의 예상 의석수 관련 조사나 기사에서 공통적인 점은, 많은 호남유권자들이 수십 년간 지지하였던 좌파 정치세력을 버리고 중도적인 안철수의 국민의당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새누리당 과반수 유지, 더불어민주당 참패, 국민의당 善戰(선전)이 예상된다.

1988년 총선 때의 신민주공화당, 1992년 총선 때 정주영의 국민당, 1996년 총선 때 김종필의 자민련에 이어 22년 만에 교섭단체 자격을 가진 제3당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제3당은 대체로 與野(여야) 극한 대결을 中和(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호남이 反좌파로 돌고 제3당이 출현하면 한국의 정치地形(지형)이 바뀐다. 안철수 대표가 총선 직전에 신당을 急造(급조),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치권과 국민여론 속에서 하나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親盧(친노) 극좌세력에 대한 反感(반감)일 것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그의 사망으로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세력으로선 소멸하였을 이들이다. 前 대통령의 자살이란 前代未聞(전대미문)의 사건과 동정심을 역이용, 증오와 분열의 에너지를 정치적 동력으로 삼았던 이들은, '이념적 패거리' 의식으로 뭉쳐 한국 정치를 不姙(불임)의 사막으로 만들었다. 정부가 하는 일은 사사건건 반대하고 북한정권이 하는 일은 사사건건 지지 내지 비호하였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과 인권탄압을 적극적으로 편들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종북세력과 손 잡았다. 그래서 '핵인종' 세력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北의 核개발 및 人權탄압을 감싸고 從北세력과 연대한 세력'이란 뜻의 略字(약자)이다.

김종인 대표가 공천과정에서 친노 극좌 세력으로 분류되는 몇 사람을 배제한 것도 이러한 민심의 변화를 感知(감지)한 때문일 것이다. 친노 극좌 세력이 야권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한 데는 호남 유권자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다. 친노 세력이 민 문재인 후보는 2012년 12월 大選(대선) 때 호남에서 과거 김대중 후보가 받았던 정도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그 문재인 씨를 호남이 버리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씨의 정치적 영향력이 큰 타격을 받고 2017년 대선에서 야권 후보가 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해졌다.

反헌법적 극좌세력의 온상 역할을 해왔던 더불어민주당의 退潮(퇴조), 중도정당의 躍進(약진), 그것을 뒷받침한 호남 민심의 변화는 한국 정치판 전체를 오른쪽으로 돌릴 것이다. 물론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진 2代에 걸친 우파 정부가 더디지만 한국 사회를 우회전시킨 큰 흐름이 호남의 변화를 牽引(견인)한 면이 있다.

한국에서 거의 모든 총선 대선은 주권자의 결단으로서 국가의 進路(진로)를 바꾸거나 조정하는 역사적 의미를 띤다. 1985년의 유명한 2월12일 총선은 선명 야당을 등장시켜 민주화를 大勢(대세)로 만들었다. 2년 뒤의 6·29 선언과 직선제 개헌은 이 총선의 부산물이다. 1988년 4월 총선은 與小野大(여소야대)를 초래, 노태우 정부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한편 전두환 세력의 몰락을 불렀다. 1996년 총선에서는 집권 민자당을 탈당한 김종필의 자민련이 약진, 보수 분열을 초래, 1년 뒤의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예고하였다. 2004년 4월 탄핵 逆風(역풍) 속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열린당은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이는 노무현 정권을 오만하게 만들어 보수층의 逆攻(역공)을 불렀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이 총선을 지휘, 개헌저지선을 확보, '선거의 여왕'으로 등장하였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치러진 2008년 4월 총선에서 좌파 세력은 참패를 당하였지만 5월에 광우병 亂動(난동)을 일으켜 집권세력의 氣를 꺾는 데 성공, 총선의 의미를 무산시켰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한명숙의 민주당은 종북 본산인 통합진보당의 이정희와 손을 잡고 정책 연대를 선언, 國體(국체)변경의 의도를 드러냈다. 막판에 이른바 김용민의 막말 파동이 나오는 등 이변이 속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끄는 새누리당이 逆轉勝(역전승)하였다. 더 위험해진 좌파의 재집권을 막은 총선이었다. 총선 직후 통진당의 正體(정체)가 안으로부터 폭로되면서 '종북 청산'이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그 해 大選에서 박근혜 후보가 100만 표 이상의 차이로 당선된 것은 총선이 만든 '反종북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反헌법적 좌익 세력을 합헌적 정치공간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여론을 업고 통합진보당 해산, 전교조 불법화 등 몇 가지 중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북한의 잇단 핵실험에 대응, 對北(대북)정책도 견실하게 운영하고 韓美(한미)연합사 해체를 사실상 無期(무기)연기시켰다.

새누리당이, 2012년 총선에서 야당이 될 것을 예상하고 만든 국회법 개정안(소위 국회선진화 조항)을 대통령 선거를 의식, 黨內(당내)의 반대와 여론의 우려를 무시하고 통과시켜준 것이 自繩自縛(자승자박)이 됨으로써 국회는 지난 4년간 國政(국정)방해 세력으로 전락하였다. 국회 마비 사태의 原罪(원죄)는 새누리당에 있지만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은 親盧 집단이 좌지우지한 야당이었다. 선거를 앞두고도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하여 필리버스터까지 한 이들의 動機(동기)는 좌파적 계급투쟁론에 입각한 反자유민주적 가치관이었다. 계급투쟁론의 본질은, 인간이 가진 증오심을 '1 대 99' 식의 거짓선동으로 조직화하여 국가·헌법·국군·기업 등 기성질서를 공격하는 혁명적 가치관이다.

親盧-극좌 세력은 2009년에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어야 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역이용, 政界(정계)에 복귀, 그 뒤 7년간 대한민국의 발전을 막았으나 이번 총선에서 드디어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15일 建國(건국) 기념일 연설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였다.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을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독재권이 아니면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을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마는 義로운 것이 종말에는 惡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더디지만 종국에 가서는 의가 악을 이긴다는 것을 믿고 참으면서 가야 한다"는 이 말은 지난 70년간 한국에서 실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에도 비판적 국회를 유지하였고, 언론 검열을 하지 않았으며, 최대 규모의 선거를 치렀다. 민주주의는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성장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위대한 예언자(그러나 무장한 예언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가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 20대 총선의 力動的(역동적, 그래서 감동적인) 모습이다.

대한민국은 제조업 중심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면서 법치를 확립하고 핵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유통일을 하여 一流국가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 이번 선거는 민족사의 이런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결과를 보일 것 같아 일단 안심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다.